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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177) 광화문(光化門)이 낳은 광복(光復)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08/16 [15:48]

▲ 광화문(光化門)     © 이일영 칼럼니스트

 

광복(光復) 74주년을 맞았다. 이와 같은 광복(光復)이라는 어휘의 표현에는 치욕적인 일제 강점의 해방에 이어 민족의 자주적 주권이 회복된 독립의 의미가 순차적으로 담겨있다.

 

광복(光復)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1895년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의 잔혹한 침략에 분노하여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민중의 의병활동에서 그 바탕을 찾게 된다.  특히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격분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거국적인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저항에 당황한 일본은 긴급하게 특수 훈련된 연합 토벌대를 조직하여 각지의 의병을 진압하였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가야 할 내용이 있다. 이는 일제가 1909년 가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호남지역 의병을 잔혹하게 살상한 만행의 역사이다.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개월에 걸쳐 당시 의병 활동이 가장 강력하였던 전라남도 일원의 외곽 지대에 일본군을 투입하여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일본은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특별한 정찰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명량대첩(鳴梁大捷)의 대패에 대한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가진 일본이 이순신 장군이 설파한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에 대한 막중한 의미를 앞세워 호남 의병의 초토화를 계획하였던 것이다.

 

이에 1909년 당시 전국 의병의 50.1%라는 호남의병의 비중을 말살하기 위하여 9월 1일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소형 함정 부대를 남도 해안에 배치하고 대구에 주둔하였던 임시 사령부를 지휘부로 보병 2개 연대와 호남지역 경찰과 헌병부대원을 연합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와 같은 치밀한 계획으로 17,779명에 이르는 의병과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다수의 부상자와 함께 주요한 의병장들이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된 의병과 가족들을 강제 노역에 투입하여 해남에서 보성 순천을 경유하여 하동에 이르는 도로를 개발하였다. 일본은 이를 폭도 도로(暴徒道路)로 이름 붙였다.

 

강력한 총칼의 억압으로 반도를 흔든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침탈한 치욕적인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오늘날의 상주인 경북 함창(咸昌)에서 태어난 독립투사 채기중(蔡基中1913-1021)등에 의하여 1913년 오늘날 영주지역인 풍기(豊基)에서 조직된 독립단체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민족의 역사에서 광복(光復)을 가장 먼저 선창한 단체였다. 이후 전남 화순 출신 양재홍(梁在鴻1883-1944)등이 화순지역에 화순 광복단을 결성하였다.

 

이 무렵 울산 출신 우국 열사 박상진(朴尙鎭1884-1921)이 1910년 사법시험에 합격되어 평양 법원에 발령받았지만, 나라를 잃은 울분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풍기광복단을 바탕으로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탄생시켰다.

 

광복회는 무장 항쟁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서부터 일제 강점 앞잡이가 되어 동족을 유린하는 악질 친일파 처단과 같은 활동을 벌였다. 이어 국내의 삼엄한 사찰을 피하여 해외 활동을 목표로 총사령 박상진과 부사령 김좌진(金佐鎭1889-1930)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1918년 일제의 치밀한 공작수사와 조직원의 밀고로 수많은 단원이 체포되어 대규모 검거령이 내려지면서 생존 단원들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1919년 민족의 독립을 외친 위대한 삼일 운동이 전국에서 전개되었다. 이에 일제의 더욱 잔혹하고 탄압적인 검색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면서 1920년 만주지역에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이 결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 거점을 두었던 민족 지도자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는 대대적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설을 도모하여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총사령부가 설립되었다. 당시 1941년 한국 광복군총사령부에서 발행하였던 잡지가 광복(光復) 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광복군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종전되면서 1946년 6월 해체되었다.

 

이와 같은 일제 식민지에서의 해방과 독립된 주권 회복의 날을 기념하여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광복절(光復節) 국경일이 탄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열망을 담은 광복(光復)에 대한 언어적 표현의 정의는 일제 치하에서 광복 단체가 설립되면서부터 대체로 묵시적인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74주년을 맞는 나라의 가장 소중한 국경일의 명칭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정리되지 못하였다.

 

 

▲ 좌-한국광복군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김문호, 신정숙, 김붕준) /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지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 우 - 한국광복군전례회     © 이일영 칼럼니스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와 같은 광복(光復)에 대하여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이지만, 일제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겨 식민지 통치를 받았던 암흑에서와 같은 인식의 대치적 관념으로 나라를 되찾고 국가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이와 같은 광복(光復)의 어원에 대한 구체적인 최초의 언급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한자 어원 전문 연구소를 이끌어가는 박대종 소장이 2013년 어느 매체 칼럼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당시 박대종 소장은 광복(光復)의 어원이 중국 당태종 시대에 편찬되었던 중국 역사서에 기틀을 세운 진서(晉書)의 진나라 장수 환온(桓溫312-373)의 기록인 환온전(桓溫傳)에 옛 도읍이나 땅을 수복한 의미로 쓰였던 광복구경(光復舊京)을 언급하였다.

 

이어 중국 사전에 그 원전의 출처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는 빛(光)에 대하여 찬란했던 문물과 영토, 나아가 주권을 포함하는 비유어라는 사실과 함께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거나 멸망한 국가의 회복을 정의하는 광복(光復)에 대한 중국 사전 내용까지 소개하였다.

 

이를 상세하게 보완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정리된다. 역사서 진서의 환온 편에서 장수 환온이 출정 전에 황제에게 상소한 내용에 북방 이민족에 정복당한 중원을 되찾아 도읍을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은 말에서 잃어버린 과거의 문물제도와 같은 정신적 가치와 문화유산의 원형을 뜻하는 광복구물(光復舊物)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晉書 九八卷 桓溫傳: 光復舊京, 疆理華 也作 光復舊物)

 

이와 같은 광복(光復)의 맥락은 동양의 가장 오랜 역사를 품은 경전인 주역(周易)의 64괘 중 20번째 풍지관(風地觀) 4효(爻)의 관국지광 이용빈우왕(觀國之光 利用賓于王)과 맞닿은 말이다. 이는 오늘날 관광이라는 말이 생겨난 어원으로 단순한 관찰이 아닌 정신적 가치의 원형까지 상세하게 꿰뚫어 본다는 의미로 광복(光復)의 뜻과 만나게 된다.

 

이어 이와 같은 풍지관(風地觀) 괘를 세밀한 형상과 상세한 설명으로 담아낸 상사(象辭)를 살펴보면 그 깊은 가치를 보는 것은 그만큼 높은 손님이 된다는 뜻으로 승화된 관국지광 상빈야(觀國之光 尙賓也)로 해석된 내용을 살피게 된다.

 

이처럼 한자에서의 빛(光)이란 가장 심오하고 넓은 의미를 가진 문자로 광복(光復)의 어휘에 담긴 소중한 의미는 나라의 원형적인 정신적 가치의 회복을 품은 말이다. 이는 한자 인 광(光)을 원형적인 갑골문에서 보면 사람이 무릎을 꿇고 횃불을 들어 불을 밝히는 형태의 상형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어 서주 시대의 청동기에 주조되어 새겨진 금문(金文)에서는 사람 위에 구체적인 문자 불(火)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빛 광(光)에 대하여 동한(東漢) 시대의 허신(許愼)이 펴낸 중국 최초의 자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불(火) 이 사람(人) 위에 있는 형상으로 밝음과 영예를 의미하는 광명의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明也. 從火在人上光明意也)

 

여기서 짚고 가게 되는 내용이 우리가 익숙한 한자 교육서 천자문의 첫 문장인 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 있어 그 빛이 누르다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이와 같은 누를 황(黃) 자의 형성 과정이 바로 밭 전(田)과 빛 광(光)이 합하여 색이 탄생한다. 이는 중국 건국 신화에 제왕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군주이며 문명의 창시자인 황제(黃帝)가 존재한 배경이다. 이어 불변의 최상에 가치를 품은 황금(黃金)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빛 광(光)의 문자적 실체와 상징은 이와 같은 중국의 신화적 제왕을 탄생시킨 가장 신성한 문자의 존재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분명하게 정리하고 갈 내용이 있다. 바로 민족의 관문 광화문(光化門)에 대한 내용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1394년(태조 3년) 한양 수도가 결정되어 세워진 경복궁 정문의 이름은 오문(午門]) 혹은 정문(正門) 이었다. 오늘날의 광화문(光化門)으로 탄생한 때는 1426년(세종 8년) 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에 의하여 군주의 빛은 천하를 덮고 그 진리는 모든 곳에 닿는다는 뜻을 가진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가져온 글자 광화(光化)였다. 이와 같은 원전의 출처는 중국 고전 서경(書經)에 태고의 천자 요(堯) 임금 이야기를 기록한 요전(堯典)편에 기록이었다.

 

여기서 중시한 부분이 있다. 당시 이와 같은 광화문(光化門)의 문호가 결정되었을 때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제창한 문호 광화(光化)가 중국 당나라 제22대 황제 소종(昭宗)의 재위 기간에 사용된 연호 광화(光化)를 몰랐을 리가 없다. 이와 같은 중국의 연호 광화(光化)는 황제 소종이 난을 피하였다가 898년 장안으로 돌아와 건녕(乾寧)에서 광화(光化)로 바꾸었던 연호이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환온전(桓溫傳)에 옛 도읍이나 땅을 수복한 의미로 쓰였던 광복구경(光復舊京)과 맞닿은 의미이다. 당시 중국의 광화(光化) 연호는 898년부터 901년까지 4년 동안 짧게 사용되었다. 우리의 집현전 학사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연호에 담긴 의미를 뛰어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살피게 된다.

 

이와 같은 광화(光化)에 될 화(化)의 문자적 상형을 보면 서 있는 사람과 뒤집혀 있는 사람의 융합 문자이다. 이는 곧 변화의 상징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경복궁 정문의 문호를 광화문(光化門)으로 작명한 의식의 중심은 크게 나라와 세상이라는 뜻을 가진 빛 광(光)과 새롭고 무한한 변화를 품은 될 화(化)에 담긴 깊은 의미를 승화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리되는 내용은 먼저 한글 창제 이전의 한자문화 사용이 절대적이었던 시대 상황에서도 중국의 문화와 정신적 가치에 눕지 않고 한자의 문자적 해석과 사용을 우리 정신에 바탕을 두어 승화시킨 대표적인 어휘의 문호가 광화문(光化門)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나라와 세상의 새롭고 무한한 변화를 품은 광화문(光化門)이 작명된 이후 민족의 정신 훈민정음이 탄생한 것이다.

 

바로 나라와 세상의 새롭고 무한한 변화를 뜻한 광화문(光化)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본래의 세상으로 되돌아옴을 의미한 광복(光復)의 역사가 탄생한 것이다. 나아가 사람이 무릎을 꿇고 횃불을 들어 불을 밝히는 형태의 갑골문자에서 출발하여 사람 위에 구체적인 불(火)을 밝힌 금문(金文)의 문자 광(光)이 의미하듯 광화문 광장에 켜든 민심의 촛불이 그릇된 권력을 심판하여 온전한 세상을 밝힌 혁명 또한, 민족의 지혜로 놓은 역사의 길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관문 광화문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 함께 쓰러졌다가 이후 1865년 재건되었다. 이어 1910년 일제의 치욕적인 한일병탄(韓日倂呑) 이후 조선 총독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민족의 관문 광화문을 철거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민예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1889-1961)와 같은 양심적인 문화예술인의 강력한 반대에 자리를 옮겨 세워지는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이후 2006년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광화문 복원 공사가 함께 진행되어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현판식이 거행되었다. 이와 같은 광화문 현판의 역사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유일한 경복궁 중건 기록인 경복궁 영건일기(1902)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를 서울역사편찬원이 경복궁영건일기로 국역하여 발간하였다. 이와 같은 정통한 기록에 담긴 내용과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된 옛 현판 사진을 고증하여 새로운 현판 이 제작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현재 광화문 광장에 조성된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에 대한 역사적 의의와 상징성은 매우 소중하다. 이와 같은 광화문이 낳은 광복의 역사는 바로 민족의 정신이다. 후손들에게 이와 같은 역사가 바르게 전달되고 신성한 민족의 성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연관 부처는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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