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은 살아서 귀국…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사실을 왜곡

파리 경시청은 김형욱 살해사건 수사단도 구성하지 않았다!

문일석 발행인 | 기사입력 2020/02/04 [15:28]

▲김형욱(1925년1월16일~실종/사망 1979년 10월7일) 전 중앙정보부장은 6년 3개월간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했다. 최장수 부장이었다.  ©브레이크뉴스

 

김형욱(1925년1월16일~실종/사망 1979년 10월7일) 전 중앙정보부장은 6년 3개월간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했다. 최장수 부장이었다. 미국에 망명해서 살고 있었던 그는 지난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 사망(1991년 법원이 실종선고)처리 됐다.


필자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1985-1989년까지 거주, 세계신보 기자로 활동했다. 이때 '비록 중앙정보부(전3권)'를 집필, 김형욱 실종사건의 시종(始終)을 추적했었다.


최근, 김형욱 실종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때문이다. 이 영화는 김형욱의 실제 죽음과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하다. 김형욱 실종을 오랜 기간 추적한 기자로서 내린 결론이다,


김형욱 실종 이후 국가기관이 공식적으로 조사, 발표한 내용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약칭 진실위)가 구성됐다. 이 기구의 조사관계자들은 필자와도 수차 만나 조사했다. 필자는 이 조사에 응했다. 그리고 이 진실위는 조사보고서를 냈다. 지난 2005년 5월 26일 이 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다. 이 기구의 조사결론은 조사하면서 고생을 했겠으나 사실과 먼 내용이었다. 진실위 조사결과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당시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는, 중앙정보부 프랑스 지점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이었고,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던 A요원, B요원이 김형욱에 대한 암살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 협력자 2명을 10만 달러에 고용했다고 한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상열 공사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사실상 자신의 회고록 원고를 넘기는 조건으로)을 했다. 이상열 공사는 이에 김형욱에게, 돈을 줄 자를 소개시켜주겠다며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갑자기 A요원과 동유럽게 협력자 2명이 나타나, 이 공사의 승용차를 이용해 김형욱을 납치해서 파리 근교로 끌고 갔고, 동유럽계 협력자가 소련제 소음권총 7발을 발사해 살해했다고 한다. 이 공사는 이 사실에 대하여, A요원에게 관저에서 결과를 보고받고, 김형욱 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을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다. 시신은 파리 근교의 야산에 던져버렸고, 나무 잎으로 덮어버렸다. A요원은 귀국 후 10월 13일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박정희(오른쪽)와  김형욱(왼쪽).  ©브레이크뉴스

파리 근교에서 청부업자가 쏜 권총에 의해 사망했다는 게 그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은 매우 위험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김형욱이 파리에서 살해되지 않고 한국으로 입국했다고 주장해왔다. 당시 최세현 박사(중앙정보부 일본 동경책임자인 주일 공사이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손위 동서) 등과 인터뷰, 이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필자의 취재 결론으로는 김형욱은 프랑스에서 대만까지 전문 요원들에 의해 납치됐고, 대만에서 대한항공편으로 한국으로 귀환했다는 것이다.

 

김형욱 실종 사건의 핵심 관련자였던 중앙정보부 이상열 전 파리 공사는 이미 사망했다. 그렇다고 진실이 과연 땅에 묻혔을까?

 

필자는 본지 지난 2019년 12월16일자 “누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납치-암살’을 지시했을까?” 제하의 글에서 “2006년 이상열 주불공사가 사망(2006.4.3.)하기 직전, 그가 필자를 만나고자 한다는 비밀전갈이 왔다. 김형욱 실종 당시 주불특파원을 지낸 언론계 선배로부터의 다급한 전화였다. 서울 동국대 앞 엠버서더 호텔에서 만나자는 거였다. 화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누군가, 비밀요원이, 그가 비밀(김형욱 납치-사망비밀)의 입을 열려는 것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이상열 공사는 사망, 끝내 그는 취득했던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사인은 감기 기운(노인성 폐렴)이라지만, 필자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과연 누가, 필자와의 인터뷰를 차단했을까? 이상열 전 주불공사가 필자를 만나려했던 것은 그가 취득한 비밀을 무덤에 가기 직전에 발설하려던 결심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앰버서더 호텔 근처를 갈 때마다, 비밀의 입을 열려했던 이상열 주불공사의 얼굴이 떠올려진다. 그때, 기자인 필자는 대 특종을 놓쳤다.”라고 쓴바 있다.

  

김형욱은 19734,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7년 미 하원이 주도했던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독재자-군부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치부를 서슴없이 공격했다. 관계했던 여성 리스트도 작성, 터뜨릴 준비까지 했다. 연일, 박정희 아킬레스를 거론, 퇴임을 재촉했다. 김형욱은 박정희의 눈엣가시였다.

 

▲필자의 저서인 비록 중앙정보부.

이 사건, 즉 김형욱 실종 사건의 진실은 의외로 간단하다. 당시 파리 경시청은 김형욱 살해사건에 대해 수사단도 구성하지 안했다. 그가 프랑스에서 살해됐다면 프랑스 경찰이 가만 있었겠는가? 김형욱이 살해돼서 파리근교에 시신을 유기했다면, 프랑스 경찰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김형욱은 프랑스 이외 국가의 여권을 가지고 프랑스에 입국했다가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고 프랑스에서 제 발로 걸어서 나간 외국인에 불과하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김형욱이 파리에서 사망됐다고 알렸다. 하지만, 사망 부분에 관한한 그 사실이 심각하게 왜곡됐다고 본다. 중앙정보부는 지난 1973년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왔다. 이 사건으로 일본국 침입이라는 거대한 외교적 문제에 봉착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조직이다. 그러하니 중앙정보부라는 국가의 최대 정보조직이 1979년에 프랑스 내까지 침입, 김형욱을 납치-또는 살해하진 않았을 것으로 분석된다.

 

김형욱의 납치 살해사건의 주범은 과연 누구일까? 형사소송법 제253조의2(공소시효의 적용 배제) 조항은 사람을 살해한 범죄(종범은 제외한다)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하여는 제249조부터 제253조까지에 규정된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지난 2007년 형사소송법의 개정으로 15년에서 25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리고 지난 20153, 국회에서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 기간을 폐지하는 법이 지난 20157월 통과돼 시행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없다.

 

김형욱 납치-살인 사건은 1979년 발생, 이미 41년이나 지난 사건이됐다. 공소시효 개정 이전에 발생한 사건의 경우, 2015년 개정법안이 적용되지 않는다.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김형욱 살해 사건의 경우, 공소시효는 이미 지난 입장이다. 국가의 공조직이 국민을 살해한 사건은 재발방지 차원에서라도 진실이 꼭 밝혀져야만 한다. 역사적 사건에서는 공소시효가 없을 수 있다.

 

김형욱은 살아서 납치돼 한국에 까지 왔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이고, 국민이 주인이라 한다면, 이제라도 김형욱 죽음에 대한 진실의 답(答)을 내놔야만 한다. moonilsuk@naver.com

 

*필자/문일석. 본지 발행인. '비록 중앙정보부(전 3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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