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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승려로서 일본 승려인 '간다 스님'과 돈독했던 교유의 회고

[기고문]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을 했던 일본인 스님

박삼중 스님 | 기사입력 2020/04/07 [15:23]

▲ 삼중 스님(왼쪽)과 고 간다 스님(일본인).     ©브레이크뉴스

▲간다 스님의 부부.   ©브레이크뉴스

 

난 1967년도 석굴암에 살았었다. 석굴암은 국보 제24호로서 우리민족 문화의 극치이다. 전 세계를 통한 불교예술의 정수이고 세계유산이다. 20대 초반의 의기 충만한 스님으로서 관광객들이 오면 석굴암 유래 설명을 했었다. 제일 많이 오는 외국인은 일본인들이었다. 그때 한참 울산 공단이 진행 될 때였다. 60대 요정 마담들이 일본인 기술자들을 인솔해서 많이 왔었다. 난 그들에게 석굴암의 유래를 여과 없이 설명했고, 요정 마담들이 통역을 했었다. 역사적인 진시로 일본인들의 높은 콧대를 꺾는 일에 사명감을 느꼈었다.

 

한 번은 한국일보를 창립한 장기영씨가 일본 "관방장관 부부"를 안내해 왔었다. 난 그들 부부에게도 석굴암의 유래를 가감 없이 설명했다. 과거 역사 속에 무도한 일본 왜구들이 동해로 수 없이 노략질을 했었다. 양민들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 해 가는 살인 강도들이었다. 오죽했으면 신라를 통일한 30대 "문무왕"이 "내가 죽으면 바다에 묻혀 잔혹한 일본 왜구들을 격퇴하겠다" 라고 "해능"을 만들라 명하셨을까?


석굴암 부처님께서 "해능"을 직시하시고, 정면으로 일본 땅을 바라보고 계신다. 신라인들의 호국 불교 사상을 설명하는데, 관방장관 부인은 연신 고개를 수그리고 “미안합니다”를 반복하는데 관방장관은 눈을 부릅뜨고 내 설명을 듣기만 했다. 설명이 다 끝날 때 쯤 일본 관방장관이 나에게 질문을 한다.

 

"젊은 스님은 일본을 와 보셨습니까"


유추해보면 일본을 와 보고 일본을 그렇게 함부러 말 하느냐? 라는 뜻일 것이다. 난 이렇게 답을 했었다.
"제가 일본을 왜 갑니까. 여기서 일본인들을 수 없이 만나는데 일본에 뭐 배울 게 있다구요"


그러자 관방장관은 "제가 스님을 초청 할 겁니다" 옆에 있던 부인은 "우리 바깥양반이 초청을 한다 하니 꼭 와 주세요. 제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난 이렇게 대답했었다. “일본은 안갑니다. 관방장관이 아니고 일본 수상이 초청을 해도 안 갈겁니다. 라고 했었다.

 

그런데 뒤 돌아 보니 절대로 안 간다던 일본을 200여회나 다녔다. 귀 무덤, 코 무덤을 모셔온 일, 울산 동백을 가져온 일, 애국동포 김희로를 데리고 온 일, 등 많은 일들로 일본을 방문 했었다.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나라를 초월해 우정을 나누었던 일본 천태종 승려 "간다" 스님을 소개 할까 한다. 내가 30대 후반 쯤 한참 교도소 교화 일을 할 때다.

 

일본 스님 한 분이 지인의 소개로 날 찾아왔다. 자기는 일본 천태종 승려고 오사카 시에 등록된 가수고 코미디언이고, 일본을 가장 사랑하는 일본인이라고 소개를 하며 우리 소년원을 방문하고 싶다 도움을 청해 왔다. 난 그 마음이 갸륵하여 그와 교류를 시작했다. 한 번은 그와 같이 영등포 교도소 위문 공연을 했었다. 가수 남일해씨가 가수협회장을 할 때다. 물론 많은 가수들이 동참했었다. 헌데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가수는 일본 "간다“ 스님이었다.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우리말로 기가 막히게 불렀다.

 

그는 승려이면서도 오사카 중심가에서 주점을 운영했었다. 우리 하고는 문화가 달랐다. 승복을 입고 술장사를 한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허나 일본에선 흉이 돼질 않았다. 저녁 6시만 되면 주점에 출근을 한다. 나는 그 집을 "간다 주점"이라 불렀다. 나이 들면서 그는 많은 병을 앓았다. 몸 여러 곳에 암 덩이를 품고 살았다.


인연이란 묘한 게 내가 일본에서 코 무덤을 환국 시킬 때도 일본 천태종을 대표하는 승려들 중에 "간다" 스님도 함께 의식에 참여 했었다. 의식을 끝내고 취재 차 동행 했던 30여명의 기자 분들을 모시고 "간다 주점"을 방문했었다. 난 의도적으로 한 번 거하게 "간다주점" 음식을 팔아주고 싶었다. 30여명이 먹었으니 그 값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계산을 하려고 하니 옆에 있던 "간다“ 스님 부인이 ”이 계산은 내 남편이 하는 게 맞다“고 했다. 그리곤 "간다” 스님이 하는 말이 "아니 저희 집에서 음식을 먹고 계산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음식 값을 안 받겠다는 뜻이다. 음식을 팔아 주고 싶어 갔다가 대접만 잘 받고 나왔다. 난 지금도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일본 신문에 내 기사가 나오면 신문을 오려 스크랩을 해 놓고 손님들에게 자랑을 하곤 했었다.

 

한 번은 일 보러 일본을 간 김에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간다 주점"을 갔었다. 설암 수술을 했는데 경과가 좋다고 부인이 말을 해준다. 노래는 부르면 안 된다는 부인의 만류에도 한국에서 "삼중 스님"께서 오셨는데 "돌아와요 부산항에" 한 곡은 불러야 한다고 열창을 했던 친구였다. 안타까운 것은 "간다“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일본까지 갔다가 보지 못하고 돌아 온 일이다.

 

▲ 삼중 스님(오른쪽)과 간다 스님(일본인).     ©브레이크뉴스

 

신도 한 분이 “간다” 스님 소식을 전해 준다. 암 수술이 잘못되어 지금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바쁜 일정들을 뒤로 두고 일본엘 갔다. 공항에 내려 통역을 시켜 전화를 했다. 헌데 통역의 잘못으로 그에게 부담을 주고 말았다. 그리고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가 하는 말이 "삼중 스님 제가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이렇게 누워서 스님을 뵙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병을 낳아서 꼭 서울로 스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그게 도리인 것 같습니다. 스님을 영원히 사랑할겁니다. 일 보시고 편히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는 먼 여행길을 떠났다.


난 급한 일이 생겨 장례식에 참석을 못하고, 뒤에 조문을 하러 일본엘 갔었다. 부인은 매일 영전에 생화를 올린단다. “스님께서도 오실 때 꽃을 좀 사 가지고 오십시요.”


약속을 하고 공항에 내려 지금 간다고 전화를 하니 "저도 스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허나  막상 오신다고 하니 제가 힘이 들 것 같아서요. 내 남편과 가장 친한 분이 삼중스님이셨습니다. 제가 스님을 뵈면 남편생각이 더 간절할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일본까지 오셨는데...“ 부창부수라고나 할까? 난 결국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소리 없이 한-일 관계에 기여한 한 사람이었다.

 

아래는 나의 제자 장만호 시인이 쓴 간다 스님에 관한 시이다.

 

*제목=사랑꽃
간다"스님!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묻고
먼 여행을 떠나셨나요?

삶은 고해라.


온 몸에 암 덩이를 품으시고
오사카 시내에 "간다주점"을 운영
하시며 "삼중스님"께서 가시면
"한국에서 지장보살이 오셨다"
"설암"수술 후유증으로
노래는 안 된다는 부인 만류에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  하시던 그 모습이 선연 합니다.

 

"간다"스님!
꽃처럼 예쁜 부인을
왜 그렇게 울리시나요.
지금도 매일매일 님 그리며
영전에 사랑꽃을 올린답니다.

 

"간다"는 말은 다시 "온다"는 뜻
사상, 이념, 문화, 나라를 초월 우정을 나누셨던
"삼중스님"께서는 지금도 오실 것을 믿고
꿈속에나마 만남을 고대 하고 계십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천태종 승려요 가수고 코미디언"이라 소개했었지요.
일본을 가장 사랑하는 일본인 이라고,
집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두 나라의 아픈 과거를
반성하신다구요.

 

"간다"스님!
긴 여행 빨리 끝내시고
영원히 지지 않는
"사랑 꽃" 피어 있는 이 땅에
하루 빨리 돌아오실 것을 믿습니다.

 

나라와 생사를 초월한 두 분의 우정을 응원합니다.
<장만호-삼중스님 제자 시인. 아동문학가. 디카시인. 시낭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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