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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리더십...난국 해결의 열쇠

권기식 한국도시우호협회 회장 | 기사입력 2019/08/19 [09:15]

▲ 권기식     ©브레이크뉴스

 

지난 18일 국립현충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번 행사의 추모위원장은 '김대중 키드' 1세대인 문희상 국회의장이 맡았다. 80년 동교동 서재에서 김대중을 만난 인연으로 정치를 시작한 문희상 국회의장은 남다른 감회에 젖어 추모사를 했다. 김대중, 문희상 두 분의 정무비서를 하면서 정치적 인연이 깊은 필자 역시 깊은 상념과 감회에 젖어 추모행사를 지켜보았다. 

 

이번 추모행사는 여느 때와 달리 '김대중 리더십'이 강조된 행사였다. 여야 5당 대표들의 추모사도 김대중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와 그리움에 모아졌다.  여야 5당 대표들은 각자의 정치적 입장과 인연에 따라 결이 다른 얘기를 했지만 '김대중 리더십'의 가치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날 SNS에서 "국민들의 마음 속에 대통령님은 영원히 인동초이자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추모했다.아울러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과 리더십을 담은 김대중 전집 30권이 완간돼 헌정된 것도 한국 대통령 역사상 기념할 만한 일이다. 3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물을 후대에 물려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더욱 사무치는 순간이었다. '김대중학'이라는 학문이 생기고 국내외 학자들이 김대중과 넬슨 만델라, 빌리 브란트 등 3인의 지도자들을 비교연구한다는 소식도 반가운 일이다.

 

돌아가신 부모가 가장 그리울 때는 형편이 어려울 때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김대중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난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 나라 형편이 많이 어렵게 됐다. 국가 경영의 양축인 안보와 경제 어느 한쪽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이다. 선무당들이 나서 제각각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그야말로 백가쟁명이 따로 없다. 해결의 길은 보이지 않고 어지럽기만 하다.

 

나라 형편이 어려우니 정치적 입장을 떠나 많은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김대중'을 불러내는 것 같다. 

 

지금 왜 '김대중'인가? 왜 많은 정치인들이 '김대중'을 소환하는가? 그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국가적인 난국을 돌파하고 극복하는 데 김대중 리더십이 매우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 8월18일 열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   ©브레이크뉴스

 

김대중 리더십은 정치인 김대중의 삶의 결과물인 동시에 상상력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한국 대통령제 역사상 김대중은 가장 어렵게 대통령이 된 정치인이다. 3번의 대통령 선거 낙선과 6년간의 감옥 생활은 그를 철학과 정책을 갖춘 정치인으로 성장시켰다. 요즘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오는 영혼없는 좀비 정치인들과 달리 김대중은 완전 '수제명품 정치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30권의 저작이 나왔고 김대중 리더십이 독자적인 학문 영역이 된 것이다.

 

김대중 시대란 어떤 시대인가?

 

김대중 시대는 산업경제 시대의 종말에 따른 외환위기와 반민주 시대의 종말, 분단 시대의 종말이라는 특징을 가진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이었다. 

 

김대중은 자신이 맡은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누구 보다 잘 간파했고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당선의 기쁨도 누릴 새 없이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나서야 했고, 당선된 날 부터 사실상의 임기가 시작된 전무후무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채 정치적 진영을 고려하지 않고 베스트팀을 꾸려 IMF와의 협상에 나섰다. 임진왜란 때 12척의 배를 모아 왜적에 맞선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외부환경을 탓하지 않고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상당수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잘못 조차 외부에 떠넘기는 비겁한 자들이었다. 서울시민에게 거짓방송을 하고 한강다리를 폭파한 지도자도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박정희에 의해 시작된 산업경제 시대는 구조적인 부패와 정경유착, 경쟁력 저하 등으로 인해 더이상 한국 사회의 성장동력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온갖 특혜와 부정으로 얼룩진 한보그룹 사태는 한국 산업경제 체제의 더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산업경제 시대의 수혜자는 부패한 정치인과 경제인들이었고, 노동자와 소상공인, 자영업자 등 서민들은 피해자로 전락했다. 그들은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가정은 해체됐다. 김대중은 외환 유동성 확보와 구조조정, 금 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고, IT 등 지식 정보화 산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최초로 5G 상용화 국가가 된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도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반민주 시대에서 민주 시대로의 전환을 위해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제도화 작업에 주력했다. 불가역적인 민주 국가를 만드는 것이 김대중의 소망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김대중이 만든 제도 민주주의의 틀안에서 호흡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과 평화체제 구축은 김대중의 평생 염원이었다. 1971년 대선에서 그는 4대국 안전보장론과 남북 교류를 주장했다. 반공 병영국가나 다름없던 그 시절 김대중의 주장은 너무나 파격적었고, 군사독재 세력은 그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정치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 선언을 해냈다. 남북 평화경제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문을 열고, 금강산으로 관광객들이 갈 수 있는 꿈같은 남북화해 시대를 열었다. 이 땅은 수많은 평화세력은 봄날 처럼 가버린 그 짧지만 행복했던 시절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다.

 

▲ 김대중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김대중 리더십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김대중 리더십은 긍정, 화합, 평화, 미래, 실용, 설득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김대중 리더십의 첫번째 요소는 긍정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말씀은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와 삶을 무한 긍정했다. 우리 민족의 역량을 믿었고, 민주와 평화, 번영의 민족사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6년간의 투옥과 납치, 고문 등 그에게 닥친 수많은 고통도 그의 긍정의 힘 앞에서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는 70년대 감옥에서 나오면서 홍일, 홍걸 두아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감옥갈 차례"라고 말했다. 수감생활이 고통 뿐이라고 생각했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그는 수감기간 동안 자신의 지식을 체계화했고 사상을 숙성했으며, 대중경제론 등 정책을 구조화했다. 감옥은 그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긍정의 힘이 없었다면 그에게 감옥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두번째는 화합의 리더십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추도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중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부부동반 초청했던 사실을 얘기했다. 김대중은 화합의 힘을 믿었다. 화해와 용서를 통해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끝내고 화합과 통합의 시대를 열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그는 '호남 홀대론'의 불만이 나오는 것을 알면서도 '동서화합을 위한 동진정책'을 추진했다. 대구에서 학교를 나온 필자에게 "동서화합, 영호남 화합은 민족화합의 씨줄이고, 남북화합은 날줄"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치적 반대자들 조차 인정한 그의 화합 리더십은 반민주 군사독재 체제를 종식시키고 제도적 민주주의를 만드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김대중은 화해와 용서라는 과정을 거쳐 화합으로 나아간 지도자이다.

 

세번째 요소는 평화다. 그는 평화의 힘을 믿었다. 지난 수천년의 역사에서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고통받고, 한국전쟁으로 동족상잔의 고통까지 받은 우리 민족에게 평화가 가장 소중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가 국내외의 반대와 회의적 시각을 무릅쓰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뤄낸 것은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4대 강국이 한반도 평화의 지지세력이 되게 하기 위해 4강 외교에 주력했고,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만들어냈다. 김대중은 "우리는 4대 강국에 둘러싸인 국가이기 때문에 외교는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국내정치는 잘못해도 바로 잡을 수 있지만 외교는 한번 잘못되면 바로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평화 비용이 갈등 비용 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는 그의 지론은 평화 리더십의 바탕이다.

 

네번째 요소는 미래다. 김대중은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청년들에게 벤처기업을 만들도록 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지금 성공한 벤처 1세대들은 '김대중의 경제 키드'인 셈이다. 그는 미래 세대에 대한 지원과 육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 용기를 주고 길을 내주었다. 그 결과 미래세대가 주도하는 IT, 한류 문화 강국이 만들어졌다. 김대중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말은 그가 미래지향적인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당시 그는 "한일 관계는 과거 보다 미래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과거는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다섯번째 요소는 실용이다. 그는 한국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기업경영의 경험을 가진 인물이다. 해방후 목포해운을 인수해 성공시킨 경영인이었다. 교조주의적인 정치인 출신들과 달리 그의 정치는 철저히 실용에 기반을 두었다. 그는 늘 후배 정치인들에게 "정치인은 서생적인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삶이 반영된 말이다. 그는 정치일생 내내 최선을 추구하면서 차선을 택했고,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택했다. DJP연합이라는 기발한 선거전략도 그의 실용주의 리더십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DJP연합을 두고 야합이니 정치공학이니 비판했지만, 결과는 결국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단독 집권이 불가능하다면 연합집권하는 방식으로 가야한다는 그의 선택은 실용적 리더십의 본보기이다. 정치적 가치와 정체성을 저버린  '3당 합당' 방식의 집권 대신 그는 각자의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연합하는 방식의 집권 전략을 만들어냈다. 정치적 정체성이 다른 정파들이 합친 자유한국당의 만성적 갈등구조를 보면 김대중의 실용 리더십은 가치와 이해관계의 조화임을 잘 알 수 있다.

 

여섯번째는 설득이다. 그는 반대자들을 설득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역사와 철학에 정통한 그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들어 상대방을 설득해 협력을 이끌어 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설득해 통일후 주한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대한 동의를 얻어낸 것은 김대중 설득 리더십의 백미로 꼽힌다. 그는 늘 야당과 대화하려고 했고, 설득과정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려 했다. 강압적 방식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권위주의 정치인들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그가  '영원한 의회주의자'로 불리는 것은 설득 리더십을 갖춘 보기 드문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사에서 유일하게 '김대중학'이라는 학문적 영역을 만들어낸 지도자다. 그는 정치인이자 사상가였고, 교육자였다. 반대 세력 조차 '김대중'의 지혜와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말하는 지금 그분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민주와 평화의 영원한 지도자 김대중.

 

필자/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김대중 정부 청와대에서 정치국장으로 일하며 4년 7개월간 김대중 대통령에게 일일정치보고를 했다. 이후 영남매일신문 기자와 인간개발연구원장을 거쳐 한양대, 일본 시즈오카현립대, 중국 칭화대에서 동북아 국제정치를 강의하고 연구했다. 현재 한중 공공교류기관인 한중도시우호협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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