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소중한 보물을 만나다!

권오인 수필가 | 기사입력 2021/09/15 [12:40]

▲ 권오인  수필가.   ©브레이크뉴스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지붕 아래 내리 세 명의 여자가 태어난 뒤 기다리던 옥동자가 불현듯 나타나 집안의 허물을 벗겨주었으니 금이야 옥이야 왜 안 했겠나? 거기에다 시골에서는 약간의 부잣집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할아버지께선 엄청나게 귀한 사탕을 지금의 금고 같은 궤짝에 넣어놓고 가끔씩 나를 불러 주셨지만, 막내 고모한테 들키면 빼앗기고 말았다. 여름이면 마당에 밀짚방석을 깔고 온 가족들이 모여 밀을 맷돌에 갈아 별미로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나는 거칠게 갈아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를 먹지 못했다. 목구멍에 넘어갈 때 껄쭉거려서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목에 넘기질 못했다. 동생들도 잘 먹는데 큰 놈이 안 먹고 밥을 달라고 한다고 어머니 눈총도 받곤 했다. 이제는 수육에 해물칼국수를 제일 좋아한다. 그렇게 가족들과 친인척, 그리고 지인들에게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라서 그런지 어찌 보면 지금까지 나의 존재는 인덕(人德)으로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란다에 핀 한 송이 꽃도 누군가가 정성을 들여 가꾸었기에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나의 삶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의 기회를 준 소중한 사람들도 하나의 보물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입문한 나의 공직생활은 천수답에 농사짓는 농부와 같았다. 하늘이 돕고 땀을 흘려야 벼 섬이라도 거둘 수 있는 하늘 아래 첫 번째 논 말이다. 가뭄에는 하늘만 쳐다보다 고작 물 한 그릇 떠 놓고 정성껏 기우제 지내는 것이 전부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산 비탈길 따라 올라가 논두렁을 걸어 보지만 걱정뿐이지 별수가 없다. 물 한 방울이라도 논바닥을 축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을 뿐이다. 

 

그러하듯 그 암울한 시절에 인사에서 연줄이 첫 번째라는 불공정한 공직에 들어가 보니 연줄이 없는 나는 늘 뒷전으로 밀렸다. 열자 되는 장대를 돌려도 한 사람 닿을 데 없는, 말하자면 빽이 없는 놈은 땀만 흘리고 소득 없는 천수답에 불과했다. 누구는 적당히 있어도 비옥한 땅에 물이 철철 넘쳐 논두렁 터지게 잘되는 벼를 수확하는 문전옥답도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땀과 실력으로 맞섰지만,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 

 

공직생활을 시작한 나의 꿈은 면장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면서기로 시작한 그때 나의 눈높이에서 면장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훗날 면장은 못했어도 부시장을 역임했으니 소원을 이룬 셈이다. 

 

어느 날 선술집에서 선후배들과 소줏잔을 기울일 때였다. 자연스럽게 사는 집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나는 전세를 살고 있었지만 그다지 내 집 마련에 관심이 없었다. 전세를 살아도 불편하지 않았고 퇴직하면 고향에 살 집이 있으니 별걱정을 안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파트는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어서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배가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달팽이도 집이 있는데 처자식 끌고 접 방살이나 다니느냐.” 아뿔사! ‘이제 내 집이 있어야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우선 맛보기 임대 아파트로 옮겼다. 딸애들이 무척 좋아했다. 현관문이 불이 나게 들락거렸다. 그곳에서 얼마간 살다가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입주하는 첫날 새벽에 아내하고 솥단지와 맑은 물 한 그릇 떠 놓고 무해무득하게 살게 해달라고 북향재배 했다. 어찌나 좋았던지 첫날밤은 내겐 잠도 오지 않았다. 아이들도 전학 온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를 가지고 와서 연필 끝에 침을 묻혀 ‘자가 아파트’에 동그라미를 쳤다. 아파트가 무엇인지 꼬마들의 기도 살리고 아내도 살맛나게 했다. 그것이 선배의 야속할 만큼의 말씀으로 내 인생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소중한 첫 아파트를 장만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자가용을 갖는다는 것은 하찮은 일이지만 90년대 초 만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대전만 해도 관공서나 아파트 주차장에 몇 대씩 주차되어 있었지만 많은 주차 공간이 텅텅 비어 있을 정도였다. 그 시절에 친구가 자동차면허학원에 다니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전혀 뜻이 없었다. 평생 자가용을 소유할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번 조르는 바람에 갑천변 상이용사 운전교습소로 가서 두 차례 연습을 하고, 그곳 쓰레기통에 버려진 운전면허 기출문제집을 들고 와서 공부하고 이튿날 면허증을 땄다. 산길을 가다 밤 한 톨 주운 횡재였다. 하지만 면허증은 장롱면허에 불과했다. 당장 자동차를 살 돈도 없고 운전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무엇이든 준비된 자에게는 언제든지 기회는 오는가 싶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가, 공매하는 엑셀 자동차가 있으니 응찰하라며 부추겨 평생 처음으로 자가용을 샀다. 비록 중고차이긴 해도 우리 시골에서는 맨 처음으로 자가용을 샀다고 뽐내며 타고 다녔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이룬 또 하나의 소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한 늦둥이 아들 혁률이를 얻은 것이다. 비단 혁률이 뿐만 아니라 두 딸도 마찬가지로 귀하고 예쁜 녀석들이다. 한 생명은 누구든 똑같이 존엄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가족들을 비롯하여 친인척 모두가 늦게까지 기다려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장남이기에 가족들은 내심 대를 이을 아들을 기다렸으나 정작 나는 두 딸로 족하다고 말해왔다. 자식에 관해서는 경제적으로 능력껏 낳아야 된다는 것이 내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부모님은 말씀을 안 해도 집안 식구들이 난리였다. 아내와 나는 많은 고민과 기도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 어머니는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인 안내를 간병하다 사내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내게 전화를 주셨다. 

 

“아들이다, 아들! 빨리 와 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시골에서 첫차를 타고 선걸음에 달려왔다. 맏손자 낳았다고 밤새 이름 몇 개를 지어 오셨다. 그리고 혁률이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던 날 두 딸은 집안 가득히 오색풍선을 달아 놓고 동생을 반갑게 맞아 축복해 주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축복을 받으며 세상에 온 것이다. 첫돌 날, 많은 축하객의 박수를 받으며 연필을 잡았다. 사주 또한 “조약돌(보석)에 비가 내려 씻기는 형상이다.” 보석이 깨끗해지면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에 태양을 만나면 빛이 난다. 아무래도 이담에 열심히 노력하여 훌륭한 나라에 재목이 되려나 기대한다. 내 나이 마흔넷에 늦둥이 아들을 얻어 부모님께 효도하고 내 생애에 가장 잘한 일이어서 소중한 보물임에 틀림없다. 

 

지금껏 내가 잘살 수 있도록 베풀어주신 분들의 뜻은 나에게는 소중한 ‘인덕’이요, 올챙이 시절에서 보면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던 관직에 나아가 부시장을 역임하고 부이사관으로 퇴임했고, 아파트와 자가용도 소유하고 늦게 귀한 아들도 얻었으니 이만하면 부러울 것이 없지 않은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라던데 지금 내가 무서운 사람이 되었나 보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이다. *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as'Google Translate'.

 

Found precious treasures on the road

 - Kwon Oh-in Essayist

 

He grew up with a lot of love from his family. It is also true that the three women fell under the same roof, and after the three women were born, the jade-dongja who had been waiting suddenly appeared and stripped the skin of the house. In addition, in the countryside, it was a bit of a wealthy house, so it was enough.

 

Her grandfather put incredibly precious candy in a box like today's safe, and occasionally called me, but when her youngest aunt found out, it was taken away. In summer, straw cushions were laid in the yard, and the whole family gathered to grind wheat on a millstone to make kalguksu as a delicacy. I did not eat kalguksu made from coarsely ground wheat flour. It's not that I didn't eat because it was gritty when it went down my throat, but I couldn't pass it down my throat at all. My younger sisters eat well, too, but my mother would stare at me because the older one didn't eat and asked for food. Now, I like the seafood kalguksu the most. I grew up with love and care for my family, relatives, and acquaintances. Just as a flower blooms on the veranda and a beautiful flower blooms because someone cares for it with care, I would like to thank everyone who helped me in my life. Not only that, but the precious people who gave me a turning point in my life are also a treasure.

 

My public life, who entered without knowing anything, was like a farmer who farmed in the fields of heaven. It is the first paddy field under the sky, where even an island of rice can be reaped only if the sky helps and sweats. In a drought, all you have to do is look up at the sky, put a bowl of water on it, and spend the rain festivities with sincerity. I go up the slope of the mountain 12 times a day and try to walk through the rice paddies, but I'm just worried, but there's nothing wrong with that. There is only a desperate struggle to moisten the rice paddy floor even by a drop of water.

 

Just like that, when I entered the unfair public office that I had the first connection in personnel affairs in those dark days, I was always pushed to the back without a connection. Even if he turned the pole that opened the door, no one could reach him, so to speak, he was nothing but a sweaty man with no income. There was also a gatekeeper who harvested rice that bursts easily in fertile soil, even if there is enough water. I fought against it with sweat and skill, but I used to hit the limit.

 

When I started my career in public service, my dream was to become a manager. It was because Myeonjang was the highest at my eye level when I started by saying that I can see as much as I know. However, after serving as the deputy mayor even though he could not be the mayor later, his wish came true.

 

One day, at a tavern, I was having a glass of soju with my seniors and juniors. The story of a house where we live naturally came out. At the time, I was living on a charter, but I wasn't very interested in owning a house. It was because it was not inconvenient to live in a jeonse, and when I retired, I had a house to live in my hometown, so I didn't worry too much. And it was because he had given up on the apartment because he could not afford it. However, the senior said shocking words that woke him up from his sleep of ignorance. “Even snails have a house, but do they drag their wives and children around the room?” Oops! The thought “I must have my own home now” came to my mind. First of all, we moved to a rental apartment. My daughters liked it very much. The front door flew in and out. I lived there for a while and then bought an apartment. At dawn on the first day I moved in, my wife and I planted a pot pot and a bowl of clear water and asked to live in the north so that we could live harmlessly. It was so good that the first night I couldn't even sleep. The children also brought home environment surveys from the school they transferred to, put saliva on the tip of a pencil, and circled the ‘self-contained apartment’. He saved the children's prayers and made his wife happy. I bought the first precious apartment that seemed unlikely to come true in my life with the words of my seniors.

 

Thinking about it now, owning a car is trivial, but back in the early 90s, it was not difficult at all. In the countryside, it was enough to count fingers. In Daejeon alone, several cars were parked in public office or apartment parking lots, but many parking spaces were empty. At that time, a friend suggested that I go to an automobile license academy. But it made no sense at all. Because he had no hope of owning a car for the rest of his life. However, after a few stutterings, I went to the Gapcheon-side veterans driving school to practice twice, and brought the driver's license paperwork dumped in the trash there, studied and got my license the next day. It was a windfall that I picked up a chestnut while walking on a mountain road. However, the license was only a closet license. It was because I didn't have the money to buy a car right away and I didn't have the confidence to drive.

 

However, for those who are prepared for anything, I want to always have a chance. Not long after, a colleague encouraged me to bid because there was an Excel car for sale, so I bought a private car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Even though it was a used car, I rode it proudly that I bought a private car for the first time in my country. It is another precious thing that I did in my life that I never dared to think of.

 

Finally, he had the most precious youngest son, Hyukryul. Not only Hyuk-ryul, but his two daughters are equally precious and pretty. A life is equally worthy of dignity and deserves respect. Even so, I cherish it more because my family and all my relatives waited for me until late.

 

Since I am the eldest son, my family has been waiting for a son to pass on to me, but they have said that two daughters are enough for me. Because it was my belief that I should have children to the best of my ability financially. However, even if the parents did not speak, the family members were in an uproar. My wife and I had a child after much thought and prayer. Her mother cares for her guide as she is hospitalized for her childbirth. As soon as her baby boy was born, she took a deep breath and she called me.

 

“Son, son! Come quickly.”

 

I couldn't speak any more. The next morning, my father took the first car from the countryside and drove to the front. He came up with a few names all night saying he had a grandson. And on the day Hyuk-ryul was coming home from the hospital, the two daughters hung colorful balloons all over the house and greeted and blessed their younger brother. I came into this world with more blessings from more people than I was when I was born. On the first day, I grabbed a pencil while receiving applause from many congratulatory guests. The keystone is also “the shape of a pebble (jewel) being washed by rain.” When the jewel is clean, it reveals itself. When it hits the sun, it shines. I am hoping that I will work hard to become a lumberjack in a great country. At the age of forty-four, having a youngest son, filial piety to my parents, and doing the best thing in my life, must be a precious treasure.

 

The will of those who have given me so far so I can live a good life are precious 'benevolence' to me, and I went on to a post that seemed impossible to achieve in my tadpole days, served as deputy mayor, retired as deputy director, owns an apartment and a private car, and later has a precious son. So, there is nothing to be envious of if you do this, right? It is said that the scariest person in the world is ‘a person who has no regrets’, but now I must have become a scary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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