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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역 대자연을 음미하며 작품제작에 열정 쏟았다!

[한국 수채화의 선구자 배동신 화가 '탄생 100주년' 생애-4] 진도 중학교 미술교사 생활

후랭키 작가 | 기사입력 2020/06/28 [01:01]

▲ 배동신 화가 자화상.   ©브레이크뉴스

그러던 어느 날 동신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왔다. 모든 과목에서 교사들이 부족한 시절에 예능 전공자 교사는 더 부족했건만 동신은 유학파 미술 전공자 교사이면서도 학교에서 쫓겨난 특별한 인물이다. 그런 동신에게 광주 동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한동안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직업이 없었던 동신에게, 다시 교사직 제안은 참 좋은 일이였다. 당시 동중고의 교장이던 장준환은 동신이 순수한 인간성을 가진 예술가로써, 일반 교사들과는 달리 예술적인 소양을 가진 인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가 현실에 맞지 않은 행동을 가끔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창의적인 사고를 불어 넣어 주는 교사라고 생각해, 동신을 미술교사로 불러 줬던 것이다. 하지만, 동신은 고민했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사직이 이젠 자신이 없었다. 동신은 전적으로 그림만을 그릴 것을 결심하고 마사에 에게 한번 더 자신의 의사를 알렸다. 마사에도 처음엔 안정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다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신의 예술정신을 존중해야 할 유일한 사람은 자신인데, 동신의 생각을 망설이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마사에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자 동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까마귀 떼처럼 자유로움을 느끼며 신바람이 났다. 동신은 마사에에게 잠깐 다녀올 때가 있다면서 급히 집을 나섰다.

 

그리고 개교기념일 날 미쳐버린 듯 술을 마시고 미술교사직에서 쫓겨나게 했던 원흉 김인규를 찾아간 것이다. 김인규는 동경에서 동신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며 서로 의지했던 선배 화우였다, 그 날 김인규는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동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었던 것이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어린 자식이 여섯이다. 동신처럼 교사직이라도 없을까 하고, 동신을 만나러 왔던 것이었다. 그러데 동신의 선생질마저 절단을 내놨다고 자책을 하고 있던 터였다. 동신은 그런 인규에게 자신이 제안 받은 미술 교사직을 넘겨 줄 생각으로 김인규를 만나려 갔고, 인규는 동신의 소개로 장준환 교장과 면담하고 광주 동고등학교의 교사로 취직이 되었다. 유학시절에 동신의 생각은 미술의 표현방식이 그 시대의 진정한 결정체 이며, 미래를 여는 열쇠라고 믿었다.

 

그리고 미술은 그 어느 곳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는 내가 발견한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미술가 배동신이 되는 것 보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창조적인 미학적 철학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신은 늘 혼자서 주절대며 뭔가를 찾아 헤맸다. 답은 없다. 나의 지긋지긋한 고뇌와의 전쟁은 언제 끝나는 걸까? , 이런 생각들로 스스로 지쳐 자빠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 산책을 하거나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도, 동신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늘 청결한 마음가짐과 솔직한 감정으로 모든 사물을 대하고, 희로애락의 기복에 휩싸이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했다.

 

 

19458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조선은 해방이 됐다. 일본은 연합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일본 천왕이 항복문서를 읽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흘러나갔다. 마사에는 그 방송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동신은 그런 아내마사에를 안아주며 위로했다. 마사에의 집안이 일본의 정통적인 "야마도다마시이" 일본우월주의를 지향했던 만큼, 마사에도 그런 집안의 가정교육으로 일본의 자존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동신은 아내가 받은 충격을 짐작했다. 동신이 나라를 잃은 식민지인으로써 지배국의 한 복판에서 서러움을 달랬던 기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도 인간사와 같이 "새옹지마"인 것이다.

 

해방은 동신의 가족과 어머니 천옥희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에서 생업의 터를 잡고 있던 일본인들이 도망치듯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 일 터에서 종업원으로 일 했던 조선인들도 직업을 잃거나, 혹은 그 일터를 이어받아 부자가 되었다. 천옥희의 남편은 전자에 속하는 직업을 잃고 백수가 될 형편에 이른 것이다. 이제 천옥희는 동신의 가족까지 돌볼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동신은 스스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사과 장사를 했다. 시간이 날 때면 안 팔리는 사과를 쟁반에 놓고 그것을 그리거나 먹었다. 나주 옆에 "비아"라는 지명이 있다 그 곳에 아버지의 커다란 과수원이 있었다.

 

▲ 배동신 화가 작. 정물화 1972년작 0407_23.9x33cm Watercolor on Paper.    ©브레이크뉴스

 

아버지 성재와 계모 조옥진이 사이에서 낳은 배 다른 동신의 형인, 동화가 그 과수원을 지키며 사과, , 자두, 복숭아 등 과일을 수확했다. 동신은 거기서 과일을 받아다가 자전거에 싣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과일 장사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화는 욕심이 많아 동생이 팔아온 돈을 받아서 동신에게 줄 돈을 나눠주지 않고 계속 내일 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동신은 화가 났지만,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일 중에 살이 잘 올라 빛깔이 좋고 볼륨감이 풍부한 종자의 비싼 과일을 마음대로 골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과일 장사를 계속 했다. 동신의 작품 중에 정물을 그린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다른 과일을 그린 것은 없고, 사과와 복숭아를 그린 정물화가 많다.

 

1957년 여수에서 배동신 개인전 왼쪽부터 허련 배동신 임학송.   ©브레이크뉴스

동신은 정물을 그릴 때 사과면 사과 복숭아면 복숭아를 모아 대여섯 개씩 혹은 7~8개 씩를 쟁반 위에 군을 이루게 해 놓았다. 그리고 어릴 적에 혼자서 사물을 살펴보며 놀았던 것처럼, 몇 날 며칠을 그 것들을 이리 저리 뚫어져라 바라보며 살폈다. 그러다가 과일이 뭉개지고 썩어들 때의 과일 향을 맡아보며 좋아했다. 그것은 동신이 정물의 자태를 살피면서 조형의 본질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이었다. 어느 날 동신이 그림을 그리려 하고 있는데 마사에 가 아들 용이를 업고 울면서 집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동신이 놀라 마사에를 안아 감싸며 이유를 물었다. 마사에 가 울먹이며 말했다. 대문 앞에서 용이를 업고 서있는데 아이들이 일본년이라고 돌팔매질을 당해 돌에 맞을 뻔 했다며 서러워했다. 동신은 기가 막혀 황급히 밖을 내다봤지만 아이들은 모두 달아나고 아낙네 몇 명에서 혀를 차며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동신과 마사에는 방에 들어와 말없이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며 참담함을 동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동신이 일본에서 마사에를 데리고 어머니 집에 거류 한지 3년만이었다. 동신은 영산포로 가족들을 옮기고 시간제 미술교사로 취직을 했다. 동신은 영산포와 나주 그리고 광주와 송정리를 돌아다니며, 친구를 사귀고 그림의 소재를 찾아 다녔다. 이 곳들의 풍경은 제각각 동신이 생각하는 그림의 성향에 잘 어울리는 자연의 풍광과 이미지로 꽉 차 있기에 동신의 마음에 풍성한 그림 창고를 들여 놓은 것처럼 문만 열면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 여기, 남도의 아들 동신이 그린 그림이 내 고향의 광선과 바람을 그리고 풍경과 인물들을 담아 먼 다른 세상에 화폭으로 걸려있는 환상을 그리며 동신은 화로서 예술적 가슴을 활짝 열어 남도의 대자연을 음미하며. 작품 제작에 열정을 쏟았다.

 

1947616일 동신은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배동신의 첫 번 째 개인전은 실패작이었다. 아무도 배동신의 수채화를 알아주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물론 화가들까지도 동신의 수채화 개인전에 대해 어떤 미친놈이 광주바닥에서 종이에 물감을 칠해서 벽에 걸어 놓았더라 하는 비아냥거리는 소문만 퍼졌다. 그러나, 그 미술 전람회는 전라도에서는 처음 열리는 미술전람회로 기록 되어있다.

 

▲ 배동신 관련 보도.  ©브레이크뉴스

동신은 가난했지만 각계각층의 많은 친구가 있었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친절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 줄 알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고 그의 예술적 기질을 부러워했다. 시인 정치인 회사원 기자 교수 검사 판사 의사 음악가 연출가 영화감독 사진사 요리사 경찰 목사 신부 승려 목수 등 수많은 직업의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 중에 동신의 절친인 이원재는 벌교사람으로 서울에서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다. 그는 동신의 철학과 그림을 좋아했고 지방작가들을 취재하러 동신을 여러 번 만났다. 그리고 신문사 초대 전시를 제안하는 바람에 동신은 신이나 있었다.

 

첫번째 실패한 자신의 전시를 이번에는 중앙인 서울에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수십 점의 작품을 그려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몇일 뒤 6.25가 터진 것이다. 한편, 그 무렵 동신은 광주에서 두 번째 아들 ""을 낳았다. 그리고 생활은 계속 어려워졌다. 아버지의 예언이 맞았다. "그림을 그린다면 너는 처 자식은 커녕 네 자신도 감당하지 못 할 것이다." 그 말대로 동신의 형편은 몹시 어려웠고 아내 마사에는 한 푼없이 아이들을 키우며 동신의 뒷바라지까지 한 다는게 불가능 했다. 동신이 가져가주는 시간제 교사직 임금으론 도무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할 수없이 한국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마사에 가 생활전선에 나설 판국이 된 것이다. 그녀가 할 일이란 고작 벽돌 나르기 같은 일 이었다. 동신은 그동안 무사태평 그림만을 생각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술 마시고 떠드는 일만 해왔다. 그런데 생활고를 해결코자 마사에 가 나서서, 아이를 업고 벽돌까지 나른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동신은 진도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한국서예의 지존이었던 소전 손재형 선생의 제안으로 진도 중학교에서 미술교사직을 맡아 달라고 했는데 섬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동신은 마사에와 세 살배기와 갓 태어난 자식들을 데리고 남도의 작은 섬 진도로 들어갔다. 당시 소전 손재형 선생은 까마득한 후배인 동신의 회화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몇 안되는 동신의 진정한 후원자였다. 한번은 여러 예술인들은 모아 잔치를 벌리는 가운데 동신을 소개하며 동신에게만 친히 동신화주라는 현판을 써줘서 참석한 모든 이들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소전선생은 동신에게 써준 글을 가지고 자신의 서재에서 만나가를 제안했다.

 

소전 손재형이 동신에게 헌정한 글.     ©브레이크뉴스

그런 가운데, 동신은 이원재의 제안으로 서울 전시를 위해 이원재에게 직접 그림을 맡겨 서울로 보냈고, 두 달 후 배동신의 전시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동신은 가족들을 무사히 진도에 옮기고 진도의 맑고 깨끗한 공기와 풍경들에 취해 진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던 중 전쟁이 일어나 북쪽에서 군대가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동신은 6.25가 터지고 전국이 전쟁 속에 휘말려 있던 시절을 진도에서 별 탈 없이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전쟁 중 진도에서는 그리 큰 소란은 없었다.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신에게는 어려운 생활고가 동신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서울로 보낸 100여점의 그림들에 대한 미련이 때때로 동신의 뇌리에 남아 어서 빨리 난리가 끝나지고 그림의 행방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그림들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 가없었다. 그동안 동신에게는 2딸이 태어났고 앞으로 또 1명의 아들을 더 낳게 된다. 동신과 마사에의 사이에 모두 5남매를둔것이다. 동신이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광주로 옮겨왔을 때는 전쟁이 끝나고 일년 후였다. 그동안 전쟁이 남긴 상처로 많은 것이 바뀌었고 세상살이는 말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기만 했었다 동신의 가족들도 역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광주에서는 일본대학동창회 주최 전국학생공모전이 창설되었다. 동신은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그 공모전은 5년 동안 치러지다가 없어졌다. 어느 날 동신이 심한 복통으로 급히 광주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가 입원하게 됐다. 병명은 급성 간경화 였다. 마사에는 한국에서의 고생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아이들의 미래도 암담했다. 동신은 병원에 누웠고 혼자서 잠도 못 자고 간병을 했다. 적십자병원의 원장은 동신의 처남 김기창(막내 여동생의 남편) 이었다. 동신의 아버지 배성재는 동신이 미웠다. 더욱이 사위에게 자식 땜에 신세지는 것도 싫었다. 김기창에게 동신이 회복됐다 싶으면 빨리 내보내 버리라고 한 것이다. 기창은 장인의 부탁에 간호원을 시켜 동신을 일반 병동으로 옮기고 병원비를 청구하라 시켰다. 병원비를 못 내는 동신의 실정을 알고, 병원에 그냥 머물러야 할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무렵 동신의 입원 사실이 신문에 났다. 많은 동신의 지인들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동신의 입원실은 병문안 온 지인들로 복잡했다. 마사에는 병원비 걱정에 고심하고 있던 차에, 어느 날 마사에의 손을 잡으며 인사하는 여인이 있었다. 배동신 선생님의 제자 김연규입니다. 개교기념일에 피아노를 쳤던 학생이라 했다. 그리고 흰 봉투를 건넸다. 그리고는 곧장 동신이 보이는 침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동신은 저 안쪽 침대에서 다른 방문자와 대화중이었다. 김연규는 다짜고짜 좁은 병실의 침대를 이리저리 피해서 동신이 반 정도 누워서 누군가와 하고 있는 대화를 자르며 인사했다.

 

배 선생님! 입원중 이라고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많이 좋아지신 것 같네요! 사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신 듯합니다. 단숨에 안부 인사를 마치더니 하얀 손을 내밀었다. !!? 누구신가? 동신은 김연규의 손을 잡으며 반쯤 누웠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네 사모님께도 인사를 드렸는데요. ? 내 아내를 어찌 아시나? 동신이 더욱 의아해 하며 물었다. ! 네에 학창시절 개교기념일에 사모님이 아가랑 함께 연극 구경 오셨는데 제가 강당으로 안내해 드렸었어요. 그날 선생님 모습이 종일 보이지 않아서 사모님이 애태웠을 꺼라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만! 그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고만잉. 나도 생각이 나는구만. 그때 그 피아노 쳤던 학생이 맞네! 가만히 보니 그때 얼굴이 나오는군! 동신은 연규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피아노를 참 잘 쳐서 나가 기억을 하고 있째!^^ 김연규 맞지? 하하.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서울 음대에 합격했다는 지금은 어디서 뭘 하나? 네 지금은 여고 음악 선생입니다. 호호. 연규와 동신의 대화에 이번엔 마사에 가 끼어들었다. 아노. 도우신(동신) 이 분이.. ! 10년 전에 학교에 연극 구경을 갔던 거요 생각납니다. 동신을 보며 얘기하다가 갑자기 연규 쪽으로 몸을 돌려 감사하므니다. 감사하므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김연규는 1927년 전남 송정리에서 아버지 김형주과 어머니 고명주의 7남매중 큰 오빠와 남동생이 맨 위와 아래에 있는 4번째 가장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났다. 연규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지금의 토지공사 같은 회사의 부사장으로 근무했던 친일파였다. 그러나 연규의 아버지 김형주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을 중시 여겨 당시 여성에 대한 교육 차별을 무시하고 5명의 딸들을 모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게 했다.

 

그 중에서 연규는 자신의 고집을 내 세워 부모를 설득하여 대학에 진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을 갖 졸업했을 때 엄격한 아버지가 정한 혼처로 시집을 가야했다. 그리고 몇 개월도 안돼 이혼했고, 어린 딸이 딸린 이혼모가 되어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모두가 힘들었다. 동신만 바라보고 한국에 왔던 마사에의 삶은 더욱 힘들었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마땅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않됐다. 가족들을 위해 돈벌이에 나섰지만 어눌한 발음 때문에 매번 인종차별로 좌절했다. 급기야, 동신은 마사에와 어린 자식들의 생계를 위해 자존심 따위를 팽개치고 아버지 성재를 만났다. 성재는 동신에게 몇 푼을 주면서 한약방에서 일하면 되지 않겠냐 하였다.

 

동신의 자존심은 그때 다시 일어났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받은 돈을 마사에 에게 전했다. 동신에게 또 딸(화자)이 태어났다. 마사에의 고민은 더 커져만 갔다. 동신이 화가로서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마사에는 동신이 그린 그림 속에서 더 큰 사랑과 희망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동신을 알아볼 수 없다. 동신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더 늦기 전에 꼭 성공을 하여야 한다. 마사에는 동신에게 다시 일본으로 가자고 했다.

 

동신은 싫었다. 하지만 마사에는 계속 동신을 졸랐다. 마사에는 말했다. 도우신(동신) 당신은 일본에서 인정받은 화가에요. 여기서는 당신의 훌륭한 그림을 알아볼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다시 일본으로 가야해요.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고생했어요. "당신을 알아주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이제 그만 가고 싶어요."라고 했다. 동신은 고민했다. 이제 막 자신의 수채화에 남도의 풍광이 잘 어울리는 회화를 발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의 길을 가야 한다!! 이제 와서 아버지와 남편의 길을 가야 할 것 같다면, 지금까지의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동신은 지금의 마사에 심정을 너무나 이해했다. 그러나 동신은 또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던 본질과 다르지 않는가, 지금 와서 달라진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또 그 현실이란 것인가? 현실은 왜 이렇게 나의 길을 막아서는 것일까? 동신과 마사에는 일본 화단에 데뷔했던 1943년 큰아들(), 한국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가졌던 47년 둘째(), 한국 동란이 터지던 1950년 셋째(명자) 1954(화자) 그리고 4년후 1958(두성), 32녀를 낳았다. 동신은 변함없이 마사에를 사랑했고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마사에가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마사에는 가족이 모두 함께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배동신(裵東信) 화가 약력

Dong shin Bae(1920~2008)

 

 

1920616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벌교초등학교로, 다시 여수 서초등학교로 옮겨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였다. 1936년 그림을 그리러 간 금강산에서 박수근(朴壽根)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았으며, 평양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장식부에서 일하며 문학수(文學洙), 장리석(張利錫)과 교류하였다. 1937년 일본으로 가서 유학했다. 1945년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 아들 배용과 함께 귀국하여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하였으나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8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였던 김연규(金年圭)과 결혼하였다. 1943년 일본 자유미술창작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는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1947년 제1회 개인전을 광주도서관에서 개최한 이후 1964, 1967, 1969년 전라도에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3년 서울, 1974년 일본 도교(東京)과 오사카(大阪)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수십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에는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오지호, 김영태, 최용갑, 김인규, 강동문, 김수호와 황토회전을 조직하고, 목포 미로화랑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에는 구상전에 초대 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초대회장이 되었다. 1978년부터 서울로 옮겨 활동하였으며, 1989년 전라남도 여수시로 내려와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을 열었다.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하였는데, 큰 붓을 이용한 빠른 필치를 보여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자유로운 선의 사용으로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하였다.

 

1943년 일본의 제7회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녀로 입상하였다. 1974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 2000년 대한민국문화훈장(보관장)을 받았다.<계속> hooranky@yahoo.com

 

*필자/후랭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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