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마라톤처럼 혼자 뛰는 것? 아니야, 인생은 계주(繼走)라고!

[문일석 발행인이 쓴 '내 인생의 골든타임 이야기']농부출신이 첨단 인터넷신문의 발행인이 되기까지 '허송세월한 삶의 궤적'

문일석 발행인 | 기사입력 2021/02/04 [15:56]

주간신문인 토요신문-일요서울-주간현대 편집국장 시절의 필자. 턱수염을 길렀다. The weekly newspaper, Saturday Newspaper-Sunday Seoul-Weekly Modern editor-in-chief. Raised his beard.  ©브레이크뉴스

모든 사람은 골든타임(golden time-황금같은 시간)이 있다고 한다. 과연 나의 인생에도 골든타임이 있었을까? 내가 나에게 묻는다. 글쎄다. 하지만, 설칠 때가 있었다. 골든타임이란 라디오-텔레비전 등에서 청취-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를 일컬으니, 비판하며, 설치고 다닐 때가 있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필자가 시준(視準)한 명제(命題)에 따라, 즉 “▲가장 지혜로운 자는 허송세월을 가장 슬퍼한다. ▲어려서 불행은 위대한 인물을 낳는 힘이다. ▲인생이란 마라톤처럼 혼자 뛰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전제(前提)로, 이 글을 시작한다.

 

난 상숙자(床宿者)-하숙자(下宿者) 출신이다. 상숙자-하숙자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썼는지, 군대에서 월간잡지에 취직이 됐다. 군을 제대하고,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3,000원을 가지고 서울에 입성했다. 무일푼에 천애 고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에서 산 군대용 침낭을 책상 위에 펴고, 그 속에 들어가, 책상 위에서 잠을 잤다. 그래서 상숙자(책상 위에서 자는 놈)다. 그런데 어느 날 잠은 자다가 책상 위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책상 밑에서 잠을 자게 됐다. 이게 하숙자(책상 밑에서 자는 놈)다.

 

1980년대 초반, 르포라이터(리포트-report+라이터-writer)라는 직업을 새로 개척했다. 한국엔 보편화 되지 않은 직업이었다. 일종의 프리랜서 기자였던 셈. 당시, 사회적으로 비주류 학교였던 담양중학교-담양실업고등학교(농고)-강남대학을 졸업, 인맥이나 학맥이 거의 없었다. 서울신문 계열의 주간잡지인 선데이서울에 기고를 첫 시작했다. 연재물 시리즈 제목은 '인간시장(人間市場). 사람을 사고파는 인간-인력시장을 잠입 취재해서 쓰는 글이었다. 보리밥이 반쯤 들어 있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잠입 취재를 했다, 선데이서울에 연재했던 인간시장 시리즈 글은 '이색지대'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의 인세로 집 한 채를 장만 할 수 있었다.

 

1980년-1984년 말까지, 선데이서울, 여성중앙, 여성동아, 레이디경향, 샘이 깊은 물, 월간조선, 정경문화 등 70여 개 매체에 기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어느 해 연말, 국내 월간지에 기고된 필자 순위 통계를 냈는데, 김동길 연세대 교수가 1위였고, 필자가 2위를 기록했다. 공병우 박사가 발명-제조한 한글타자기를 들고 다니며 손가락이 아프도록 글자판을 눌러댔다. 시골촌놈-상숙자 출신의 대약진이었다.

 

필자는 전남 담양출신이다. 1980년 5.18 당시 주간신문 기자였다. 당시, 계엄분실 언론검열과는 서울시청 1층에 있었다. 군이 완전 장악한 언론 검열반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사를 일체 보도하지 못 하도록 통제했다. 그 이후 나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험악한 사진들을 모았다. 1985년에서 1989년지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발행됐던 '세계신보(segaetimes-마지막 책 편집부국장)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때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됐던 폭정의 실태를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있는 대로 보도할 수 있었다. 또는 국내에서 벌어졌던 각종 정치적 사건, 반정부 시위 등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부 관련자들은 필자를 '반정부 기자'라고 호칭했었다. 문화이론에 보면, 문화란 인간의 의지로 파괴한 만큼 넓어진다고 했다. 한민족 민중-대중들이 독재와 정치적 압제에 치열하게 저항했던 것은 저항한 만큼 민주주의 진전의 힘이 됐을 것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과 필자.  Former President Kim Dae-jung (right) and writer. ©브레이크뉴스

브레이크뉴스 사옥 바깥에 걸린 "자유, 함께 살자! 난, 너 없이 못살아”라는 목 조각. A piece of the neck that says "Freedom, let's live together! I can't live without you" hanging outside the break news office building.    ©브레이크뉴스

 

이때 잊지 못할 일이 만들어 졌다. 필자는 '비록 중앙정보부(전 3권)'의 저자인데, 미국에서 방준모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최세현 전 주일공사(중앙정보부 소속) 등 중앙정보부 출신과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이로 인해 김형욱 중앙정보부 전 부장의 실종사건 추적 등이 이뤄졌다. 노무현 정부에서 진전시켰던 과거사진상조사위의 김형욱 실종자료 가운데 필자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 필자가 추적했던 진실은 끝내 묻혔다.

 

미국은 진실한, 아주 민주적인 국가이다.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 지켜보았던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미국 자국의 국익(國益)을 챙기기 때문이었는지 한국의 민주화는 뒷전이었다. 1987년, 김영삼 총재가 이끄는 야당 방미 단이 뉴욕엘 들렀다. 20여명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모임에서 주한미 대사를 지낸 이가 연사는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어깃장 놓는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대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미국은 한국의 쿠데타 군부집권 허용, 그들의 잔인한 권력을 용인했다. 유감스러운 순간을 목격했다.

 

당시 한국의 민중은 박정희-전두환 군부 독재세력에 저항했다. 민주주의를 세우겠다고 거리에서 투쟁했다. 독(毒)하디 독한, 최루탄 가스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도로에 깔린 벽돌을 깨어 온몸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던지면서 거리투쟁을 벌였다. 특히 광주학살과 관련된 정보들이 속속 뉴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눈 감았던 반독재 저항했던 민중들의 투쟁뉴스-정보들이 지하경로를 통해 뉴욕으로 유입됐다. 필자는 군부정권에 저항했던 국내의 뉴스-정보들을 미국 뉴욕이란 해방구(解放口)에서 빠짐없이 기록해나갔다. 이때 신문들은 '팩스 밀리'라는 신종 소통도구를 이용, 대부분 국내로 유입, 정가와 시민 단체들에 전달됐다. '팩스 통신'은 위력을 발휘했다. 막아도막아도 어디론가 밝은 여명의 구멍이 뚫리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이때 김일성 북한 주석(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출신-1994년 7월 8일)을 만난 한국인들을 취재, 시리즈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정부는 북한정보에 대해 봉쇄정책을 펴고 있었다. 신문에 김일성 사진을 맘대로 실을 수 없는 때였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미국 시민권자들의 경우, 북한방문이 허용됐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한국인들이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만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 북한을 방문,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난 이들도 많았다. 필자가 만난 북한 김일성을 직접 만난 사람들과의 인터뷰 인물은 임창영 전 주 유엔대사(1960.9.6.-1961.6.1.), 언론인 문명자(1930-2008) 여사 등 수 십 명이었다.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은 자료를 추적. 보도하기도 했다. 북한이 발간했던 생생한 북한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던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 도서관을 자주 들었다. 한국에선 접할 수 없었던 북한 자료가 많고 많았다.

 

그때만 해도 “왜 그런 위험한 취재를 하느냐? 한국에 입국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고 말해주는 주변 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의 뉴욕 그것도 맨해튼에서 발행되는 신문이었음으로 한국정부가 간섭할 수 없는, 치외 법권 지역이었다. 이런 기사를 자유로이 쓸 수 있었던 그 당시, 취재기자로서 골든타임(황금시간)이었다. 아마, 짐작하건데,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난 미국-일본의 한인들은 중앙정보부-안기부에서 파견된 정보원들의 감시의 대상, 요시찰 인물이었음직하다. 언론인이었던 필자 역시, 감시 대상 중의 한 명이었지 않았을까? 당시, 나를 보호해주었던 미국에 감사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친미파이다.

 

김일성은 6.25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과 남한-북한 간, 장기적인 정치대결을 벌였던 북한 최고의 정치인이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남한-북한의 긴 대결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남한이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남한이 이룩한, 인류사적 자존심이랄 수 있는, 경제적인 폭발성장은 자유민주주의 때문이었다. 김일성을 만난 당시 한국인들은 김일성을 만났다는 것 때문에 '우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한-북한 대결에서 패한 패장이랄 수 있다.

 

1985-1989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의 신문기자 생활은 내 인생의 꽃다운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매우 가난한 시기였다. 그래도 회상하면,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불행은 위대한 인물을 낳는 힘”이라고 했지만,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그 불행이 불행인지 모르고 보낼 수 있었다. 

 

필자가 발행인으로 있는 브레이크뉴스 자체사옥. 뒷 건물은 경찰청사이다.   Break News' own office building, which I am the publisher of. The back building is the police office. ©브레이크뉴스

 

1989년, 서울로 들어왔다. 일간신문인 세계일보에 입사, 정치부에 발령이 났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에서 녹을 먹었던 그 신문사의 정치부장 A씨(전 주미 대사관 공보관장)는 ”당신은 빨갱이 기자야, 내 목을 치고 정치부에 들어올 수 있으면 들어와 봐!“라며, 나를 매몰차게 내쳤다.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나는 무산대중 출신의 기자인 것은 사실이다. 내가 좌파라고? 아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니 한국파임에 분명하다. 나는 태어나서 줄곧 오른손으로만 밥을 먹어왔으니 우파이다. 나는 전철을 탈 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거나 내릴 때, 오른손으로 잡고 있으니 우파이다. 난 조선일보 해외 면을 좋아해서 자주 읽으니 조선일보파다. 난 노란 색깔의 조밥을 좋아하니 조파다. 더, 솔직하게 답한다면? 나는 남자이니 남자파다. 더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난 항문을 닦는데 왼손이 더 편리해서 늘 왼손을 사용하니, 그 일을 치를 때만은 좌파다. 더더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좌파? 우파? 난 잘 모르겠다. 폭격기가 폭탄을 싣고, 적진을 향해 고속으로 날을 때 좌우의 날개로 비행한다. 한쪽 날개로만 비행한다면 끝내는 자폭한다. 하찮은 파리도 좌우 날개로 난다.”

 

필자는 세계일보 정치부로 입사했으나 정치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출판국에서 발행했던 '세계와 나' '세계여성'에서 1년을 지내다가 사표도 내지 않고, 학교에 비유하면 자퇴했다. 아무런 미련이 없이 떠났다.

 

1990년을 기점으로 내 인생은 더 격렬한 휩쓸림의 현장으로 내몰렸다. 그해 토요신문에 입사했다. 1992년 대선 때는 편집국장으로 대선보도를 이끌었다. 편집국장이던 안택수 국장(전 기자협회 회장-전 국회의원)이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편집국을 떠나자 홍성목 사주(발행인)는 나를 편집국장으로 임명했다. 전임 편집국장이었던 안택수 국장은 후임국장인 나에게 토요신문(주간) 발행부수 3만5천여 부를 물려줬다. 1992년 12.18 대선 때, 필자가 편집국장이었다. 이때 발행부수 33만부를 상회했다. 한국 주간신문 역사상 최고의 발행부수였다. 친(親) 김대중의 편집논조를 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 때가 평생 기자였던 필자 인생의 최고조에 달하는 때였음직하다.

 

인생이란 마라톤처럼 혼자 뛰는 것이라고. 그게 아니었다. 이때 '토요신문'의 사주는 나에게 부여됐던 편집국장 자리를 회수해 버렸다. 김대중 대선 낙선이 화근이었다. 정치란, 그처럼 무서웠다. 정상에 오르면, 내려오게 예정돼 있었던 모양이다. 인생은 마라톤 경주가 아니라 릴레이 계주(繼走)였다. 죽느니 사느니 발광(?)하며, 몸 맘 바쳐 키웠던 주간 신문사의 편집국장 자리를 내주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그때, 낙선했던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면 떠났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며칠이고 눈물이 났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기분은 그런 것이었다.

 

토요신문을 떠나, 1993년 주간신문인 일요서울을 창간, 이사 겸 편집국장으로 3년을 일했다. 한국의 현대 주간신문사 역사(歷史)를 쓰라면 쓸 수 있는 사실적 토대가 이뤄지고 있었다. 토요신문-일요서울 편집국장을 마감하고 필자가 신문사 오너-발행인인 체제로 넘어왔다.

 

김영삼 정권 5년 기간 줄곧 공보처장관이었던 당시 오인환 장관의 허가로, 시사주간 신문인 '주간현대'와 '사건의 내막'을 시작하게 됐다. 1997년 4월에 신문사를 창립했다. 필자는 지난 1997년부터 시사 주간신문 '주간현대'를 발행해왔고, 1998년부터는 시사 주간신문 '사건의 내막'을 발행해왔다. 지난 2003년부터는 인터넷신문 브레이크뉴스를 발행해왔다. 브레이크뉴스는 한동안 인터넷 신문업계 방문자 수 1위를 기록했다. 월 방문자 1,000명을 상회했던, 큰 매체로 성장했다. 지금도 방문자 수면에서 상위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매체이다.

 

필자 인생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지난 2000년에 발행을 시작했던 일간 '펜 그리고 자유(줄임말 '일간 펜'-일간 전국종합지)'의 발행이다. 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야당 총재 시절의 최다 인터뷰어였다. 본격 인터뷰란 적어도 3시간은 진행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본질을 꿰뚫을 수 있어서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런 깊은 인연으로,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한 이후, 첫 인터뷰어이기도 했다. 박지원 문화부 장관이 필자가 발행했던 '일간 펜 그리고 자유'를 등록해준 주무장관이었다. 타블로이드 판형의 전국 일간신문이었던 '일간 펜'은 발행한 이후 서울에서 가장 잘 팔리던 가판 일간신문이었다. 

 

세속적 용어로는 이때가 가장 잘 나갔던, 소위 골든타임이었다. 그러나 정점에 있었던 세월은 아주 짧고도 짧았다. 일간신문 발행 1년 6개월쯤에 노조의 총파업 선언으로, 잘 나가던 일간 신문이 폐간으로 치달았다. 오너 발행인이었던 나는 정점에 올라갔다가, 먼지만 푸석거리는 땅바닥까지 꼬꾸라지고 말았다. 위대한 인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성주괴공(成主壞空). 쌓을 때가 있었는데 허물어지는 때가 가까이 뒤를 이었다.

 

그렇다. 나는 기자로 인생 49년(군대 정훈병 3년 포함)을 보냈다. 짧지 않은 세월이다. 지금 이 시간. 신문의 발행인으로 또는 오너로 있는 이 시간, 아직도 다짐하는 사명은 “자유의 확대에 종사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농부출신이다. 지게를 짊어진 필자의 모습.  I am a farmer. The appearance of the writer carrying the paper.  ©브레이크뉴스

대한민국은 언론자유가 있는 흠뻑 주어진 나라이다. 중국-러시아-북한과 비교하면, 언론자유의 천국쯤 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런 나라에 살 수 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아주 단단한 나무에 "자유, 함께 살자! 난, 너 없이 못살아“라는 문구를 스스로 조각칼로 조각, 회사 외부에 걸어 놨다. 언론 오너로서 ”변치말자“는, 일종의 다짐 같은 것이다.

 

필자는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부에 이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전임전부와 문재인 현 정부에서 기자 또는 언론사 오너-발행인으로 일해왔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봉사했다. 바닷물은 스스로에게 어느 골짝에서 흘러들어온 물인지를 묻지 아니한다, 다만 그러한 바닷물에 스스로 용해되어 있을 뿐이다. 필자 역시, 대한민국의 민주화-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의 한 언론 물줄기. 그런저런 물줄기 중의 하나로 남아지기를 희구한다.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기자생활을 했는데, 당시부터 문재인 정권 직전까지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 IO(정보요원)들의 관리-관찰-감시 대상이었다. 그들이 자주 찾아오곤 했었다. 그분들은 후임이 바뀔 때마다, 나의 담당자라면서 “1976년, 장성 역에서 도둑기차 타고 올라왔느냐”고 물었다. “도둑기차 타고 서울에 올라온 놈이냐?”는 투의, 깔보는 식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때가지 양복 한 벌이 없는 무산(無産) 대중이었다. 글을 잘 썼는지, 군대에서 월간잡지에 취직이 돼, 전역 다음 날 출근해야만 했다. 예비군복에 예비군화를 신고 장성역으로 나갔다. 호남선 기차검표 요원은 나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탑승하라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무임승차였다. 그러나 검표 요원이 스스로 허락한 승차였다. 그러하니 도둑기차는 타지 아니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류(類)의 놈이었다.

 

나의 인생에 골든타임이 있었다면, 결코 위와 같이 허송세월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가난한 시골 농촌의 토박이 농부 아들로 태어나서 인생을 불행하게 출발했으니, 위대한 인물로성공을 했을까? 아니다. 그러하지도 못했다? 정말, 그런 인생이 아니었다. '아엠 유어스'라는 영화의 주인공은 “자본주의를 파시즘”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그는 “파시즘의 자리를 기업이 지배했다”고 비난했다. 필자의 견해로는, 오랜 동안 언론이 가졌던 그 자리를 기업이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권력의 삼각형 정점에 있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또다시 그런 세월이 다시 올까? 어릴 적, 나는 농부였다.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농부였다. 농부가 첨단 인터넷 신문의 발행인이 되기까지, 숨 가쁘게 살아왔다. 작가로서 30여권의 저서도 있다. '비록 중앙정보부(전3권)'를 대표 저서로 꼽는다. 급(急) 변화-변환 속에 매몰됐다. 인생을 나 홀로, 뛰면서, 팍팍하게 살아왔으니, 승리한 마라토너처럼 인생이 결코 빛나지도 않았다. 인생은 홀로 격렬하게 뛰는 마라톤이 아니었다. 마침내, 인생은 계주(繼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인생 한 토막, 시끄럽고, 또 요란스럽게 산 구석이 있어 기록(記錄) 차원에서 이 글을 썼음을 밝힌다. 내 인생에 골든타임은 없었다. 허송세월, 그 자체였다. 쾌속으로 달리는 기차 같은 세월이라는 좌석 위에 그냥 올라타고만 있었을 뿐임을 실토한다. 골든타임이 아니라. 다만 다가오는 후임자를 위한 '자리 만들기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나의 삶은 비 주류(非 主流)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주류(主流)를 경외(敬畏)한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주류적인 삶의 고백이지만, 그래도 나를 도와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늘 쓰고 다닌 털실 모자를 벗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올린다. 그리고, 내 인생의 후임들이여, 그대들에게 영광 있으소서! 

 

[이 글은 월간 '시(詩=발행인 서정환)' 3월호(통권 86호)에 “내 인생의 골든타임, 촌놈이 인터넷신문 발행인 되다”라는 제목으로 게재됐음을 밝힌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이다.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with Google Translate.]

 

1997년 5월 발행 '주간현대 창간사'.  'Weekly Hyundai's founding company' published in May 1997.   ©브레이크뉴스

*Title = Life is running alone like a marathon? No, life is a relay!

*['The Story of My Life's Golden Time' by Publisher Moon Il-suk]'The trajectory of life' from farmers to high-tech Internet newspaper publishers

 

-Written by/Ilsuk Moon, Publisher

 

Everyone says there is a golden time (golden time). Was there a golden time in my life? I ask me I don't know. However, there were times when it was overwhelming. Golden Time refers to the time zone in which the listening-to-view rate is the highest in radio-TV, etc., so there may be times when you criticize and install it. This essay follows the proposition I've tried, that is, “▲The wisest person mourns the years of waste the most. ▲ Misfortune as a child is the power to produce great people. ▲Life is running alone like a marathon.” This article begins with the premise.

 

I'm from a senior citizen-a boarder. Boarder-boarder is a word that doesn't even appear in the dictionary. I have written well since I was young, and I got a job in the military for a monthly magazine. He left the military and entered Seoul with the 3,000 won his mother had given him in his hand. She was a penniless and profane orphan. So he spread the military sleeping bag he bought at Namdaemun Market on his desk, went inside it, and slept on the desk. That is why he is a senior (a person sleeping on the desk). But one day, while I was sleeping, I fell from my desk. So he slept under the desk. This is the boarder (the one who sleeps under the desk).

 

In the early 1980s, he pioneered a new job as a reporter (report-report+writer-writer). It was a job that was not common in Korea. She was a kind of freelance reporter. At that time, he graduated from Damyang Middle School-Damyang Industrial High School (Nong High School)-Gangnam University, which was a socially non-mainstream school, and had few connections or academic connections. He started his first contribution to Sunday Seoul, a weekly magazine affiliated with the Seoul newspaper. The title of his series is'Human Market (人間 市場). It was written by infiltrating the human-manpower market that buys and sells people. While carrying a lunch box containing half of barley rice, the article in the Human Market series, which was serialized in Sunday Seoul, was published as a book called'Unique Zone' and became a bestseller. With this book, I was able to buy a house.

 

From 1980 to the end of 1984, I was able to contribute to more than 70 media such as Sunday Seoul, Women's JoongAng, Women's Dong-A, Lady Trend, Water with a Deep Spring, Monthly Chosun, and Jeonggyeong Culture. At the end of one year at the time, the ranking statistics of the authors, which were contributed to a domestic monthly paper, were published, with Professor Kim Dong-gil at Yonsei University ranked first, and the author ranked second. While carrying around the Hangul typewriter that Dr. Byung-Woo Gong invented and manufactured, he pressed the letters so that his fingers hurt. It was a great leap forward from rural villagers-senior citizens.

 

I am from Damyang, Jeollanam-do. He was a weekly newspaper reporter at the time of May 18, 1980. At the time, the media censorship section for the loss of martial law was on the first floor of the Seoul City Hall. The media censorship group, which was completely controlled by the military, controlled it from reporting any articles related to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Since then, I have collected harsh photos related to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From 1985 to 1989, he worked as a reporter at the Segaetimes (Editing Deputy Director of the Last Book) published in Manhattan, New York, USA. At this time, it was possible to report the situation of tyranny related to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as if it was not under any control. Or they reported various political events and anti-government protests that took place in Korea as they are. At the time, Chun Doo-hwan's military government officials referred to me as an anti-government reporter. According to cultural theory, it is said that culture expands as much as it is destroyed by human will. The fierce resistance of the Korean people and the masses to dictatorship and political oppression would have been the strength of democracy progress as much as they did.

 

At this time, something unforgettable was created. I'm the author of'Although Central Intelligence Agency)' (3 volumes), and I got an opportunity to interview former Central Intelligence Agency members such as Bang Joon-mo, former head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s Inspectorate Office, and Choi Se-hyun, former Sunday Corporation (of Central Intelligence Agency). This led to tracking of the disappearance of former head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Hyung-wook Kim. The author's name often appears among the missing data of Kim Hyeong-wook from the Past Photographic Investigation Committee that the Roh Moo-hyun administration made progress. However, in this regard, the truth I was pursuing was finally buried.

 

America is a true, very democratic country. However, whether it was because the US, which we have seen in the US, is taking the national interests of the US in terms of democratization in Korea, democratization in Korea was behind the scenes. In 1987, New Yorkers visited the opposition party led by President Kim Young-sam. At a meeting attended by more than 20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Lee Ga, who served as the US ambassador to the Republic of Korea, made a bleak remark, "Roh Tae-woo will become the next president." As he said, Roh Tae-woo became president. The United States tolerated South Korea's coup d'état and their brutal power. I witnessed a regretful moment.

 

At the time, the Korean people resisted the dictatorships of the Park Chung-hee-Chun Doo-hwan military. They fought on the streets to establish democracy. Poisonous, tear gas gas penetrated into the lungs. He broke the bricks on the road and threw it with all his might and fought a street fight. In particular, information related to the Gwangju massacre began to enter New York one after another. News-information of the people's struggle against anti-dictatorship, who closed their eyes in Korea, flowed into New York through an underground route. I recorded all of the domestic news-information that had resisted the military regime in the Liberation District of New York, USA. At this time, newspapers used a new communication tool called'fax milli', mostly introduced into the country and delivered to the government and civic groups. 'Fax communication' showed its power. Even if it was blocked, I witnessed a hole in the bright dawn somewhere.

 

At this time, he also reported on Koreans who met North Korean President Kim Il-sung (April 15, 1912, from South Pyongan Province-July 8, 1994). At that time,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as implementing a blockade policy against North Korean information. It was a time when I couldn't put Kim Il-sung's photos in the newspaper. But America was different. US citizens were allowed to visit North Korea. Many Koreans with US citizenship visited North Korea and met Kim Il-sung. In addition, many people visited North Korea from Japan and met North Korean President Kim Il-sung. The interviewees I met with North Korean Kim Il-sung were dozens of people, including former UN Ambassador Lim Chang-young (1960.9.6.-1961.6.1.) and journalist Myung-ja civilization (1930-2008). Those who could not meet trace the data. Reported. I often listened to the Columbia University Library in Manhattan, New York, where a lot of the live North Korean materials published by North Korea were stored. There was a lot of North Korean data that was not available in South Korea.

 

Even then, “Why are you doing such a dangerous report? There were many people around me who said, "What do you do when you enter Korea?" However, New York in the United States was also a newspaper published in Manhattan, so it was an extraterritorial jurisdiction that the Korean government could not interfere with. At the time when I was able to freely write such articles, it was golden time (golden time) as a reporter. Probably, as you might guess, the Korean Americans who visited North Korea and met with North Korean President Kim Il-sung were the targets of surveillance by the intelligence officers dispatched from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and Security Agency. As a journalist, wasn't I also one of the targets of surveillance? At the time, I am grateful to America for protecting me. In this respect, I am a pro-American.

 

Although Kim Il-sung is also the one who caused the 6.25. Syngman Rhee, Jeonghee Park, Doohwan Chun, Taewoo Roh, and Youngsam Kim were the best politicians in North Korea, who fought a long-term political battle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Korea is a free democracy. It can be said that South Korea, who chose liberal democracy, won the long confrontation between South Korea and North Korea. The economic explosive growth that South Korea has achieved, which is the pride of human history, was due to liberal democracy. At the time of meeting Kim Il-sung, Koreans may have been'poppy' because they met Kim Il-sung. However, Kim Il-sung may be the defeated leader in the South-North Korea confrontation.

 

Life as a newspaper reporter in Manhattan, New York, USA from 1985-1989 was a flowery period of my life. It was a very poor time economically. Still, when I recall, I thought I was great. He said that “unhappiness is the power to produce great people,” but because there was an unfortunate childhood, I was able to spend it without knowing if that unhappiness was unhappiness.

 

In 1989, I came to Seoul. He joined the daily newspaper, Segye Ilbo, and was appointed to the political department. But Mr. A, the head of the politics of the newspaper, who had eaten rust in the Chun Doo-Hwan regime (formerly the chief of public affairs at the U.S. embassy), said, "You're a red journalist, hit me in the neck and come in if you can get into the politics department!" At that time, I thought like this.

 

"okay. It is true that I am a reporter from the Musan masses. I am the leftist? no. I am Korean, so it is clear that I am Korean. Since I was born, I have eaten only with my right hand, so I am right. When I get on the train, when I get on or off the escalator, I hold it with my right hand, so I am right. I like the Chosun Ilbo overseas, so I read the Chosun Ilbo often. I like the yellow color of jobap, so I'm a jopa. If you answer more honestly? I am a man, so I am a man. Even more, to be honest, I always use my left hand to clean my anus, so I am left-wing only when I do that. Even more, to be honest, the left? the right wing? I am not sure. When a bomber carries a bomb and flies at high speed toward the enemy, it flies with the left and right wings. If you fly with only one wing, you will end up self-destruct. Even insignificant flies fly with left and right wings.”

 

I joined the Segye Ilbo Political Department, but couldn't even go to the Political Department, and after spending a year in the ‘World and I’ ‘World Woman’ published by the publishing house, I did not resign, and when compared to school, I dropped out. He left without any regrets.

 

Starting in 1990, my life was pushed to the scene of a more intense sweep. That year, I joined the Saturday newspaper. During the 1992 presidential election, he led the presidential election as chief editor. When Director Taek-soo Ahn (former Chairman of the Journalists Association-former National Assembly member), who was the editor-in-chief, left the editorial office to run for the National Assembly, Seju Hong (publisher) appointed me as editor-in-chief. Director Ahn Taek-soo, former editor-in-chief, handed over 35,000 copies of the Saturday Newspaper (weekly) to me, the successor to me. During the December 18, 1992 presidential election, I was the editor-in-chief. At this time, the number of issued copies exceeded 330,000. It was the highest number of publications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weekly newspaper. It must have been because pro (親) Kim Dae-jung's editorial tone was spread. Probably, this was the peak of my life as a reporter of my life.

 

Life is running alone like a marathon. That wasn't it. At this time, the owner of the “Saturday Newspaper” recovered the position of the editor-in-chief that was given to me. The failure of the Kim Dae-jung presidential election was a big hit. Politics was so scary. When it reached the top, it seemed that it was supposed to come down. Life was not a marathon race, but a relay relay. I gave up the job of the editor-in-chief of the weekly newspaper that I had devoted myself to, and I had to leave. At that time, presidential candidate Kim Dae-jung, who was defeated, left if he left to study in England. Tears ran in my eyes. Tears came for a few days. That's how it feels to come down from the top.

 

After leaving the Saturday newspaper, he founded Sunday Seoul, a weekly newspaper in 1993, and worked as a director and editor-in-chief for 3 years. If you write the history of Korea's modern weekly newspaper, a realistic foundation was being built. After closing the editor-in-chief of the Saturday Newspaper-Sunday Seoul, I moved to the newspaper owner-publisher system.

 

With the permission of Minister Oh In-hwan, who was the Minister of Public Affairs for the last five years of the Kim Young-sam administration, the current affairs weekly newspapers'Weekly Hyundai' and'The Intent of the Case' were started. In April 1997, he founded a newspaper. Since 1997, I have been publishing the current weekly newspaper'Weekly Hyundai', and since 1998, the current weekly newspaper'The Inside of the Case'. Since 2003, he has been publishing Internet newspaper Break News. For a while, Break News ranked first in the Internet newspaper industry. It has grown into a large medium, exceeding 1,000 monthly visitors. It is a medium that still ranks high in the number of visitors.

 

One of the indispensable things in my life is the publication of the Daily Pen and Freedom (short for “Daily Pen”-Daily National Magazine), which began publication in 2000. I was the most interviewer of former president Kim Dae-jung and the opposition president. A full interview should last at least 3 hours. Only then can it penetrate the essence. With such a deep relationship with former President Kim Dae-jung, he was also the first interviewer since he took office in February 1998. Culture Minister Park Ji-won was the main secretary who registered the'Daily Pen and Freedom' that I published. 'Daily Pen', a national daily newspaper in tabloid format, was the best selling daily newspaper in Seoul since its publication.

 

In secular terms, this was the so-called Golden Time, which went best. However, the time at the peak was very short and short. About one year and six months after the publication of the daily newspaper, the union declared a general strike, and the daily newspaper, which had been well-run, was closed. As the owner/publisher, I climbed to the peak and slumped to the dusty ground. I thought you were going to be a great person. That wasn't it. Seongju Ingot Gong (成主壞空). There was a time when it was piled up, but the time when it fell apart followed closely.

 

Yes. I spent 49 years of his life as a reporter (including 3 years in the army Jung Hoon Byeong). It's not a short time. Now this time. At this time as the publisher or owner of the newspaper, the mission that I still pledge is to be "action in the expansion of freedom."

 

The Republic of Korea is a country devoted to freedom of speech. Compared to China-Russia-North Korea, I think it is a country that is about a haven for freedom of speech. I think it's a pleasure to be able to live in such a country. I sculpted the phrase "Freedom, let's live together! I can't live without you" on very hard wood, and hung it outside the company with a carving knife. As a media owner, "Let's not change" is a kind of commitment.

 

Following the military dictatorship of Park Jeong-hee and Chun Doo-hwan, I have been working as a reporter or media company owner-publisher in the current government, as well as the former presidents Roh Tae-woo, Kim Young-sam, Kim Dae-jung, Ro Moo-hyun, Lee Myung-bak, and Park Geun-hye. Korea served in its own way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democracy and democracy. Seawater does not ask itself which trough it was flowing from, but it is only dissolved by itself in such seawater. I, too, are a stream of media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democracy and democracy in Korea. I hope to remain one of those waters.

 

 

He worked as a reporter in earnest from 1976, and from that time until just before the Moon Jae-in regime, he was the subject of management-observation-monitoring by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Ministry of Security and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IOs). They used to visit often. Whenever they changed their successors, they said, “I was in charge of me and asked, “In 1976, did you ride a thief train from Jangseong Station?” “Is he the one who came up to Seoul on a thief train?” was a question of criticism, looking down, honestly, I was a musan public without a suit until then. I was able to write well, so I got a job in a monthly magazine in the military, so I had to go to work the next day. Wearing the reserve military uniform and reserve military boots, he went to Jangseong Station. The Honam Line train checker asked me to salute me and board. To be precise, it was a free ride. However, it was a ride that the inspection agent allowed himself. Therefore, the thief train did not ride. However, I was that kind of guy.

 

[이 글은 월간 '시(詩=발행인 서정환)' 3월호(통권 86호)에 “내 인생의 골든타임, 촌놈이 인터넷신문 발행인 되다”라는 제목으로 게재됐음을 밝힌다.]. [This article reveals that it was published in the March issue of the monthly'Poetry (publisher Jeong-Hwan Seo)' under the title "Golden Time in My Life, a Countryman Becomes an Internet Newspaper Publisher".]

moonilsuk@naver.com  ©브레이크뉴스

Had there been a golden time in my life, I would never have spent time like this. Also, since he was born as a farmer's son in a poor rural village and started his life unfortunately, would he succeed as a great person? no. Couldn't it? Really, it wasn't that kind of life. The protagonist of the film'Am Yours' compared capitalism to fascism. In doing so, he accused him of "the place of fascism was dominated by business." In my opinion, I think that companies have taken away what the press has had for a long time, the press was at the peak of the power triangle, but not now. Will those years come again? When I was young, I was a farmer. I graduated from agricultural high school, so I was a farmer until I graduated from high school. Until the farmer became the publisher of a high-tech Internet newspaper, he had lived a breathless life. As a writer, there are over 30 books. He picks'Although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3 volumes in total)' as his representative book. I was buried in sudden change-transformation. I have lived my life alone, running, and hard, so my life never shined like a winning marathoner. Life wasn't a marathon running wild alone. Finally, I realized that life is a relay.

 

There is a piece of my life, noisy and noisy, and it reveals that I have written this article as a record. There was no golden time in my life. It was in itself. They confess that they were just getting on the seat of the ages like a train running on a high speed. Not Golden Time. However, he confesses that it was'time to make a seat' for the upcoming successor. My life was a non-mainstream continuation. That is why they respect the mainstream. This article is a non-mainstream confession of life from start to finish, but to all those who have helped me, take off the wool hat I always wear and say "Thank you". And, successors of my life, be honored to you! 

 

[This article reveals that it was published in the March issue of the monthly'Poetry (publisher Jeong-Hwan Seo)' under the title "Golden Time in My Life, a Countryman Becomes an Internet Newspaper Publisher".]

moonils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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