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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입맞춤은 뒤에 인기척을 느낄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됐다

<은미야! 괜찮아 노래해!> 제1장 애인 있어요-(하)

이헌영 소설가 | 기사입력 2021/01/19 [09:43]

▲ 이헌영  소설가.   ©브레이크뉴스

토요일 아침, 일찌감치 영업 준비를 끝내고 커피와 모닝 빵 두개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 일어날 일들을 그려보았다.

 

강우 선배가 온다면 어떻게 대해야 하나? 반가운 내색은 해야겠지 그다음은 막막하다.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자신이 자신을 속이려한다는 것을 알고는 실소했다.

 

아래쪽 주차장에 승용차가 들어서는 게 보인다. 송 선생 차다. 송 선생은 차에서 내려 은미 쪽을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박 선생을 기다렸다.

 

이윽고 박 선생 차가 들어와 주차를 하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후 나란히 올라왔다.

 

들어서자마자 송 선생이 스마트폰을 내밀며 말했다.

 

“은미씨! 이 사진 한번 봐 봐요.”

 

좌우 균형이 잘 잡힌 멋진 삼각원뿔형 모양으로 솟은 산이다.

 

“어머! 멋있네요.…이산이 어디 있는 산이에요?”

 

성공이다, 오늘도 은미의 관심을 끌었으니 최대치를 만들어야한다.

 

“그 산이 어디 있을 것 같아요?”

 

박 선생이 선수를 쳤다.

 

“글쎄요…. 우리나라에 있는 산이에요?”

 

은미가 후하게 인심을 썼다.

 

“아! 물론 우리나라지요. 자세히 봐요. 산뿐만 아니라 요 밑에 물에 비친 산모양도 봐요

 

기가 막히잖아요.?

 

“아! …그러네요. 산이 호수에 그대로 비쳐서…야! 대박!”

 

실제로 균형 잡힌 삼각원뿔형 산이 멋져보였고 물속에 거꾸로 비치는 산모습도 신비로웠다.

 

“이 물이 호수가 아니라 논물입니다. 아직 모내기를 안 한 논에 마침 물을 대놔서 산 그림이 비춘 겁니다. 그러니까 모를 심거나 물을 안대 놨으면 이런 멋진 모양을 찍을 수 없는 거지요. 우리가 운이 좋은 겁니다. 딱 요때 거기에 갔고 우리 눈에 띄었으니”

 

“아! 직접 찍은 거예요?”

 

은미는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요 이게 요 뒤에 있는 추읍산이에요. 산수유마을로 유명한 주읍리 방향에서 보이는 추읍산입니다. 다른 방향에서는 이렇게 멋지게 보이지 않죠.”

 

“아! 그래요? 요기, 추읍산이요?…어디 한번 다시 봐요. 야! 진짜 멋있네요.”

 

송 선생과 박 선생은 오늘도 은미의 관심 끌기에 멋지게 성공했다.

 

아침커피를 마친 두 사람은 족한 얼굴에 가벼운 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벌써부터 자꾸 주차장으로 눈길이 갔다.

 

토요일이라 아침부터 산성을 오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만 아르바이트하는 규환이가 오고 두 팀의 손님을 맞이했을 때 경미네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강우는 보이지 않았다.

 

맥이 풀렸다. 한편으론 홀가분한 마음도 생겼다.

 

‘차라리 불편하지 않아 좋다’ 고 자위하면서도 며칠 동안 마음조리며 기다리게 했던 강우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경미가 주차장에서 손을 높이 들고 흔든다. 은미도 마주 흔들었다.

 

경미가 앞장서 올라오는 그림을 보며 다시 한 번 강우를 찾았으나 여전히 강우가 보이지 않는 여섯 명이었다.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이 이젠 저들을 반갑게 맞이해야한다.

 

“어서들 와…고마워 이렇게들 와줘서”

 

“안녕!,…정말, 장소가 묘하네, 진짜 어떻게 여기다 카페를 차릴 생각을 했지?”

 

동욱이의 첫 반응에 이어,

 

“그렇지! 내가 그랬잖아, 나도 처음엔 진짜 이상하더라니까”

 

경미가 맞장구를 쳤다.

 

“어우! 야! 그래도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네.…강도 보이고”

 

정모가 말했다.

 

“잘 꾸몄네, 그런데 왜 간판이 ‘노팅 힐’이야? 파사 힐이라고 하지.”

 

“토요일이라 그런가?…올라가는 사람이 꽤있네!”

 

“와! 저 사람들은 산악자전거 팀인가?…힘들겠다.…저걸 타고 끝까지 올라갈 수 있나?”

 

“2층에도 올라가보자, 2층에서는 더 잘 보이겠지”

 

“난 파사성이라는 이름도 못 들어 봤는데…저 사람들은 어떻게들 알고 오는 거지?”

 

은미는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일일이 대꾸를 하고 덧붙여 설명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이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조금은 자책을 했다.

 

억지로라도 기분을 산뜻하게 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조용히 다짐했다.

 

카페에서의 긴 탐색이 끝난 다음 함께 산성에 오르기 위해 신발을 바꿔 신었다.

 

카페를 규환이에게 맡기고 나니 완전 휴가를 받은 느낌이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나설 수 있었다. 더 이상 강우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들과 더불어 수다를 떨었고, 맞장구를 쳤고, 키득대기도 했고, 투덜대기도 했고, 노래도 불렀고, 허세도 부렸고, 아는 척도 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산성의 연인나무에서 정모와 문숙이가 사진을 찍을 때 연인사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돼서 놀랍고 행복했으며 정상에 올라 돌아보며 왁자하게 함께 탄성을 지르며 행복했고,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으며 익살들을 부려서 행복했고, 숲길을 걸으며 아이들같이 재잘대서 행복했고, 천서리 막국수와 편육을 먹으며 행복했고,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에서 대왕의 업적을 새로이 많이 알게 되어서 행복했고, 세종대왕 능은 소헌왕후와 합장 능이라고 해서 행복했고, 여주 쌀 밥집에서 흰쌀밥을 먹으며 새삼스럽게 행복했고, 동욱이가 소주잔을 들고 정모와 문숙이를 위해 건배를 하자고 해서 행복했다.

 

“야! 은미 진짜 술이 늘었네. 그때도 놀랬는데 …너무 마시는 거 아냐?”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그들과 시끌벅적하고 끈적끈적한 작별도 행복했다. 혼자 카페에 오르면서도 행복했다.

 

규환이가 반갑게 맞아주어서, 매출도 괜찮아서, 규환이가 대견스럽고 믿음직해서 행복했다. 모두들 떠나고 규환이도 없는 카페에 혼자 남은 은미는 소리 내어 울진 않았지만 술 때문이었는지 맥락 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리는 것을 그대로 둔 채 처연히 느끼려 했다. 그 느낌도 제법 괜찮다고 느낀 것 같았다

 

늦잠을 잤다.

 

대충 단장을 하고 카페에 내려오자 박 선생과 송 선생이 들이닥쳤다.

 

“은미씨! 웬일? …아이고 얼굴이 부었네.…몸이 안 좋구나.”

 

“병원에 다녀와요.…아! 오늘 일요일이라, 병원 문이 닫혔겠구나, 어쩐다?”

 

“올라가서 누워요. 여기 우리가 봐 줄게요, 조금 있으면 그 아르바이트생 올 거잖아요. 오늘 일요일이니까.”

 

“우리가 대충 청소하고 …정리하지 뭐”

 

은미는 민망함으로 망설여졌지만 이실직고를 했다.

 

“아! 아니에요.…어제 서울에서 친구들이 와서 같이 놀다 술을 많이 마셨어요. 그래서…”

 

“아! 술이요? 은미씨 술 잘해요?”

 

“아! 술! 그러면 해장을 해야지요. …은미씨,…언제 우리 술 한 잔 합시다.”

 

두 사람은 오늘도 한건 해야겠다고 달려들었다.

 

“용문산 쪽에 분위기 좋은 집 있어요. …언제 날 한번 잡읍시다.”

 

“아! 예!… 그런데 저, 술 잘 못해요,”

 

은미는 마지못해 웃으며 화답했다.

 

송 선생과 박 선생은 오늘도 제대로 한 건 했다. 대박이다. 은미의 인사치레를 술 약속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규환이가 왔다. 두 사람은 은미를 규환이에게 다짐하듯 부탁하고, 뿌듯해져서 몇 번씩 뒤돌아보며 갈 곳을 향해 떠났다.

 

규환이는 이른 점심으로, 은미는 늦은 아침으로, 짬뽕을 시켜먹고, 2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어제의 술기운이 남아서인지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손님 오셨어요.”

 

깜박 잠이 들었었나보다. 규환이의 조심스러운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손님이?… 많이 왔어?”

 

“아니, 사장님을 찾는 손님이요. 한 명이요”

 

“나를 찾아?…어떤 손님인데…”

 

규환이를 먼저 내려 보내고 입 주변을 손으로 훔친 뒤 머리를 매만지며 뒤를 따랐다.

 

몇 계단을 내려가다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분명히 강우였다. 세월만큼 달라진 강우가 입구에 선채로 물끄러미 은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짧은 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은미는 당혹감에 휘둘려 이 현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며 입속말을 겨우 밖으로 밀어냈다.

 

“어! 선배!…아니 오빠!… 웬 일이세요?”

 

강우는 입을 꾹 다문 채, 실룩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의 표정이 심상찮다, 은미의 가슴이 나대기 시작했다.

 

“여기 좀 앉으세요,…우선 차, 한잔, 차 뭐 하실래요?”

 

강우는 여전히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은미도 머뭇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눈이 마주쳤다, 강우가 엷은 미소를 보낸다.

 

가슴이 맹렬하게 나댔다.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슴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은미는 시간을 벌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규환에게로 갔다.

 

“주스, 뭐가 좋을까?…딸기? 딸기, 그래 딸기 주스 두 잔, 부탁해”

 

‘저 오빠가 계획적으로 어제 오지 않고, 오늘 온 거야! 나쁜 건 아냐, 여기는 내 집이고’

 

은미는 조금의 여유를 찾았다. 얼굴에 웃음기를 만들어냈다

 

“오빠! 그러지 않아도, 한번 뵙고 싶었어요. 잘 오셨어요. 그런데 나 어제 그 애들과 술을 많이 마셔서 얼굴도 붓고 꼴이 말이 아닌데,… 그래서 위층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래도 괜찮은데…”

 

강우의 부드럽지만 절제된 첫말이었다. 은미의 가슴이 좀 더 가벼워지며 밝아졌다.

 

웃었다, 웃으니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제법 큰소리로 말했다.

 

“오빠! 선배보다 오빠가 더 낫죠? 음…어제 함께 안 오고 오늘 온 것은, 계획적이죠?”

 

은미가 흔쾌히 말하자 강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응! 일부러 오늘 왔어, 우리 사이에 풀어야할…사과를 해야겠기에”

 

은미는 당황했다.

 

“오빠가 사과?…아녜요. 사과는 내가 해야 돼요. 내가 바보같이…”

 

때 마침 규환이가 딸기주스를 들고 와 조심스럽게 놓아주고 갔다.

 

“그게 무슨…?”

 

강우가 궁금해 하며 얘기를 이어가려할 때 은미가 제지하며 말했다.

 

“오빠! 우리 …저리 올라가면서 얘기해요. 주스 마시고”

 

“아! 그럴까? …가게 비워도 되나?”

 

“혼자서도 괜찮아요. 재, …규환이 잘 해요”

 

강우도 처음보다는 많이 가벼워졌는지,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니… 어떻게 여기에다 카페를 차릴 생각을 했어?”

 

초점에 비껴난 질문이지만, 이미 수없이 받은 질문이지만, 은미는 기쁘게 대답했다.

 

“다른 곳은 사람도 많은 반면 경쟁도 심하잖아요. 여기는 사람이 적은 반면 경쟁이 없어요, 공휴일엔 사람이 꽤있어요. 평일엔 사람이 적은 반면, 카페에 들어오는 확률은 높아요.

 

그리고 집세가 없어요, 게다가 앞으로도 오를 염려가 없어요,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가 주인이셨는데, 집이 워낙 낡아서 그냥 폐가로 있던 것을 저한테 아주 싸게 주셨어요. 처음에 이렇게 고치느라고 돈이 좀 들어갔지만…그런대로 괜찮지요? 좀 있다가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요쪽 옆에 있는 밭도 살까 해요. 할아버지가 사래요. 거저 주시겠다고“

 

“아!… 아주 괜찮아! 장사만 잘되면 뭐, 안 돼도 그냥 집으로 살면 되겠고”

 

둘은 카페를 나와 산성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오빠!…이렇게 부르니까 아까는 어색하더니…나 여기서 처음 얼마동안은 까먹었었는데 지금은 직장 다닐 때보다 훨 나요. 게다가 돈 쓸 일도 없고, 좀 외롭긴 하지만“

 

“나도 아까는 오빠 소리가 이상하더니, 이젠…직장 다닐 때 보다 낫다니 잘됐네.”

 

은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몇 발짝을 말없이 걷다가 은미가 생각난 듯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오빤 결혼해서 행복하죠?…외롭지 않고”

 

강우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멀리 산성 쪽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곤 큰 숨을 내쉬며 느릿느릿 다지듯 말했다.

 

“은미! 이은미! …미안하다, 그때 내가 잘못했어, 내가 판단을…은미도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었어, 늦었지만 정말 미안하다”

 

강우가 이름을 부를 때부터, 몸이 먼저 떨며 반응했다. 어느새 두 손이 나아가 강우의 왼팔을 껴안아 당기며, 낮은 울부짖음이 바로 터져 나왔다.

 

“오빠! 그게!……그게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흑…저도 오빠를 좋아 했었어요.흑흑…저도 좋아했었다고요. 흐으 흑…”

 

울부짖음은 낮았지만,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그대로 봇물처럼 터져 나와 ,온전한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느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물이 그득한 얼굴로 입술을 실룩이고 강우를 우러러보며 다시 울부짖었다.

 

“제 잘못이라니까요! 흐으 흑 오빠!…그게 흑”

 

강우는 당혹했다.

 

“그게 무슨?…나보고 미쳤다고 하며 도망갔잖아! 이은미!…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라고요 흐흑 나도 오빠를 흑흑… 좋아했단 말이에요.”

 

은미는 더 이상 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강우는 이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 듯, 허공에 초점을 둔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우선 일어나. 저 밑에 사람들 올라온다. 일단 산성 올라가서 앉아 차분하게 얘기해보자”

 

은미는 일어났다. 엉덩이를 털고 나서 입술을 실룩이며 대뜸 강우의 팔짱을 꼈다.

 

강우는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지만, 일단 은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참동안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은미는 강우의 팔짱을 낀 채 산성을 오르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그래야만 된다는 생각을 했다.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나마 표시하고 싶었다.

 

점점 경사가 심해져 팔짱을 끼고 걷기가 불편했지만 은미는 풀지 않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심해져 걸음이 느려지고 숨이 가빠져 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그대로 팔짱을 유지했다.

 

은미가 걸음을 멈추자 강우도 멈췄다. 은미가 무심코 강우를 올려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은미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강우도 눈을 고정한 채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의 미소가 은미를 다시 울게 했다.

 

은미는 솟아나는 눈물을 보이며, 북받치는 가슴에 한손을 얹고 일그러진 입술로 겨우 말을 밀어냈다.

 

“오빠!…미안해”

 

“알았어! 울지 마! 울보가 됐네. 뭐가? 왜? 미안하다는 건지 원!… 저기 무너진 돌담이 보이는 거 보니 조금만 올라가면 되는 것 같다. 천천히 올라가보자. 어떻게 산성이라면서 무너진 돌무더기가 먼저 눈에 보이냐?”

 

강우는 어색한 상황을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며 은미를 이끌었다.

 

“정말 연암 박지원 말이 맞네!… 연암 박지원 선생이 쓴 열하일기에, 우리나라의 성과 중국의 성을 비교한 것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의 성은 돌로 쌓아서 튼튼해 보이지만 돌 한 개가 무너지면 와르르 하고 무너지는데 중국의 성은 흙벽돌로 쌓아서 약해 보이지만, 오히려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다는 거야, 맞잖아! 저 봐! 저 무너진 돌무더기가 저 위에서 여 밑에까지 굴러 내려왔잖아. 휴… 그럭저럭 다 올라왔네. 아! 저쪽은 새로 복원을 해놨구나…. 너무 표가 난다.”

 

불과 20여분 만에 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무너진 오른쪽 돌담과는 대조적으로 왼쪽으로는 새로 복원을 한 깔끔한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산성이라고 하지만 출입문 같은 것은 없고, 그냥 돌담이 끊긴 곳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정상에 오르는 길도 돌담 옆을 걷는 것이 아니라 널찍한 돌담위로 걸어 오르게 되어있었다. 새로 복원한 산성 돌담 위를 천천히 걸어 오르다 멈추고, 강우가 뒤 돌아 보기위해서 몸을 돌리자, 은미는 팔짱을 낀 채 빙 돌아 강우의 반대편 쪽으로 옮기면서도, 팔을 놓지 않았다.

 

“이야! 산성이 높지도 않은데,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네, 저게 한강, 그러니까 남한강이지?”

 

은미는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만 끄덕이다 강우를 보았다. 또 눈이 마주쳤다

 

은미가 배시시 웃었다, 강우도 웃었다. 이번엔 울지 않고 계속 웃기만 했다.

 

조금 오르니 돌담길 가운데에 엉뚱하게도 소나무 몇 그루가 솟아있는데, 그중 두 나무에 팻말이 붙어 있다. ‘연인나무’

 

두 나무의 밑은 하나인데 밑에서부터 두 기둥으로 갈라져 살짝 곡선을 그리며 올라 마치 하트의 곡선을 닮은듯해서 누군가 이 소나무를 연인나무라 이름을 짓고 팻말까지 만들어 놓았다고 사연을 소개하며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어제 이곳에서 문숙이하고 정모씨 사진 찍었어요.…둘이 사귀고 있다는 거 알고 있죠? 나는 어제 알았어요,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말을 해서 알았어요.”

 

“알지! 내가 안지는 얼마 안됐지만, 저희들끼리는 꽤 오래전부터 밀고 당기고 했었던 것 같던데…머지않아 국수 먹게 해 주겠지. 곧, 그렇게 될 걸, 아마”

 

“아유! 좋겠다. 남들은 연애도 잘하는데”

 

“이은미! 진짜 …아직도 넌 혼자인거니?”

 

은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강우를 보았다, 강우도 마주보다가 먼저 눈을 돌려 먼 곳을 보았다. 은미는 강우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보았다. 강우의 무표정한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느껴졌다.

 

“오빠는 내가 빨리 시집갔으면 좋겠어요?…여기 좀 앉았다가요.”

 

은미는 강우의 팔을 당기며 돌계단에 앉았다, 강우도 앉았다. 날이 흐려서 햇볕은 걱정 안 해도 될 만했다. 나란히 붙어 앉으니 조금은 어색해져서 강우가 좀 떨어지자 은미가 장난스럽게 더 바짝 붙어 앉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앉으니 참 좋다. 오빠! 내가 이러니까 이상하지?…나도 이상해”

 

강우는 대답대신 은미를 물끄러미 보았다.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눈빛이었다.

 

은미는 그 눈길을 마주대하다 “휴우” 한숨을 쉬었다.

 

강우는 기다렸다. 은미가 스스로 속을 드러내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판단했음이다.

 

은미도 자신이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아까부터 어떻게 이야기 실마리를 풀어 나가야 할지를 생각했었다. 다시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잠시 지체되는 동안, 강우는 표정 없이 먼 곳을 보며 기다렸다. 은미가 결심이 선 듯이 밭은기침을 하고 말을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목이 메여 주춤거렸다.

 

“오빠! 얘기 할게요,…이상한 얘기가 될 수도 있으니 그리고 좀 듣기 거북한 내용도 있으니 그냥 들어만 줘요 비밀 얘기도 다할 거니까…비밀 얘기를 다 해야 돼요”

 

강우는 눈길을 먼 곳에 둔 채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오빠에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얘기를 먼저 해야 해요. 대학 졸업 때 쯤 있었던 두 번째 연애, 그러니까 그게 마지막 연애이기도 해요 오빠 이후로 두 번의 연애 비슷한 것을 했는데… 두 번째 연애를 설명해야 내가 갖고 있는 병이 설명될 거 같아서 그래요.”

 

“병?… 그런 게 있었어?”

 

“네, 일종의 병 이예요. 음…좀 더 명확하게 하기위해서 첫 번째부터 해야겠네요. 첫 번째 연애부터 할게요. 음 …첫 번째 연애 때는… 그 얘를 나도 좋아했지, 그러니까 연애가 시작됐을 거 아녜요? 그런데 그 얘는 내손을 제대로 잡아보지도 못했어요, 식당이나 카페에서 마주앉아 얘기하는 것은 좋은데, 옆자리에 와서 앉으면 불편했어요, 옆 자리에서 손을 잡거나 몸을 터치하는 것도 아닌데 불안하고 싫었어요.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질색을 했어요. 왜 그런지 몰라요, 그 얘를 싫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좋아했는데 그랬어요, 잘 생겼고 매너도 좋았는데… 가까이 오는 건 이상하게 싫더라고요, 음, 그 얘가 나를 떠난 뒤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내가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그게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은 거예요. 어렸을 때도 어른들이 예쁘다면서 머리나 얼굴을 만지면 난 질색을 했어요. 특히 남자 어른들이 만지려 하면 난 자지러지다시피 했었어요. 무섭고 징그럽고 냄새도 싫고, 누가 가까이오거나 쳐다보기만 해도 뒷걸음질 쳤던 것 같아요. 왜 그랬는지 몰라요. 점점 자라면서 덜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극복은 안됐던 거예요.…그 얘 이름이 김준호인데 잘 생기고 착했어요. 실제로 나도 그 얘를 많이 좋아했었어요. 헤어지고 나서…그냥 헤어진 게 아니고 차인 거죠. 옆에 앉는 것도 못견뎌하니 …결국 문자로 이별 통보를 하더라고요. 한참 동안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되고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된 거지요. 그리고 이러다간 연애는 물론 결혼도 못하겠구나 싶더라고요. 내 스스로를 닦달해서라도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두 번째 상대가 나타나 데이트신청을 하는데 막상 신청을 받으니까 용기가 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거절했어요, 싫지 않았는데 계속 거절했어요.…그러다가 나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좋아하면서 왜? 그러냐고, 화를 냈어요. 그리고 결심했어요. 이번엔 받아들이고 내가 더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성공하자고요, 다행이 그 얘는 내 거절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한참 후에 다시 데이트 신청을 해왔고,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 졌어요. 제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 갔으니까요. 오빠 이제부터 좀 듣기 거북할 텐데 …오빠 괜찮겠어요?”

 

강우는 먼 허공에 두었던 눈길을 거두어 은미를 무심히 보면서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들어야할 거라면, 그래야 은미의 병… 그걸 알게 된다며…”

 

“네, 그래요, 마저 얘기할 게요 이런 기회가 왔으니 말 해야지요…고마워요, 오빠,…오빠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한테도 언젠가는 해명해야 되는데, 두 번째 남자친구 이름은…아! 이름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거 같고, 그 친구한테는 의도적으로 용기를 내서 내가먼저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음 …두 번째 만나던 날, 내가 먼저 키스를 유도했어요. 괜히… 오빠한테 미안한 생각이드네, 오빠 괜찮아요?”

 

강우는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은미는 표정 없는 강우의 표정에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복잡한 무언가를 감지했다.

 

“미안해요 오빠! 마저 얘기 할게요. 두 번째 만난 날 키스를 했는데 첫 느낌은 입 냄새가 조금 거북했는데 금방 좋아지는 거예요. 사실 처음이잖아요.…오빠와의 것 빼고,…솔직히 좋았어요. 그 때까지의 일들이 후회될 만큼 좋았어요. 키스가 그렇게 감미로운지 처음 안거예요. 그래서 얼마 후에는 섹스를 감행해보려고 했어요. 해보고 싶었어요. 결론부터 말하면 못했어요. 섹스를 못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둘이 모텔에 들어갔어요. 모텔 방이라는 델 처음 들어간 거예요.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모텔방과는 많이 달랐어요, 무엇보다 나를 거슬리게 한 것은, 그 묘한 냄새였어요, 그냥 퀴퀴한 게 아니고 무슨 방향제를 뿌린 것같이 비릿하기도 하고 눅눅한데다… 창문을 열어 놨는데도 좌우지간 아주 싫은 냄새였어요, 그래서 내가 당황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눈치를 챘는지, 그 친구, 아주 차분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난감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 그 친구 마음이 급했나 봐요, 나를 끌어안고는 다짜고짜 침대에 쓰러트리고, …옷 입은 채로 마구…금방 땀을 뻘뻘 흘리며,…그런데 그때 내 머릿속이 짱짱해지면서 아주 죽을 만큼 무서웠던 기억이 떠오른 거예요. 언젠가 꼭 이렇게 무섭게 당했었던 기억이 흑! 흑!…기시감이 아닌 흑! 흑!… 확실한 기억이 흑!…그래서 나도 모르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 두 손으로 그 얼굴을 내 눈앞으로 힘껏 당겨와 확인했어요,…바로 흐 !윽! 흑!… 그 얼굴이었어요. 번들번들한 얼굴, 충혈 된 눈, 축축이 젖은 머리칼, 거친 숨소리, 그리고 그 기분 나쁜 훈기와 역겨운 냄새…그런 것들이 확인된 순간 나는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또 당할 수는 없다고요 있는 힘을 다해서 악을 쓰며 밀치고 일어났어요, 흑! 흑!…욕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도망쳐 나왔어요.…그리고 그 이후로 두고두고 생각해 봤어요. 내 어린 시절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한 것은 분명한데,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당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아니면 더 어렸을 때일 수도…여섯 살 정도면 기억나지 않을까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 더 어렸을 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우는 꼼짝 않고 집중해서 듣다가 은미의 물음에 고개만 작게 끄덕이다 한마디 툭 던졌다.

 

“가까운 사람이겠지”

 

“흠! 흠!…아닌 것 같아요, 내가 남자 어른들을 무서워한 것은 맞는데 가까운 사람들을 특별히 무서워 한 것 같지는 않거든요, 집에서 좀 떨어진 어느 집으로 납치를 당했는지 꼬임에 빠져갔는지 그 번들번들한 얼굴이 제일 기억나요. 아마 내가 무서워서 울었더니, 입을 틀어막았던 것 같아요. 숨이 안 쉬어진 것 같았으니까요. 어떻게, 어떻게 집엘 왔는데, 아마 집에서도 애가 없어졌으니 찾느라고 난리가 났었겠지요.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야단도 맞고, 엄마가 울고―그랬던 것 같아요. 어린 게 뭐 자초지정을 설명할 수 있었겠어요?…엄청 무서웠었던 것은 분명해요, 아마. 그때부터였겠지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예쁘다며 얼굴이나 머리를 만지면 난 자지러졌거든요. 끔찍하게 무서웠고 소름 끼쳤어요. 그래서 누가 예쁘다고 하면은 바로 뒷걸음질 쳤어요. 그게 지금까지도 그래요.…오빠! 오빠가 둑길에서 갑자기 입맞춤을 했을 때도 불현듯 그 느낌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에 미쳤다고 소리를 치고 도망쳐 온 걸 거예요. 내 진짜 마음이 그랬던 것은 아녜요…둑길을 내려올 때부터 이미 잘못 됐다는 것을 알았는데 다시 오빠에게로 돌아가지를 못했어요. 바보같이 아주 많이 후회했지만, 왜 그렇게 용기가 없었는지… 교회에서 오빠가 나를 피하면서도 가끔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았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다가가기가 더 어려워지더라고요. 오빠네 이사 간다는 날 ‘찾아갈까?’하고 많이 망설였고 또 혹시나 오빠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기도 했었어요.…흑! 흑! 나도 오빠를 아주 많이 좋아 했었어요.…사랑 했었다고요. 오빠! 흑! 흑!… 오늘 이렇게 찾아와줘서 정말 너무 고마워요. 그리고 늦었지만 정말 정말 미안해요. 오빠! 흑! 흑!… 미안해! 오빠!”

 

강우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 아! 아!…참!…이거 차 암!”

 

먼 산을 보다 바닥을 보다 허공을 보다 고개를 끄덕이다했다. 한참 후에 짧게 한 마디하며 일어섰다.

 

“이해는 되는데 너무 기구하다. 차 암!… 좀 걷자! 마저 올라가자!”

 

은미는 울면서 강우의 팔을 당겨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걸었다, 강우는 은미의 얼굴을 한번 돌아본 후 말했다.

 

“울지 마,”

 

강우의 짧은 말 속에는 살뜰한 정이 담뿍 담겨있었다.

 

은미는 눈물 고인 눈으로 강우를 올려다보았고 강우는 먼 곳에 초점을 맞췄다.

 

잠시 후 정상에 올랐다. 235m의 정상, 높진 않지만 사방으로 조망은 좋은 편이었다.

 

남한강이 멀리까지 보이고, 용문산이 보이고, 정상부분만 보이는 추읍산도 동그마니 보였다.

 

은미는 강우가 몸을 돌려 사방을 돌아볼 때도 혹시라도 놓칠세라 팔을 감싸 안고 함께 크게 돌았다. 그리고 연신 강우를 올려다보며 눈치를 살피는 척하는 등 오버를 표 나게 했다.

 

강우는 그런 은미를 어이없어 했지만 싫은 기색은 하지 않았고, 빙긋이 웃어보였다.

 

은미는 아무생각 없는 아이처럼 강우의 팔 만을 감싸 안고 강우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강우는 정상에서 꽤 오랫동안 서성였다. 은미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침내 강우가 내려가자고 눈짓으로 말했고, 은미는 동문지 쪽으로 이끌었다, 동문지 쪽 길은 흙길이다.

 

은미는 여전히 강우에게 붙어있었는데, 말없이 걷던 강우가 걸음을 멈추고 은미를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은미!…그날 네가 나한테 미쳤다고 한 날부터, 나도 트라우마가 생겨서 장가도 못갈 뻔 했다. 차 암내!…그땐 이은미!…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나를 좋아한다고 확실히 믿었었거든. 사실, 그날 나도 첫 키스였단 말이다. 나도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 좀 서툴렀겠지. 그래도 그렇지, ‘미쳤나 봐’라니, 그리곤 횅하니 돌아서 가버리다니,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미칠 것 같더라고. 그 다음부터 교회에서 널 보는 게 그렇게 곤욕스러울 수가 없었어. 이사 갈 때 이젠 살았구나 하는 해방감이 들더라고.…나, 지금 아내와 사내 결혼인데 내가 먼저 프러포즈 못했어. 진희, 우리아내 이름이 조진희인데, 진희가 참다 참다 못해서 내게 막 화를 내면서 프러포즈를 하더라고. 우리 결혼 안할 거냐고. 왜 남자가 용기가 없냐고. 입술을 내밀며 키스하라고. 하! 하!… 웃기는 얘기 같지만, 사실 나는 겁이 났거든. 프러포즈 했다가 너한테 당한 것처럼 또 당할 가봐. 그때 진희가 그렇게라도 안했더라면 결혼도 못했을 거야 아마 …”

 

그때 은미가 냉큼 말했다.

 

“그랬음 내가 있잖아, 그랬어야 되는데 히히힛!…”

 

“어이구! 좋기도 하겠다. …아! 아카시아 꽃냄새 좋다. 좋은 계절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이파리들이 막 나오고 아직 벌레들은 없어서 잎사귀에 벌레 먹은 구멍도 없는 좋은 계절이다. 여하튼 세월이 많이 흘러갔지만 찌들고 케케묵은 숙제를 해결한 것같이 홀가분해서 좋다. …이런 말이 있어. 계란은 밖에서 깨면 음식이 되지만 안에서 깨면 생명이 태어난다고.

 

네 자신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이젠 알았으니, 네 스스로 깨고 나와야지. 이은미…너 정말 아직 혼자인거니? 그 이후로 새로 누구 안 생겼어?”

 

은미는 대답은 않은 채 도리질만 하며 미소를 지었다. 땅만 바라보며 말없이 걷던 은미의 눈에 개미굴이 뜨였다. 아주 작은 흙 알갱이들이 소복하게 둘러싸인 작은 구멍으로, 개미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은미가 강우의 팔을 놓고 개미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은미의 손에서 벗어난 강우도 선채로 굽어보다가 자연스럽게 따라 앉았다. 까맣고 작은 생명들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었다, 이리 저리 살피던 강우가 신기한 듯 말했다.

 

“어! 이쪽도 있고 아! 여기도 …많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여덟 군데나 있네. 이게 아마 땅 속에서는 다 서로 통해 있을 거야. 지금 이놈들이 무얼 하나 봤더니 안에서 흙을 파서 밖에다 쌓고 있는 거야. 집을 새로 만드는 거거나 아니면 엊그제 비가 와서 집에 물이 들어서 집 보수작업을 하는 것 같아󰡓

 

은미는 대꾸는 않고 약간 경사가 진 아래쪽에 가까이 있는 강우얼굴을 빤히 보다가 느닷없이 두 손을 뻗어 강우의 귀를 잡고 뽀뽀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했다. 놀란 강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미를 마주보며 은근하게 말했다.

 

“나…유부남이야!…”

 

“알아요.”

 

은미도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답하고, 눈길도 피하지 않고 속으로 외쳤다.

 

‘난 지금 계란을 안으로부터 깨고 있는 중이야’

 

강우는 멈칫하며 생각에 잠긴듯하더니, 이내 풀고 말했다.

 

“안다고?”

 

“네, 알아요.”

 

은미가 똑 바로 보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강우가 갑자기 손을 뻗어 은미의 뒷목을 잡아당겨 부딪치듯 입을 맞추고 놓아주지 않았다. 은미도 기다렸다는 듯이 본능으로 응했다.

 

쪼그려 앉은 채의 불편한 입맞춤은 뒤에 인기척을 느낄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인기척의 주인공들이 지나간 후 불편한 입맞춤은 거듭 거듭 재연되었다.

 

그리고 산성을 내려오며 구부러진 길모퉁이 외진 곳마다에서 처음의 불편하고 두려운 단계를 넘어 불편하지 않은 자세로, 깊고도 뜨거운 입맞춤을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처절하도록 했다. 강우는 은미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 올리며, 은미는 두 팔로 강우의 뒷목을 아래로 끌어당기며, 서로의 입술을 맹렬히 흡입했다. 쌓이고 쌓였던 원한 풀이를 하듯, 오직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란 듯이, 정말 정말 이 순간을 또 다시 놓칠 순 없다는 듯이, 처절하고 애절하게. 서로를 흡입하고 또 하고 했다.

 

끝내 무아지경에 이르러 한 쌍의 커플이 지나치는 것도 모르고 탐닉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 알아채고 슬그머니 풀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서로를 당겨 안았다.

 

그냥 둘만의 세상이었다. 진즉부터, 그날 밤 그 둑길에서부터 이렇게 됐었어야 맞는 거라는 생각을 언뜻 한 것 같았다.

 

문득 문득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밀려와 거리낌 없이 매달리게 했다.

 

결코 잘못 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고 자신을 신랄하게 채찍질 했다.

 

다음은 없다. 오늘 뿐이라고. 놓치면 안 된다는 심정이 더욱 애절하게 매달리게 했다

 

산성을 내려와 카페가 보이는 곳에서 비로소 거센 파도는 서서히 스러졌고 강우는 충혈 된 얼굴에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은근하게 말했다.

 

“전화…해도 되지? 전화할 게.”

 

은미는 아무 말 못하고 아쉬운 가슴만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이다 겨우 한 마디 했다.

 

“오빠…잘 가.”

 

작별 인사를 하고서도 은미는 주차장까지 따라갔다.

 

“들어가,…전화할 게.”

 

은미는 고개를 끄덕이다 눈물이 흘러 손등으로 훔쳤다

 

“오빠…잘 가 고마워 오빠”

 

“응! 그래 울지 마, 바보같이”

 

은미는 입을 삐죽이며 끄덕였다.

 

강우는 갔다. 차 창문을 열고 “전화할 게”를 처음인 것처럼 외치며 긴 여운을 남기고 떠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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