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은유의 몽상가의 지극한 행복

마르크 샤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둥둥 떠다니는 마을들, 신부와 신랑, 동물들...

이서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7/04 [06:38]

▲ 샤갈 "마을과 나"     ©자료사진

시인이자 몽상가였던 마르크 샤갈. 독실한 신앙인이자 모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화가. 사랑 속에서 충만했던 영혼. 그는 젊은 나이, 30대에 자서전을 썼다. [나의 삶] 혹은 [나의 인생]이라고 번역되는 그의 책 속에 그는 삶의 초기의 고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아버지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하지만 손은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 늘 기도를 하고 늘 일을 하고, 말이 없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말수가 적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걸까? 나도 벽에 기대앉아서, 아버지처럼 그렇게 일생을 살 운명일까? 혹은 물건이 담긴 통을 운반하며 살까? 나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내 손은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나는 특별한 직업을 찾아야 했다.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 그래, 그것이 내가 찾는 일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절대 '예술'이나 '예술가' 같은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하고 나는 나에게 물었다."

 

질문하는 소년, 샤갈. 그는 1887년 7월 7일, 러시아 비테브스크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9명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인구 5만 명 가운데 절반인 유대교도들. 나무로 만들어진 집, 전원적인 분위기, 그리고 가난. 당시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공동체에서 거주하였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어린 샤갈은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무엇이든 되고 싶어했다. 그는 가수, 무용가, 음악가, 시인, 그리고 화가를 꿈꾸었다. 그는 가족과 종교, 일상 생활과 이웃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그것들을 자신의 그림의 주제로 선택했다. 어머니 페이가 이타는 샤갈을 공립학교에 보내려고 교사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초라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 샤갈을 향한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샤갈을 프랑스로 옮겨 가게 한 그 첫,은 아니었을까? 그는 공립학교에 다님으로써 유대교의 언어인 이디시어 외에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었고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공동체 중심의 사회와 힘든 노동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샤갈의 어머니는 제례용 고기를 파는 푸줏간집 딸이었다. 샤갈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봐 준 어머니. 화가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될 수 있을까를 의문스러워했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샤갈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 내 아들아. 나는 알아. 너는 재능이 있어.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 너같은 아이가 태어났을까?"

 

어머니의 정성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샤갈의 깊은 내면세계를 이루었고 그의 작품에 오랜 주제가 된다. 그는 자서전을 '나의 부모님께, 아내에게, 고향에게 바친다'고 밝혔다. 그의 평생의 작품 주제 또한 부모님과 아내와 고향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작품 세계 속에는 마을의 푸줏간, 마을의 집달리, 행상인, 이발소, 잡화상, 은행, 가축들, 악사들이 등장한다.

 

19살의 샤갈은 화가인 예후다 펜의 화실에서 두 달간 다니게 된다. 그는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했고 풍경화와 인물화를 주로 그린 화가였다. 샤갈은 이 화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어린 시절인 이때에도 그의 개성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강렬한 색채 구사와 비현실적인 그만의 특징이 초기작부터 예외 없이 나타난다. 22세에 그린 유화 [안식일]을 보면 그의 개성인 강한 색채와 가족적인 주제가 대담하게 드러나고 있다.

 

▲ 이서영  작가. ©브레이크뉴스

 

청어를 파는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샤갈이 돈을 벌지 않는 것을 불평한다. 샤갈은 약간의 돈벌이라도 하기 위해 사진관에서 리터치하는 일을 하기도 하다가 20세가 되자 러시아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27루블을 들고 길을 떠난다. 샤갈은 페테르부르크의 웅장한 건축물을 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스물 살 시골 청년을 에술가들의 후원자인 골드베르그 변호사가 정식으로 기용한다. 샤갈의 화가로서의 성공을 들여다보면 늘 후원하는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다. 간절히 원하면 문이 열린다는 우주의 원리가 샤갈에게는 무리없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스무 살의 청년 샤갈은 예술원 부속 왕립협회 학교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골드베르그 변호사에게 축복을...
샤갈을 눈여겨 본 사람은 왕립학교의 젊은 교사 니콜라이 로에리치. 그는 샤갈에서 군대 징집도 유예시켜 주었고 병역 면제도 받게 해주었으며 매달 15루블의 장학금도 받게 해준다. 미천하고 지방 출신이며 교육도 별로 받지 못한 샤갈은 가난한 사람들과 짚을 넣은 매트에서 함께 잠을 자야 할 때도 있었고 늘 궁핍함을 느끼며 살았다. 그는 [나의 인생]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탁자 위에서 타오르는 등잔불을 부러워하며 한참을 바라본 적이 많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이 등잔불은 자기 마음대로 탈 수 있구나. 목이 마르면 자신의 석유를 마시잖아. 나도 그럴 수 있다면..."

 

다음의 후견인은 막심 비나베르. 그는 1905년 혁명을 이끌어 러시아 제국 의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주당의 대표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잡지의 사옥에 샤갈이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다음 후견인은 레온 바크스트.


그는 즈반체바 학교의 교장으로 샤갈을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이 학교는 모더니즘에 개방적이었고 톨스토이 백작의 딸과 무용가 니진스키도 다니던 학교였다고 한다. 샤갈은 당시를 떠올리면서 레온이 자신에게 '진정한 유럽의 숨결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샤갈이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가라고 권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샤갈은 점점 독자적인 시각과 자기만의 세계를 확보해나간다. 레온은 샤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샤갈은 나의 사랑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내 설명을 경청하고 나면 붓과 파스텔을 손에 쥐고는 내 그림과는 전 혀 다 른 그 림 을 그렸다. 이것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한 그의 독특한 개성과 기질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개성을 지닌 화가였기 때문에."

 

바크스트는 샤갈에게 파리로 가라고 권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떠났던 사람이기도 하다. 샤갈은 프랑스에서 자신의 혁신적인 개성을 꽃피운다.

 

샤갈이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막심 비나베르의 장학금 덕분이었다. 장학금이 풍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샤갈이 파리에서 생존할 수 있는 귀한 재원이 되어준 것도 사실이다. 그는 항상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재생 캔버스나 홑이블, 그리고 자신의 속옷에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샤갈은 그곳에서 모이슈 세갈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마르크 샤갈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이후 그는 모이슈 세갈이 아니라 마르크 샤갈이라는 화가로 거듭난다. 그는 반 고흐와 세잔의 복제품도 만난다. 23세에 최초의 전시회를 갖기도 한다. 당대 유럽 현대성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의 예술은 샤갈에게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의 개성을 제대로 보여줄 적절한 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의 야수파를 지나 독일의 표현주의, 이탈리아의 미래파까지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큐비즘의 공간 파괴의 흔적도 보이고 예기치 못한 각도에서 사물을 포착하기도 한다. 2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숙함이 배어난다. 그는 현실과 비현실을 뒤섞고 민속과 전설을 합친다.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키고 여러 상징을 도입한다. 자신이 살아온 마을과 종교를 재해석해 그림의 소재로 삼는다. 그의 색채에 대한 갈망은 점점 대담해지고 확장된다.

 

파리의 샤갈은 루브르 박물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대가들의 그림을 충분히 보고 공부할 시간을 갖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프랑스 고전파 화가들의그림, 플랑드르와 이탈리아 화가들의 미학, 들라크루아, 제리코, 쿠르베의 그림을 감상하고 연구했다. 와토, 우첼로, 푸케, 샤르댕을 연구했다. 인상파들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세잔, 고갱, 그리고 당대 화가들의 빛과 공간에 대한 탐구를 눈여겨 관찰했다. 그는 야수파의 근대성을 자신의 작품 안으로 포섭하였고 이 모든 공부와 연구들을 통해 눈부신 색채의 마술사가 되었다. 20대에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분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스승 바크스트는 그에게 이렇게 감탄했다고 한다.


"이제 자네의 색은 춤을 추고 있군!"

 

그가 20대의 어린 나이에 그토록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실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는 메모의 달인이었다. 그의 묘사력과 관찰력은 시인의 면모를 지닌 그를 떠올리게한다. 그의 일기를 들여다 본다.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앙데팡당전에 갔다. 나는 1910년대 프랑스 화가들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어떤 미술학교도 내가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와 그곳의 전시작품들, 파리의 미술관에서 흥미롭게 발견한 것들을 가르쳐주지 못한다. 1914년까지 프랑스의 회화와 그 밖의 다른 나라의 회화를 구분하는 차이점에 대해 나보다 더 명확하게 의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이나 그림, 문학, 심지어 잠을 잘 자는 것에도 체질적이거나 정신물리학적인 '다른 요인'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 러시아인들의 화실에서는 모욕당한 모델들의 울음소리가, 이탈리아인들의 화실에서는 노랫소리와 기타소리가, 유대인의 화실에서는 토론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두세 시. 하늘은 맑다. 곧 새벽이 되겠지. 나는 그렇게 밤을 꼬박 세우곤 했다. 벌써 1주일이나 화실청소를 하지 않았다. 그림 틀과 달걀 껍데기, 2수짜리 싸구려 수프가 들어 있던 빈 깡통이 뒤죽박죽이 되어 굴러다녔다. 나는 타오르는 램프를 바라보았다. 램프는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아침까지 빛을 비춰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색깔을 담을 소재를 그의 고향 러시아의 비테브스크의 어린 시절에서 가져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러시아에서 나의 것들을 가져왔고 파리는 그것들에게 빛을 비춰 주었다."

 

샤갈, 하면 떠오르는 그림 중 하나는 [나와 마을]일 것이다.


이 작품은 1911년, 그의 24세 때 작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작품들이 샤갈의 20대의 작품인 것을 알게 되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 간절함과 당당함이 샤갈을 샤갈답게 만든다. 19세기 화가들의 20대는 21세기의 20대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든다. 19세기의 20대들은 20대에 이미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루는 모습이 꽤 번번히 발견된다.

 

[나와 마을]도 비사실적이고 매우 상징적이다. 러시아의 고향 마을에 대한 추억이 선명한 색조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의 과감한 분할은 리드미컬한 음악적 요소를 느끼게 한다. 붉은색과 파란색, 초록색의 대조가 눈에 띈다. 낫을 들고 있는 남자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가까이 있지만 서로 거꾸로 마주보고 있다. 여자는 풍요를 상징한다. 그림 아래쪽은 생명의 나무가 있고, 인간과 동물, 둘 다 십자가를 목에 두르고 있다. 종교성에서 배제될 수 없는 두 존재를 상정하는 걸까. 초자연적이면서 상징적인 이 작품은 그러나 전체적인 색감은 따뜻하다. 그의 새로운 그림 언어를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아하!에 이르는 길을 그림을 보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 놓는 샤갈의 상상력에 감탄하는 시간.

 

1913년, 26세의 샤갈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 하나 더.


[창 밖으로 보이는 파리]라는 작품이다.


기하학적 분할 구도가 이상적인 이 그림에 원근법은 사라지고 없다. 이 그림은 서정적이나 비사실적이고 비논리적이다. 파리의 시내는 '찬란한 자유'의 도시다. 야누스의 모습을 한 샤갈의 한 부분은 파리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 속 빛깔은 흰 색이다. 그러나 상상의 공간인 것처럼 흰 색 이외에 분할된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기차는 거꾸로 지나가고 사람들도 비스듬이 누운 채로 걷고 있다. 화면의 중간에서 약간 비껴 에펠탑이 서 있고 에펠탑의 오른편에는 깃발을 든 사람이 서 있다. 실내에는 화병이 놓여 있고 그의 손가락에는 심장 모양의 노란 하트가 놓여 있다. 시내를 바라보는 샤갈은 또한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지만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창가에는 사람 형상의 동물 한 마리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제목은 [창 밖으로보이는 파리]이지만 사실은 그의 복잡한 내면 세계가 묘사되어 있는, 다분히 상징적인 그림이다.

 

"나의 예술은 괴상망측한 예술이고, 타오르는 사랑의 사자이고, 캔버스에서 솟아난 창백한 영혼일 것이다."

 

그림을 선명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고질적인 습관을 가진 우리에게 샤갈이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의 꿈은 깊고 넓다. 우리가 그것을 선명하게 해석하기에 우리의 지식이 너무 짧다.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 잔상처럼 그의 그림을 보고 난 뒤의 인상impression은 말 그대로 인상적이다. 해석하려 하지 말고 깊이 느껴보려는 습관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먼저 느끼고 다음에 혼련을 통해 그림을 보는 시야를 확보한다. 이것이 알맞는 순서가 아닐까? 그림은 느끼지만 보는 훈련을 하지 않거나 보는 훈련을 잘 되어 있지만 제대로 온전히 느낄 수 없음. 두 가지의 경우 다 난감하긴 매 한가지이다. 자주 보고 자주 느끼는 연습. 해석과 느낌이란 매우 주관적이다. 이 주관적인 영역이 객관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눈을 훈련시킬 필요도 있다. 한 시점에 고착되는 것은 전혀 배우려 하지 않고 느끼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도,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 어떤 작품도 새롭게 보지 못하는 편견덩어리인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제대로 보기. 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그림은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분석의 영역도 아니다. 그것은 감성의 영역이다. 감성의 영역을 설명하려고 하면 사실 난감해진다. 느낌에서 출발하여 제대로 된 감성적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배워야 한다. 하지만 배운다는 것이 기계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일정한 틀에 고착되어서도 안 된다. 틀은 반드시 필요하다. '벽에 그림이 있다'라고 할 때 그것은 벽과 분리되는 어떤 '틀frame'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즉 변별이 되기 때문에 '저 벽에 그림이 있다'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즉 그림을 보려면 일정한 인식의 '틀'이 필요하다는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갇혀서는 안 된다. 아마도 샤갈도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해석하여 우리에게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의 그림은 그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들'을 늘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한 공간에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치됨으로써 그것은 꿈과 꿈의 이미지들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의 그림은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영혼의 차원으로 변형되면서 음악적인 리듬을 확보한다.

 

같은 해에 그린 그림 중에 한 작품 더.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큐비즘을 잘 활용한 그림이다. 손가락이 7개나 된다. 그만큼 그림에 익숙하고 능숙하고 노련한 화가임을 드러내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현이다. 이디시어로 '7개의 손가락'은 '손이 빠른'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자화상. 그림 속 스물여섯 청년은 이미 화가로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표정은 느긋하다. 창밖으로는 파리의 에펠탑이 밝은 불빛에 노출되어 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라고 꼽는 [러시아에게, 당나귀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라는 재미 있는 제목을 가진 그림이다. 그는 도시의 불빛을 등지고 앉아 있다. 실내 바닥은 노랗게 빛을 받아 빛나고 벽지는 빨갛다. 샤갈은 화가의 머리 위에 히브리어로 '파리'와 '러시아라고 표기해 놓았다고 한다. 그를 형성하는 세 문화를 동시에 표현한 것이다. 다양한 색깔의 물감은 성공과 풍족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를 일정한 유파로 한정시킬 수 없음을 이 작품은 다양한 색조와 분할과 구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하여.

 

샤갈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과장되거나 비사실적인 표현법을 데포르마시용deformation이라고 부른다. 이는 회화나 조각에서, 대상이나 소재가 되는 자연물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표현하는 사람의 주관에 의하여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기법을 뜻한다 그래서 대상은 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확대하거나 변형된다. 샤갈에게 이 기법으로 꿈과 내면을 성찰하고, 현실의 요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병렬시키거나 재배열한다. 그는 환상과 상상, 이미지와 현실의 교차가 미묘한 작품을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20대 후반의 그를 독일 표현주의의 대변인이라고 하는 [슈트룸]지의 헤르바르트 발덴은 이렇게 표현해 주었다.


"특이할 정도로 맑은 눈과 곱슬머리의 소유자인 이 젊은이는 파리에 있는 그의 친구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들은 그를 비범한 화가로 여기고 있는데, 사실 그는 그렇다."

 

샤갈에게는 가족이 있고 그림이 있고 사랑이 있다. 평생 사랑 안에서 풍성한 삶을 영위하게 만들어준 여인 중 한 사람. 벨라. 그러고 보면 샤갈처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했고 사랑하는 여인들과의 사이에서도 지극한 행복을 경험하였으니 말이다.


피카소에게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피카소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들이 바뀔 때마다 작품의 성향 또한 다양하게 변주했다. 그가 많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사랑 속에서 지구별 여행을 마쳤지만 그의 사랑은 편의적인 사랑으로 보인다. 혹은 기능적인 사랑.

 

반면 샤갈의 사랑은 공기 같은 느낌이 든다. 들숨과 날숨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늘 우리를 건강하게 충족시키는 숨breath 같은 자연스러움. 혹은 물 속에 들어가 수영하는 느낌이랄까. 물은 형체도 없으면서 수영하는 나를 감싼다. 내가 어떤 포즈를 취하든 물은 자신의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거대한 힘, 무한한 따뜻함을 지닌 사랑의 형태로서의 물.

 

22세의 샤갈. 자신의 고향인 비테브스크의 보석 세공사의 딸, 벨라와 사랑에 빠진다.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이던 벨라는 짓궂은 샤갈에게 반한다. 샤갈이 파리에 머문 4년간을 꼬박 기다렸다가 1915년에 결혼한 뒤 30년 동안 아름답고 꿈꾸는 듯한 사랑을 함께 한다. 벨라는 샤갈의 작품의 여신으로 줄곧 등장하게 된다. 서로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열렬히 사랑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그들은 1944년,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병을 얻은 벨라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었다. 샤갈은 벨라의 무덤 비문에 직접글을 새기고 그림을 그렸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


"그녀는 나의 그림이었습니다..." 샤갈은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둘은 결혼한 다음해에 딸 이다를 낳는다. 이다는 벨라만큼 샤갈에게는 소중한 인물로 아버지 샤갈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벨라가 세상을 떠나고 한동안 샤갈은 붓을 들지 못하고 정신적 공황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샤갈이 만난 두번째 사랑은 발렌티나 브로드스키. 1952년 봄, 샤갈은 그녀의 타고난 품성과 교양에 매료된다.
"나는 그대만을 바라볼 뿐이고, 그대는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할 뿐이오."


새로운 동반자 바바의 정적인 아름다움으로 샤갈은 다음 30년 동안 그녀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는다.

 

1887년, 지구별에 도착한 샤갈. 러시아의 가난한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굳은 믿음으로 공립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삶의 고비마다 그를 후원하는 후견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필자는 샤갈,하면 그의 '후견인들'이 떠오른다. 누군가가 한 사람의 인격으로 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후견인들이 필요한지 그를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 그리고 사랑. 그는 벨라가 있었고 이다가 있었고 그가 바바라 부르던 브로드스키가 있었다.  벨라는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되어 주었고 그의 작품 세계에 영감을 주는 날개였다. 바바는 그의 작품 세계를 한층 성숙하게 이끌어 주었다. 그는 1985년, 98년의 지구별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근1세기에 달하는 시대를 살아낸 사람. 얼마나 행복한 지구별여행자인지!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고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1957년, 장 폴랑은 샤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샤갈은 샘이나 빗물과 친숙하다. 그는 태양하고도 똑같이 친근하다. 그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이든 또렷하게 그린다. 그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같다. 아니, 그보다는 그는 슬픔이나 상실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행복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책읽어주는여자 블루노트>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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