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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최은희 北탈출 "미CIA 공작이었다"

새로운 증언, 신상옥 영화감독-최은희 배우의 북한 탈출 내막

이명산 북한전문가 | 기사입력 2013/07/15 [10:32]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와 나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다 기이한 인연으로 저들을 만나게 되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차분하게 시작해 보겠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납북경위와 북한에서의 행적 그리고 성공적인 탈출에 대하여 글을 썼지만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종종 발견이 되는데, 내가 지금부터 기록하는 내용은 그들의 탈출공작을 총지휘한 미국정부의 관리로서 그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 목격한 사실, 내가 행한 역할, 그리고 객관적 분석에 근거한 서술이다. 
 
▲ 신상옥     ©브레이크뉴스
신상옥 감독의 본명은 신태익이고 함경북도 청진 태생으로 (1926.10.18-2006.4.11)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계의 거장이었고 성격이 고지식하고 강한 개성의 소유자로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천재적인 예술 감각을 구사한 인물이었다. 심훈의 장편소설을 각색하여 1961년에 개봉한 영화 <상록수>는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으로 제작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고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박대통령과 신감독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했으나 견해 차이에 있어서는 서로 양보를 못하는 고집불통의 적수이기도 했다.
 
박대통령과 신감독 사이를 불편하게 만든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2시에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평화시장 봉재공장 재봉사로 일하고 있던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사건이었다. 그는 혹사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분노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22살의 새파란 나이에 목숨을 던졌다. 박대통령은 그 당시에 대한민국의 경제부흥을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전후복구도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나라의 경제는 아직도 걸음마의 수준이었으며 사회의 구석구석에 비리와 부조리가 지병처럼 도사리고 있을 때인데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노동쟁의와 노사분규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주제로 신감독이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나섰다. 그것은 불난 집 앞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격이 되었고 박대통령은 신감독을 설득하고 영화제작을 만류하려 하였으나 두 분이 팽팽하게 고집을 꺾지 않았고, 드디어 박대통령은 신감독의 영화제작 영업 감찰을 박탈하고 말았다.
▲ 최은희     ©브레이크뉴스
 
그 무렵 신감독은 신인여배우 오수미와 1973년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아들 <상균>과 딸 <승리>를 낳았으며 불임체질의 최여사와는 1976년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신감독은 국내에서 영화제작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 최여사는 안양 예술고등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은행 빚은 누적되고 고전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슬럼프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북한의 김정일이 들었다. 김정일은 영화광으로서 수천 개의 영화필름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한국의 최고 영화인으로 알려진 신상옥과 최은희를 북으로 납치해갈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김정일의 야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을 드나들며 남북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을 때 북에서는 1972년 5월에 부수상 박성철이 김일성 밀사로 서울에 왔었고 그가 돌아갈 때 중앙정보부는 흑백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필름을 선물로 주었다. 그가 평양에 돌아간 후에 김정일이 이 영화필름을 보고 신상옥과 최은희를 북으로 데려오라고 대외연락부 부부장 임호군에게 지시하였다. 북한의 영화는 노동당의 선전선동을 위한 도구로 제작되기 때문에 딱딱하기 그지없고 예술영화를 제작할만한 사회적 정신구조나 인재가 없는 상황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같은 애틋하고 순결하며 전통적으로 한국적인 순수애정영화를 본 김정일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그 당시 노동당의 선전선동담당비서였다.

최은희의 본명은 최경순이고 1926년 11월 20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7년에 영화 <새로운 맹세>를 통하여 영화배우로 데뷔 했고, 6.25사변 때에는 북으로 납치되어 청천강 부근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고초를 겪었으며, 1954년에 영화감독 신상옥과 결혼하고 1960년대 1970년대 영화계 황금기에 독보적인 인기를 끄는 배우로 활약하였다. 그가 출연한 작품 <성춘향,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이>에서 보여준 그의 한국적 미모와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파란만장의 생애를 통하여 또 하나 불행의 그림자가 그를 덮치기 시작하였다. 1976년에 신감독과 이혼을 하고 안양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1978년 정월연초에 홍콩에서 이상희라는 교포가 (당시 52세) 최은희를 방문하였다. 그때 최여사를 포함하여 한국사람 그 누구도 이상희가 북한이 홍콩에 심어놓은 대남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상희는 최여사에게 접근하여, 홍콩의 유력한 재벌가가 운영하는 홍콩영화사가 <양귀비>라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최여사와 합작하기를 원하며 일이 잘되면 홍콩영화사가 운영하는 현지 예술학교와 최여사가 운영하는 안양 예술고등학교가 자매결연을 하게 된다고 진언하였다. 이 말을 들은 최여사는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서 살길을 열어주신다고 믿고 아무의심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상희를 따라 1월 11일에 홍콩에 도착하여 <푸라마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자기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재벌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희의 말에 의하면 그분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출타중인데 2-3일내로 돌아온다고 했다. 
 
▲ 최은희     ©브레이크뉴스
1월 14일 저녁 늦게 이상희가 급히 와서 지금 그 재벌가가 돌아왔는데 당장 최여사를 만나기를 원한다며 그가 타고 온 자가용에 최여사를 싣고 호텔을 떠났다. 최여사는 핸드백 하나만 들고 따라가며 기뻐서 정신이 없었고 흥분상태에 있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해변 가에 있는 큰 호텔에서 그분이 기다리고 계시다고 하였다. 차가 <완짜이>를 지나서 나무가 우거진 어떤 고갯길을 통과할 때 이상희를 따라와서 동승한 그 재벌가의 비서라고 하는 어떤 중년남자가 갑자기 흰 수건을 꺼내어 최여사의 얼굴을 덮고 마취시켜버렸다. 그들은 마취된 최여사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야음으로 주변이 캄캄할 때 고속고무보트에 최여사를 인계하고 고무보트는 공해로 빠지고 공해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한공작선에 인계했다. 그 공작선은 최여사를 배 밑바닥 선실에 가두고 어디를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 1월 22일 밤에 북한의 남포항에 도착하였다. 남포항에는 김정일과 대외연락부 부부장 임호군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에서 영화제작을 할 수 없는 신감독은 일본 프랑스 미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살 길을 찾아 헤매던 중, 홍콩에서 최은희여사가 북으로 납치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뼈저린 죄책감을 느꼈다. 그와 오수미와의 관계, 이혼, 재정적 어려움 등이 최여사를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홍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홍콩으로 달려갔다. 홍콩에서는 신감독이 전에 영화필름이나 촬영기자재를 구입할 때 거래하던 김00 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를 찾아갔다. 그는 신감독에게 최여사를 구출해내는 방법을 모색해보자면서 신감독이 홍콩에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말하자 순진한 신감독은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놈도 북한의 첩자인 것을 아무도 몰랐다. 1978년 7월 19일, 신상옥 감독도 최여사와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함정에 빠졌고, 동일한 루트를 거쳐 북으로 납치되어 7월 23일 남포항에 도착하였다. 
▲ 최은희     ©브레이크뉴스
 
북한에 끌려간 신감독은 저들의 집요한 세뇌공작과 설득에 응하지 않았고 두 번씩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평양시 승호리에 있는 보위부 수용소에 수감되어 3년 10개월간 고생을 하였다. 승호리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건강이 나빠졌고 허술한 병원에서 간장 생체조직검사 (biopsy)를 하였는데 소독이 잘 안 된 기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C-형 간염이 감염되어 향후 계속 그 병 때문에 투병하며 살았다. 그가 탈출하고 후일에 서울에 왔을 때에도 간 이식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그 병 때문에 2006년 4웡 11일 서울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집이 센 신감독을 설득하기가 힘들다고 느낀 김정일은 방법을 바꾸었다. 그를 바로 석방하여 자기의 별장에서 최여사와 상봉하게 하였다. 그때까지 최여사는 신감독도 자기처럼 납치되어 평양에 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눈물겨운 재회를 통하여 신감독은 여생을 최여사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속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재회 이후 김일성과 김정일은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하였고 북한의 영화를 국제수준으로 창달하여 줄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자주 만나고 중요한 연회석이나 가정모임에 초청하여 격이 없는 대우를 하였다.
 
신감독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기와 최여사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이 두 독재자들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여 신임을 얻은 후에 운신의 자유가 확대 되었을 때 무슨 일이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저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영화제작활동을 개시하였다. 김정일은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지어주고 자금도 노동당의 어떤 과업보다도 우선순위로 지원하였고, 신감독과 최여사는 북한 영화예술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하였고 모든 영화배우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그들을 따랐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의 작품을 보고 환호성을 올렸다. 인민들이 신감독과 최여사를 더 좋아해서 김정일이 질투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재북 기간 중에 총 17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혹사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중에 <탈출기>, <소금>, <불가사리>, <돌아오지 않은 밀사>는 외부 세계에도 알려진 작품들이며, 특히 구한말 고종황제의 밀사로 화란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할복자살한 이준 열사를 주제로 제작한 <돌아오지 않은 밀사>는 1984년에 체코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신감독이 특별감독상을 수상하였고, <소금>은 1985년 모스코 영화제에서 최여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들의 작품이 국제영화제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함으로 그들의 위상이 높아졌고 김부자의 신임과 배려가 더 좋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감시는 계속 철저했으며 절대로 부부가 동반하는 외유를 허락하지 않았고 최여사가 부다페스트에서 담석 수술을 받을 때에도 혼자 다녀왔다. 신감독이 부다페스트와 비엔나와 프라하에 자주 갔지만 늘 경호감시원이 따르는 단독 여행이었다. 그런데 1985년 런던 국제영화제에 신감독과 최여사가 처음으로 부부 동반하여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영화배우 남궁원과 김지미가 참석하였는데 그들이 신감독과 최여사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했으나 신감독과 최여사가 어찌나 쌀쌀맞게 그들을 대했는지 김지미는 섭섭하여 퍽퍽 울었다고 한다. 북에서의 생활이 어떠냐고 질문하자 그 두 사람이,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배려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영화제작활동도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당의 지원을 받고 있고 최대한으로 자유분방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북조선 공화국 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남궁원과 김지미에게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자기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계 하였다. 이처럼 엄청난 거짓말을 해 놓고 신감독은 속으로 울었다. 자기의 조국을 배신하는 말과 행동을 뻔뻔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한 토막의 연기로 그는 후에 많은 것을 얻어내게 되었다.
 
그들을 따라온 4명의 북한 경호감시원들이 평양에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김일성 부자는 신감독과 최여사가 이제 완전히 자기들의 사람이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저들의 의심과 감시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한국에 돌아온 남궁원과 김지미는 런던 영화제에 가서 신감독과 최여사를 만났던 이야기와 저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김일성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언론에 퍼트렸고 독자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저들의 진심을 몇 사람이나 눈치를 챘을까. 이 사건 이후에 김일성 부자가 신감독과 최여사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고 자유스러운 부부동반 해외여행이 허락되었으며 김정일은 북한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개설한 금별은행에 $230만을 신상옥 구좌로 예치해 놓고 영화 사업과 제작기자재 구입에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선심을 베풀었다. 이때부터 신감독은 본격적으로 탈출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신감독은 1985년 말경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출장 가서 Intercontinental Budapest 호텔에 머물면서 따라온 북한의 경호감시원들의 눈을 피하여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친구, 함경북도 경성고보 동기동창, 김인환에게 전화를 하였다. “누구야? - 나 신상옥이야 - 자네 지금 거기가 어디야? - 나 지금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와서  Intercontinental 호텔에 머물고 있는데 빨리 와서 나를 좀 만나주게.” 친구 김인환은 그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득달같이 부다페스트에 날아가 신상옥을 은밀하게 만났다. 그때 신감독은 친구에게 자기의 탈출계획을 말하고, 김일성 부자가 잘 배려를 하고는 있지만 예술가의 양심과 지각으로는 그 숨 막히고 비위에 거슬리는 사회제도와 구조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겠으니 협조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친구 김인환은 그러면 어떻게 협조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신감독은 남한에는 북한의 간첩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위험해서 갈수가 없고 미국으로 가고 싶으니 미국정부에 자기의 뜻을 전달하고 협조를 부탁할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김인환은, “그러면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나에게 연락해 주면 내가 자네의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래전부터 신감독과 최여사는 일제 Sony 휴대용 녹음기를 하나 구입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자주 만나는 자리에서 그것을 테이블 위에 버젓이 올려놓고 “위대한 수령님의 육성을 평생 간직해야한다”면서 그들과의 대화를 계속 녹음했는데 신감독의 속셈도 모르고 저들은 좋다고 낄낄대며 거리낌 없이 여러 가지 속에 있는 말도 하였는데 그중에는 우리가 참작해야하는 중요한 정보도 들어있고 김정일이 북한의 영화발전을 위하여 신감독 부부를 북으로 납치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자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신감독과 최여사는 이 작업을 저들이 알게 모르게 진행하여 카세트 네 개 분량을 녹음해 두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이불속에서 그가 믿을만한 일본인 친구,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는 교도통신 비엔나 특파원에게 일본말로 자기가 북한을 탈출할 계획을 하고 있는데 차후에 연락이 가면 비엔나에 나타나 협조해 달라는 부탁을 녹음 하였다. 그리고 1986년 정월에 그가 다시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 뉴저지에 있는 김인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김인환의 부인이 전화를 받으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안타까워서 다그쳐 물으니 부인이 하는 말이, “신선생님, 그이가 지난겨울에 간암으로 가셨어요” 라고 했다. 신감독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머리회전이 빠른 신감독은 침착하게 김인환의 부인에게, 집에는 나를 만나줄만한 다른 사람이 없느냐고 묻자 스무 살 먹은 대학생 딸 <마리>가 있다고 했다. 신감독은 <마리>를 급히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애원 하였다.
 
그 다음날에 <마리>가 부다페스트에 날아갔다. 그때마침 Hilton Budapest 호텔 Front Counter 에 일본인 청년이 일하고 있었는데 신감독은 그를 통하여 은밀한 장소에 가서 <마리>를 만나고 미국정부에 보내는 편지와 녹음카세트 다섯 개를 주면서 미국에 돌아가면 즉시 국무부에 등기우편으로 발송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리>가 미국에 돌아갔으나 그들 모녀가 그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절절매다가 뒤늦게 정월말경에 국무부에 발송했다. 그 소포를 받은 국무부는 단도직입적으로, “They are South Koreans. Why should we worry about them? Let them go to South Korea. - 그들은 남한사람들이야. 왜 우리가 그들 문제로 신경을 써야해? 남한으로 가라고 해> 하면서 그들의 미국망명 의사를 묵살해 버렸다. 그런데 신중론자 몇 사람이 그 문제는 자기들이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며 CIA에 넘기라고 하여 결국 그 문제는 CIA 소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문제를 접수한 CIA에서는 동아시아 공작국과 남한과와 북한과 참모들이 토의를 하고 일단은 녹음카세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들어보고 다시 대책을 세우자고 합의했다. 그런데 누가 녹음카세트를 녹취해야하느냐가 문제 되었다.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 차단의 원칙에 따라 (Compartmentation) 북한과나 남한과 직원이어야 할 것; 둘째, 영어 한국어 일어에 능숙해야 할 것; 셋째, 1급 비밀 이상의 기밀취급자격이 있어야 할 것; 넷째, 김정일의 육성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 이었다.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직원이 몇 사람 있었으나 김정일의 육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직원이 한사람도 없었다. 김정일은 평소에 대중 앞에서 5초 이상 연설을 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음성을 식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손을 들었다. 나는 김정일의 음성을 15분 이상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의 음성을 들었느냐고 질문하면 나는 절대로 그 일을 여기에서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녹음카세트를 녹취하는 작업이 나에게 떨어졌다.
 
나는 정성을 다하여 녹취작업을 끝내고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결론은 국무부의 경우와 동일하였다. “So what? Let them go to South Korea."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들보고 남한으로 가라고 해.) 이 일을 신감독이 알았으면 어떻게 느꼈을까. 그다음, 나는 다른 직원들 모르게 상부의 결심에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미국정부가 저들의 망명을 허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네 차례에 걸쳐 건의문을 작성하여 상신 하였다. 첫째, 저들은 국제적인 연예인으로서 북한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선전효과가 지대하다는 것. 둘째, 저들은 북한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생활을 가깝게 목격한 사람들로서 우리가 아직도 모르고 있는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는 안 되는 일도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여기에서 또 얻었다. 나의 건의문이 CIA 부장 William Casey에게 까지 올라가 그를 설득하고 그가 하부에 지시하기를, 일단 저들을 만나보고 망명허용여부를 결정하자고 하였다.          
 
▲William Casey ©브레이크뉴스
William Casey의 지시가 떨어진 직후, 북한과에서는 나를 불러 신상옥과 최은희의 탈출을 지원하는 모든 공작계획을 수립하고 그와 관련된 활동을 은밀히 이행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나는 즉시 뉴저지에 있는 김인환의 딸 <마리>를 불러 지금이후로 신감독으로 부터 연락이 오면 그들 사이에 사전에 약조한 암호 사용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 하였다.

즉, <어머니 건강은 어떠하신가?> <좋지 않아요. - 일이 잘 안 되고 있어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 일이 잘 되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유럽 모든 나라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극비훈령을 작성하여 보냈다. <향후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장소와 시기, 참가국, 참가하는 영화인들의 명단을 즉시 보고할 것. 북한에 가 있는 신상옥과 최은희가 미국망명을 희망하고 있는데 저들이 미국대사관에 뛰어들면 지체 없이 무조건 접수하고 철저하게 보안보호조치를 취하며 수 시간 이내에 은밀히 제3국으로 소개할 것. 사건이 발생하면 처리결과를 즉시 워싱턴에 보고할 것.> 그런 내용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정부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1986년 3월 13일에 우리가 기대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날 오후 1시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신상옥감독과 최은희여사가 미국대사관에 뛰어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집에 갈 시간이 없어서 아내에게 전화하여 내가 급히 출장을 가게 되었으니 갈아입을 옷과 내복 몇 개와 세면도구를 트렁크에 넣고 사무실까지 와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4시에 나는 Washington National 비행장에서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그 다음날 아침 8시에 나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어느 나라 지방도시에 내려 지정된 호텔에 가서 여장을 풀고 이미 그곳에 배치되어있는 우리요원들의 안내로 신감독과 최여사가 머물고 있는 안가에 갔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내가 죽을 때 까지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때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색안경을 쓰고 007가방을 들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과 나는 평생 처음만나는 대면이었다. 그런데 내가 나타나자 그들의 표정이 굳어버리고 얼굴색갈이 창백하였다. 나중에 하는 말이, 그들은 내가 한국정부에서 온 사람으로 알고 미국정부가 자기들을 한국정부에 넘기는 것으로 오해를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그들을 자리에 앉히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신감독님, 그리고 최여사님,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나는 한국정부에서 온 사람이 아니고 미국연방정부의 외교관입니다. 한국에서 출생했지만 미국에 이민 와서 당당하게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국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그동안 두 분의 탈출을 지원하기 위하여 모든 공작을 구상하고 총지휘한 담당관입니다. 내가 이제 두 분의 미국망명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이곳에 왔으니 안심하시고 이곳에서 나와함께 며칠을 지내면서 잘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름은 <마이클>입니다.” 그리고 나는 미국외교여권을 꺼내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때서야 그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우리 세 사람은 서로 끼어 안고 퍽퍽 울었다. 그때의 감격을 우리 세 사람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요원들도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그들로부터 경과보고를 듣기 시작하였다.
 
신감독과 최여사는 1986년 2월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후 평양으로 돌아가기 전에 영화촬영기자재 구입을 위하여 비엔나에 왔고, 그들 뒤에는 여러 명의 경호감시원들이 따라다녔다. 신감독은 첫째, 비엔나 <금별은행>에 비엔나주재 북한대사관 직원과 공동명의구좌로 예치되어있는 $230만을 <Creditanstalt Bank>에 신상옥 단독명의 구좌로 이체하고 수표책을 받았으며, 사전에 연락하여둔 일본인 교도통신 비엔나 특파원과 은밀히 접촉하고, 북한에서 따라온 경호감시원들을 따돌리고 탈출하기위한 위장전술을 논의하였다. 신감독은 1986년 3월 13일 아침에 북한경호감시원들에게, “오늘은 일본에서 온 모 영화제작사 대표들과 영화제작 합작을 논의하기위하여 그들이 묵고 있는 다른 호텔에서 오찬을 하기로 되어있으니 따라오라”고 통보하였다. 그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날 12시 반경에 교도통신 특파원이 공개적으로 호텔에 나타나 일본 영화제작사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행세하고 택시 두 대를 불러, 첫차에는 자기와 신감독 부부를 태우고 다음 차에는 북한경호감시원 네 사람을 태우고 길을 떠났다.
 
길을 떠나면서 교도통신 특파원은 택시운전기사에게 유창한 독일어로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뒤에 따라오는 택시를 따돌리라고 강요했다. 그런데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앞차가 어느 교차로를 통과하자마자 빨간 신호등이 들어와 따라오던 택시를 차단시켰다. 그러자 교도통신 특파원은 택시기사에게 최대한의 속도로 미국대사관으로 질주하라고 하였다. 그때가 오후1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신감독과 최여사는 죽을힘을 다하여 미국대사관 정문을 향하여 달렸다. 후일에 최여사가 원망할 정도로 신감독은 최여사의 손도 잡지 않고 혼자 앞에서 달리고 최여사는 뒤에서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 달렸다.
 
전 세계에 나가있는 미국의 외교공관의 경비는 미국해병대가 담당한다. 정문과 건물입구에서 미국직원과 현지직원들은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을 하거니와, 외부 방문객들은 정문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방문목적을 확인하고 내부에 연락하여 승인이 떨어지면 그때 신분증을 정문경비실에 맡기고 출입증을 가슴에 달고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신감독과 최여사가 뛰어들었을 때 정문에서 신분증검사나 방문목적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 육중한 철문이 자동적으로 열리고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도로 닫쳤다. 미국해병대원 한사람이 접근하여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을 건물 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때 뒤 따라 오던 택시의 북한경호감시원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대사관 정문 밖에서 소란을 피웠다. 신감독과 최여사가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어떤 지하실에 들어가 약 15분간 초조한 시간을 보낸 후, 턱수염이 더부룩한 미국외교관 한사람이 한손에 오렌지 주스와 다른 손에는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층층대에서 내려왔다. 오렌지 주스는 신감독에게 그리고 장미꽃 한 송이는 최여사에게 주면서, <Welcome to the west> 하고 인사를 하였다. (서방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후일에 신감독이 자유스러워졌을 때, 앞으로 영화제작활동을 계속하게 되면 그들의 납북과 탈출을 영화화해야겠는데, 나는 그 제목을, <Welcome to the west> 아니면 <From Hong Kong to Vienna> 로 하자고 건의 한바가 있었다.
 
그날 오후 4시에 신감독과 최여사는 간단한 식사 후에 옷을 갈아입고, 가발을 쓰고, 굵은 검은 테 안경을 쓰고, 두꺼운 머플러로 목을 휘감고, 미국외교관 차를 타고 미국외교관 에스코트 한사람과 동승하여 대사관 뒷문으로 빠져 은밀히 비엔나를 떠났다. 제3국으로 가기위하여 국경을 넘는데, 그때가 3월 중순인데도 그곳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국경에 도착했을 때 양국 출입국 관리소에서도, 신감독과 최여사가 탄 외교차량번호만 확인하고 승객들의 신분을 묻지도 않고 무사통과 시켰다. 차의 앞 유리창에 싸이는 함박눈을 <와이퍼>가 서서히 헤치며, 그들이 미지의 나라로 들어갈 때 신감독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며 최여사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나는 그곳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그 두 사람들을 <Debriefing/심문> 하기 시작하였다. 제일먼저 워싱턴의 지시가, 최여사의 경우는 납치된 것으로 인정을 하지만, 신감독의 경우는 한국 국내에서 자진입북이라는 의혹이 있는데 그 사실여부를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과거 15년 동안 한국에서 북한 간첩들을 심문한 경험에 입각하여 북한의 대남공작기법과 간첩호송선의 작전운영과 침투 루트에 대하여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세밀하게 그 문제를 집중심문 하였다. 신감독은 영화계의 거장이었지만 북한문제에 있어서는 절대로 나를 속일 수 없었다. 그는 북에서 살다온 자기보다도 북에 가본일이 없는 내가 북한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 문제에 대한 심문이 끝나고 나는 즉시 신감독도 김정일의 낚시에 갈려 납북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워싱턴에 보고하였다. 그다음, 나는 미국정부가 저들의 망명요청을 수용할 수 있도록 보고서를 써야하는데 여러 가지 각도에서 고민하다가, 정확하게 3주간동안 집중심문을 진행하면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생활, 여자관계, 건강문제, 성격, 리더십 스타일, 약점과 허점, 대남정책, 대미정책, 남북통일정책, 주변인물 들과의 관계 등, 총 21건의 심문조서를 작성하여 올렸다. 내 뒤에는 2-3명의 우리기관 요원들이 나의 보고서를 편집 작성하여 워싱턴에 보내는 작업을 협조하였다.
 
심문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현지주재요원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와서 엄지손가락을 위로 추켜세우며 나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지금까지 내가 올려 보낸 심문조서를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어본 CIA부장 William Casey가 오늘아침 출근하자마자 신상옥과 최은희의 미국망명을 접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신감독과 최여사에게 전하자 저들은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그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다 중단하고 샴페인 파티를 하였다. 그리고 신감독은 비엔나 은행에 예치되어있는 돈을 인출하기 위하여 $100만짜리 수표를 쓰고 나는 현지근무 우리요원 한사람을 시켜 제네바에 가서 스위스 은행에 신상옥 명의로 구좌를 트고 그 돈을 이체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신감독은 끝내 그 돈을 인출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는 북한과 무역거래를 하면서 받지 못한 돈이 $5,000만이 넘는데 신감독이 Creditanstalt Bank에 예치한 돈이 북한의 자산이라고 인정하고 그 빚을 다 받기까지 동결시켜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기쁜 소식을 받은 이틀 후에 독일 Frankfurt에서 의료진이 도착하여 두 사람의 신체검사를 마치고, 사흘 후에 미국에서 에스코트 요원들이 도착하여 저들의 망명입국수속을 마치고, 또 이틀 후에 신감독과 최여사와 우리들은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 돌아왔다.
 
워싱턴에 돌아온 후 CIA는 북한에 관한 정보를 더 얻기 위하여 저들을 약 3개월간 심문 하였고, 그 작업이 끝난 후 그들에게 영주권을 주었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Los Angeles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평생연금을 타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법적으로 아직 이혼상태 이였기 때문에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이경재 신부를 한국으로부터 초청하여 가톨릭교 의식으로 재결합하는 혼례식을 올렸고, 입국 3년 후에 미국시민권을 받았으며 신감독은 이름을 <Simon Sheen>으로, 최여사는 <Theresa Sheen>으로 바꾸었다. 이과정이 모두 끝난 후에 나는 1계급 특진과 훈장을 받았으며, 신감독 부부는 나를 평생의 은인으로 그리고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고 최여사와 나는 그들의 요청으로 의남매 결연을 하였다.
 
그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고도 신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를 않았고 제작활동을 계속하였다. 탈출 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제작한 영화로는 <마유미, 증발, 닌자키드2, 돌아온 닌자키드, 닌자키드3>등이 있다. 특히 1990년 서울에서 제작한 <마유미>는 1987년 말에 KAL-858기를 폭파한 김현희 사건을 주제로 제작한 영화인데, 그때 나는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김현희를 심문한 조사관이었던 관계로 이 영화제작에 적극 협력하였고, 영화 중에 몇 장면은 내가 살고 있던 미국대사관 관사의 내부이며 배우 신성일이 타고 나타난 차는 나의 Oldsmobile 외교관 차였다. 1994년에는 신감독이 매년 5월에 열리는 프랑스의 <칸 영화제 - Festival de Cannes>의 심사위원이 될 만큼 그의 영화인으로서의 명성은 변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작품이 있었는데 그의 납북과 탈출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고 또 하나는 1950년 말 6.25사변 때의 흥남철수를 주제로 하는 작품이었다. 그 일을 위하여 신감독과 나는 1998년 말에 Virginia주 Norfolk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 가서 그곳에 소장되어있는 6.25한국동란 전사에서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북 Virginia의 Alexandria에 있는 미국재향군인회 본부에 가서 6.25참전용사들을 만났고 영화제작이 시작되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왔다. 이 일을 위하여 극작가 신봉승씨가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흥남철수 때 남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 중에서 돈을 많이 벌어 재벌이 된 인사들이 자금을 대기로 하고 만반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을 하던 이가 <북한을 자극하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제작을 좌절시켰다. 
 
신감독과 최여사의 북한탈출사건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일면뉴스로 도배를 하였다. 특히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대형뉴스로 떴고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주기를 애원하였다. 그분들의 형제들과 특히 양자 신정균과 양녀 신명희는 애절한 편지를 써서 그들이 하루속히 서울로 와달라고 호소하였다. 한국정부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 2차장 (국제담당) 이학봉과 제3국 부국장과 수사단장을 미국에 파송하여 신감독과 최여사를 접촉하고 한국으로 가자고 설득하였으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이 한국으로 가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한 것을 섭섭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 있었으나, 그들은 절대로 조국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으며 후에 그들이 쓴 수기를 읽어보면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만, 그들이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만이 아는 고민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집권당시 노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강원룡 목사가 신상옥 감독을 만났고 서울에 오라고 설득을 하였다. 신감독과 강목사는 청진을 고향으로 하는 동향인이었다. 두 분 다 고집이 센 것도 비슷하였다. 노대통령은, 신상옥 부부가 서울에 오게 되면 그들을 철저히 보호하고 편히 머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강목사는 이 말을 신감독과 최여사에게 전달하여 탈출 3년 후인 1989년 5월에 그들이 서울에 갔다.     
                    
그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던 날 공항 주차장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보도진이 몰려왔고, 나도 미국대사관의 대표로 공항에 가서 유일하게 저들에게 장미꽃을 안기면서 그들의 환향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입국수속을 마치자마자 안기부 요원들이 그들을 데리고 서울 남산으로 갔다. 서울 남산에서 안기부 제3국 대공수사단이 저들을 21일간 심문하고, 바로 대공수사단장 한철흠이 조사관 몇 사람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그 당시 나는 1986년 6월부터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철흠 단장은 신감독과 최여사를 심문하면서 나타난 23가지 의문점을 나에게 제시하면서 나의견해를 물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최여사의 경우는 아무문제가 없지만 신감독의 경우는 석연치 못한 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23가지의 의문을 조목조목 해명하면서, 내가 평생을 두고 북한 문제를 다루고 북한간첩들을 심문한 경험에 비추어 신감독에 대하여 아무런 의혹도 없으며 미국의 최고 정보기관인 CIA가 확인한 내용을 한국정부가 의심한다면 새로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는 나의 견해를 말하고, 항간에 떠도는 신감독의 자진입북설이나 그가 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외부인사들에게 자기가 자진입북 했다고 거짓말 한 것에 대한 진의를 파악해야 하며 아무 선입감이 없는 객관적인 판단을 해달라고 건의하였다. 한철흠 단장은 내가 한말을 다 노트에 적고 돌아가서 그 당시의 안기부 박세직 부장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박세직 부장은 보고를 받고, “마이클이 말 한 대로 처리하고 이 문제를 종결하라”고 지시하였다 한다.    
     
신감독이 북으로 납치되어간 후에 오수미는 아들 <상균>과 딸 <승리>를 혼자 키웠고 1982년에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하였다. 신감독과 최여사가 돌아와 미국 Los Angeles에 정착하였을 때 오수미가 주한미국대사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의 교육문제도 있고 해서 <상균>과 <승리>를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미국에 있는 신감독과 연락하여 그들의 이민수속을 처리해 주었다. 그런데 오수미도 기구한 운명의 여자였다. 1992년 6월 30일에 그가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여사는 Los Angeles에서 급히 달려와 남편의 전 애인인 오수미의 장례식을 잘 치르고 돌아가, <상균>과 <승리>를 친엄마처럼 돌보았다.
▲ 이명산     ©브레이크뉴스
 
신감독이 늘 나에게 충고하는 말이 있었는데, 사람이 무슨 일을 하던지 불타는 열정이 없으면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분은 아마 그렇게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 나이에 그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으며 항상 두 눈에는 빛나는 서기가 있었고 새로운 창작활동을 하려는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그분의 그런 기질을 잘 아는 친구들과 유력한 인사들이 신감독을 계속 뛰게 하였다. 안양 시에는 <최은희 거리>라는 길 이름이 있고 안양시장은 신감독 부부와이 인연을 소중히 여겨 안양시를 영화예술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안양시 명학에 있는 전에 안양경찰서가 사용하던 건물을 개수하여 초급대학 과정의 <신필름 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일을 위하여 신감독과 최여사는 2000년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아주 돌아와 여생을 보람 있게 살려고 정착하였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모두 무상하다. 2006년 4월 11일, 그가 지병을 이기지 못하여 떠나버렸다. 그를 아끼고 존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떠남을 슬퍼하였고, 역사의 중요한 함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한 우정의 영토를 남겨두고 가셨다. pswoodson@yahoo.com
 
*필자/이명산. 미국 최대의 정보기관에 근무했던 북한 전문가.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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