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그날 중심잡았던 신현확前총리 별세

申鉉碻 전 총리, '魂이 있는 관료'의 귀감으로 기록될 것‥명복을 빈다

조갑제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7/04/26 [15:23]

金載圭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혼란 수습. 말년엔 박정희 기념사업회장 맡아 마음 고생 많아‥

申鉉碻 전 국무총리가 26일 오전 치료를 받고 있던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申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보건사회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거쳐, 1979년 10월 朴 대통령 서거 이후 제5공화국 출범까지 6개월 동안 국무총리직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외아들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차관급) 등 1남 4녀와 사위인 심영수 서울대병원 교수, 성상철 서울대병원장, 박정석 고려해운 전무가 있다. 장례는 5일장의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申 전 총리는 부총리 시절에 맞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혼란중에도 범인 金載圭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중심을 잡았던 이다. 필자가 쓴 朴正熙 전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김재규의 합수부 진술에 따르면 '본인과 김정섭, 김계원 셋이 총장실에 남았을 때 김정섭을 바깥으로 나가게 한 뒤에 김계원을 이리로 오라고 하여 실내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사람아. 각하를 어떻게 그렇게 했어." "보안이 급선무입니다. 최단시일 내에 계엄사령부의 간판을 혁명위원 회간판으로 바꿔달아야 합니다." "알았어.". 
  
김계원은 김재규를 밀면서 화장실 바깥으로 나와 국방부로 옮기는 행렬에 끼었다. 김계원은 "육군본부벙커에서 김재규가 혁명 운운할 때까지는 오발로 각하를 죽인 줄 알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밤 10시30분 국방장관실에 올라가서 최규하(최규하)총리는 장관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김재규, 김의 맞은편에 김계원, 그리고 내무-법무-국방 다른 장관들과 정승화총장도 둘러앉았다. 유혁인 수석은 장관이 아니어서 앉아 있기가 뭣했다. 일어나 방을 들락날락했다. 
  
이야기는 자연히 총리와 실장, 부장 사이에서 오갔다. 崔총리가 "계엄을 선포하자면 그 사유를 명확하게 해야 하는데 무엇이라 하지요. 유고로 하는가, 아니면 각하의 서거라고 하는가"라고 의견을 구했다. 김계원은 유고라고 발표하자는 데 동의했고 김재규는 "부산 마산 사태도 있고 하니 국내 치안문제로 하자"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김계원은 "대통령 각하의 유고로 인하여 27일 0시를 기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최 총리는 "유고만 가지고는 국민들을 어떻게 납득시키지요. 무엇인가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야지요. 국무위원들도 내용을 좀 알아야 의견을 교환하지요"라고 했다. 김재규는 "유고도 안됩니다. 국내 치안이 좋지 않아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또 강경하게말했다. 
  
최총리는 "국내에서 데모가 난 것도 아닌데 그리고 부산 마산이 다 조용한데 국민에게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대통령 서거를 어떻게 국민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계속해서 보안유지하는 것도 어려우며 우선 당장 국무위원들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반박했다. 
  
김재규는 "왜 안됩니까. 소련은 1주일간도 발표하지 않고 모르게 할 수가 있는데 우리는 2∼3일간만 보안유지를 하자는데 왜 안됩니까"하고 격하게 이야기했다.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계엄령의 사유를 명백히 밝히지 않은 채 그냥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라고 대들었다. 김재규는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렇게 따지고 드느냐"라고 역정을 냈다. 
  
이것이 과장이 되어 김 장관이 김 부장에게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었다. 이 무렵 연락을 받은 국무위원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김성진 장관은 먼 발치에서 신현확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가 복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국무회의가 왜 소집되었는지 아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대통령께서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 김재규 부장이 알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꾸 계엄령을 펴야 한다고만 하니 부총리께서 달래서 이 사태를 처리하셔야겠습니다.". 
  
김 장관은 김재규가 동향의 선배인 申 부총리의 말은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申鉉碻 부총리는 장관실에 들어가서 김재규와 마주앉자마자 물었다. 
  
"유고의 내용이 뭡니까." "그것은 밝힐 수 없습니다.". 
  
"다치셨습니까, 아니면 갑자기 병이 났습니까."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비밀에 붙여야 합니다." "유고의 내용도 모르고 비상계엄령을 어떻게 선포할 수가 있습니까.". 
  
申부총리는 평소에는 예의바르던 김 부장이 딴판으로 변한 게 이상해서 방 한 구석에 서 있던 김계원 실장을 불렀다. 등뒤로 다가온 김 실장을 돌아보면서 "어떻게 된 거요. 김 실장은 각하와 늘 행동을 같이 하는 분이니 알 것 아니오"라고 다그쳤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니 어째서 모른다는 겁니까.". 
  
"제가 사실은 각하를 업고 병원에 갔었습니다." "지금 수술중입니까, 사고가 나서 다치셨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다 끝났습니다. 별실에 안치를 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사고인데 저도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장관들이 국방부장관실로 모여들고 아무것도 모르고 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따지자 金실장은 "각하께서 운명하셨다"고만 말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또 한 마디도 털어놓지 않았다. 김재규도 보안유지만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장관들이 많이 모일수록 김재규와 김계원은 몰리는 입장이 되었다. 장관들이 벌떡 일어나 화를 내면서 "돌아가셨으면 가봅시다. 확인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어느 장관인지 "보안이 무슨 보안이냐. 경위를 말하라"라고 하니 실내가 와글와글했다. 
  
최규하 총리는 밤 11시30분쯤 국방부회의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말했다. 
  
"그러면 김 부장이나 김 실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사유를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 하지요.". 
  
김재규가 대답했다. 김계원은 그러나 "우리는 국무위원이 아니니 들어갈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장관들은 국무회의장에 들어가고 장관실에는 김계원, 김재규, 유혁인이 남게 되었다. 이때 김재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군검찰에서 진술하였다. 
  
"비상국무회의 결의 여하에 따라서 그날 밤으로 본인이 평소부터 신임하던 안전국장 김근수 등 안전국 요원으로 하여금 궁정동 현장에 보내어 궁정동 소재 중정요원은 전부 연행해서 안전한 곳에 수용하여 보안을 유지시키고 사건현장은 안전국 요원이 조사중이라는 이유로 일체 비밀에 붙이고 본인이 의도하는 혁명이 성공단계로 접어든다고 판단될 때 국민 앞에 진상을 발표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김재규의 구상은 신현확 부총리와 김치열 법무장관, 김성진 문공장관 등의 반발에 직면하여 물거품이 된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 金桂元씨는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범인이 김재규"라고 알려 체포되게 만들었다. 
 
日帝 관료 출신인 申鉉碻 씨는 李秉喆씨와도 가까워 李씨의 死後 한때 삼성그룹의 회장을 지냈다. 이때 李健熙 씨의 행태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모종의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가 성사되지 못했었다. 그는 야심이 컸던 인물이었으나 그 야심을 다 이루진 못했다. 
 
鐵拳의 권력자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혼란상태에서 중심을 잡은 申鉉碻씨는 정치인, 기업인, 관료생활을 성공적으로 해왔지만 말년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자신이 앞장서서 朴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따라 申 전 총리가 나섰으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사실상 기념관 건립을 방해했다. 申 전 총리는 이 와중에 병을 얻어 자리를 柳陽洙 장군에게 물려주고 오랫동안 병상에서 지냈다. 흔히 관료는 魂이 없다고 하지만 申鉉碻 전 총리는 '魂이 있는 관료'의 귀감으로 기록될 것이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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