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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나키즘의 과제와 자유공동체운동

[기고문]아니키스트 정신 “누구든지 남을 압박해 보라, 그는 반항할 것이다”

이문창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회 회장 | 기사입력 2019/03/19 [12:08]

요즘 몇 해 사이 우리나라에도 청년지식층 간에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서 이에 관련된 서적이며 간행물이 쏟아져 나오고 세미나라든가 인터넷을 통한 학술교류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적 활동이 과연 얼마만큼 아나키즘사상의 진수를 파악하게 하는 데 기여가 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이란 '지행합일', 즉 인격적 행위로 연결되는 데서만 진가가 나타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지식이란 자주적 인간이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으로도 양보할 수 없는 신조와 지침을 제공하는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 아나키스트가 핵심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쟁점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행동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 해답으로서의 가설을 '자유공동체운동'에서 구하려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우리의 근본 취지이다.

 

▲ 이문창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회 회장.  ©브레이크뉴스

이런 가설을 풀어나가는 순서로서 이 논제의 기본바탕인 아나키즘을 알기 쉽게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동서양 민중생활의 전통 속에서 그 원류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이 19세기 유럽의 근대사회주의 사조 속에서 어떻게 빛을 발하여 20세기 행동주의시대로 옮아갔는가 하는 것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고전적 아나키즘과 현대아나키즘의 차이는 무엇이며, 행동주의 공간으로서의 절대자유주의(리버타리아니즘)와 아나코 생디가릴즘(혁명적 노동조합주의)은 어관계성으로 연결되고 있는가? 이런 화두들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되, 이 글에서는 주로 아나키즘 사상의 기본적 특징이라 할 '자주인적 개체의식'과 '공동체의 지향성'에 중심을 두고 논술해 볼 것이다.


단군 이래 한국 민중의 생활전통 속에 흐르는 아나키즘적 원류는 상호부조적 자위적 건설적 측면과 반역적 파괴적 저항적 측면 두 가닥이 동아줄처럼 서로 이합을 반복하며 흘러내려온 것을 발견케 된다. 절대다수 민초들은 생존적 생태의 본능에 따라 서로 모여 원시적 농경공동체(마을)를 꾸려가며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질서를 터득하는 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골치 아픈 것은 그 아름다운 꽃밭의 순진한 백성들을 통치한답시고 노예로 만들어 군림한 지배자들의 폭압이요, 가렴주구였다. 매번 자위수단으로서 이에 항거하여 몸부림치던 것이 이른바 정사에 올라있는 반적이요 비도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들까지도 일단 보다 큰 외부의 침략자가 나타나 생존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소이에 구애되지 않고 모두 힘을 합쳐 난국을 극복하던 것이 우리 백성들의 자주협동의 역사요, 그 상호부조의 저력의 덕으로 우리겨레가 수백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오늘날 이만큼 버틸 수 있은 것임을 분명히 해놓아야 할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 부문의 작업은 일후 좀더 많은 기초자료가 모아진다면 우리역사를 본격적인 민중생활사 중심으로 다시 쓰기 위한 '통사적 서설'로서의 가치 또한 없지 않을 것으로 본다.


강도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나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수용한 한국 아나키즘이 처음부터 근대화 과정의 서구적 유형과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적이도동(蹟異道同)이라고나 할까, 상황에 따라 행적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가는 길의 본질에 차이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이 길로 접어든 아나키스트 동지들의 한결같은 심경이었음을 다음과 같은 조선혁명선언의 한 구절에서 감지할 수 있다.


즉 "안중근 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잘 나타났지만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라고 자성한 다음, '민중·폭력' 양자의 일치 속에 "외나무다리 위의" 민중직접혁명을 부르짖은 것은 당시 세계적 아나키스트 운동의 수준으로 놓고 보아도 결코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할 것이다. 그들의 전략목표는 우선 "모든 빼앗긴 것을 되 빼앗아오자'는 데 두었다. 우리민중 하나하나의 '모든 생존적 자유의 탈환'으로 직결되는 이 싸움의 상대는 강도 일본을 정면의 적으로 하고, 내부적으로 봉건적적 토착자본세력(우)과 볼세비키 공산주의자들(좌)등 3면의 적이었다. 양심적인 좌파민족주의세력과의 연대로 겨우 전선의 교착상태를 유지하였지만 싸움은 격렬하고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일본에서 중국 등지에서 이 힘겨운 싸움을 버티어 일제의 패망을 맞이한 것이 우리 아나키스트 선배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귀한 희생의 대가를 치렀던 것이 우리 아나키스트선열들의 항일 혈투사였다.


8·15 해방 이후 한국아나키스트들은 해방 전 항일전투과정에서 연마한 프로그램에 따라 그 지향목표를 크로프토킨적 자유공동체 사회를 구현하는 데 두자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였다. 다소의 의견차이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과도기적 운동추진의 수단을 정치운동에 치중하자 느니, 사회운동에 무게를 싣자느니 하는 방법론에 대해서 이었다. 어느 쪽이건 간에 그들은 농촌과 공장에 기반을 둔 자유연합 자유합의의 사회모형을 짜는 데 주력하는 한편, 민중의 자주적 각성에 기대를 모았다.


일제는 패퇴하였지만 외세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치는 좌우 양면의 적(봉건적 토착자본주의자들과 공산국가주의자들)을 상대하기에 민중이나 아나키스트들의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6·25라고 하는 미증유의 전란에 휩싸여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절대절명적 처지를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백성들은 내 운명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자각에 눈뜨게 되었다. 무인지경의 폐허 위에 이룩한 산업화의 금자탑은 그야말로 민중들의 자주적 역량의 산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민주화 투쟁과정을 통해 성장한 시민의 자치역량! 이야말로 이제부터 아나키스트들이 발 벗고 나서 갈아야 할 문전옥탑이 아닐 것인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지적 풍토에 아나키즘의 물결이 다시 밀어닥친 가장 큰 배경으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권 몰락에 따른 기존 좌파세력의 혼란과 이 과정에서 새로운 대안에 대한 모색이라고 하는 틀에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의 생활실천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싹터 나온 것이 못되기 때문에 별수 없이 이러고 저러고 하는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와 병행해서 최근 우리 사회에는 사이버 공간 등 '제3의 물결'의 기류를 탄 포스트 모던적 아나키즘의 징후가 여러 면에서 떠오르고 있지만, 이 또한 아직은 지적 호기심을 찾아 맴도는 수준이니 크게 기대할 바는 못 된다.


그보다도 지금 우리가 주목할 점은 비전, 반세계화 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전 세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NGO, NPO 운동의 추세이다. 신자유주의로 포장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일원화'에 맞서 싸우는 이 운동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고 연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은 이런 그룹들이 자칫 체제 참여의 프로패셔널리즘 또는 집단이기주의의 속성에로 타락해버리는 경향은 아나키즘의 본령과는 거리가 먼 것이니 깊은 반성이 요구되는 측면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21세기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 한국의 아나키스트가 추구할 행동강령이 왜 자유공동체운동일 수밖에 없는가? 이 강령에 도달하기 위한 당면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통찰하는 데서부터 판을 다시 짜야할 것이다.


모든 발상의 원천은 개인(자아)의 자유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남들이 자유롭지 못하면 내가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 진리이다. 아나키스트사상을 아나르고·산디칼리즘의 방향으로 전개하는 루돌푸·록커가 말한 것처럼 기왕에 우리는 '경제적 주박과 정치적 사회적 노예화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문제를 아직도 우리 시대의 문제로 떠안고 살아왔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날 우리는 하이테크 뷰로크러시의 중압으로부터 어떻게 풀려날 수 있는가 하는 더욱 무거운 짐까지 아울러 짊어지고 있다. 이 3중의 과제에 전방위적으로 대처하면서 생각을 나 개체의 자유를 탈환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여 지역적 세계적 자유의 탈환문제에 접근하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공동체 운동의 방향이다. 그 경제적 행동전략으로서의 아나르고산티칼리즘운동을 리버타리안의 철학적 기조 위에서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조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 한국이 껴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이 곧 지구촌과 직결되는 문제들이다. 그것은 백성들 자신이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 이웃과 연대해가며 자유를 되찾는 데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 출발점은 누구에도 양도할 수 없는 개체로서의 자유가 불가결의 전제조건이다. 이 개인의 출발점을 오늘 우리 사회의 생산·생활의 자유탈환문제와 연계시키는 데서 자유공동체운동의 기본목표에 도달하려는 것의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당면한 과제로서 안출한 오늘의 컨센서스이다.

 

아나키즘은 어떠한 사상인가?

 

"누구든지 남을 압박해 보라, 그는 반항할 것이다. 권력에 반항하는 자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자는 누구나 자주인 되기를 갈망하는 '반권위주의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아나키스트라 부른다."


누구나 권위를 부정하고 그것과 싸우는 자는 아나키스트라 할만하다는 이 명쾌한 정의는 그 간결함으로 해서 매력이 있으나, 그 간결함은 도리어 아나키즘을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도 혼란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된다. 이와 같은 혼란의 요인은 이 사상이 심지어 논적들이 감행하는 치명적인 악평까지도 능히 포용할 만큼 무엇 하나 수용 못할 것이 없으리 만큼 폭이 넓은 그 배경에서 유래한다. 백지와 같다고나 할까, 무엇하나 감당 못할 것이 없고 거리낄 것이 없는 순수성이야 말로실로 아나키즘 사상의 기본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우리가 아나키즘을 설명하는데 애로가 되는 또 다른 요인으로는 주로 아나키스트들이 극도의 자유와 개인적 판단의 우위를 강조하는 나머지, 융통성 없는 독단적 체계의 이론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각양각색의 견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상시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아나키즘은 다양하고 불일정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교의이다. 또한 운동으로서도 그것은 끊임없는 변동 속에서 성장하고 결코 꺼지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그런데서 지난 1세기 반 동안 아나키즘은 그 프로메디우스와 같이 변화무쌍한 특질에 의해, 훨씬 강력했지만 적응력이 약한 여러 운동들이 소멸해버린 자리에서, 새로운 사상적 생명의 움이 이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길 수밖에 없었던 부정적 시각이나 곡해의 요소들을 털어버린 다음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우선 아나키즘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곡해하거나, 일부 혼동을 일으키기 쉬운 사례 몇 가지에 대해 해명 겸 들어보고자 한다.


첫째, 아나키스트를 무질서, 또는 악질적인 혼란의 조성자로 매도하는 경향에 대해서이다. 통속적으로 "아나키"는 '무 지배' 또는 좀 더 적극인 의미에서 '지배를 안 받겠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어다. 그것을 아나키스트에게 악의적으로 들이대, 파괴한 질서에 대신할만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면서 단지 무질서만을 조장하는 자들이라고 폄하하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천만부당한 험구다! 아나키즘에 있어 아나키는 도리어 고도의 질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지위'의 자연의 질서요, 남을 다스리는 통치의 질서가 아니라 스스로 다스리는 자율자치의 질서다. 새로운 건설을 위해 잘못된 질서, 바르지 못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것이지 덮어놓고 파괴만을 일삼으려는 것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그런데도 프랑스혁명기의 소용들이 속에서 아나키, 아나키스트라는 이 통속적인 용어가 각종정파들 간에 난무한 것은 주로 그들의 반대자를 잡는 데 써먹는 욕설로서 였단다. 1840년대에 이르러 다행히 역설의 명수요 이율배반적 선동자임을 자부했던 피엘· 죠세프 ·프루동은 반대파를 비방하는데 사용하던 이 아나키란 용어를 자신의 칭호로 받아들여 떳떳이 '나는 아나키스트'라고 나선 데서 무질서적, 부정적 어의를 건설적 긍정적으로 뒤바꾸어놓으므로 통치기구에 대체할 아나키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그는 혼란을 조성한 책임은 통치기관에 있으며 통치기관이 없는 사회만이 자연스러운 질서와 사회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야기는 좀 다르지만, 금세기 초 일본의 한 젊은 학도가 무지배라는 뜻의 이 어휘를 무정부주의로 번역한 데서, 우리 한자 세계에 두고두고 누가 되었던 것 또한 깊이 음미해 볼만한 일이다.


그 다음 아나키즘은 니힐리즘(허무주의)과 어떻게 다르냐에 대해서이다. 아나키즘을 니힐리즘과 동일시하거나 또는 부정적인 철학, 단순한 파괴의 철학으로 보거나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오해에 대한 책임이 얼마간 아나키스트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에 흔히 자기네의 주장의 파괴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권위를 전폐한다는 바로 그 사상은 전형적인 근대사회제도의 골간을 뿌리 채 허물어버리겠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에 비하여 그들의 재건계획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어서 사람들을 신복시키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어떤 아나키스트 저술가도 고립적으로 음울한 파괴의 사상에만 매몰되어 있은 일이 없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프루동도 바꾸닌도 한결같이 파괴를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 죽음의 페허 위에 새로이 돋아나는 자유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경탄할 일이다. '독일에 있어서의 반동'(Reaction in Germany)의 말미에서 미하일 바꾸닌은 이렇게 기원하고 있다.


"오직 그것이 전생명의 신비적이고도 영원히 창조적인 원천인 까닭으로 해서만 파괴하고 전멸시키는 그 영원한 정신을 믿게 할지어다. 파괴에의 정열은 또한 창조적 정열이기도 하다!"


요컨대 아나키스트가 무조건 절망하고 모든 것을 허무로 규정하여 처신하는 니힐리스트와 다른 것은 바로 그들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사회변혁에 대한 낙관을 신념으로 하고 행동한다는 데 있다. 한편 아나키스트가 러시아의 역사에서 소위 니힐리스트라 불리어진 '인민의 의지단(The people' will)과도 확연히 유별되는 것은 후자가 19세기 후반에 제정 러시아의 독재적 지배자들을 암살하고 입헌정부를 세우려는 조직적인 음모집단이었다는 데 있다. 정권 장악에 목적을 두었던 그들의 운동을 엄밀한 의미에서 니힐리스트라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아나키스트와는 더욱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나키즘과 테러리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아나키스트가 설령 니힐리스트는 아닐지 모르지만, 테러리즘의 일면까지 부인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사실 폭력에의 경향성은 쟈코방파, 브랑키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마티니와 카르발의 추종자 등등 할 것없이 이 시기 모든 정파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의 현상이었다. 일부 아나키스트가 1880년대를 전후하여 폭력적인 행동으로 기운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파리코뮨의 실패 후 모든 국경이 폐쇄되는 등 극도로 행동의 자유가 위축을 당한 상태에서 그들을 자극한 것은 러시아의 나르도니키들에 의해 감행된 아렉산더 2세의 암살(1881년)이었다.  guso9662@daum.net


*필자/이문창.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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