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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문학 50주년’ 온몸으로 축하

김준태 시인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十字架)여!>는 최초의 5월시

이승철 시인 | 기사입력 2019/11/09 [22:00]

▲ 김준태 시인.   

▲ 김준태  시인.   ©이승철 시인 제공.

▲ 김준태 시인(오른쪽)과 필자 이승철 시인(왼쪽).     ©이승철 시인 제공.

고 3때인 1977년 3월 어느 날, 김준태 시인을 전남 함평 학다리고 교정에서 처음 만나뵐 수 있었다. 학다리고 영어교사로 부임해온 선생님은 그해 7월, 창비에서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를 출간했다. 이 시집을 읽고서 나는 점차 문학(시)에 뜻을 두게 되었고, 이후 문예반 활동을 통해 시인의 꿈을 키웠다. 김준태 선생님의 인솔로 함평 촌놈이 광주에서 열린 조선대 백일장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고교 은사인 김준태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지가 어언 42년이 흘렀다.

 

조선대 사대 독어과 2학년 때인 1969년 1월, 김준태 선생님은 광주의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와 <전남매일신문> 그리고 <삼남교육신문> 신춘문예를 모두 석권하여 3관왕이 되었고, 이어 월간 <시인>지 11월호를 통해 중앙문단에 등장했다. <전남일보>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와 <시인> 지의 심사를 본 사람은 다름 아닌 박목월, 김현승, 조태일 시인이었다. 약관 21살 때 한국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김준태 시인은 기존의 한국시와 전혀 다른 새로운 목소리와 방향성으로 1970년대의 민족문학 형성에 기여했다. 1980년 5월 민중항쟁 당시 광주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5월항쟁의 전 과정에 참여했다. 말하자면 김준태 시인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광주 5월이 처참하게 학살당할 때 눈 부릅뜬 현장 목격자였다.

 

10일간의 항쟁이 신군부에 의해 진압된 후 1980년 6월 2일, 김준태 시인은 <전남매일신문> 1면에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신문에 발표 당시 이 시 제목은 계엄사의 검열조치로 <아아, 광주여!>로 게재됨)를 발표했다. 항쟁 당시 5월 21일 <전남매일신문>은 기자들의 제작거부로 발간이 중지되다가 13일 만에 속간될 때 이 신문사의 문순태 편집부국장(소설가)이 오전 10시경 김준태 시인에게 전화하여 오전 11시까지 써줄 것을 청탁한 그 원고였다. 김준태 시인은 청탁받은지 불과 1시간 만에 수많은 광주 영령들과 <엑시타시>(접신)하여 이 시를 썼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준태 시인의 <아아, 光州여!>는 독자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다.

 

계엄사의 검열로 시 제목은 물론 원문 시 105행 중 2/3가 삭제되어 불과 34행만이 신문에 실렸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삭제되지 않은 시 전문(全文)이 비밀리에 수천 수 만장이 인쇄되어 국내외에 유포될 수 있었다. 5월 항쟁이 피의 학살로 마감되자 실의와 좌절에 빠졌던 광주시민들과 이 땅의 국민들에게 김준태의 시는 패배의 아픔을 딛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한 편의 시가 국내외에 몰고 온 파장은 대단했다. 신문과 방송 등 전국의 모든 언론을 장악했던 신군부에 의해 광주의 참상과 진실이 모두 유언비어로 취급되어 철저히 왜곡당할 때 김준태 시인의 이 5월시는 거짓권력과 가짜언론에 비수의 칼을 들이댄 광야의 목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 김준태 시인의 시.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十字架)여!' ©이승철 시인 제공.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十字架)여!>는 한국문단이 낳은 최초의 5월시다. 그리고 이 시는 AP와 UPI, 로이터통신, 신화통신 등 외신을 타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광주항쟁(Kwangju Uprsing)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김준태>라는 한국시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김준태 시인은 이 시를 썼다는 이유로 1980년 6월 2일부터 계엄사에 의해 전격 수배조치 되었고, 25일간의 긴 잠행 끝에 전남고로 출근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더 이상 숨어 다닐 수 없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 구속되더라도 학교로 가자."

 

김준태 시인은 1980년 6월 25일 오후 곧바로 전남고로 출근했다가 잠시 머문 다음 신안동 자택으로 갔다. 바로 그날 광주 화정동의 505보안대로 끌려간 김준태 시인은 20일간 모진 곤욕을 치러야 했고, 보안사의 강요 로 교사직에서 강제로 퇴출되었다. 이로써 김준태 시인은 1980년대 최초의 필화(筆禍)사건의 당사자가 된 것이다. 1980년 5월 직후 한국문학은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였다. 바로 이때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는 한국문학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데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광주에서는 1981년 7월, <5월시> 동인이 활동을 시작했고, 1982년 12월에는 <5월시> 아랫세대가 <광주 젊은 벗들>을 결성하여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문학화하기 위한 소집단 운동을 펼쳐냈다.

 

이후 서울 대전 대구 마산 부산 강릉 등지에서도 소집단 문예운동이 전개되었다. 1984년 12월 19일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채광석 시인의 주도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재창립되었고, 이 단체에 소속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이후 5공정권의 폭압과 금기를 뚫고 은밀하게 수많은 5월시편이 창작됨으로써 광주의 진실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김준태 시인의 그 5월시가 단초가 되어 문학을 통한 광주의 진실 알리기 투쟁이 전국화될 수 있었다.

 

허나 신군부의 강요로 졸지에 교단에서 쫓겨난 김준태 선생님은 이후 거리의 교사로, 신문사 기자로, 조선대 객원교수로 당신의 삶을 전환, 확장하면서 수많은 후생들을 키웠고, 이제 광주문단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요즘 김준태 선생님은 <광주평화포럼> 이사장과 <국립한국문학관> 이사로 한반도 평화와 한국문학의 부활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지금껏 시집과 산문집, 평론집 등 수십 권의 저서를 펴낸 김준태 선생님은 고희를 넘긴 연치에도 여전한 현역시인으로 후생 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2019년 11월은 김준태 선생님의 등단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후생들이 뜻을 모아 한판 걸게 잔치상을 마련해 드려야 했건만 그리하지 못했다. 다만 지난 10월, <광주전남작가회의>의 김완 회장, 주영국 사무처장이 중심이 되어 조촐한 축하연을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광주의 계간지 <문학들>(송광룡 대표) 여름호는 김준태 등단 50주년 특집을 실었고, 서울의 계간지 <푸른사상>(한봉숙 대표, 맹문재 주간) 가을호도 "김준태 50년" 특집을 게재했다.

 

그리하여 11월 8일 오후 6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맹문재 시인이 주도하는 <민족문학연구회> 주최로 민족문제연구소 5층 강당에서 강연회가 열렸고, 뒤풀이 모임도 가졌다. 한국문단의 경사이자, 축복인 <김준태 문학 50주년>을 온몸으로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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