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신군부의 잔악-잔혹했던 언론탄압 밝혀져야

언론사가 신군부에 동조-부역함으로써 광고비 지원 등의 혜택을 받은 수입행태 등이 소상하게 밝혀져야

문일석 발행인 | 기사입력 2020/05/18 [11:08]

5월18일은 지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주년 되는 날. 광주민주화운동의 원인은 박정희 군부정권의 유신 탓이었다. 박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지난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때부터 일어났던 유신독재 반대시위는 지난 1979년 10월 16일 발생했던 부마항쟁(부산-마산)에서 극(極)을 이뤘다. 민란(民亂)수준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였다. 이 와중에서 10.26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근인은 1979년 12.12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생긴 피흘림-학살사건이었다. 1979년 10.26 박정희 암살 직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월 27일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다. 이때 계엄사령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입명했다. 전두환은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육사 11기생들이 주축이 된 사조직 '하나회'를 기반으로 군권을 완전 장악했다. '신군부'가 군사 쿠데타의 실세였다.

 

권력장악에 반대-저항했던 전국 대학생들은 서울역 일대에서 대규모 시위를 기획했다. 지난 1980년 5월 15일, 전국 27개 대학 학생대표와 10만여 명의 대학생-시민들은 서울역 광장에 모여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노동3권 보장"등을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 ©브레이크뉴스

▲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  ©브레이크뉴스

 

이때까지만 해도 대체적으로 평화적인 시위였다. 5월17일, 신군부는 서울역 시위에 참석한 규모-저항의 수준 따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신군부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비상계엄을 확대한 것. 비상계엄 확대 이튿날인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이에 분개한 학생-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비상계엄령을 해제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신군부의 수장인 “전두환을 찢어 죽여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강경시위를 전개했다. 

 

계엄군은 학생-시민들에게 무차별 폭행-폭언을 가했다.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 됐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렇게 발단됐다. 계엄군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제일먼저 출동하는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 1980년 5월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무차별 학살하는 등 무자비한 살육 작전을 감행했다. 이 진압사건에서 얼마의 광주시민이 학살됐는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 5.18 기념식사에서 발포 명령자 규명과 계엄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헬기 사격의 진실과 은폐·조작 의혹과 같은 국가폭력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들이라고 제시했다.

 

이 당시 계엄군은 극도의 언론탄압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다. 계엄군의 서울지역 언론검열반은 서울시청 1층에 마련돼 있었다.

 

당시 필자는 한 주간신문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신문 발행을 위해 가 인쇄본을 들고 가 계엄군에게 검열 받는 일을 해야만 했다. 계엄군은 전 지면을 검열하면서 반정부 시위소식에 대해서는 가 인쇄본에 빨간 사인펜으로 표시, 민주화운동 시위 기사를 완전 삭제도록 했다. 이와같이 모든 매체의 발행은 계엄군의 언론검열을 거쳐서만이 발행될 수 있었다.

 

그러하니 당시 국민들은 광주민주화항쟁 과정의 피 흘림-학살소식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신군부 계엄군은 언로(言路)를 완전 차단했다. 급기야 국가는 암흑천지 상태 였다. 

 

▲ 비상계엄 확대로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    ©브레이크뉴스

▲ 광주 학살의 주범이었던 계엄군.    ©브레이크뉴스

 

신군부의 언론탄압 실상은 광주민주화운동 못지 않았다. 신군부의 언론탄압은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긴 유혈진압과는 방향이 달랐다. 무혈(無血)진압이었다. 이 당시, 언론인들은 계엄군의 강경한 언론탄압에 정면으로 맞섰다. 군사 쿠데타세력의 무력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제작거부를 선택했다. 당시, 신군부의 언론탄압 과정에서 기자직을 박탈-축출 당한 수효는 1천여명에 달했다. 

 

고승우 19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는 지난 4월29일 개최한 “1980년 제작거부 언론투쟁, 한국 언론의 오늘을 묻는다” 주제의 세미나(자유언론실천재단이 주관)에서 “1980년 언론투쟁은 언론인들이 검열제작을 거부한 일대 사건으로, 세계 언론사(史)에서 이렇게 집단적으로 항쟁한 유례가 많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오늘날 1980년 언론투쟁이 광주민주화운동과 별개로 인식되고 있다. 1980년 ‘언론학살’은 내란 과정에서 벌어진 언론에 대한 탄압이며 1천여 명의 언론인을 불법 해고한 사건이다. 그런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1980년 언론투쟁 역사 바로잡기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실 캐기는 아직도 진행되는 과정이다. 민주화 시위에 가담했다가 죽임을 당한 사체 암매장, 실종자 문제 등의 진실은 아직도 추적 중이다. 신군부의 잔악-잔혹했던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을 소상하게 찾아내야만 한다.

 

누가 언론탄압의 주역이었는지. 언론인들의 피해 실상, 일부 언론사가 신군부에 동조-부역함으로써 광고비 지원 등의 혜택을 받은 수입행태 등이 소상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추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moonilsuk@naver.com

 

*필자/문일석. 시인.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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