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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발생 배경과 경과와 영향

신상구 국학박사 | 기사입력 2023/03/01 [23:33]

<특별기고> 3.1운동의 발생 배경과 경과와 영향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3.1운동의 발생 배경

 

3.1운동은 한민족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일제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무단통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중국 동북부 길림성의 무오독립선언과 동경 유학생의 2. 8독립선언, 김규식(金奎植)의 독립 시위 주문, 고종의 독살설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 특히 고종의 독살설을 전해 듣고 분개하여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수십만 군중의 대부분이 한양 한복판에서 시위를 벌였다.

 

3.1운동은 민족종교인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주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 시위 계획과 장소가 결정되었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하였고,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교정을 보았으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2. 3.1운동의 경과

 

원래 3.1운동은 3월 3일로 예정되었으나,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이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3월 1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경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민족대표가 모일 장소는 태화관으로 바뀌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이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 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다.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했다.

 

저녁 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관에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기미년 3.1운동 당시 탑골공원 시위모습 (C) 신상구 갈무리

 

한편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러자 탑골공원에 모인 천여 명의 학생이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도착한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하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 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대전 동구 3.16인동장터 만세운동 재연행사(트래블 아이)

 

3.1독립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주로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함경남도 북청, 평남 강서군 사천, 평북 정주군 곽산, 경남 창원시 삼진, 충남 천안시 병천, 충북 괴산군 괴산읍, 대전 인동장터, 경북 대구, 부산 동래, 전북 남원과 군산, 전남 완도군 소안면 소안도, 경기도 수원시 향남면 제암리, 평남 맹산, 만주 용정 등 한반도 전역에서 거세게 벌어져 일제를 당혹케 했다. 임종국(林鍾國)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60일 동안 전국에서 1,214회의 항일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3.1운동은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1919년 3월 당시 전체 인구 1,678만 8,400명 중 6.32%)이 3.1운동에 참가하였고,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하였으며, 12,000명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3개월간 만세운동 상황은 202만 3,089명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시위 횟수는 1,542회에 달한다. 무려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961명, 피체포자가 46,948명에 이르렀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교였다고 한다.

 

3. 3.1운동의 영향

 

3.1운동의 결과 독립은 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렸다. 그리고 중국 상해에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근대 국민 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었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무단통치를 문화 통치로 바꾸어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필리핀·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토가 분단되어 남북한이 군사적 대치 상태에 있고, 일재의 잔재를 말끔하게 청산하지 못해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대부분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해 고생하고 있는데 반해 친일매국노와 그 후손들은 대부분 해방 후에도 정치권력을 잡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어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있다.

 

4. 3.1운동 104주년 기념행사

 

천안청년회의소가 주최·주관하고 천안시가 후원하는 ‘3.1운동 제104주년 기념 2023 아우내봉화제’가 지난 2월 28일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사적관리소 광장 및 아우내장터 일원에서 3.1운동 당시 호서지방 최대 규모였던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을 기념하고 유관순 열사와 순국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내빈과 유족, 시민 등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관순열사 추모각 참배, 순국자 추모제 등 추모의례와 기념식, 횃불행진, 불꽃놀이 순으로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횃불행진은 참가자들이 횃불을 들고 대형태극기를 앞세워 사적관리소 광장에서 출발해 아우내장터에 위치한 동남구 문화원까지 총 1.2km 구간을 걸으며 만세를 재연했다.

 

행사장에는 태극기 만들기, 페이스페인팅, 에어바운스, 3·1절 골든벨 코너 등이 마련돼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참가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 2023 아우내봉화제 (C)천안시

 

박상돈 천안시장은 “3.1운동 104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아우내 봉화제는 애국 충절의 고장 천안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천안시민의 자긍심을 드높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이화여고 내 유관순 기념관에서는 애국지사 및 독립유공자와 유족, 주요 공직자 및 각계 대표, 주한외교단, 시민 등 1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를 주제로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애국지사 및 독립유공자와 유족, 주요 공직자 및 각계 대표, 주한외교단, 시민 등 130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 3년간 3·1절 기념식은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소규모 행사로 진행됐지만, 이번에는 각계 국민과 함께 현장성을 살린 규모 있는 행사로 진행됐다.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하는 33개의 태극기 입장과 함께 시작된 기념식은 이종찬 우당재단 이사장의 개회선언, 주제 영상 상영,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 전국의 3·1운동 유적지에서 사전 촬영한 영상 낭독과 기념식장 현장 낭독,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표현한 공연과 대합창, 만세삼창의 순서로 진행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1300여자 분량의 간결한 기념사에서 “지금의 세계적 복합 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위험한 안보 상황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분열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됐다”고 밝혔다. 또한 북핵 위협 등을 들어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도 했다.

 

그런데 양국 간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배상 문제, 역사 왜곡 문제, 위안부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과거사 관련 일본의 반성과 변화를 촉구하는 원칙적 수준의 메시지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하거나 한일간 현안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에 대해 일방적으로 협력 의지만 강조하는 굴욕외교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3.1운동이 벌어졌던 전국 각 지역과 해외에서도 3.1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104주년 3.1운동 기념식을 개최했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를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Special contribution> Background, progress and influence of the 3.1 movement

 

Director of Chungcheong Culture and History Research Institute (Doctor of Korean Studies, Poet, Literary Critic) Daesan Shin Sang-gu

 

1. Background of the 3.1 Movement

The 3.1 Movement is the largest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Korean people, the unjust occupation and unauthorized rule of Joseon by the Japanese Empire, Wilson's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the Muo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n Jilin Province in northeast China, and the second The Augu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Kim Gyu-sik's order for independence demonstrations, and rumors of King Gojong's poisoning were direct causes. In particular, on March 3, 1919, the anniversary of King Gojong's poisoning, most of the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who came from all over the country demonstrated in the middle of Hanyang.

The March 1st Movement was led by the ethnic religions of Chondogyo, Christianity, and Buddhism. The plan and location of the demonstration for national independence were decided by the coalition of Chondogyo and Christian figures.

The draft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as drafted by Yukdang Choi Nam-seon, Chunwon Lee Kwang-su proofread, and Manhae Han Yong-un added three pledges.

2. Progress of the 3.1 Movement

Originally, the March 1st Movement was scheduled for March 3, but Okpa Lee Jong-il was printing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t Boseongsa Temple, while Shin-cheol (aka 申勝熙), a senior detective at the Jongno Police Station, Because it was discovered, it was moved forward to March 1st. Around February 28, they gathered at the house of Son Byeong-hee in Uiam and decided not to go to Tapgol Park, the meeting place, to avoid a bloody clash, and the meeting place for the national representatives was changed to Taehwagwan.

The 33 national representatives of Joseon, who were supposed to meet at 2:00 pm on March 1, 1919, had a late arrival, so it was not until 3:00 pm that 29 people, excluding Gil Seon-ju, Yu Yeo-dae, Kim Byeong-jo, and Jeong Chun-soo, gathered.

They declared Joseon's independence at Taehwagwan in Insa-dong, Jongno-gu, Seoul, and it was around 4:00 pm when all the events were over.

They called Izaburo Yamagata, the head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inform them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hich meant that they were gathered at Taehwagwan, so he had to be taken away. About 60 military police officers and police officers burst into Taehwagwan and took the national representative to the Namsan Police Superintendent and the current Jungbu Police Station.

In the evening, the other four people who did not arrive at Taehwagwan, including Gil Seon-ju, also voluntarily appeared to the police.

 

Demonstration at Tapgol Park during the March 1st Movement in the year of Gimi

Meanwhile, students gathered at Tapgol Park, the original meeting place, 300 meters away from Taehwagwan at 2:00 pm. I was embarrassed for a while because I couldn't see the 33 national representatives, but Jeong Jae-yong, who graduated from Gyeongsin School, climbed the Palgakjeong Pavilion and rea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en, about a thousand students gathered at Tapgol Park hurrahed for national independence. Small Taegeukgi and declarations rained down like flower rain from the sky.

The demonstrators were divided into two parts and marched. One part passed Jongno Bosingak toward Namdaemun Gate, and the other part passed next to Maeil Shinbo Temple toward Daehanmun Gate.

The person who led the crowd who arrived at Daehanmun Gate went to Honjeon Hall in Deoksugung Palace, bowed three times and hurrahed. Then, going around Seodaemun and passing through Taepyeong-ro, we reached the US consulate. When we reached Jongno and gave another speech, the Japanese military police and cavalry soldiers brandished swords and tried to disperse them. However, the crowd did not go back with a calm attitude and voluntarily dispersed at 6:00. The next da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searched for the independence group, arrested and imprisoned, and the number reached 10,000.

 

Daejeon Dong-gu March 16 Manse Movement Reenactment Event (Travel Eye)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quickly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and from March 1 to April 30, it was mainly held in Bukcheong, Hamgyeongnam-do, Gangseo-gun, Pyeongnam, Gwaksan, Jeongju-gun, Pyonganbuk-do, Samjin, Changwon-si, Gyeongnam, Byeongcheon, Cheonan-si, Chungcheongnam-do, Goesan-eup, Goesan-gun, Chungbuk, and Indong Market in Daejeon. , Gyeongbuk Daegu, Busan Dongnae, Jeonbuk Namwon and Gunsan, Jeonnam Wando-gun Soan-myeon Soan-do, Gyeonggi-do Suwon-si Hyangnam-myeon Jeam-ri, Pyeongnam-nam Maengsan, Manchuria Yongjeong, etc. According to Lim Jong-guk's 'Annals of Pro-Japanese', 1,214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s took place across the country in 60 days.

The March 1st Movement took place in Japan and abroad, including Maritime Province, and lasted for about a year. According to the official count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1,060,000 people (6.32% of the total population of 16,788,400 at the time of March 1919)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Movement, 553 people died in the suppression process, and 12,000 people were arrested and suffered hardships.

As for the situ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for three months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2,023,089 people participated in the demonstrations, and the number of demonstrations reached 1,542 times. It is said that 7,509 people died, 15,961 people were injured, and 46,948 people were arrested. There were 715 demolished and burned houses, 47 churches, and 2 schools.

3. Influence of the 3.1 Movement

As a result of the March 1st Movement, independence was not achieved and a lot of damage was suffered, but the Korean people's will for independence was widely known to many countries around the world. An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under a democratic republic in Shanghai, China, the movement to establish a modern nation-state that had continued since the late 19th century bore its first fruit.

In additio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hanged unauthorized rule into cultural rule, allowed group activities and media activities, and expanded very basic elementary education. On the other hand, it influenced the May 4th Movement in China, the anti-reflection movement in India,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Vietnam, the Philippines, and Egypt.

However, even now, 78 years after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ese colonial rule on August 15, 1945, the country is divided and the two Koreas are in a state of military confrontation. It's a sad situation.

In addition, most of the independence activists and their descendants who gave their lives for the independence of the country are suffering because they do not receive compensation from the state, while most of the pro-Japanese traitors and their descendants live happily holding political power even after liberation, and the national spirit cannot stand right away. there is.

4. Commemorating the 104th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The '2023 Aunaebonghwa Festival in Commemoration of the 104th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hosted and supervised by the Cheonan Youth Chamber and sponsored by Cheonan City, was held on February 28 at the square of the Historic Site Management Office in Byeongcheon-myeon, Dongnam-gu, Cheonan City and around the Aunae Market, which was the largest in the Hoseo region at the time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order to commemorate the Aunae Independence Movement and inherit and develop the spirit of love for the country of the martyr Yu Gwan-soon and the martyred patriots, about 2,000 guests, bereaved families, and citizens attended the memorial ceremony and memorial ceremony, such as a visit to the memorial hall for the martyr Gwan-sun Yu, a memorial service for the martyrs, a torchlight procession, Fireworks were held in order. In the torchlight procession, the highlight of this event, participants held torches and held large poles at the fore, starting from the historical site management square and walking a total of 1.2km to the Dongnam-gu Cultural Center located in Aunae Market, reenacting the hurrah.

At the event, Taegeukgi making, face painting, air bounce, and the 3/1 Golden Bell corner were prepared to entertain participants from children to the elderly.

 

2023 Cheonan Aunae Beacon Fire Reenactment Event

 

Park Sang-don, mayor of Cheonan, said, “This Aunae beacon festival held to commemorate the 104th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is expected to spread the image of Cheonan, the home of patriotic loyalty, and boost the pride of Cheonan citizens.”

At the Yu Gwan-soon Memorial Hall in Ewha Girls' High School in Jung-gu, Seoul, about 1,300 people, including patriots, independence activists, bereaved families, key public officials and representatives from all walks of life, diplomatic corps in Korea, and citizens, attended and held a 'Republic of Korea again! The '104th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Ceremony' was held under the theme of 'New People's Nation'.

About 1,300 people attended the ceremony, including patriots, independence activists, bereaved families, key public officials and representatives from various fields, diplomatic corps in Korea, and citizens. For the past three years, the March 1st ceremony was held as a small, non-face-to-face event due to the corona, but this time it was held as a large-scale event with people from all walks of life.

The ceremony, which began with the entrance of 33 Taegeukgi symbolizing the 33 national representatives, was followed by the opening declaration by Lee Jong-chan, chairman of the Woodang Foundation, screening of the theme video, awards to those of national merit, and a reading of pre-filmed videos at the historic sites of the March 1st Movement across the country and a commemorative ceremony. On-site reading, reading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performance expressing the independence activists' desire for independence, grand chorus, and three cheers for national independence were held in this order.

Yoon Seok-yeol at the 104th anniversary of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Day held at the Yu Gwan-soon Memorial Hall on March 1 at 10 am.

Photo of the President giving a commemorative address.

 

President Yoon Seok-yeol said in a concise address for 1,300 women, “We need to think about how to overcome the current complex global crisis, the dangerous security situation including the North Korean nuclear threat, and the crisis of division and polarization in our society.” “Japan has gone from being a militaristic aggressor in the past to a partner that shares universal values with us and cooperates on security, economy, and global agendas,” he said. He also said that “trilateral cooperation among South Korea, the US, and Japan has become more important than ever,” citing the North Korean nuclear threat. However, it did not mention the issue of compensation for forced labor, the issue of historical distortion, the issue of comfort women, and the issue of sovereignty over Dokdo, which are the biggest pending issues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re was also no principle-level message urging Japan to reflect on its past history and change. As a result, criticism is being raised that Japan carried out humiliating diplomacy, emphasizing its will to cooperate unilaterally with Japan, in a situation where it did not show any will to reflect on and apologize for its past mistakes or to resolve pending issues between Korea and Japan.

The 104th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was held in each region of the country and overseas where the March 1st Movement took place to honor the spirit of the March 1st Movement.

<Author's bio>

.1950 Born in Daman, 63 Samnak-ri, Cheongcheon-myeon, Goesan-gun, Chungcheongbuk-do

Baekbong Elementary School, Cheongcheon Middle School, Cheongju High School, Department of Economics at Cheongju University, Department of Social Education,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with “Research on Korean Inflation (1980)”, obtained a master's degree in Social Education, and 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Brain Education (UBE) Department of Korean Studies “A study on shamanic culture in the Taean region (2011)” from Gukhakb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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