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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 (214) 발트해 물결이 삼킨 역사 이야기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9/17 [15:18]

프로이센(Preussen) 또는 프러시아(Prussia)로 알려진 역사를 안고 프로이센 공국(Herzogtum Preußen)에서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독일이 존재하는 오랜 역사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오늘 칼럼은 상당히 많은 분량이 예상된다. 불가피하게 얽혀들 이야기가 물결처럼 밀려드는 까닭이다. 나름 역사를 헤아려 오면서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늘 아쉬웠다.)

 

북유럽과 동유럽의 주요한 육지로 둘러싼 감추어진 바다 ‘발트 해’(Baltic Sea)에는 BC. 3000년경 하늘이 내린 재해로 오랫동안 살아왔던 인도 유럽어족의 세력이 떠나갔다. 이를 일러 역사는 어둠의 바다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어둠의 땅에 BC. 2800년경 빗살무늬 토기 시대부터 발트해의 천연적인 요새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바 발트족(Balten)이다.

 

이와 같은 발트족이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동발트와 서발트족으로 나뉘어 세력화되면서 중세 무렵에는 리투아니아(Litauische)와 라트비아(Latvia)지역에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후 당시 폴란드와 잦은 마찰이 생겨나면서 폴란드에서 ‘독일기사단’(Deutscher 0rden)을 원병으로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독일기사단’은 ‘튜턴기사단’(Teutonic Order)으로도 부르는 단체로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이 연합하여 1187년부터 1192년까지 지속한 제3차 십자군 전쟁 시기에 세워졌다, 당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요충지인 이스라엘 북부의 항구도시 ‘아크리’(Acre)에서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때 독일 북부의 트라베강(Trave R.)에 인접한 도시 뤼베크(Lübeck)와 중북부의 ‘브레멘’(Bremen) 상인과 자선단체가 연합하여 아크리 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현지에 병원을 세워 구호 활동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방대한 조직을 가진 ‘독일기사단’으로 세력화되었다.    

 

▲ (좌로부터) ‘발트 해’(Baltic Sea) / 프로이센(Preussen) / ‘독일기사단’(Deutscher 0rden)/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여기서 잠시 당시 시대 상황의 이해를 위하여 전설적인 또 다른 기사단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Livonian Brothers of the Sword)을 기억하고 가야 한다. 이들은 북유럽 가톨릭 군대 기사단으로 1204년 176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PP. III. 1160~1216)시대인 1204년 승인된 기사단이다. 이후 1237년 독일기사단에 통합되었지만, 이들은 라트비아를 거점으로 리보니아 기사단(Livonian Order)으로 세력화되어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독일기사단이 1226년 폴란드 왕의 요청으로 발트족을 정복하면서 무력으로 주변 도시 종족들의 기독교 개종을 통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독일기사단의 세력이 거대해지면서 기사단을 이루는 평신도들이 신교인 루터교를 지향하면서 세력 간에 갈등이 생겨났다. 이에 기사단을 이끌던 ‘알브레히트 폰’(Albrecht von Preussen. 1490~1568)이 ‘마르틴 루터’와의 깊은 교감을 통하여 신교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이후 폴란드 왕의 공작령이 되었다. 이와 같은 ‘알브레히트 폰’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Albrecht Friedrich. Preußen. 1553~1618)에게 상속된다.

 

그러나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기에 폴란드 국왕은 신성로마 황제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브란덴부르크 공국(Brandenburg)의 ‘요아힘 프리드리히’ 선제후(Joachim Friedrich. Brandenburg. 1546~1608)를 관리자로 임명하면서 사실상의 공동상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두 집안은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작의 장녀 ‘안나’(Anna of Prussia. 1576~1625)와 요아힘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아들 ‘요한 지그문트’(Johann Sigismund. 1572~1619)와 결혼하게 된다.

 

이에 아들이 없었던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작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위인 ‘요한 지그문트’(Johann Sigismund. Brandenburg, 1572~1619)가 공국의 상속을 받았으나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이에 ‘요한 지그문트’의 아들 ‘게오르그 빌헴름’(Georg Wilhelm. Brandenburg. 1595~1640)이 프로이센 공작령을 이어받아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를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폴란드의 위축된 국력의 틈새에서 1660년 프로이센 공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에는 신성로마 황제의 수많은 자치령으로 얽힌 독일지역에서 1618년부터 1648년까지 개신교 ‘프로테스탄트’와 구교인 ‘가톨릭’ 사이에 벌어진 30년간의 치열한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이 녹아있다, 이 전쟁을 통하여 개신교인 루터파와 칼뱅파는 그 세력이 확장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서게 된다. 이후 ‘게오르그 빌헴름’ 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Brandenburg. 1620~1688)으로 이어진 역사는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추락한 경제문제를 인도 무역으로 막강한 경제력을 가졌던 네덜란드와 협력하면서 극복하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영국의 역사를 잠시 살펴 간다, 개신교 포용정책을 펴면서 시민계급의 설 자리를 제공하였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1533~1603)이 1603년 후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는 123년의 역사를 이어온 튜더 왕가(House of Tudor)의 막이 내린 것이다. 이에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House of Stewart)의 출신 ‘제임스 1세 왕’(James I. 1566~1625)이 스튜어트 왕가 최초로 영국 왕이 되었다. 이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기가 함께 있는 오늘날 영국 국기가 탄생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 찰스 1세 왕(Charles I of England. 1600~1649)이 1625년 왕위에 오르면서 청교도(Puritan) 박해 정책을 폈다.

 

그러나 1618년부터 독일에서 신교 프로테스탄트와 구교 가톨릭이 치열하게 대립한 종교전쟁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에서는 찰스 1세 왕은 신교 ‘프로테스탄트’ 편에 용병지원을 하였다. 이와 같은 전쟁비용을 과도한 세금 징수를 통한 해결과 함께 군법의 일반인 적용과 같은 전횡적인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서 이를 비준할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당시 청교도 상공인들이 장악하였던 하원의 반대에 의회와 왕권이 강하게 대립하였다, 이에 국왕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 입법의 어려움을 피하여 전제정치의 권력을 견제하는 내용을 담은 ‘권리청원’(the PetitIon of Rights)이 1628년 제출되었다. 이에 찰스 1세 왕은 다음 해 1629년 의회를 해산해 버리고 전횡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여기서 살펴 가게 되는 내용이 30년 종교전쟁에서 신교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한 내용이다. 이는 신교 ‘프로테스탄트’ 맹주이었던 팔츠 선제후(Psalz-Slmmern)이며 보헤미아(헝가리)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 1596~1632)의 부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Elizabeth Stuart, 1596~1662)는 찰스 1세 왕의 누나이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5세는 칼뱅주의자였다. 그러나 청교도가 압도적인 영국 하원에서 신교 ‘프로테스탄트’의 지원을 반대한 까닭이다, 이는 복잡한 이야기를 안고 있다.

 

먼저 같은 개신교이면서도 루터파와 칼뱅파의 대립이 거의 적대적이었다. 이는 1555년 9월 25일 열린 가톨릭과 신교의 화해를 모색한 제국회의에서 결의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Augsburger Religionsfrieden)를 통하여 제후 도시의 종교 선택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는 루터파 신교에 한정된 공인으로 칼뱅파 신교의 반발이 생겨났다. 결국 이러한 갈등에서 30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신교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한 배경에는 신성로마제국의 견제와 함께 독일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 헝가리에 이르는 힘의 균형을 분리하려는 야심을 영국이 견제한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 짚고 가야 하는 대목은 영국은 당시 국교로 성공회(The Anglican Domain)라는 독자적인 종교를 발전시킨 배경이다, 이는 ‘헨리 8세 왕’(Henry VIII. 1491~1547)이 ‘아라곤’(Aragon)의 ‘페르난도 2세 왕’(Ferdinand II. 1468~1516)의 딸 ‘캐서린 공주’(Catherine of Aragon. 1485~1536)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왕자의 연속된 유산으로 새로운 결혼을 위하여 요청한 결혼 무효를 교황청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이 거부하자 ‘헨리 8세 왕’이 영국 교회를 1534년 교황청에서 분리하여 국왕인 자신이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국교회로도 부르는 독립된 성공회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 속에서 다시 프로이센 공국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셋째 아들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Preußen. 1657~1713)가 공국을 이어받아 1701년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으로 발전시켜 초대 왕으로 즉위한다. 이어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I. 1688~1740) 가 왕국을 물려받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선왕의 문화와 예술의 애호와 소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16세에 군에 입대하여 일찍부터 일사불란한 조직체계에 익숙해 있었다.

 

이와 같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온 국민의 의식적인 의무체계를 세워가면서 군사력 증강에 진력하였다, 먼저 왕실의 소비적인 사치성을 솔선하여 개혁하였다. 이어 대외적으로는 친화적인 화평정책을 지향하였지만 강한 군사력을 갖는 정책을 중심으로 펴나갔다. 이렇듯 강력한 통치력으로 매사에 독선적인 일생을 살다간 그의 별칭은 군인왕이었다. 그는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벨프가(Welf family)에서 독일 작센(Sachsen)의 하노버(Hannover) 지역에 거점을 두었던 칼렌베르크 공국(Fürstentum Calenberg)의 ‘조지 1세’(Georg I. George Louis. 1660~1727)의 외동딸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Sophie Dorothea von Hannover. 1687~1757)와 결혼하였다.

 

여기서 잠시 이와 같은 하노버의 ‘조지 1세’에 대하여 짚고 가야 한다. 이후 영국의 하노버 왕가(House of Hanover)의 시조가 ‘조지 1세’이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House of Stewart)의 출신 ‘제임스 1세 왕’(James I. 1566~1625)의 아들 찰스 1세 왕(Charles I of England. 1600~1649)의 누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Elizabeth Stuart, 1596~1662)와 결혼한 인물이 보헤미아(헝가리)의 왕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 1596~1632)이다, 여기서 태어난 딸이 팔츠의 ‘소피’(Sophie von der Pfalz. 1630~1714)와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Ernst August-Hannover. 1629~1698)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조지 1세’(Georg I. George Louis. 1660~1727)이다, 바로 영국의 제임스 1세 왕’의 외증손자인 것이다. 

 

프로이센 공국에서 당당한 국가적 개념인 프로이센 왕국으로 발전시켜 강력한 군사력까지 갖추어 놓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I. 1688~1740)는 왕세자인 아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Preußen). 1712~1786)와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는 원칙적인 군인정신을 바탕으로 독선적인 힘을 휘둘렀던 아버지와 다르게 왕세자인 프리드리히 2세는 예술적 감성이 깊었다. 이에 부자간의 극심한 갈등을 가져와 18세이던 1730년 어머니인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Sophie Dorothea von Hannover. 1687~1757)의 오빠인 조지 2세(George II of Great Britain. 1683~1760)가 잉글랜드 왕이던 때에 외삼촌이 있는 잉글랜드로 도피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처형 직전까지 내몰렸다. 주변의 만류로 가까스로 왕세자로 복귀한 그는 174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에 올랐다.

 

왕에 오른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펴면서 왕국을 쇄신하였다. 그는 누에치기를 통한 실크산업을 육성하였으며 우리가 볼테르(Voltaire)로 부르는 프랑스 계몽주의 작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 M,Arouet. 1694~1778)와 깊은 교유를 통하여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였다. 또한 스스로 작곡을 남길 만큼의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음악은 물론 미술에도 깊은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일구어놓은 탄탄한 국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외교정책을 펴면서 폴란드 남서부 지역 슐레지엔(Schlesien) 공작령을 침략하여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바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어머니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이며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테리지아(Maria Theresa. 1717~1780)와의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슐레지엔전쟁은 1742년 베를린조약을 통하여 슐레지엔 지역의 분할로 종전되었으나 이후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합스부르크의 세력화를 견제한 2차 슐레지엔 전쟁이 다시 1744년 시작되었다.

 

당시 ‘마리아 테리지아’(Maria Theresa. 1717~1780)는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에 거점을 가진 로렌 공국(Duchy of Lorraine)의 ‘프란츠 1세’(Francis I. 1708~1765)와 1736년 2월 결혼하였다. ‘마리아 테리지아’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이며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으로 프로이센과 2차 슐레지엔 전쟁을 통하여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중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7세(Charles VII, Holy Roman Emperor. 1697~1745)가 세상을 떠나면서 프로이센 왕국이 슐레지엔을 차지하면서 ‘마리아 테리지아’의 남편을 ‘프란츠 1세 신성로마 황제’(Francis I, Holy Roman Emperor. 1708~1765)로 선출하는 합의를 가져왔다.

 

그러나 오랜 앙금이 쌓인 슐레지엔 전쟁은 1756년 8월 이른바 7년 전쟁(Seven Years' War)이라는 세계대전의 성격을 가진 전쟁으로 일어났다. 당시 프로이센왕국과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이 동맹이 되었으며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주축으로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등의 많은 나라가 맞붙었다. 또한 슐레지엔 지역과 신대륙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그리고 인도와 서인도 제도에서 아프리카까지 다발적으로 많은 나라와 여러 지역의 전투가 1763년까지 벌어진 전쟁은 결과적으로 우여곡절 끝에 프로이센 왕국이 슐레지엔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새로운 세력 러시아의 등장과 함께 예측할 수 없는 많은 문제도 생겨났다.     

 

이에 프로이센 왕국은 유럽의 5대 강국으로 부상한다, 이후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강력한 세력 프로이센 왕국을 견제하였고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영국과 동맹을 맺어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왕국의 세력전쟁과 함께 신대륙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치열한 세력 전쟁의 이중적 구조를 가진 패권 다툼으로 유럽사는 물론 세계사에 많은 영향을 가져온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계가 단절되어 여제 ‘마리아 테리지아’(Maria Theresa. 1717~1780)로 왕권이 승계되어 남편 ‘프란츠 1세 신성로마 황제’(Francis I, Holy Roman Emperor. 1708~1765)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서 합스부르크 정통 왕가는 역사를 마감하고 남편 ‘프란츠 1세의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왕가로 새로운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이후 ‘프란츠 1세 신성로마 황제’가 1765년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 요제프 2세 신성로마 황제(Joseph II. Holy Roman Emperor. 1741~1790)가 후계를 물려받았다. 이 무렵 막내딸이 1770년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 ‘마리아 테리지아’도 1780년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 왕도 1786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1744~1797)가 후계를 물려받아 폴란드 영토의 동프로이센과 남프로이센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이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영원한 적이었던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와 동맹 관계를 맺어 프랑스 대동맹에 참여한다. 이는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1769~1821)의 등장을 말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의 정복자로 나서면서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프랑스 대동맹을 맺어 이에 대항하였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후 요제프 2세 황제의 후계를 물려받은 그의 동생 신성로마 황제 레오폴드 2세(Leopold II, Holy Roman Emperor. 1747~1792)였다. 그는 1790년 신성로마 황제에 즉위하였고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대공이었으며 보헤미아(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에 올랐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자신의 여동생인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 부부가 투옥되었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마지막 수단인 도피방법을 마련한 루이 16세 왕 부부는 1791년 6월 21일 파리를 떠났으나 6월 25일 사실상 체포되었다. 이에 유럽 군주국이 오빠인 신성로마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눈치를 보던 중 신성로마 황제 레오폴드 2세가 1792년 3월 1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에 1792년 8월 13일 공식적인 체포 사실이 알려지면서 감옥과 같은 궁전에 유폐되었다가 ‘루이 16세 왕’(Louis XVI of France. 1754~1793)이 1793년 1월 21일 처형되었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가 10월 16일 처형되었다. 루이 16세 왕의 나이 39세였으며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나이 38세였다.    

 

▲ (좌로부터) 트리팔가 전투(Battle of Trafalgar) / ‘넬슨 제독’(Horatio Nelson) / 여인 ‘엠마’(Emma, Lady Hamilton) /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of Austria)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1792년 신성로마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프란츠 2세(Francis II, Holy Roman Emperor. 1768~1835)가 1792년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 나폴레옹(Napoléon, 1769~1821)은 1796년 조제핀(Empress Joséphine. 1763~1814)과 결혼식을 마친 이틀 후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달려가 1797년 이탈리아 주요 도시를 정복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다음 해 1798년 5월 19일 대규모의 병력과 대포를 실은 함대 선단에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와 기술자로 구성된 탐사단을 태워 이집트로 출정하였다. 이는 이집트에 거점을 두어 아프리카의 장악과 함께 지중해 해상권 장악이라는 일거양득의 계산이 깔린 중요한 출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면 영국의 경제 근거지인 인도의 정복이라는 야심이 분명하게 담겨있었다.

 

이와 같은 나폴레옹의 계획을 탐지한 영국 정부는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나폴레옹은 1798년 5월 19일 프랑스 남부 지중해 해군기지 ‘툴롱’(Toulon)을 출발하여 극도의 보안 속에 연안을 타고 지중해 코르시카섬과 이탈리아반도 사이의 리구리아해를 거쳐 이탈리아 점령도시 제노바항에 중간 기착하였다. 이어 대기 중이던 함대와 합류하여 보급품을 싣고 코르시카섬을 타고 내려와 6월 7일 시칠리아섬을 지나 6월 9일 몰타 섬에 도착하여 6월 12일 '몰타섬'을 점령한다, 나폴레옹은 몰타 섬의 천혜의 요새 항구 '발레타 항'(Valletta)에 소수의 점령부대를 남겨두고 6월 19일 몰타를 출발하여 크레타섬을 기점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였다.

 

당시 영국 해군의 전설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758~1805)은 코르시카섬과 이탈리아반도 사이의 엘바섬 근해와 나폴리에서 프랑스 함대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때 6월 22일 프랑스 함대가 몰타섬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떠났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 넬슨 제독은 프랑스군의 착륙지로 예상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프랑스 함대의 추격을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이를 따돌리고 6월 29일 정찰대의 도착에 이어 7월 1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였다. 이후 수심이 낮은 알렉산드리아를 피하여 ‘아부키르만’(Aboukir Bay)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프랑스군은 카이로를 향하여 진군 중에 7월 13일 오스만 제국의 부대와 연합한 '맘루크 왕조'(Mamluk) 사령관 ‘부무라드 베이’(Murad Bey. 1750~1801) 부대와 벌인 ‘수브라 키트 전투’(Battle of Shubra Khit)와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Battle of the Pyramids)에서 승리한 이후 7월 24일 카이로를 점령하였다.

 

프랑스함대 추격에 실패하였던 영국의 넬슨 제독이 ‘아부키르만’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를 발견하고 8월 1일과 2일 이틀간의 일대 격전을 통하여 프랑스 함대를 불태웠다, 이른바 ‘나일 해전’ 또는 ‘아부키르만 해전’(The Battle of the Nile or Aboukir Bay)이다. 8월 11일 충격적인 해전의 참패 소식을 보고받은 나폴레옹은 진군을 계속하여 시나이반도를 거쳐 주요 거점을 정복하면서 1799년 3월 2개월에 걸친 총공격에도 이스라엘 북부의 요새 도시 '아크리'(Acre)의 점령에 실패하고 이집트로 철수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집트 통치를 후임자로 지정한 ‘장 밥티스트 클레베’와 ‘자크 프랑수아 므누’ 사령관에게 맡기고 지중해에 포진한 영국 함대를 피하여 1799년 8월 파리에 돌아온다. 이와 같은 나폴레옹의 패전을 빌미로 재판에 부치려는 반대파의 움직임을 예견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은 즉시 측근 장군들을 불러 1799년 11월 9일 거행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총재정부를 뒤엎고 집정정부를 수립하여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의 사전에서 바다는 악몽이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758~1805)은 나폴레옹의 거대한 꿈을 수장시킨 장본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만큼 나폴레옹은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영국과 그 수장인 넬슨 제독에게 바다에서만큼은 연패를 거듭하였다. 결국 이러한 영국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하여 훗날 러시아 원정이라는 무리수가 등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해전의 결정판은 지중해와 대서양의 경계로 흐르는 지브롤터 해협 북서쪽 대서양 연안에 있는 트리팔가 전투(Battle of Trafalgar)였다.

 

1805년 10월 21일 넬슨 제독은 트리팔가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가진 전설적인 전술을 쏟아 놓으며 승리했다.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는 영국 본토의 진격을 준비하였던 나폴레옹 군대의 수송선이 움직일 시간을 벌기 위한 정교한 전략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바다와 육지의 너무나 다른 조건을 고려하지 못한 전략의 실패였다. 한쪽 팔과 눈을 잃고도 조국을 넘보는 물결을 지켜낸 넬슨 제독은 트리팔가 해전에서 총을 맞고 3시간 이후에 전사하였다.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758~1805)은 3시간 동안 남은 마지막 삶 속에서 사랑하는 엠마(Emma, Lady Hamilton. 1765~1815)에게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것을 몇 번이고 유언하였다.

 

여기서 이와 같은 여인 엠마에 대하여 잠시 살펴본다. 그녀는 대장장이의 딸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어린 나이에 가정부를 거쳐 1663년 12살 나이에 런던에 최초로 지어진 뮤지컬 극장 드루어리레인극장(Drury Lane Theatre)에서 배우의 하녀로 일하다가 단역 배우가 되었다. 이후 당시 관행적이었던 일정한 생활비를 받고 정부(Mistress-lover)의 역할을 하는 생활을 전전하면서 귀족사회의 사교적 활동에 익숙하게 되었다. 당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남자의 소개로 섬세한 묘사력으로 인기가 있었던 초상화가 ‘조지 롬니’(George Romney. 1734~1802)의 누드모델로 활동하였다. 이후 1786년 21세 때에 지인의 소개로 당시 나폴리에 영국 대사로 있었던 베수비오 화산(Mount Vesuvius)연구로 잘 알려진 고고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1730~1813)에게로 가게 된다. 당시 정부(Mistress-lover)와 같은 관계로 소개되었으나 정작 엠마는 그 사실을 몰랐다.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 홀아비였던 윌리엄 해밀턴과 엠마는 관행적인 관계에서 사랑에 빠져 1791년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엠마의 나이 26살이었으며 윌리엄 해밀턴은 61세였다.

 

뛰어난 친화력을 가진 엠마는 여러 외국어에 능숙하였으며 춤과 노래는 물론 연기력까지 갖추어 당시 나폴리에서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이에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이었던 페르난도 1세 왕(Ferdinand I of the Two SicilIes. 1751~1825)의 부인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of Austria. 1752~1814)와 특히 친한 사이가 되었다.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는 바로 프랑스 루이 16세 왕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친언니였다.

 

이 무렵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위험에 처하게 되자 동생의 안위에 노심초사하는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에게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구출방법을 조언하였던 엠마의 지혜는 놀라울 만큼 시대적 정황과 권력의 속성을 세세하게 꿰뚫고 있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이 부분의 이야기는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프랑스가 1793년 나폴리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나폴리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중 넬슨 제독이 1798년 8월 나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나폴리만에 도착하였을 때 해밀턴과 긴밀한 지인이었던 넬슨 제독이 집으로 초대되었다. 넬슨 제독은 약간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때 엠마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1798년 12월 나폴리를 침략한 프랑스 군대를 피하여 넬슨 제독의 군함을 타고 시칠리아의 팔레르모(Palermo)로 피난하였다, 페르난도 1세 왕과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와 함께 해밀턴 대사와 넬슨 제독 그리고 엠마가 동행하였다. 이후 넬슨 제독과 엠마는 사랑에 빠졌다. 이러한 엠마에 대하여 넬슨 제독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엠마에게 유언하였지만, 영국 정부는 엠마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으며 넬슨 제독의 재산은 법정 상속인에게 돌아갔다. (이 내용에 담긴 많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프란츠 2세는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Austria)의 설립을 선언하면서 황제에 오른다. 이때 연승가도를 구가하던 나폴레옹이 연이은 해전의 패전으로 영국정복을 영국의 고립이라는 전략으로 수정하게 된다. 이에 프랑스가 장악한 독일 지역을 묶어 1806년 7월 12일 라인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 Confederation of the Rhine)을 설립한다. 이와 함께 영국과의 무역을 중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통하여 영국을 고립하려는 구상이었다. 나아가 이와 같은 독일지역의 제후국을 하나로 묶어 군사와 경제 지원을 통하여 러시아를 정복하려는 나폴레옹의 전략이었다. 이는 당시 대륙 봉쇄령 이후 프랑스 상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며 비협조적인 러시아에 대한 통제가 없이는 영국의 견제가 불가능한 사실을 고려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프란츠 2세는 떠오르는 별 나폴레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1806년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을 해산한 것이다. 이는 ‘레오 3세 교황’(Leo III. 795~816)이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2~814)에게 서로마 제국의 계승과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뜻을 담아 최초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시킨 800년 이후 1006년을 이어온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어 프란츠 2세는 1804년 황제에 오른 프랑스 나폴레옹이 1810년 1월 첫째 부인 조제핀(Empress Joséphine. 1763~1814)과 이혼한 이후 3월에 딸 마리아 루이즈(Marie Louise, Duchess of Parma. 1791~1847)를 나폴레옹과 결혼시켰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바탕에서 1812년 6월 러시아 원정의 정복에 나섰다. 당시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으나 방대한 영토의 내륙으로 뒷걸음치며 결전을 미루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1세(Alexander I of Russia. 1777~1825)의 전략을 간파한 나폴레옹은 회군을 결정하였지만 시기를 놓친 결정이었다.

 

이후 프랑스군은 라인동맹의 독일 제후국을 닦달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독일 동부 라이프치히(Leipzig)에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모스크바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당시 프랑스에 점령당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또한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에서부터 영국에 이르는 대동맹이 결성되어 1813년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독일 동부 라이프치히전투(Battle of Leipzig)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완패하였다. 나폴레옹이라는 해가 석양의 붉은 눈물을 머금은 순간이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부분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왕국의 이야기이다. 먼저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계가 단절된 이후 신성로마 제국을 물려받은 프란츠 2세(Francis II, Holy Roman Emperor. 1768~1835)는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Austrian Empire)을 설립하고 황제임을 선포한다. 이는 1806년 8월 6일 신성로마 제국을 해산을 앞두고 자신의 입지를 세운 것이다. 프란츠 2세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of Austria. 1793~1875)가 뒤를 이었다. 이어 1848년 유럽 전역에 혁명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12월 퇴임하게 되면서 조카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of Austria. 1830~1916)가 황제에 올랐다, 이러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1848년 12월 2일 황제에 올라 1916년 11월 21일까지 68년간 통치한 인물이다, 1850년 5월부터 1866년 8월까지 독일 연방 총재를 역임한 그는 신성로마 황제의 오랜 역사를 근거로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가 독일의 바탕임을 내세워 오스트리아가 통일 독일의 주체임을 주장하였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Sarajevo)에서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ranz Ferdinand of Austria. 1863~1914)과 그의 부인 호엔베르크의 소피 공작부인(Sophie, Duchess of Hohenberg. 1868~1914)이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세르비아군 정보국의 지휘로 고도로 훈련된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암살단의 행동이었다, 결국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 (좌로부터) 신성 로마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 1871년 베르사유 궁전 황제 대관식 빌헬름 1세/ 빌헬름 2세 /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다음은 프로이센 왕국에 대한 마지막 정리를 하게 되면 이와 같은 역사 속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이어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1770~1840)는 연이은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하면서 많은 영토를 잃었다. 이러한 프로이센 왕국을 물려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 1795~1861)는 독일 연방 제후의 연합에 의한 독일의 통일된 제국을 기대하였지만,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말년에 엄습한 정신질환으로 인하여 생전에 동생 빌헬름 1세(Wilhelm I. 1797~1888)에게 왕국을 물려주었다. 이러한 빌헬름 1세는 군국주의를 지향한 지도자였다. 

 

그는 일찍 군에 입대하여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일전을 치렀던 군인이었다. 1861년 형을 대신하여 프로이센 왕국의 왕에 오른 그는 철혈재상으로 잘 알려진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를 수상으로 등용하였다. 이와 같은 빌헬름 1세 왕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통일 독일을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66년 프랑스와 동맹 관계에 있던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하여 독일지역에 프랑스의 영향권을 인정하는 정책으로 눈을 가린 후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어 이른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은 서로가 이미 예상한 순서였다. 막강한 대포의 화력을 가졌던 프로이센이 군사 대국 프랑스를 제압한 것이다. 1871년 빌헬름 1세 왕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럽 제일의 강국으로 통일 독일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 German Emperor. 1831~1888)가 독일제국을 물려받았으나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빌헬름 2세(Wilhelm II, German Emperor. 1859~1941)가 1888년 독일 황제와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빌헬름 2세는 평화정책을 추구하는 쳘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충돌하면서 1890년 그를 해임하였다. 이후 반유대정책과 함께 군국주의 노선을 지향하면서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였다. 평소에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호전적이었던 그는 결국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터지면서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으며 패전 후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오랜 역사를 이어온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의 한 주로 남고 말았다. 

 

그는 망명 중에 1933년 게르만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를 주창하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독일 총통에 올랐을 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또한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에서 1940년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히틀러에게 ‘나의 총통 각하 축하합니다’. ‘이제 독일 군주제가 영원히 복원될 것입니다’. 라는 전보를 보냈으며 히틀러의 군대가 승리할 때마다 ‘당신은 나의 군대를 사용하여 승리하였다’라는 전보를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정작 히틀러는 이러한 빌헬름 2세를 매우 싫어하였다, 1941년 6월 그는 세상을 떠났으며 1945년 5월 8일 독일은 항복하였다. 이후 연합군에 의하여 1947년 2월 25일 독일의 지역으로 남아있던 프로이센마저 해체되었다. 

 

BC. 2800년경 어둠의 바다 ‘발트해’(Baltic Sea)의 물결이 출렁이는 땅에 빗살무늬 토기를 들고 찾아온 발트족(Balten)에서부터 시작된 프로이센(Preussen)의 오랜 역사는 전쟁이라는 폭탄을 안고 사라졌다. 다음 칼럼은 (215) 추락한 역사의 눈물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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