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 (236) 예향이 품은 역사 이야기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02/11 [07:17]

반도의 끝자락을 바다에 적신 남녘의 항구도시 목포(木浦)는 예향이다. 1897년 개항한 이후 일세를 풍미한 헤아릴 수 없는 문인과 화가에서부터 소리꾼과 춤꾼을 배출한 목포는 곧 예술로 승화된 시대의 감성이 숨결처럼 일렁이는 항구도시이다.

 

이와 같은 목포항(木浦港)의 개항 역사를 살펴보면 1876년 부산의 개항을 시작으로 1880년 원산과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후 1897년 진남포와 함께 개항되었다. 이와 같은 목포와 진남포의 개항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목포는 개항 당시 유달산 자락의 오늘날 북교동에 작은 어촌마을 목포진(木浦鎭)이었다. 진남포 또한 평안남도 남부의 대동강을 경계로 황해도와 접경을 이룬 작은 어촌의 삼화군(三和郡)이었다.
 
이와 같은 목포와 진남포는 지형적으로 대형 선박의 출입이 쉽지 않은 조건을 가진 연안의 항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에도 두 항구가 개항된 배경에는 쌀과 면화 그리고 소금의 주요한 산지인 호남의 관문과 북한 관서 지역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주요한 평야의 곡물 생산지라는 바탕에서 개항된 것이다.       
 
이러한 개항의 역사를 깊게 헤아리면 우리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한 실체적인 조명을 늘 비켜 갔다. 이에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1876년 우리나라 근대조약의 효시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성사시킨 인물로 부산항을 개항시켰다. 이어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맺어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통하여 인천항을 개항시킨 장본인이다. 이어 1884년 박영효와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이후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시킨 인물이다. 이를 요약하면 일제 강점이라는 국권침탈의 기초 작업을 완수한 인물인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 최초의 종합상사의 지평을 열어 전후 일본의 경제 부흥에 견인차 구실을 담당한 오늘날 일본 최대의 재벌기업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의 전신인 선수회사(先収会社)를 1874년 창설한 인물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근대사와 함께 오늘의 일본이 존재하는 바탕이라 할 만큼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에 훗날 상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본 칼럼에서는 주요한 내용을 간추려 살펴본다.

 

▲ (좌로부터) 목포시 전경 / 호남은행 목포지점(등록문화재 제29호) 출처: 목포시/ 문화재청/     © 브레이크뉴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삶에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인물이 있다. 바로 그중 한 사람이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숨진 대한제국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1885년 일본 초대 총리가 되었으며 1892년 두 번째 총리를 역임하며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 체결시킨 장본인이다, 이에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1909년 우국지사 안중근의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일찍 인연을 맺어 함께 영국에 유학하여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천재적인 정세 판단력과 선진국의 상업적인 시스템을 꿰뚫는 명석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내각 체제에서 그는 언제나 주요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이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 조선의 국권 침탈에 대한 치밀한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살피게 한다.

 

당시 이노우에 가오루는 권력을 유지하는 자금력에 대한 중요성을 깊게 인식하여 정경유착의 전형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이에 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마쓰다 다카시’(益田孝. 1848~1938)와 종합 무역회사의 선구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선수회사(先収会社)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선수회사(先収会社)는 권력의 유착으로 2년 동안의 짧은 기간에 일본 군부에 여러 물품의 납품을 통하여 크게 성장하였으나 1876년 반대파의 견제에 문을 닫았다. 이때 손을 잡은 상업 가문이 미쓰이 가문(三井家)으로 바로 그 세력을 지칭하는 미쓰이구미(三井組)다. 이에 선수회사(先収会社)의 시스템과 인력을 미쓰이 가문으로 승계시켜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이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종합 무역회사 체계를 갖춘 기업으로 탄생하면서 이노우에 가오루의 분신과 같았던 ‘마쓰다 다카시’가 초대 사장이 되었다.

 

이와 같은 미쓰이 가문은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말기로 거슬러 오르는 역사를 가진 상업 가문이다. 일본 혼슈지방의 미에현(三重縣) 중부 도시 마스사카시(松阪市)에 전당포와 주점에서 출발한 상업 가문이었다. 이후 에도막부 시대에 이르러 1673년 미쓰이에치코야(三井越後屋)라는 포목점을 오늘날의 동경인 에도(江戸)에 열었다.

 

당시 이들은 주요 상권인 에도(도쿄)와 오사카의 물류 운송과 대금 지급에 관한 기발한 시스템을 창안하여 이른바 환전상의 업무를 지배하면서 강력한 기반을 일구었다. 이에 막부와의 오랜 유착으로 권력의 주요한 자금원이 되어 대를 이어왔다, 이러한 미쓰이 가문(三井家)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손을 잡았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처럼 유사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바탕을 구축한 이후 은밀한 행보를 시작한다. 이후 1892년 8월 이토 히로부미가 2차 총리에 오르면서 내무장관에 취임하였다. 그해 11월 말경 이토 총리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게 되자 다음날 총리대행에 올라 1893년 2월 초순까지 총리대행을 수행하였다. 

 

이후 1894년 우리나라는 전라도 동학군이 봉기하여 삽시간에 전주까지 함락시키자 임오군란의 전례에 따라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진압군을 출병시키며 일본과 맺은 텐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 이를 통고하였다. 이에 조선의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1848~1906)는 본국에 이를 보고하였다. 당시 일본은 중의원(衆議院)에서 이토 내각의 탄핵안이 가결되어 벼랑에 몰렸던 터라 ‘이토 히로부미’ 총리는 즉시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이어 일본공사관 보호 명분으로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당시 조선의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는 마이니치 신문기자 출신 외교관으로 1880년 조선에 부임하여 부산포 서기관을 거쳐 경성 공사관에 근무 도중 1882년 임오군란 때 잠시 본국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부임하였던 조선의 정세에 대해 매우 익숙한 인물로 임시대리공사를 맡고 있었다.
 
이는 1889년 당시 청나라 특명 전권대사로 부임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1833~1911)가 1893년 7월부터 조선 공사를 겸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어 1894년 6월 청나라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즉시 조선에 공사로 부임하여 청나라와 협상에 나서는 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결국 일본이 의도한 협상의 결렬로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1894년 10월 전시 중에 내무부 장관을 사임하고 조선 공사로 부임한 인물이 바로 ‘이노우에 가오루’이다.

 

이와 같은 ‘이노우에 가오루’가 1895년까지 재직하면서 청일 전쟁 중에 서해를 샅샅이 시찰하였다, 이는 청일 전쟁 마무리 이후 일제 강점에 대비한 진남포와 목포 개항의 필요성을 빠르게 정리하여 이를 실현하게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식량에 대한 시대적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여 이에 대비한 상업적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후 목포항과 진남포항의 미곡(쌀)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이어 조선의 국권을 탈취한 뒤 중국을 침략하면서 이와 같은 항구를 주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청나라는 배상금으로 기축 화폐 고평은(庫平銀) 2억 냥을 지급하면서 당시 세계 강대국이 청나라와 무역하는 동등한 조건의 통상권을 일본에 내주는 굴욕을 당하였다. 이때 일본은 이와 같은 전쟁 배상금을 바탕으로 금본위제를 시행하여 자유경제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 대한 공개되지 않은 더욱 상세한 이야기들은 향후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이와 같은 개항의 역사를 가진 목포에서 가장 아프게 시대를 관통한 이야기가 있다. 평양 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尹心悳. 1897~1926)과 연인이었던 목포 출신의 극작가 김우진(金祐鎭. 1897~1926)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수 윤심덕은 루마니아의 음악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h. 1845~1902)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1926년 일본 닛토레코드사에서 녹음하였다, 이후 녹음을 마치고 귀국하던 뱃길에서 연인과 함께 대한해협에 투신한 것이다. 당시 닛토레코드사는 이와 같은 슬픈 이야기를 앞세워 음반을 출시하였다. 이에 세간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폭발적인 음반판매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우리나라 연극의 개척자인 극작가 김우진은 장성군수를 역임한 김성규(金星圭. 1864~?)의 아들이다. 김우진의 부친 김성규는 목포 상공학원의 후신으로 상업 전수학교를 설립하였다. 바로 목포를 지킨 운림산방 3대의 화가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이 졸업한 학교이다, 이와 같은 김우진의 부친 김성규는 오늘날 신 전남 도청이 들어선 지역인 목포 남악에 거주하던 자택을 뜯어 북교동 성당 사제관 숙소를 지었던 이야기도 역사에 담긴 이야기다. 기록에 의하면 막내아들은 사제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 예향 목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성동과 인근 양동 태생의 예인이다. 목포 대성동은 양동과 인접한 곳으로 우리의 전통 춤사위를 구현한 시대의 무인(舞人) 이매방(李梅芳. 1927~2015)이 출생한 곳이다. 이매방의 어린 시절 옆집에 전남 진도의 섬 조도(鳥島) 출신의 목포 권번의 기생 함국향(咸菊香)이 살았다. 당시 함국향이 어린 이매방의 춤을 추며 노는 모습을 보고 너는 춤에 재능이 뛰어나니 춤을 배우면 대성할 것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의 할아버지 이대조(李大祚)는 목포 권번에서 호남류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치던 명인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재능을 살핀 함국향(咸菊香)의 권유로 춤에 입문하여 훗날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僧舞)와 제97호 살풀이춤 예능 보유자가 되어 세계 속에 우리의 춤을 알린 당대의 무인이 되었다. 또한, 이매방이 목포 권번에서 공부할 때에 가야금 산조의 명인 함동정월(咸洞庭月. 1917~1994)의 격려도 한몫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함동정월이 가정형편으로 어려서 고향 강진을 떠나 광주 권번에 들어가 기생수업에 필요한 춤과 소리의 기본을 배운 이후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때 그의 출중한 재능을 살핀 인물이 있었다. 바로 가야금 산조를 창시한 전남 영암 출신의 김창조(金昌祖. 1865~1919)의 제자 최옥산(崔玉山. 1905~?)이었다. 이렇게 가야금을 배운 그녀는 당시 크게 번성한 목포항의 경제적 영향으로 번창한 목포 권번에 적을 두고 잠시 활동하였다, 이때 어린 이매방의 춤사위를 보고 대성할 자질이 충분하니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함동정월은 19세에 광주에서 열렸던 일본 컬럼비아레코드사가 주관하는 경연대회에서 판소리 부문 최연소 1등 상을 받았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판소리와 가야금 산조 그리고 가야금 병창을 녹음하면서 그 명성이 알려져 서울에서 활동하였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의 예능 보유자가 되어 그 계승과 발전에 헌신하였다.

 

이와 같은 이매방이 태어났던 대성동과 바로 인접한 양동에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이 살았다. 당시 그의 본명은 이옥례(李玉禮)로 호적 이름은 이옥순(李玉順)이었다. 이러한 이난영이 북교초등학교 4학년이던 1929년 가정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순회극단 태양극단에 입단하였다. 당시 태양극단 단장은 선구적인 연극인 박승희(朴勝喜, 1901~1964)였다. 박승희는 메이지 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당시 도쿄 유학생들을 모아 토월회를 조직하였던 한국 신극 운동의 선구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든 재산을 바쳐 토월회의 발전에 열정을 바쳤으나 내분과 운영난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태양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이난영의 예명을 지어준 인물이다.

 

이후 이난영은 1932년 삼천리 가극단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다가 뛰어난 가창력이 오케레코드 사장의 눈에 띄어 전속 가수가 되었다. 이에 1933년 데뷔곡 ‘향수’를 녹음한 후 다음 해 1934년 ‘고적’과 ‘불사조’ 그리고 신민요 가락의 ‘신강남’과 ‘봄맞이’ 등을 연이어 녹음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이때 1934년 일본 동경의 유명 공연장인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일본 명가수음악대회에 유일하게 조선인으로 출연하여 뛰어난 가창력으로 유학생과 교포는 물론 일본 현지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러한 이난영의 가창력이 인정받게 되면서 1935년 ‘오케레코드’와 ‘조선일보’가 주최한 우리 노래 가사 모집에서 당선된 ‘문일석’(본명-윤재희 추정?~1944)의 ‘목포의 눈물’을 손목인 작곡으로 이난영이 부르게 되었다. 이는 영원한 목포의 노래가 되었으며 그를 가요계의 여왕으로 등장시켰다.

 

▲ (좌로부터) 이난영 목포의 눈물 음반 / 이매방 / 목포 박준상 시인 출처: 이매방 춤 보존회/ 박준상 시인     © 브레이크뉴스

 

이후 이난영은 1936년 오케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이던 천재음악가 김해송(金海松. 1911~?)과 결혼하였다. 이후 김해송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노래하며 가요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에게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남편 김해송이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이난영은 남편과 함께 이끌던 KPK악단을 손수 운영하며 활동하다가 1965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자녀들이 부모의 대를 이어 김씨스터스와 김보이스로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목포의 역사에는 문화와 예술에서 정치와 경제에 이르는 각 분야에서 시대를 관통한 이야기를 가진 인물들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대부분 익히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이와 같은 목포의 역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이야기는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모이며 부인 홍라희와 중앙일보. JTBC를 총괄하는 중앙홀딩스의 홍석현 회장의 어머니인 김윤남(金允楠. 1924~2013)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단순하게 국내 최대기업 회장의 장모와 언론사 그룹 회장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흥미로 살펴보는 것이 아님을 주지하기 바란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그동안 역사적으로 간과하여온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았음을 헤아려 이번 기회에 이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김윤남은 1924년 목포에서 은행가 김신석(金信錫. 1896~1948)의 1남 1녀로 태어났다. 김신석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 영업국에 근무하였다. 이 무렵 전남 영암 출신의 갑부 현준호(玄俊鎬, 1889~1950)는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 귀국하여 은행설립에 주력하였다. 이는 1908년 세워진 광주 농공은행이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에 흡수 합병되는 사실에서 일본이 추구하는 전략적 의도를 간파하고 이에 대응하는 민족은행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었다.

 

이를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먼저 살펴 가야 하는 인물이 일본이 낳은 귀재 ‘메가다 다네타로우’(目賀田種太郎. 1853~1926)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천재로 당시 일본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 學文所)에서 영재교육으로 한문을 공부하였다. 이후 에도막부의 명문 학교 ‘카이세이 학교’(開成学校)에서 수학과 영어를 비롯한 서양 학문을 공부하였다. 이후 16살 나이에 ‘시즈오카학문소’(静岡学問所)의 영어 교수가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천재성에 ‘시즈오카 번’(静岡藩)의 후원을 받아 자신이 다녔던 ‘카이세이 학교’(開成学校)가 대학으로 변신한 도쿄대학의 전신인 ‘대학남교’(大学南校)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870년 제1회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하버드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 법학과에 유학하였다. 이후 4년 만에 졸업하고 1874년 귀국하였다. 이는 일본이 1871년부터 시행한 ‘이와쿠라 시찰단‘(岩倉使節団)에 앞선 일본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하버드 대학 최초 입학과 졸업자라는 사실에서 그의 천재적인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공부를 마치고 1874년 일본에 돌아온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백년대계를 지향한 세력의 국제적인 인재양성 계획의 주요한 책임을 맡게 된다, 이에 자신이 다녔던 ‘대학남교’(大学南校)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춘 미국행 유학생 9명을 선발하여 감독관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당시 그는 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학업을 지도하여 전원을 졸업시켜 1879년 일본에 돌아왔다. 다음 해 1880년 오늘날의 전문학교인 전수학교를 설립한다. 바로 이 학교가 1922년 오늘날의 ‘센슈대학(専修大学)이 되었던 학교이다. 당시 이 대학을 설립한 배경을 살펴보면 그의 뛰어난 천재성이 드러난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유학생들에게 서양대학의 장점을 모은 대학의 설립을 강조한다. 이후 이들이 귀국하여 그 방법론으로 오늘날의 대형 로펌과 같은 법률회사를 만들어 기금을 모아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메가다 다네타로우’(目賀田種太郎. 1853~1926)는 음악에도 천재적인 감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에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인 ‘도쿄음악대학’의 바탕이 되었던 ‘도쿄음악학교’의 설립에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는 그가 1905년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 1904년 최초의 한일협약에서부터 재정 고문을 담당하였던 인물이다. 역사를 가름할 주요한 협약에서 재정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참여하여 실질적인 전략을 매만진 것이다, 이후 그의 머리에서 탄생한 것이 일본이 체계적인 한일병탄(韓日倂呑)을 위하여 1906년 설치한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이다. 이와 같은 일제 통감부에 일본의 천재 ‘메가다 다네타로우’는 또다시 재정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서울에 왔다. 그리고 그가 제일 먼저 수행한 일은 우리의 전통 음악에 대한 것이었다, 바로 1907년 대한제국의 왕립음악 기관이었던 ‘교방사’(敎坊司)를 새로운 명칭인 ‘장악과’(掌樂課)로 이름을 바꾸어 개편한다. 이때 ‘장악과’(掌樂課)에 소속한 ‘궁중 악사’의 조직을 ‘국악사장’(國樂師長)과 ‘국악사’(國樂師) 로 개편하면서 최초의 ‘국악’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국악(國樂)이라는 명칭이 일본의 귀재 ‘메가다 다네타로우’에 의하여 작명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역사를 관통한 일본의 천재 ‘메가다 다네타로우’의 머리에서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제일 먼저 조선에 들어와 민족의 숨결 전통음악의 직제를 개편하고 그 명칭을 국악(國樂)으로 바꾼 의도에 대하여 살펴오면서 고도로 계산된 실로 무서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언제인가 기회가 되면 일본의 천재 ‘메가다 다네타로우’가 두었던 한 수에 대하여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과 천재적인 지략으로 1920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제1회 총회에 외무대신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郎. 1866~1945)와 영국대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 1860~1930)와 함께 참가하였다. 당시 회의에 참여한 영국대사 ‘하야시 곤스케’는 1900년 일본공사로 한국에 부임한 인물로 그가 당시 강경한 외교정책으로 치밀하게 항일병탄의 초석을 만들었던 중심인물이었음을 헤아리게 되면 당시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주요한 시기에 일본의 국제적인 감각을 터득한 전략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무방비 상태였음을 살피게 된다.

 

이와 같은 재정 고문 ‘메가다 다네타로우’(目賀田種太郎. 1853~1926)가 이후 추진한 사업이 바로 야심에 찬 식민지정책의 하나로 농업과 공업의 발전을 전면에 세워 그와 같은 자금을 공급할 농공은행의 설립이었다. 당시 그는 농공은행이 설립되면서 발행하는 채권을 1900년 설립된 일본의 특수은행 일본흥업은행(日本興業銀行)이 인수하는 약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결국 농공은행의 전체적인 운영권을 확보하겠다는 의도였다. 이와 같은 농공은행 운영권 확보를 통하여 조선 경제의 숨통을 거머쥐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일본의 신생은행 일본흥업은행(日本興業銀行)의 외채 조달의 부진으로 약정을 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국내 자본에 의하여 1906년 서울 한성농공은행이 설립되면서 1907년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 11개의 농공은행이 설립되었다.

 

이에 일본은 1918년 특수은행인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을 설립하여 전국의 모든 농공은행을 흡수 합병하였다.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전남 영암 출신의 갑부 현준호(玄俊鎬, 1889~1950)는 이에 대응할 은행설립에 주력하여 1920년 호남은행을 광주에 설립하였다. 이 무렵 1920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에 의하여 민족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으며 당시 현준호는 주주로 참여하여 동아일보 감사역을 맡았다. 

 

당시 현준호는 호남은행 설립 이후 전무로 취임하였으며 은행장은 목포 남교동 출신의 주요한 관료를 두루 역임하였던 김상섭(金商燮, 1876~1933)이었다. 그는 무안 항과 동래 항 경무관을 거쳤으며 전남 완도군수와 경북 칠곡군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광주지방재판소 검사가 되었으며 대구지방재판소에 변호사로 등록한 법률과 행정업무의 달인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호남은행은 1922년 경남 산청 출신의 은행원으로 조선은행에 근무하던 회계의 천재 김신석(金信錫. 1896~1948)을 발탁하였다. 또한, 당대의 민족 법률가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1888~1964)를 감사로 추대하였다. 김병로는 당시 경성전수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에 3.1 독립운동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밀양지원 판사로 잠시 근무한 이후 1919년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이처럼 민족자본으로 유일하게 설립된 호남은행은 업무에서 일체의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인 직원 채용을 하지 않았으며 일본인과 관련 단체에 융자 불가라는 원칙을 세워 끝까지 이를 고수하였다. 이와 같은 호남은행은 광주에 본점과 목포 지점으로 발족하여 순천과 장성 그리고 보성 등지로 지점을 확대해 갔다.

 

이에 일제는 조선 민족은행의 성장을 좌시할 수 없는 문제로 인식하여 1928년 신 은행령을 공포하였다. 이는 조선 민족은행의 일본 은행으로의 통합을 통한 경제권을 완전하게 통치하려는 식민지금융정책의 추구였다. 이에 호남은행의 회계와 경영의 문제점을 들춰내기 위하여 일본 최고의 회계사를 불러들여 오랜 감사를 시도하였지만, 천재적인 암산 능력을 바탕으로 회계의 귀재이었던 김신석과 법률에 통달한 김병로의 완벽한 방어에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라는 찬사를 남기고 철수한 일화는 당시 세간의 화제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호남은행에 대한 더욱 노골적인 압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완벽한 업무처리에 그 명분을 찾지 못한 일제 당국은 호남은행의 일부 임원과 본점 지점장을 일본인으로 교체하라는 협상안을 제시하였지만, 호남은행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호남은행은 오랜 법률적 투쟁과 물밑 작업을 병행하여 민족은행의 고수를 위하여 분투하였지만, 1942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합병되고 말았다.  

 

일제의 최고 회계사들도 혀를 내두른 회계의 천재 김신석은 민족은행인 호남은행의 존립을 위하여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바쳐 헌신한 은행가였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부분이 있다. 훗날 역사는 이와 같은 김신석과 현준호를 친일 반민족 명단에 실었다. 그 주된 이유는 조선 총독부의 총독자문위원인 중추원 참의 직함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삼았다.

 

필자는 1931년 현준호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1936년 김신석이 중추원 참의가 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주시하였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민족은행 호남은행의 번영과 확장에 대하여 좌시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으로 인식하였던 시대 상황과 맞물린 이야기이다. 이에 은행 업무를 총괄하는 회계의 천재 김신석에 대한 다양한 압박과 사찰이 진행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이와 같은 김신석을 보호하려는 방안이 강구되었던 시대상황도 역사가 품은 이야기이다, 필자가 살펴온 정황과 기록에서는 이들이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내용도 많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많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목포에 등록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이는 1929년 건립된 건물이다. 이를 마치 호남은행 목포지점이 1929년 설치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1920년 호남은행이 설립되면서 본점은 광주에 두었고 목포지점이 함께 인가를 받았다. 이는 전라도가 1895년 전주부와 나주부 그리고 남원부와 제주부로 구분되었으나 1896년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개편되면서 도관찰부(道觀察府)가 광주에 세워졌다, 이후 1910년 일제강점기에 전남도청으로 바뀌면서 도청소재지에 인가되는 은행법령으로 본점 소재지가 광주로 인가된 것이다.

 

당시 목포항의 번영으로 본점 광주보다 목포지점의 운영이 중시되어 1922년 발탁된 김신석(金信錫. 1896~1948)이 목포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재직 중에 1924년 딸 김윤남(金允楠. 1924~2013)이 태어났다. 이후 1926년 김신석은 임원으로 승진하여 광주 본점에서 근무하였다. 이에 김윤남은 광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화여전을 졸업하였다.

 

이후 김신석은 호남은행 전무로 재직 중에 1942년 호남은행이 동일은행(東一銀行)으로 강제 합병되면서 동일은행 상무로 재직하였다. 이와 같은 동일은행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민족계 은행 병합정책에 따라 민족은행 한일은행과 호서은행을 합병하여 1931년 설립된 은행이다. 이후 1942년 호남은행을 합병하였으며 1943년 다시 한성은행과 합병하여 조흥은행으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은 조흥은행에 상무로 재직하던 김신석은 당시 경성지방법원 인사 조정위원이었다. 이때 사위가 될 홍진기(洪璡基. 1917~1986)를 만나게 된다. 홍진기는 1940년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1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그는 당시 경성제대 법학과의 조교로 근무하면서 ‘주식회사의 합병에 있어서의 교부금’(株式會社の合併における交付金)이라는 논문을 경성제대 법학회 논집에 게재하였다. 당시 그의 논문은 경성제대의 역사에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단 2명의 조선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논문의 내용은 회사의 합병 시에 주식과 함께 일정액의 금전을 피합병회사의 주주에게 지급하게 되는 금전을 합병교부금이라 한다. 여기서 다양한 형태로 제공될 수 있는 제반 금전에 대하여 합병교부금의 인정에 대한 범주와 함께 그 법리적 논쟁은 오늘날에도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당시 그는 이에 대하여 놀라울 만큼 명쾌한 논리를 담아 일본 학자들이 극찬하였다.   
 
이후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로 근무를 시작하였을 때 은행가 김신석과 만나게 되어 딸 김윤남과의 혼담이 이루어졌다. 이후 1943년 10월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하여 그해 12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전주에 재임하며 조국 광복을 한 달 앞둔 1945년 7월 15일 첫 딸을 얻었다. 바로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홍라희(洪羅喜. 1945~)의 탄생이다. 이는 어머니 김윤남(金允楠. 1924~2013)은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딸 홍라희(洪羅喜. 1945~)는 전북 전주에서 낳은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이루어진 전라도와의 깊은 인연이다.
    

홍진기(洪璡基. 1917~1986)는 1945년 조국 광복 이후 사법요원양성소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향후 다가올 일본과의 치열한 외교전쟁을 대비하여 ‘배상청구조서’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정부 차원의 식민지 피해 배상 목록 작업을 이루어 냈다, ‘부동산과 문화재 문제’ ‘인적 손실의 문제’ ‘강제동원과 공출피해의 문제’로 정리된 청구 조서가 완성된 직후 6·25 전쟁이 터졌다. 이는 조금만 늦었어도 전쟁으로 소실된 많은 기록 문제로 그 작성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준비된 자료를 바탕으로 이후 열린 한일회담에서 낱낱이 반박하고 추궁하는 회담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던 사실은 역사에 남긴 이야기다.        

 

이후 홍진기는 1949년 대검찰청 검사로 재직한 이후 법무부 법무국장이 되었다, 이때 미국은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대일 강화회의)초안을 발표하였다. 당시 초안에 한국과 일본의 당면한 현안이 모두 배제된 심각한 상황을 감지하고 준비위원회 구성을 김준연 법무부장관을 통하여 정부에 촉구한 인물이 홍진기였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간과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훗날 엄청난 문제로 대두될 문제점을 정리하여 법제처장 유진오에게 이를 설명하여 장면 총리 등을 설득시켜 비로소 ‘대일 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외교 총력전을 전개하여 미국은 한국의 권리를 인정하는 다수의 조항을 포함한 수정안을 발표하였다. 이는 우리의 분명한 주권의 권리를 논리적으로 주장하여 미국이 이를 인정한 우리 역사의 외교사에서 가장 소중한 장면이었다.
 
1951년 9월 8일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와중에 미국은 연합국과 일본의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일본은 미국과 동맹 관계가 되어 미국의 군정 상태를 벗어나 독립된 자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어 같은 날 미 육군 사령부에서는 ‘미일안보조약(구)’이 체결되었다. 이를 요약하면 2차 대전 패전국 일본이 대한민국의 전쟁배상 문제를 외면한 조약이었다.

 

이후 홍진기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한일회담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일본과 한국은 1951년 10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예비회담을 개최하였다. 이후 1952년 2월 15일 제1차 본회담을 통하여 한일 양국 국교를 위한 기본조약 체결 사안과 일본 거주 한국인 법적 지위 문제 그리고 재산청구권과 문화재 반환과 어업 문제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회담이 시작되었다. 이때 법학자 홍진기 대표의 사전에 준비된 자료를 바탕으로 명쾌한 논리와 통렬한 반박은 일본 대표들의 입에 자물쇠를 채웠고 일본은 여러 이유를 들어 회담을 결렬시켰다.

 

이어 1953년 4월 15일 열린 2차 회담은 한국이 1952년 선언한 ‘인접 해양주권선언’에 대한 일본의 반발로 결렬되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후 1953년 10월 15일 3차 회담이 열렸다. 당시 재산 청구권 위원회에서 홍진기 대표의 논리 정연한 법리에 할 말을 잃은 일본은 마침내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1902~1977)의 망언을 쏟아내게 했다. 그는 일본이 36년간 한국에 많은 발전을 가져다준 나라로 이를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는 이른바 역청구권이라는 명분의 망언을 쏟아놓았다.

 

이에 홍진기 대표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의 권리에 대한 전통 국제법의 조문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통렬하게 반박하였다. 결국 일본은 구보타 대표의 역청구권 망언을 취소하였다. 이어 그는 1954년 2월 법무부 차관에 임명되어 그해 5월에 열린 제네바 평화회담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당시 그는 최초의 평화통일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을 제출하였다. 이는 오늘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북미회담과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뉴스의 봇물 속에서 그의 시대를 앞서간 역사의식을 재평가하게 한다.

 

당시 그는 여러 협약에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미국과 일본의 협약을 통하여 일본에 유리한 조문이 작성되는 문제에 명쾌한 국제법 논리로 이를 차단하였다. 이후 그는 독도에 접안시설과 등대를 설치하고 태극기를 게양해야 하는 국제법적인 논리를 환기시켜 이를 성사시켰다. 이는 오늘날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교과서에 수록하는 역사의 왜곡과 망언을 멈추지 않는 사실에서 이를 분명하게 예단한 깊은 통찰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후 그는 1958년 41세의 최연소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3.15 부정선거가 발생한 지 일주일 후 1960년 3월 23일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 달여 만에 4·19혁명이 일어나 4월 24일 장관에서 물러나 구속되었다. 이어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 혁명재판소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1963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10월 15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제3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이후 홍진기는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 사장으로 취임하여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하였다. 이후 그는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언론인으로 삶을 살았다.

 

▲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과 부인 김윤남 원불교 원정사(圓正師) / 사진 출처 유민문화재단   © 브레이크뉴스


 

1924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그의 부인 김윤남(金允楠. 1924~2013)은 1943년 12월 전주지방법원 판사이었던 부군과 결혼하여 격동의 역사를 살아왔다. 부군의 승승장구한 관직의 출세와 함께 4·19혁명 당시 내무부 장관의 책임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부군의 옥바라지를 3년간 해내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아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이와 같은 바탕에는 1962년 오라버니 김홍준의 부인인 올케로부터 ‘원불교 교전’을 선물 받아 원불교에 입문한 이후 돈독한 신심으로 평생을 수행한 맑은 이슬과 같은 마음이 근원이었다.

 

필자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써가면서 몇 가지 자료를 요청하였던 목포에 있는 박준상 시인은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선친이 자주 나에게 들려준 말이 있네!" "선친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문성당 서점에서 전라남북도 도서공급권을 가지고 영업하면서 은행가 김신석과 절친한 사이로 전주에 법관으로 있던 김신석의 사위 홍진기를 서적 구입 문제로 자주 보았던 분이었네!" 

 

“당시 선친이 전한 말에 의하면 은행가 김신석은 조선에 널리 알려진 천재적인 은행가였지만, 그 인품이 낮은 사람을 낮게 보지 않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곳에 팥이 자라듯 그러한 부모의 자식 또한, 온화하고 맑은 마음이 어디를 가겠는가?” “내 나이 어언 75세인데 선친에게 들은 이야기 그대로일세!”

 

친 숙부님보다 더 가까운 삼촌으로 모시고 살아온 박준상 시인의 음성에 담긴 진정성을 삼키며 필자는 시인의 음성을 고스란히 글로 적었다.

 

예향 목포에서 태어나 광주로 이주하여 유년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살았던 김윤남(金允楠. 1924~2013)은 예향 전라도가 낳은 시대를 관통한 인물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태어나 자란 환경과 마음을 나눈 친구의 영향은 곧 사람을 만드는 바탕이라고 하였다. 예향 목포의 눈물과 청산(靑山)이 지란(芝蘭)을 기르는 빛고을 광주의 맑은 이슬이 낳은 이야기를 마감하며 박준상 시인의 시 ‘그림자’를 읊조려 본다.   

   

그림자 – 박준상

보여도
그립고


보여도
그립다 

 

다음 칼럼은 (237) ‘그리움을 삼킨 목포의 눈물’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기사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인터넷 신문사 '브레이크뉴스' 발전에 쓰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