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한국인 신사참배 거부사건과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식민지 비판학③

이백산 역사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2/04/16 [18:36]

 

▲ 일제의 감독하에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하는 어린이 행렬



일제는 한민족 말살을 위해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추진하였고, 그 하위 정책으로 ‘내선일체’(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사상을 강요), ‘황국신민서사’(행사나 학교 조회에서 일본에게 충성하는 내용의 서약을 암송할 것을 강요), ‘창씨개명’(조선인들에게 일본식으로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 ‘궁성요배’(매일 아침 도쿄를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 ‘신사참배’ 등을 만들어 강요하였다. 여기서는 일본의 신도(神道)에 기반한 신사참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일본의 신도(神道)는 본래 일본의 고유 민족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기네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라기보다는 일본 왕을 신(神)처럼 받들어 모시는 국민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신도(神道)는 신사(神社)로 구체화 되었다. 신사는 태평양전쟁 패전 이전까지 일본이 국교로 내세운 신도의 사당으로, 신도의 신을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 이 신사에 대한 참배를 일본국민의 애국적 의무로 강요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제국주의가 부추긴 ‘신사참배’였다. 신사참배는 결국 ‘천황참배’를 의미했다. 

 

신사참배는 1930년대부터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과 함께 일본 내에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당시 10만 개가 넘는 신사에 대한 행정은 일본정부가 맡았고, 신도의 수양을 가르치는 수신(修身) 과목은 학교의 필수과목이 되었다. 일본정부는 일왕의 신성(神性)을 선전했다. 그리고 일본국민을 일왕의 신민(臣民)으로 육성하였고, 침략전쟁에 동원하였다.

 

이어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일본내의 종교정책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15년과 1917년에 신사(神社)에 관한 법령을 발포하고, 신사(神社)의 설립과 육성을 관장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동화(同化)정책의 하나로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까지는 신사(神社) 건립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체제에서 신사참배는 통치체제의 중요한 수단으로 대두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직후에 조선총독부는 관공서를 포함해서 학교의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모든 조선인에게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학교들은 폐교되었고, 또한 개별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과 교사들은 학교에서 축출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 기독교계는 감리교, 성결교, 천주교회, 안식교 등이 먼저 신사참배를 수용했고, 마지막에 가서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각 교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이기선, 신석구 목사 등은 계속해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주기철(1897.~1944) 목사는 경상남도 창원, 현재의 진해시에서 태어났다. 학교공부는 평안북도의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졸업하였고,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2년 3월 봄학기부터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졸업생이 305명, 재학생이 461명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신학교였다.

 

1925년 12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에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장로회 경남노회 노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조만식 선생이 그의 오산학교 제자이기도 한 주 목사를 찾아와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총독부 경무국은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수립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학교와 학생뿐만 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특히 한국 기독교계 중에서 장로교는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고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반대해 왔으나, 일제의 강요가 심해지자 이에 굴복하는 개인과 교회들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38년 2월 9일 평북 선천읍 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에서 일제 당국의 주장대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임을 시인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의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장로교를 중심으로 평안도와 만주 지역에서 개별 교회 단위로 전개되었고, 그 결과 해방 전까지 교회 지도자 2천여 명이 투옥되고 그중 50여 명이 옥사했으며, 200여 개의 교회가 폐쇄되었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PACHINKO>에는 기독교의 당시 상황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장로교회의 의사 결정권자들은 엄청난 압력에 못 이겨서 의무적인 신사참배를 천황을 위한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시민의 의무로 받아 들였다”(1권, p. 242)

 

이에 따라 국내에서의 신사참배는 강화되었다. 총독부는 기독교인들을 모아서 매일 아침마다 신사참배를 시켰다. 

 

일제 경찰은 1939년 10월에 모인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목사나 장로는 주일 예배에서 설교나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를 강요했다. 그러나 이미 신사참배 거부로 구속된바 있던 주기철목사는 이에 개의치 않고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계속하였다. 이에 일제는 10월 중순경 총독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을 공적인 목회에 종사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시 구속하였다. 이것이 <매일신보>에 대서 특필되었다.  

 

소설 <파친코>에 등장하는 백이삭 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나온다.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한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추정된다. 같은 평양신학교 출신이었던 큰형 사무엘은 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당해 모진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자신의 우상이었던 젊은 형의 죽음을 본 동생 백이삭은 ‘용감한 삶을 살겠노라’고 결심했다. 형 사무엘은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 신자였고, 북쪽에 교회를 지었다. 여기서 북쪽은 평양을 말한다. 백목사의 가정분위기는 이미 신사참배를 거부하도록 조성되었다. 

 

<파친코>에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살고 있던 백이삭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건에 연루된 내용이 나온다. 

 

“경찰이 오늘 아침에 그분들을 잡아갔어요. 다들 신도 신사에 참배하러 갔는데 관리하던 사람이 후가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할 때 주기도문을 외우는 걸 알아챘어요. 경찰이 후를 심문했고, 후는 신사참배 의식이 우상숭배라고 말하며 더 이상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1권, p.232)

 

백이삭 목사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중국인 후(Hu)가 신사참배할 때에 주기도문을 외운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경찰에 함께 체포되었다. 백목사는 속으로 후(Hu)의 그런 행동을 존경했다. 백목사는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집에 돌아와 곧 사망했다. 일제는 죽기 직전에 죄수를 석방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야 죄수들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감옥에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가득했다.

 

국내외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국인 스스로 자기 조상의 역사를 부정하도록 세뇌되었다. 결국 한국은 일본에 의지하여야 발전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의식을 갖게 만들었고, 일본의 역사가 위대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한국인을 강제적으로 동원하는데 용이하도록 활용된 범죄행위였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A case in which Koreans refused to worship a shrine in Japan and Lee Min-jin's novel Pachinko---Critique of colonialism③

 

Baeksan Lee/History Columnist

 

In order to annihilate the Korean people, Japan promoted a policy of making them the people of the Japanese emperor, and as a sub-policy, 'naesunilche' (forcing the ideology that Joseon and Japan are one) and 'Imperial Shinminseosa' (a pledge of allegiance to Japan) was promoted. Forced to recite), 'Creating a surname and changing the name' (Forcing Koreans to change their name to Japanese), 'Gungseong Yobae' (Forcing them to bow to Tokyo every morning), 'Shrine worship', etc. made and forced. Here, I would like to explain 'Shrine Worship' based on Japanese Shinto. Shinto in Japan is originally derived from Japan's indigenous national beliefs. It can be seen as an indigenous belief that worships one's ancestors or nature. However, rather than a religion, it developed into a national belief that worships the Japanese king as a god. Shinto was embodied as a shrine. A shrine was a shrine to the Shinto religion that Japan had promoted as the state religion before the defeat in the Pacific War. Worshiping this shrine was made as a patriotic duty of the Japanese people. This was the “Shrine Worship” promoted by Japanese imperialism. Shinto shrine worship ultimately meant "Emperor worship." Since the 1930s, shrine worship has spread throughout Japan along with the imperialist aggression ambitions. At that time, the administration of more than 100,000 shrines was taken care of by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 Shinto discipline, which taught Shinto discipline, became a compulsory subject in schools. The Japanese government promoted the divinity of the emperor. And the Japanese people were nurtured as subjects of the emperor and mobilized in the war of aggression. Follow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ompelled shrine worship even in colonial Joseon in accordance with the religious policy in Japan. In 1915 and 1917, ordinances on shrines were issued, and they were in charge of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shrines. Also, as part of the assimilation polic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established the Joseon Shrine in Namsan, Seoul, in 1925. Until the 1920s,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ocused on building shrines, but did not actively force shrine worship.

 

However, during the wartime system that led to the Manchurian Incident in the 1930s,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Pacific War in 1941, shrine worship emerged as an important means of governing. Immediately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of 1931,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orced students at schools, including government offices, to visit shrines, and before the Sino-Japanese War of 1937, forced all Koreans to visit shrines to pray for victory in the war. Schools against the shrine worship were closed, and students and teachers who did not participate individually were expelled from the school. In the Christian world, Methodism, Holiness, Catholic, and Adventist churches were the first to accept shrine worship, and finally, the Presbyterian Church accepted it. Although each denomination decided to accept shrine worship, Rev. Joo Ki-cheol, Son Yang-won, Han Sang-dong, Lee Ki-seon, and Shin Seok-gu continued to refuse to worship the shrine.

 

Pastor Joo Gi-cheol (1897.-1944) was born in Changwon, Gyeongsangnam-do, in present-day Jinhae. After graduating from Osan School in Jeongju, North Pyongan Province, he entered the Presbyterian Seminary in Pyongyang. He began studying theology in the spring semester of March 1922. At that time, the Presbyterian seminary in Pyongyang was the largest seminary in Korea with 305 graduates and 461 current students. In December 1925, he graduated from Pyongyang Theological Seminary, and shortly thereafter took office as the senior pastor of Choryang Church in Busan, and was active in the area. Joo Man-sik visited Pastor Joo, who was also a disciple of his Osan School, and in July 1936, he was appointed as the senior pastor of the Sanjeon Sanjeonghyeon Church in Pyongyang. In February 1938, the Government-General’s Police Department established what was called “Guidance Measures for Christianity,” and mobilized the police force to force not only schools and students, but also churches and Christians to visit the shrine.

 

In particular, among Korean Christians, the Presbyterian Church opposes shrine worship as a violation of Christian doctrine and infringes on freedom of conscience and religion. On February 9, 1938, at the 53rd Pyeongbuk Presbytery held at the Nam Chapel in Seoncheon-eup, Pyeongbuk, as the Japanese authorities insisted, “It was decided to admit that shrine worship is not a religion, but a national ritual.” However, in spite of this resolution, the movement against shrine worship was carried out by individual churches in Pyeongan-do and Manchuria, centering on the Presbyterian Church. As a result, about 2,000 church leaders were imprisoned before liberation, 50 of them died in prison, and 200 churches were destroyed. was closed Lee Min-jin's novel expresses the situation of Christianity at the time well.

 

“Under considerable duress, the decision-making authority of the Presbyterian Church had deemed that the mandatory Shinto shrine ceremony was a civic duty rather than a religious one even though the Emperor, the head of the state religion, was viewed as a living deity. ” (p. 157)

 

As a result, shrine worship in Korea was strengthened. The Governor-General gathered Christians to visit the shrine every morning. The Japanese police put pressure on the “Pyongyang Presbytery”, which had been assembled in October 1939, and forced the pastor or elder who did not attend the shrine to decide not to preach or pray during the Sunday worship service. However, Pastor Joo Joo-cheol, who had already been arrested for refusing to visit a shrine, continued preaching at Sansan-hyeon Church regardless of this. Accordingly, in mid-October, the Japanese imprisoned again on the grounds that those who disobeyed the orders of the Governor-General could not be allowed to engage in public ministry.

 

This was widely reported in . Pastor Isaac Baek, who appears in Lee Min-jin's novel , is from Pyongyang Theological Seminary. He is believed to be the Pyongyang Presbyterian Seminary that led the refusal to visit the shrine. His eldest brother Samuel, who had been from the same Pyongyang Seminary, was arrested while attending a protest and died without being able to withstand the harsh torture. Seeing the death of his younger brother, who had been his idol, his younger brother, Isaac Baek, decided to ‘live a brave life’. His older brother Samuel was an independence activist. His parents were Christians, and they built a church in the north. North here refers to Pyongyang. Paik's family atmosphere has already been created to reject shrine worship. In , Pastor Isaac Baek, who was living in Osaka, Japan, was involved in the refusal to visit a shrine.

 

“The police arrested them this morning-when everyone went to the Shinto shrine to bow, one of the village leaders noticed Hu mouthing the words of the Lord’s Prayer when they were supposed to be pledging allegiance to the Emperor. The police officer who was supervising questioned Hu, and Hu told him that this ceremony was idol worshiping and he wouldn’s do it anymore.” (p.151)

 

Pastor Isaac Baek was also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after a Chinese man, Hu, who attended the same church, memorized the Lord's Prayer while visiting a shrine. Pastor Baek admired Hu's behavior inwardly. Pastor Baek was released from prison, but died soon after returning home. The Japanese repeated the release of prisoners just before his death. That way you don't hear that the prisoners died in prison. The prison was full of Koreans and Chinese. The Japanese imperialist coercion to visit a shrine was aimed at destroying the identity of Koreans, both at home and abroad. Koreans themselves have been brainwashed to deny the history of their ancestors. In the end, it created a false sense that Korea could develop only by relying on Japan, and made them mistaken as if Japan's history was great. This was a criminal act used to facilitate the mobilization of Koreans forcibly in Japan's war of aggression.

(lee291838@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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