강태공(姜太公)과 유기(劉錡), 세상사를 통찰하여 하늘과 인간을 조화시켜

[고전소통]강태공(姜太公)과 유기(劉錡),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를 예측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 기사입력 2021/04/21 [11:30]

▲ 이정랑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중국 역사에 영웅이나 의인들은 많지만, 기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중국 역사에는 기억할 만한 기인(奇人)들이 있었다. 기인들은 대부분 구 왕조가 쇠하고 새로운 왕조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시기에 나타나 자신들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곤 했다. 이른바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은 기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황량한 벌판을 누비면서 병력을 지휘하고 적을 소탕하는 장수는 영웅(英雄)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기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뛰어난 지모로 치국과 안정의 지략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현사(賢士)이지 기인은 아니다.

 

그럼 기인이란 무엇인가? 기인이란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세사를 통찰할 수 있고 하늘과 인간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인이란 속세를 종횡무진(縱橫無盡), 하면서도 속세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중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기인은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했을 당시의 강자아(姜子牙-주나라 초기의 정치가, 공신으로 본명은 강상 姜尙이다. 속칭 강태공(姜太公) 姜太公)일 것이다. 강자아(姜子牙)는 자신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지만, 시대와 운이 따르지 않아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국수를 팔려고 길거리에 나섰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물건을 다 날려버리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말없이 운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면서 위수 강가에 나가 낚시를 했다. 그가 사용한 바늘은 끝이 곧은 바늘이라 물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밥을 갖다 주러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버럭 화를 내며 낚시의 바늘을 구부려 강자아가 식사하는 동안 여러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놓았다. 강자아는 물고기를 전부 놓아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모든 일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지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아내마저 그를 떠나버렸다. 그래도 그는 아무런 불평 없이 때를 기다렸다. 여든 살이 되었을 때 주공이 위수를 지나다가 강자아를 보고는 산에서 내려갈 것을 권했다. 주공은 직접 마차를 끌고 와 반나절을 기다렸고, 마침내 마음이 움직인 강자아는 산에서 내려와 주 무왕을 도와 주왕을 토벌했다.

 

강자아(姜子牙)는 지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도술에 정통하여 주공에게 갖가지 지략을 제공하는 동시에 기상과 농사의 작황 등 미래의 자연현상을 예측하기도 했다. 강자아(姜子牙)는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제(齊)에 봉해졌고 장수(長壽)와 부귀(富貴)를 누렸다.

 

한편 진말한초(秦末漢初)의 장량(張良)도 기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기행은 네 가지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한(韓)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해 가산을 털어 자객을 구한 후 박랑사에서 진시황제를 칼로 찌르게 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의 용기와 의기에는 기인의 기질이 농후했다. 둘째, 그는 우연하게 병법을 배웠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장량은 우연히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은 그에게 길에 버려진 신발을 주워서 신게 했고, 장량이 노인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자 날이 밝을 무렵에 다시 만나 병법을 전수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장량이 노인을 두 번 만나러 갔으나 매번 노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노인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는데, 장량은 비장한 각오로 초저녁부터 약속 장소로 가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 노인을 감동케 했다. 노인은 그의 품성이 훌륭하고 자질이 범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병법을 전수해주었다.

 

셋째, 그는 여러 차례 지략을 제공하여 유방을 곤경에서 구하고 항우를 격퇴함으로써 한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넷째, 그는 공을 세우고도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고 멀리 물러나 병법 연마에 전념함으로써 유방과 그의 아내 여후(呂后)가 공신들을 주살할 때 화를 면했고 소하처럼 굴욕을 당하지도 않았다.

 

유기(劉錡)도 이런 유형의 기인이었다.

 

유기(劉錡)는 자가 백온(伯溫)으로 절강 청전 출신이며, 1311년에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절강은 송대 이후 문화교육의 중심지로서 뛰어난 인재들을 다수 배출하면서 ‘산과 물, 인재의 고장 千山千水千秀才‘으로 유명했다.

 

유기(劉錡)의 선조들은 송대에 관직을 지내다가 남송이 남쪽으로 천도하자 절강 청천으로 이주했다. 남송의 태학상사(太學上舍)를 지냈던 유기(劉錡)의 조부는 박학다식하고 천문지리에 통달한데다가 정직하고 의기가 투철하여 일찍이 반원(反元)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를 조직하기도 했다. 유기(劉錡)는 어려서부터 공을 세울 큰 뜻을 품고 있었고, 아첨하거나 시기하지 않는,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 갖가지 재능을 나타냈는데 특히 뛰어난 기억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유기(劉錡)의 집 근처에는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서당을 오가는 길에 항상 그 앞을 지나쳤다. 하루는 천문분야의 책을 집어 대충 읽었는데, 다음날 다시 들러 그 책을 펼쳤을 때는 내용을 완벽하게 외울 정도였다. 책방 주인이 몹시 놀라며 그 책을 유기(劉錡)에게 주자 유기(劉錡)가 말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제 머릿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가져가봤자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바를 알고 말하지 못하는 바를 말하기도 했다. 그의 스승은 그가 장차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열일곱 살이 되자 유기(劉錡)는 괄창산의 석문동으로 가서 당시의 명사였던 정복초(鄭復初)에게서 이정(李程-송대의 대 유학자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형제)의 이학(理學)을 배웠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서적을 두루 통독했고, 특히 정통 경자사집(經子史集-중국의 고대 서적을 네 유형으로 나눈 것으로 경은 경전, 자는 제자백가서, 사는 역사서, 집은 문인들의 글 모음을 말한다) 외에 잡가의 저술에도 관심을 보여 의학과 농업, 천문, 지리 분야의 학문을 익혔다.

 

하지만 유기(劉錡)의 청소년 시절은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됐고, 1333년에야 간신히 진사에 급제하여 강서 고안현의 현승이 되었다. 당시 원 왕조의 정국은 혼란과 불안이 그치지 않았는데, 통치자의 취생몽사(醉生夢死-취한 속에서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아무 뜻 없이 한세상을 흐리멍덩히 보냄‘을 이르는 말.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있는 통치자를 비유한다.)와 폭정이 계속됐고 각처에서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뜻있는 인사들은 거사의 기회를 엿보거나 과감하게 기의군의 대오에 뛰어들었다. 극소수의 지식인만이 원의 통치자에게 목숨을 팔았다.

 

유기(劉錡)는 현령을 보좌하는 말단직에 있으면서 적당히 부서의 요구에 응하긴 했지만 언젠가는 지식인의 양심과 정의를 지키는 데 전념하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그는 아첨과 영합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1340년, 청전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은사(隱士)의 생활을 시작했다.

 

유기(劉錡)의 학문과 품성은 이미 세상에 두루 알려져 절강의 행성에서 그에게 유학 부제거(副提擧)의 관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유기(劉錡)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부임해서 보니 모든 관장(官場)이 부패 되어 있었다. 성격이 곧은 유기(劉錡)는 불법행위에 대해 혹독한 질책을 서슴지 않았고, 그 결과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더 나아가 지권을 남용해 사소한 일까지 참견한다며 그를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또다시 울분을 품고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351년을 전후하여 방국진(方國珍) 형제가 반항과 투항을 거듭하며 온주와 대주, 경원 등지를 점령하고 수시로 상해에 출몰하여 소요을 일으키면서 연해 지역 백성들의 재난을 가중하고 있었다. 원나라 조정의 무능한 관리들은 유기(劉錡)가 훌륭한 인재라는 소문에 그를 절동원수부(浙東元帥府) 도사(都事)로 임명했다.

 

유기(劉錡)는 철저한 분산전략으로 군심을 뒤흔들어 방국진 형제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방국진은 행동이 의롭지 않아 부하들이 억지로 명령에 따를 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관부에서 방국진(方國珍) 을 처벌하되 나머지 사람들을 달리 대하겠다는 포고문이 나붙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방국진의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1358년, 세 번째 사직하고 청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기(劉錡)의 나이는 40세가 넘어있었다. 스물 갓 넘어 진사에 합격한 후, 20여 년의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은거하며 언젠가 뜻을 펼쳐보겠다고 마음먹었으나 그 기회가 다한 것 같았다.

 

한편 곽자흥이 죽자 주원장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그는 ’성벽을 높이고 널리 양식을 비축하되 칭제를 미뤄야 한다‘는 주승(朱升)의 충고를 받아들여 몽골인의 공격을 피하면서 신속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그는 군대의 규율을 매우 중시하여 훌륭한 위세와 명망을 세웠고, 가는 곳마다 현지의 뛰어난 인재들을 맞아들였다. 청주를 점령한 후 주원장은 유기(劉錡)가 청전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맞아들였다.

유기(劉錡)는 일찍이 주원장의 명망을 들어온 터이지만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관직 생활에서 느꼈던 염증 때문에 주원장의 첫 번째 요청을 거절했다. 주원장은 화를 내지 않고 다시 손염(孫炎)을 보내 간절하고 공손한 어투의 편지를 전했다. 손염이 주원장의 웅대한 뜻과 지략을 설명하며 재삼 간청하자 유기(劉錡)는 그제야 마음이 움직였다.

 

“저는 일찍이 관직을 버리고 서호에서 한가롭게 세월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서북방에서 이상한 기운을 발견했는데, 당시 저는 그것이 천자의 기운이고 10년 후에 금릉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지금 주씨의 대업이 흥성하면서 현사들을 크게 예우하여 하늘과 땅이 순조롭게 조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차 대성할 것이 분명합니다.”

 

유기(劉錡)는 이런 말로 주원장의 세 번째 요청에 응했다. 유기(劉錡)는 주원장을 만나 이른바 ’시무18책 時務十八策‘을 제시했고 주원장은 그가 군문에 들어오기도 전에 천하의 대세를 꿰뚫어 보는 불세출의 인재라 생각하고 즉시 명령을 내려 예현관(禮賢館)을 건립하게 하고 그를 상객으로 모셨다.

 

당시 주원장은 동쪽으로 장사성, 서쪽으로 진우량과 대치하고 있었다. 양군의 세력은 주원장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고, 합세하여 주원장을 제압하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원장의 군대는 사기충천해 있긴 하지만 동서 협공의 위험에 처해있어 장사성과 진우량의 공격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원장은 마음을 비운 채 유기(劉錡)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주원장이 말했다.

 

“선생께선 절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좋은 생각이 있으시거든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선생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공께선 금릉을 차지하고 있어, 지세(地勢)는 매우 유리한 편입니다.

그러나 동쪽에는 장사성이 있고 서쪽에는 진우량이 있어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한 바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가장 시급한 일은 이 두 사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원장도 바로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방법을 몰라 초조했던 터라 다시 유기(劉錡)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들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

 

“적을 방어하려면 완급의 균형을 잡아야 하고 용병에도 앞뒤 순서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먼저 진우량을 대적하시고, 후에 장사성을 공격하시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장사성은 약소하지만 진우량은 매우 강대합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장수들은 먼저 약자를 제압하여 진우량의 날개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먼저 약자를 공격하고 나서 강자와 대적하는 것이 병법의 상식인데 선생께선 어째서 약자를 제쳐두고 강자를 공격하라 합니까?”

 

“지금의 형세로는 병법에 구애될 필요가 없습니다. 장사성은 자기를 지키는 데 만족해하는 사람이라 웅대한 뜻을 품고 있지 못합니다. 공이 전력을 집중하여 진우량을 공격하면 그도 금릉을 공격하는 경거망동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진우량은 칭제(稱帝)한 이후로 한순간도 금릉을 잊은 적이 없고 지금은 장강 상류를 점거하고, 있는 상태라 순순히 남하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야심이 커서 군웅을 남김없이 모조리 쓸어버리려 해서 지금으로서는 그가 가장 큰 적수입니다. 병력을 집중하여 먼저 장사성을 공격한다면 그 틈을 이용하여 진우량이 밀고 들어올 텐데 공께선 그를 어떻게 막아내시겠습니까?”

 

제갈량을 방불케 하는 유기(劉錡)의 뛰어난 전략에 주원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주원장은 유기(劉錡)의 계책을 그대로 실행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명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실제 전투에, 있어서도 유기(劉錡)는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그가 주원장의 막하로 들어온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진우량이 서수휘(徐壽輝)를 앞세워 장사성과 함께 동서 협공으로 공격해왔다.

 

당시 적군의 막강한 병력에 비해 주원장의 군대는 약세였고, 싸움에 임하는 장수들의 의견도 제각기 달랐다. 주전론자가 있는가 하면 도피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투항을 건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유기(劉錡)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먼저 투항과 도망을 주장하는 자들의 목을 베야만 승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도망친다 해도 갈 곳이 없고, 투항한다 해도 죽기는 마찬가지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우량의 세력이 강대하긴 하지만 의롭지 못한 군대이기 때문에, 사기가 높지 않은 데다가 먼길을 오느라 병사들이 몹시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군사를 매복시켜 기습공격을 가하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진우량은 너무 오만하고 지략이 부족하여 무모하게 전면전의 전략을 쓸 것이 분명한 만큼 아군의 승리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유기(劉錡)의 이런 주장은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부합해서 주원장과 병사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대단한 기세로 밀고 나와 태평을 점령하여 스스로 칭제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던 진우량은 주원장의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유기(劉錡)의 군대에 포위되어 꼼짝, 못하다가 결국 강주로 달아나고 말았다.

 

강주는 물가에 건설된 도시라 성벽이 대부분 물속에 세워져 있어 수비는 쉽지만, 공격이 몹시 어려웠다. 주원장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워낙 난공불락의 성이라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에 방심한 진우량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때 유기(劉錡)는 성벽의 높이를 측량한 다음 모든 배 끝에 사다리를 만들어 어둠을 틈타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진우량은 하늘에서 신병(神兵)이 내려왔다고 생각하고 황급히 처자식을 데리고 배에 올라 남창으로 도망쳤다. 그 후 파양호 대전에서도 유기(劉錡)는 뛰어난 지략으로 주원장의 공격을 도와 진우량을 호수 한가운데서 사살함으로써 대한정권을 무너뜨렸다.

 

한임아(韓林兒-원나라 말기 홍건군의 수령)를 소명왕(小明王)으로 봉하는 문제에 있어서 유기(劉錡)는 주원장과 생각이 달랐다. 주원장이 한임아의 봉작을 받아들인 목적은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켜 원군의 공격을 전부 한임아와 진우량 등에게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세력을 키울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형세의 추이로 볼 때 한임아를 받드는 것은 백해무익한 일이었다.

 

1361년 정월, 주원장은 금릉 중서성에서 소명왕을 모시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지만, 유기(劉錡)만이 꼿꼿이 서서 절을 올리지 않았다. 유기(劉錡)가 말했다.

 

“한임아가 한산동(韓山童-홍건군의 우두머리)의 아들이긴 하지만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일개 목동에 불과하고 성씨도 조(趙)가 아니라 한이기 때문에 송왕조의 후예라 할 수 없습니다. 송이 망한 지 이미 오래고 민심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굳이 전대의 연호를 빌려 쓸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대장부가 제업을 이루려면 어떤 견제도 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 전대의 연호를 고집하다가는 스스로 설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주원장은 그 자리에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유기(劉錡)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상태였다. 나중에 한임아를 구하려다 진우량에게 패할 뻔했던 주원장은 그 후로 유기(劉錡)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임하고 따르게 되었다. 결국, 주원장은 한임아를 주살하고 스스로 대명제국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유기(劉錡)가 명 왕조의 개국에 세운 공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확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여 한임아를 죽이고 칭제를 단행함으로써 인심을 모으고 천하를 장악하게 했다. 둘째, 정확한 전략 방침을 정하여 먼저 진우량을 친 다음 장사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이끌었다. 셋째, 모든 전투에서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국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여 인(仁)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는 점이다.

 

한번은 주원장이 치국과 치민의 방법을 묻자 유기(劉錡)는 “백성을 살리는 길은 관인(寬仁)에 있다.”라는 말로 치국의 도리를 밝혔다. 아첨을 모르고 강직한 성품을 유지했다. 그는 문신의 우두머리인 이선장의 요구나 위협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사중승의 신분으로 이선장의 측근이자 부패 관리인 이빈(李彬)을 주살함으로써 조정을 뒤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선장의 모함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아예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효유용은 유기(劉錡)가 이전에 주원장의 면전에서 자신을 폄하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승상이 되자마자 유기(劉錡)의 아들을 모함하면서 동시에 유기(劉錡)가 왕기(王气)의 묘를 차지했다고 무고했다.

 

유기(劉錡)는 낙향하여 차를 음미하거나 장기를 두면서 소요자락(逍遙自樂)하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경사로 불려와 무고의 내용에 대해 시비를, 가리는 대질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주원장이 그를 비호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화병이 생겨 1375년에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영웅이나 열사, 지사와 의인들은 많았지만, 기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기인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자연스럽게 사모하게 되는 신비한 품격을 지니고 있기에 당대에는 이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j6439@naver.com 

 

*필자 :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평론가. 칼럼니스트.

 

 

[Classical Communication] Kang Tae-gong and Ki-gyo (劉錡) master the past and predict the future

By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the world, Tae-gong Kang (姜太公) and Ki-gyo (劉錡), harmonize the sky and humans.

-Jung-Rang Lee, Chinese Classic Critic

 

There are many heroes and righteous people in Chinese history, but it is not easy to find the origin.

There were memorable roots in Chinese history. Most of the older dynasties appeared in a period when the old dynasty was declining and the new dynasty began to flourish, and they used to show their abilities to their fullest. The so-called “hero comes out in a difficult world” is a word that applies even to the people of origin.

A longevity who leads troops and wipes out enemies while traversing the desolate field can be said to be a hero, but not a root cause. Those who provide the resources of government and stability with excellent Jimo are also wise men, not roots.

So what is an origin? Ginjin refers to people who can master the past, predict the future, gain insight into the world, and harmonize the sky with humans. In a word, Ginjin is a person who exists outside the world while making the secular world vertical and horizontal (縱橫無盡).

 

The earliest origin recorded in Chinese history may be Kang Ja-a (姜子牙-a politician and contributor of the early Zhou Dynasty whose real name is Kang Sang-尙, also known as Kang Tae-gong (姜太公) 姜太公) when King Zhou subjugated Zhou. Kang Ja-ah (姜子牙) had a unique ability, but he did not follow the times and luck, so he waited silently for the time. Because everything didn't go according to his will.

 

He once went out on the street to sell noodles, but suddenly a strong wind blew everything away, so he couldn't find his real estate and returned to empty stomach.

 

However, he was not frustrated and silently waited for his luck to improve, and went fishing by the Wesu River. The needle he used was a straight needle, so no fish could be caught. When his wife came to bring her rice, he was angry and bent the hooks of fishing to catch several fish while Kang Ja-ah was eating. Kang Ja-ah said to his wife, letting go of all his fish.

 

“Everything is done according to nature's rules, not just because you are forced to do it.”

 

After this, even her wife left him. Still, he waited for the time without complaining. When he was eighty years old, he recommended that the main gong pass through the stomach, see Kang Ja, and go down the mountain. Jugong himself pulled the wagon and waited for half a day, and finally, Kang Ja-a, whose heart moved, came down from the mountain and helped King Zhu Mu to subdue him.

 

Kang Ja-a was not only excellent at Jimo, but also well versed in martial arts, providing various resources to the main gong, and predicting future natural phenomena such as weather and farming conditions. Kang Ja-ah (姜子牙) made a big contribution in the process of subjugating King Mu, and was sealed in a ritual and enjoyed longevity and wealth.

 

On the other hand, Jangyang (張良) of Jinmal Hancho (秦末漢初) can be said to be the origin. His journey can be found in four events. First, in order to repay the resentment of the Korean country, he robbed Gasan to save an assassin, and then had Emperor Qin stabbed him at Park Rangsa. Although he was not successful, his courage and spirit were rich in the temperament of Gin. Second, he learned the strategy by accident. According to the story said, Jang Liang accidentally met an old man who had him pick up and put on abandoned shoes on the road, and when Jang Liang obeyed the old man's instructions, he promised to meet again in the light of the day and teach him the tactics. Zhang Liang went to see the old man twice, but each time the old man arrived first.

 

The old man gave him the last chance, and Jang Liang went to the meeting place from the beginning of the evening with tremendous determination and waited until the day was bright and impressed the old man. The old man judged that his character was excellent and his qualities were not unusual, and he passed on his tactics.

 

Third, he became the national contributor of the Han Dynasty by providing resourceful resources several times to save the breasts from trouble and repel Hang-wu. Fourth, he did not covet Myeong-ri even though he established the gong and retreated away and devoted himself to cultivating his martial arts, thereby avoiding his anger when Weifang and his wife, Yeo-hu, killed the public spirits and was not humiliated like Soha.

 

Yugi (劉錡) was also a cause of this type.

 

Yu Yu is a self-owned Baek-on, from Zhejiang Qingjiang, and was born in 1311 in a landowner's family. Zhejiang, as a center of cultural education since the Song Dynasty, produced a number of outstanding talents, and was famous for ‘Mountains, Water, and Talents’.

 

The ancestors of Yugi (劉錡) served as government officials in the Song Dynasty, and then moved to Cheongcheon, Zhejiang, when Namsong moved south. Yugi's grandfather, who had been a former Taehak-sangsa of Namsong, was well-educated, mastered in astronomical geography, was honest and well-meaning, and organized an uprising under the banner of anti-won. Yoo Ki-gi had a great will to elaborate since childhood, and has a strong and upright personality that is not flattering or envious. He also showed various talents, especially astonished people around him with his outstanding memory.

 

There was a bookstore near Yugi's house, and on the way to and from Seodang, he always passed in front of it. One day he picked up a book in the astronomical field and read it roughly, but the next day he stopped by and opened the book, enough to memorize the content perfectly. The owner of the bookstore was amazed and gave the book to Yugi, and said Yugi.

 

“The content of this book is already in my head, so it's useless to take it with me.”

 

He knows what people don't know and even says things they can't say. His teacher affirmed that he would become a great timber in the future. At the age of 17, Yu Ki went to Seokmun-dong in Mt. I learned (理學). During this period, he read numerous books throughout, and in particular, a collection of authentic Gyeongja history books (經子史集-Chinese ancient books, divided into four types, Gyeong-eun scriptures, Ja-ji confession books, living history books, and houses by literary men). In addition to ), he also showed interest in the writings of his family and learned the fields of medicine, agriculture, astronomy, and geography.

 

However, Yugi's youth period was marked by hardships and trials, and it was only in 1333 that he was barely paid to Jinsa and became the present successor of Kangseo Koesu-hyeon. At the time, the government of the Yuan Dynasty continued to be confused and unsettled, but a word meaning'to live and die in the drunkenness of the ruler'. It compares the missing ruler) and tyranny continued, and peasant uprisings in every place did not end. In this situation, meaningful personnel took a glimpse of the opportunity to meet or boldly jumped into the ranks of Kiui-gun. Very few intellectuals sold their lives to the ruler of the circle.

 

Yoo Ki-Yi (劉 錡) was in the minor position of assisting the present spirit and adequately responded to the demands of the department, but he decided that one day he would devote himself to upholding the conscience and justice of the intellectuals. Eventually, he abandoned his office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because he was irritated by flattery and famine. In 1340, he returned to his hometown of Cheongjeon, where he began his career as a gift.

 

The scholarship and character of Ki-Yi was already known throughout the world, and Yu-Yi accepted it when the planet of Zhejiang asked him to assume the office of the Confucian deputy. However, when he came to office, he found that all the directors were corrupt. His straightforward character, Gi-gyo (劉錡), did not hesitate to reproach severely for illegal acts, and as a result hated people. He went further and impeached him, saying that he was abusing his powers and tampering with even trivial matters. Eventually, he again became resentful and had to step out of office.

 

Around 1351, Brother Bang Guk-jin repeatedly rebelled and surrendered, occupied Wenju, Daeju, and Gyeongwon, and frequently appeared in Shanghai, causing riots, aggravating the disaster of the people in the coastal region. The incompetent officials of the Yuan Dynasty's court appointed him to be a master master of Jeoldong Won-subu (浙東元帥府) because he was rumored to be an excellent talent.

 

Ki-Yi decided to neutralize the forces of the Bang Kook-jin brothers by swaying the military spirit with a thorough decentralization strategy. Originally, the behavior of Bang Kook-jin was unrighteous, so his subordinates were forced to obey orders, and there was no intention of giving their lives for him. In the meantime, when the government officials punished the country, but declared that they would treat the rest of the country differently, not a few people escaped and the force of the visitation was greatly weakened.

 

In 1358, when he resigned for the third time and returned to the house of Cheongjeon, Kiwi was over 40 years old. After he passed the Jinsa after twenty-one years, he retired several times during his 20-year office in office, and decided that he would one day unfold his will, but the opportunity seemed to be exhausted.

Meanwhile, when Kwak Ja-heung died, Director Joo's power expanded rapidly. He took the advice of Joo Seung (朱升) to “raise the walls and store food widely, but to postpone the title”, and quickly grew in power, avoiding the Mongols' attack. In particular, he placed great importance on the rules of his army, established an excellent prestige and reputation, and welcomed outstanding local talents wherever he went. After the occupation of Cheongju, Director Joo heard the news that Yugi was residing in Cheongjeon, and sent a person to welcome him.

 

Yoo Ki-gyu (劉錡) had previously entered the prestige of Director Joo, but he lacked understanding of him, and because of the irritation he felt in his office life, he rejected Director Joo's first request. Director Joo didn't get angry, but sent a son-in-law again to deliver a letter with a desperate and polite tone. When Son Yeom explained the grand meaning and resourcefulness of Director Joo and begged again and again, Yu Gi was moved.

 

“I gave up my office early and spent time leisurely in West Lake. One day, I accidentally discovered a strange energy in the northwest, and at that time I predicted that it would be a heavenly spirit and that it would reappear in Geumneung 10 years later. With the prosperity of Mr. Joo’s great work now, it is clear that he will be prosperous in the future as he greatly honors the present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are in smooth harmony.”

 

Yoo Ki-yo was discouraged and was living in a reclusive life where he enjoyed tea or kept organs, and was suddenly called to an innocent sergeant and received a questionnaire about the contents of the innocence. At this time, Director Joo defended him and returned home safely, but a vase was formed and he died at the age of 65 in 1375.

 

In Chinese history, there were many heroes, envoys, governors, and righteous people, but it is not easy to find the origin. The origin is not found just by looking for it. It is difficult to recognize in the day because it possesses a mystical dignity that naturally yearns for after a long period of time. j6439@naver.com

 

*Writer: Jeongrang Lee

Journalists. Chinese classic critic. Colum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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