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諸葛亮],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려 했던 고독한 승부사

[다시 읽고 새로 쓰는 소전소통(古典疏通)]인물론-지도자는 일꾼을 잘 활용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 기사입력 2020/07/02 [10:10]

▲ 이정랑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고 나라를 위해선 진충보국했던 만고의 충신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군주의 도리이고, 일을 알아보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다. 형태가 없는 것이야말로 유형의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이고, 근원이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세상사 인정의 근원이다.”

 

당나라 때 조유(趙蕤)가 쓴 『장단경 長短經』이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의 원전 ‘인물지’의 저자 유소(劉邵)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관리의 책임은 한 가지 일로 여러 가지 일을 잘 조합하여 처리하는 것이지만 군주는 아무 일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대신들에게는 어떤 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인재겠지만 군주에게 있어 인재란 인재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대신들은 탁월한 지모와 지략을 제시하고 언변에 능한 것이 재주이지만, 제왕은 여러 대신과 백성들의 간언을 제대로 경청하는 것이 바로 재능이다. 대신들은 몸으로써 실천하는 것이 능력이고, 제왕들은 상벌을 잘 운용하는 것이 능력이다. 최고 통치자는 모든 일에 정통할 필요가 없고 모든 일을 손수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잘 통솔하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다.”

 

 『장단경』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북은 다른 악기의 소리에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잘 융화해낸다. 진정한 군주의 도를 체득한 황제는 문무백관들이 책임지고 있는 일들에 일일이 간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고로 훌륭한 제왕들은 이러한 원칙을 엄격히 지켜왔고 정부 관리들도 각자가 할 일들을 잘 알아서 해왔다.”

 

요(堯) 시대에는 순(舜)이 사도(司徒)의 자리를 맡았고, 계(契)가 사마(司馬)를, 우(禹)가 사공(司空)을 맡았으며, 후직(后稷)이 농업을 관장했고, 기(夔)가 예악(禮樂)을 관장했다. 또한 백이(伯夷)가 제사를 관장했고, 고요(臯陶)가 사법(司法)을 맡았으며, 익(益)이 전쟁에 쓰일 짐승들을 전문적으로 훈련 시키는 일을 맡았다. 요는 이 모든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제왕으로서 할 일에 충실했다. 그렇다면 이 아홉 명의 신하들은 어째서 아무런 불만 없이 신하의 직분에 충실할 수 있었을까? 요가 이 아홉, 신하들의 재능과 장점을 잘 이해하고 신임함으로써 각자의 성취를 이루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전한의 유안(劉安)이 쓴 『회남자 淮南子』란 책에는 이런 비유가 나온다.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이 궁궐을 지으면서 원을 그리고자 할 때는 둥근 자를 이용하고, 직선을 긋고자 할 때는 줄을 이용한다. 그리고 한 가지 물건이 완성된 후에는 누구도 어떤 공구를 이용했는지 따지지 않고 장인의 솜씨만 칭찬한다. 또 궁궐이 완성된 후에는 어느 장인이 지었는지를 따지는 사람 없이 그것이 어느 제왕의 궁궐인지만 말한다.”

 

이는 황제에서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따라야 할 위정(爲政)의 이치를 상징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현명한 재상의 상징인 제갈량(諸葛亮)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모든 일을 혼자 독점하여 처리했다. 촉나라에는 제갈량만이 재상이요 충신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훌륭한 일을 할 줄도 몰랐고 애당초 일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제갈량은 생전에 별다른 성취 없이 죽어서 명성을 얻었을 뿐이다. 제갈량은 모든 일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일의 성패는 따지지 않았다.

 

그런 단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사마의가 담이 작고 겁이 많아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제갈량이 사자를 보냈다. 

 

촉병을 이끌고 오장원에 진주한 제갈량이 사자를 시켜 선물과 함께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는 보고를 들은 사마의는 서둘러 사자를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였다. 사마의가 선물 상자를 열어보니 부인용 머리 장식과 의복이 들어있었다. 편지를 읽어본 사마의는 제갈량의 저의를 알고 몹시 분개했다. 규방에 들어앉은 부인네들처럼 겁을 내고 출전하지 못하는 것은 대장부로 서의 기개가 부족한 소이라는 충고를 선물로 대한 것이었다.

 

“제갈량이 날 여인네로 취급한다 이거로군!”

 

사마의는 애써 분을 삭이면서 선물 상자를 받아놓고 사자에게 두둑한 상을 내렸다. 그리고 한마디 물었다.

 

“그대의 승상께선 평소에 식사는 어떻게 하시는가? 일은 여전히 바쁘신가?”

 

“승상께선 매일 밤늦게까지 일을 하십니다. 곤장 스무 대가 넘는 형벌에 관한 일은 무조건 손수 처리하시지요. 하지만 식사는 아주 적게 하시는 편입니다.”

 

사마의는 고개를 돌려 웃으면서 자신의 부하 장수에게 말했다. 

 

“제갈량이 충신이요 뛰어난 전략가인 것은 사실이오. 단지 남을 믿지 못하는 것이 커다란 흠이지. 그는 지나치게 세심해서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관장하려 드는 것이 문제요, 이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태도는 윗사람이 가져야 할 자질이 아니오. 게다가 식사를 조금밖에 하지 않는다니, 어떻게 장수할 수 있겠소?”

사자는 촉으로 가서 사마의와 주고받은 대화를 소상히 보고했다. 보고를 다 들은 제갈량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어허! 사마의가 내 처지를 다 알아버렸군!”

 

사실 이때 제갈량은 이미 계속되는 과로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고 때때로 각혈(咯血)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 제갈량의 품성은 비난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고상한 인덕보다 통치하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 제갈량이 정치에서 드러낸 결점은 대국을 인식하지 못하고 세부적인 일에 지나치게 몰두했다는 것이다. 두보(杜甫)는 「촉상 蜀相」이란 제목의 시에서 제갈량의 죽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

 

중원의 대업을 이루기 전에 몸이 먼저 죽어

고금의 영웅들로 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시게 하네.

 

제갈량은 역사적인 인물로서 누구보다 문학적 이미지를 강하게 형성하고 있다. 현명하고 명철함은 고금을 통해 다시 찾아보기 어렵고, 그 도덕적 인격에도 폄하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자질에 있어선 얼마든지 부정적인 평가가 있을 수 있다. 

 

제갈량의 가장 큰 비극은 그를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민간에 유행했던 “촉나라에는 장수가 없어 요화가 선봉이 되었네(蜀中無大將 廖化做先鋒)라는 속언이 제갈량 사후의 처량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당시에 제갈량은 기산을 여섯 번 드나들면서 마음속에 웅대한 뜻을 품고 있었고 수하에 맹장들이 구름처럼 많았다. 비록 예기한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당시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도 제갈량에게는 인재 부족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었고, 촉이 망할 수밖에 없는 전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 말기에 이른바 ‘오호대장(五虎大將)’이 차례로 원수의 자리를 이어갔으나 요화가 선봉에 나서면서부터 제갈량 치하의 서촉은 유능한 장수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는 유비를 추종해 모든 일에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으면서도 서기 207년부터 세상을 떠난 해인 234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자신을 대신할 인재를 찾지도 않았고 후계자를 키우지도 않았다. 이것이 제갈량의 가장 큰 실수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자신이 평생 학습했던 병서들을 여러 사람에게 공개했으나 마땅한 전수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구한 인물이 바로 강유(姜維)였다.

 

강유는 훌륭한 품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재능은 제갈량에 훨씬 이르지 못했다. 승상의 마음 자세는 있으나 승상의 재능이 없었던 그는 여러 차례의 북벌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전개한 전술은 거짓 투항으로 서촉을 보전한 것이었다.

 

사실 요화는 전혀 쓸모없는 평범한 장수는 아니었다. 그는 강유에 비해 훨씬 투철한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여러 차례 반복되는 강유의 무모한 진격을 두고 “병사들이 싸우지 않는 한 자멸할 수밖에 없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실제로 강유의 지략은 적을 압도하지 못했고 적에게 밀리는 병력으로도 빈번히 출전했으니 패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사실 요화의 비판은 강유의 약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제갈량의 한계를 암시한 것이었다.

 

제갈량의 한계는 여러 분야에서 드러났다. 유비는 임종 직전 제갈량에게 마속이 충실하긴 하지만 크게 쓸 인물이 못 된다고 일러주었다. “마속은 말이 사실보다 지나치니 중용하지 말라.”고 제갈량에게 경고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제갈량은 마속을 선봉의 총대장으로 임명했다. 결과는 참패로 끝났다. 제갈량은 군율에 따라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베었으며, 유족에 대해서는 종전처럼 대우하였다. 제갈량은 뒤늦게 자신의 인재 관리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반성은 하지 않았다.  j6439@naver.com

 

*필자 : 이정랑

언론인. 중국 고전 평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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