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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낙화유수(落花流水) 이야기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11/29 [10:21]

▲ 낙화유수 작사가 조명암 대중가요 전집과 1942년 남인수가 취입한 음반     © 이일영 칼럼니스트

 

 

1942년 오케레코드에서 발표된 남인수 가수의 노래 낙화유수는 월북작가 조명암이 작사하여 이봉룡이 작곡하였다. 목포출신의 작곡가 이봉룡은 불멸의 가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가수의 오빠이다.

 

이와 같은 남인수가 부른 낙화유수의 작사가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은 본명이 조영출(趙靈出)이다. 그는 충남 아산태생으로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풍지 박산이 된 가정형편으로 어머니와 함남 석왕사에 머물면서 보통학교를 다녔다. 이후 출가하여 법명 운탄(雲灘)으로 금강산 건봉사에 승려였다. 당시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그의 재능을 만해 한용운 선생에게 전한 고승이 있었다. 이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그를 대하고 뛰어난 문장력에 감복하여 1930년 조명암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추천하여 공부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규교육을 받게 되면서 그의 재능은 더욱 두각을 나타내어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방의 태양을 쏘라)와 대중가요 작사 (서울노래)가 동시에 당선된 특이한 경력을 갖게 되었다. 이후 작사가로 활동하다가 그의 뛰어난 재능과 영민함을 지켜본 어느 독지가의 후원으로 1936년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당시부터 작사에 주력한 그는 졸업이후에도 작사에 주력하여 이가실(李嘉實)과 김다인(金茶人), 금운탄(金雲灘)이라는 예명으로 고향초,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강, 꼬집힌 풋사랑, 목포는 항구, 서귀포 칠십리, 아주까리 등불, 어머님 전상서, 애수의 기타, 꽃피는 내 고향과 같은 쉽게 기억되는 노래에서부터 약 400여곡의 노래를 작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이후 1948년 말 월북하여 교육문화성 부상 등을 지내고 1993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그의 월북으로 남인수가 부른 낙화유수에서부터 그가 작사한 모든 노래가 금지곡이 되면서 1950년 작사가 반야월이 다시 개사하여 오늘날 전하는 낙화유수가 탄생한 것이다. 다음은 1942년 김다인(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의 남인수 노래 가사이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후 1948년 조명암이 월북한 이후 금지곡이 되자 1950년 작사가 반야월이 필명 박남포로 개사하여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낙화유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서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 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이와 같은 보편적으로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꽃을 일러 봄이 가는 의미로 해석되는 낙화유수(落花流水)는 그 원전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로 당나라 시인 이군옥(李群玉. 808-862)의 시 한 구절에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떠나감이 원망스러워”(落花流水怨離襟)라는 대목이거나 중국 악곡의 바탕이 된 운문 시인 사(詞)에 능통하였던 남당의 시인 이욱(李煜. 937-978)의 사(詞) 낭도사(浪淘沙)에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봄이 간다(流水落花 春去也)라는 구절도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시는 중국 당나라 시인이며 장군인 가오피엔(高駢. 821-887)의 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訪隱者不遇) 란 시의 첫머리에 흐르는 물에 떨어진 꽃에서 세상의 드넓음을 알겠네(落花流水認天台)라는 소절에서 유래된 제목으로 정리한다. 이는 작사가 조명암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하여 전해온 이야기이다.

 

여기서 잠시 짚고 가야할 매우 주요한 역사가 있다. 당나라 희종 2년(875)에 반란군 황소(黃巢)가 복주를 점령하면서 당나라 시인이며 장군인 가오피엔(高駢)은 토벌사령관으로 명을 받았다. 당시 통일 신라 시대를 관통한 문장가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바로 가오피엔(高駢) 장군의 종사관으로 일하였던 때였다.

 

이때 시인이며 장군인 가오피엔이 최치원의 뛰어난 문장을 헤아려 그에게 반란군 황소의 죄상과 이에 대한 대적을 널리 알리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짓게 하였다. 이에 최치원이 지었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에 담긴 명문의 문장에 역적 황소(黃巢)가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문헌이 중국 여러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기록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의 원문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최치원의 문집 계원필경에 격황소서(檄黃巢書)로 전해지고 있는 사실에서 격황소서(檄黃巢書)로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

 

여기서 한걸음 더 짚고 가는 대목은 필자가 젊은 나이에 중국의 당시에 빠져 많은 서적들을 독파 할 때에 가오피엔(高駢. 821-887)의 시를 접하면서 이와 같은 가오피엔(高駢)이 우리의 역사에서 너무나 소중한 나라 발해(渤海)와의 연관성이 느껴져 여러 문헌을 헤아렸던 기억이 실로 새롭다.  이일영(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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