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ㅡ멀리서 온 사람, 또 멀리 갈 사람

이서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6/25 [10:24]

▲ 폴 고갱     ©브레이크뉴스

영국의 작가 서머셋 몸은 1919년,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예술이라는 세계에 풍덩 빠져버린 한 남자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런던 증권사의 직원이었던 릭 스트랙랜드. 어느날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다 타히티라는 남태평양의 섬으로 건너가 그림을 그린다. 가족을 버린 그의 삶은 이기적인 것이었을까? 남겨진 가족에게는 철저히 이기적일 수 있었을 한 남자의 삶. 달이 상징하는 것은 이상이거나 꿈, 6펜스는 몸을 지닌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 작품을 중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에 가서 다시 읽었고 10년쯤 지나 다시 읽었다. 그랬음에도 그의 이야기는 아련하게 이미지만 남아 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고 그림과 사랑에 빠져서 17년 간의 가족과 아이들을 과감히 버린 남자. 스트릭랜드는 말한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나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을 만큼 그림을 그리고 싶소. 물에 빠진 사람은 수영을 잘 하든 못하든 헤엄을 쳐야만 하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내가 바로 그렇소. 물에 빠져 익사하고 싶지 않은 남자 말이오."
 
고갱의 예술은 길고 긴 여행과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다. 가난이 주는 삶의 불안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통이 천재성을 고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통이 너무 심하면 천재성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의 화가로 살겠다는 결정이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듯 고갱의 삶은 안정과는 거리가 먼 불안, 고통, 열정, 현실과 떨어진 거리감 등이 느껴진다. 매독, 우울증, 타히티에서는 어린 십대 여자들과의 몇 차례 동거, 심한 음주, 그림에의 과도한 몰입 등...

파리에서 페루의 리마로, 브르타뉴에서 프로방스로, 코펜하겐에서 파나마로, 마르티니크로, 타히티에서 마르키즈 제도로 그의 삶은 길고 긴 여정이다. 그의 무덤 또한 태평양의 한 가운데인 마르키즈 제도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장소가 변할 때마다 그의 그림은 변화하고 발전했다. 여행의 목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갱의 질문이다. 이 작품은 고갱이 두 번째로 타히티를 찾았을 때 그린 그림이다. 그는 이 그림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제의식, 색채, 구상 기법 등 자신의 작품의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49세에서 50세에 걸쳐 그린 작품이다. 높이 139센티미터, 너비 375미터의 대작으로 몇 년 전 우리나라로 들여와 전시를 할 당시 거액의 보험료를 들기도 했던 작품이다.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12명의 인물이 화면에 골고루 퍼져 있다. 전업작가를 선언한 이후로 병들고 가난하고 정신적 고통마저 심했던 고갱이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우리에게 건넨다. 몇 개의 전시실에 다양하게 전시된 고갱의 작품 중 가장 눈에 띄었던 작품이기도 한데 이는 작품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제목 때문이리라. 질문이 너무 거대해서 한동안 이 질문 속에서 살았던 때가 있었으니까. 도록으로 고갱의 작품을 보았을 때와 실물로 고갱의 작품을 보았을 때의 차이는 별로 없었다. 다만 그 거대함에 숙연해지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도록을 보았을 때와 조금 달랐다. 이 그림은 그의 둘째 딸 알린의 죽음을 전해듣고 견딜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알린의 죽음을 전해들은 뒤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유언처럼 이 그림을 그린다.


"딸 이름은 알린, 어머니와 같은 이름이었네. 알린의 무덤과 꽃들, 그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야. 그녀의 진짜 무덤은 내 곁에 있고 이 눈물이 진짜 꽃이라네."


그는 죽기 전에 미친 듯이 밤낮으로 그림에 매달린다. 작품을 끝내고 고사리 숲으로 들어가 비소 한 통으로 자살을 감행하지만 모두 토해내고 이후로 마지막 창작의 시간을 겸허히 갖게 되었다고 한다. 더욱 다행인 것은 이 작품을 계기로 고갱이 떠나왔던 파리의 평단은 점차 고갱의 작품에 호의를 보였으며 동료화가인 몽프레를 통해 1,000프랑에 이 작품을 팔 수도 있었다고 한다.
                                        
고갱은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페루 리마에 신문사를 설립하려 했던 아버지를 따라가 5살 때까지 살았다. 아버지는 도상에서 돌아가시고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고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브라질로 가는 루치타노호에 승선한다. 이등항해사로 13개월 반의 세계 여행을 다녀온 고갱은 군에 입대한다. 군대에 다녀와 베르텡 증권회사에서 주식 거래인으로 일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고갱은 25세에 덴마크 처녀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고 차례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낳는다. 에밀, 알린, 클로비스, 장 르네, 폴 롤랑.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던 고갱은 26세에 아마추어 화가로서 처음으로 붓을 잡는다. 그림 수집가 귀스타브 아로자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그는 귀스타브의 집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하고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35세까지 본업이 아닌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고갱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남편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가 나와 결혼하던 해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데 이듬해부터 그는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게 그림에 대한 소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일요일마다 혼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선배 화가들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린 풍경화 한 점이 28세에 살롱전에 입상함으로써 그는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게 된다.

 

고갱의 첫 스승은 세잔의 첫 스승이기도 한 피사로였다. 여러 화가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 피사로는 고갱에게도 과수원과 전원 풍경을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며 인상주의 기법을 전수해준다. 고갱은 자신 이외의 모든 화가들을 스승 삼아 공부했다. 들라크루아, 마네, 르누아르, 시슬레, 기요맹, 피사로, 그리고 세잔 등 그에게는 배울 선생들이 즐비했다. 특히 세잔의 그림 한 점을 고갱은 매우 소중하게 간직한다. 고갱은 드가도 자신의 스승이라고 생각했고 드가 또한 고갱의 작품을 사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33세의 고갱은 42세의 세잔을 만난다. 세잔은 공간과 형태에 대한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고 뒤틀어진 공간 표현, 넓고 구조적인 붓터치 등을 통해 커다란 깨달음을 고갱에게 선물한다. 생계가 어려워져 소장하고 있던 그림을 팔아야 했을 때에도 고갱은 세잔의 작품만큼은 소중히 간직하였는데, 이렇듯 세잔이 인정받기 전부터 세잔의 진가를 알아본 화가이기도 하다.

 

1886년, 38세에 브르타뉴에 체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화가로서의 고갱은 시작된다.


모네의 경우 35세에 이미 400여 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으나 고갱은 이제 첫 발걸음을 뗀다.


1900년, 52세의 고갱이 말한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지금까지 기껏해야 300여 점의 그림을 그린 것 같다.


그중 초기 작업한 100여 점은 내게 중요하지 않은 습작 같은 작품이다."


그가 말하듯 30대의 고갱은 집에서 마당에서 노는 딸들과 바느질하는 아내, 평화롭게 잠든 아들을 즐겨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31세에서 38세 사이에 고갱은 인상주의전에 참가하면서 화가로 조금씩 성장한다.


35세에 주식시장이 붕괴되어 고갱은 일자리를 잃었는데 이때 가정에 충실해야 할 고갱은 가장으로서는 무책임한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생업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한 것. 이때 자녀는 셋.


피사로는 고갱의 선언에 친구인 외젠 뮈레에게 편지를 보낸다.


"고갱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를 떠난다고 하네. 악착같이 작업해서 미술계에 입지를 마련해 보겠다는 과감한 결정이 아닌가? 그는 성공할 거야."

 

고갱은 가족들을 데리고 루앙으로 이사한다. 이때 자녀는 다섯. 하지만 고갱은 그림을 전혀 팔지 못했다.


아내 메테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덴마크로 떠나고 아내를 따라 덴마크에 갔다가 37세에 혼자서 파리로 돌아온다.


37세의 고갱은 피사로에게 편지를 쓴다.


"돈도 용기도 바닥이 났습니다. 다락방에서 목이라도 매달아야 할까요. 그나마 나를 붙잡아주는 건 그림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림만 그리며 살 수 없어서 파리 역을 돌며 벽보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고흐에게는 최소한 동생 테오의 도움이라도 있었다.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 그림만 그리겠다는 고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38세의 고갱은 브르타뉴로 옮겨간다. 이유는 적은 돈으로도 생활할 수 있어서 그림에 전념할 수 있을 거라는 동료들의 전언때문이었다. 그곳은 이미 많은 화가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곳은 풍경을 그리는 화가들에게는 천혜의 장소이기도 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선명한 햇살, 변화무쌍한 하늘 등 색채로 가득한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었다고 한다.

 

▲ 이서영 작가.  ©브레이크뉴스

 

고갱이 인상주의를 벗어난 것은 40세.


39세의 고갱은 샤를르 라발과 마르티니크에서 이국적인 느낌의 놀라운 풍경화 몇 점을 완성하면서 인상주의 기법을 뛰어넘기 시작한다.


40세에 작품 몇 점을 팔고 고흐와 테오를 만난다.


고흐를 통해 일본 판화를 접한 후 형체와 윤곽을 단순화시키는 법을 배우고 원근법과 공간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알게 되면서 서양 전통회화와 완전히 단절되는 새로운 세계로 걸어들어간다.


여전히 작품의 기복이 있지만 과감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변화 속에서 자기만의 화풍을 찾아간다.


또한 에밀 베르나르와의 만남은 40세의 고갱이 종합주의라는 새로운 양식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과도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형태는 단순화되고 원근법은 사라지고 음영과 기복도 느낄 수 없다. 원색을 사용하고 모티브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 그리지 않는다. 굵은 터치와 선명한 윤곽선도 즐겨 사용하였다.


그림의 주제와 화가의 생각이 형식적이거나 조형적 측면과 구분되지 않고 그림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고갱의 종합주의적 첫 작품, <설교 후의 환상>.
 
40세의 고갱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을 그대로 따라 그려서는 안 된다네. 자연으로부터 추상적인 세계를 끌어낼 수 있도록 창작의 과정을 더 많이 고민하게. 그것이 신의 경지로 올라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네. 우리를 만드신 조물주처럼 '창조'함으로써 우리도 신에게로 이르는 것이지."

 

'창조'함으로서 신에게로 이른다.

 

이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스승 피사로를 넘어서고 수많은 그림 스승들로부터 배우고 세잔의 그림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고갱이 드디어 자신만의 화풍에 도달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고갱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타히티에서 딸의 죽음을 전해들은 고갱은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존재에 대한 물음에 집착한다. 그 결과물로 종교에 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고 한다.

 

40세의 고갱은 고흐의 초대를 받아 브르타뉴 퐁타방에서 남프랑스의 아를르로 향한다. 아마도 10월쯤. 두 화가는 함께 지내며 그림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 반 고흐의 곁에서 고갱은 색채 부분을 강화하며 색을 주제로 반복적인 토론을 벌인다.


고갱은 "아름다운 색의 문제를 놓고 우리들은 미친듯이 끝없는 논쟁을 벌였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 두 사람의 논쟁은 결국 헤어짐에 이른다. 고흐는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으로 들어갔고 고갱은 파리로 떠나왔다. 그날은 크리스마스날 저녁, 반 고흐는 손에 면도칼을 들고 고갱에게 다가가다가 멈추더니 집으로 돌아가 자기 귀 한쪽을 잘랐다고 한다. 다음날 고흐는 피범벅이 된 채 발견되고 치료를 받은 다음 병원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도 고흐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가 지구별을 떠나기 2년 전의 쓸쓸한 크리스마스.

 

41세와 42세의 고갱.


퐁타방과 르 풀뒤에서 고갱의 표현은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색채는 더욱 강렬해지며 상상력은 더 풍부해진다.
투박하고 본질적이며 원시적인 소재들을 통해 <설교 후의 환상>,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 수많은 그림들이 그려진다.


이 그림들은 기존의 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양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들로서 새로운 화풍에 대한 갈망이 표현된 상징주의적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에서 [황색 그리스도]를 자신의 얼굴 뒤에 배치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백인이 아니라 황색으로 표현했다. 그는 순간에 느낀 색을 선택하고 그 색을 강조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고갱이 마을 사제에게 자신의 그림을 선물했다. 사제는 고갱의 화풍에 놀라 악마 같은 선물이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속 고갱의 모습을 서머셋 몸의 번역본 [달과 6펜스]에서 표지로 사용했던 게 기억난다.

 

늘 또 다른 고장을 꿈꾸던 유목민으로서의 고갱.


통킹에서 마다가스카르, 그리고 타히티를 꿈꾼다.


"타히티에서는 열대의 아름다운 밤하늘이 침묵하고, 내 주위의 신비로운 존재들과 다정하게 조화를 이루며 심장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부드럽고 잔잔한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42세의 고갱은 오딜롱 르동에게 말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내 예술은 씨앗에 불과하다. 나는 타히티에서 나 자신을 위해 이 씨앗을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상태로 키워나가고 싶다. 내게는 고요함과 평온함이 필요하다. 명예가 무슨 소용인가. 이곳에서의 고갱은 끝났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고갱을 볼 수 없을 것이다."

 

43세의 고갱은 2월에 자신의 그림을 팔아 여행 경비를 마련한다. 6월이 되어 고갱은 마침내 타히티에 발을 내딛는다. 고갱은 죽을 때까지 12년 사이에 타히티에 세 번째 안착한다.


타히티에서 비로소 고갱은 고갱으로서 완성된다.

 

20살 어린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멀리서 듣고 한동안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던 시간도 있었고 종교에 침잠하기도 한 그는 죽을 때까지 타히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가난과 질병의 삶을 기록에 남긴다.

 

고갱의 창작은 회화, 조각, 판화, 드로잉, 수채화 등 다양했다. 그의 조각은 대리석, 청동, 세라믹, 나무 등 다양한 재질이 사용되었으며 판화 작업에는 석판화, 동판화, 목판화 등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했던 화가였다. 많은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늘 새로운 진경을 개척하려고 노력했던 고갱은 눈에 보이던 것을 그리던 전통 회화의 방법에서 벗어나 그의 스승들이었던 피사로, 세잔 등의 화가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주관적인 인식 과정을 통해 화폭에 그려냄으로써 탈전통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우리는 고갱을 종합주의 화가라고 부른다.

 

고흐는 고갱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갱은 멀리서 온 사람이고 또 멀리 갈 사람이다."

 

화가들의 작품과 그림 세계를 공부하다 보면 그들이 순간순간 직면하였을 창작의 고통을 즉물적으로 느낄 때가 있다. 하얀 캔버스에 나를 표현하는 작업은 어쩌면 거대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텅 빈 공간에 '있음'의 무엇인가를 선과 색채를 통해 표현해낸다는 것은 매우 엄중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 채색되지 않은, 순백의 도화지 한 장을 눈앞에 두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하루라는 흰 도화지에 조금씩 선을 긋고 채색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결과물로 우리는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지금, 여기는 어쩌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종목적지인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 아니면 어디에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니체의 전언을 천둥처럼 들을 일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 <책읽어주는여자 블루노트>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기사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인터넷 신문사 '브레이크뉴스' 발전에 쓰여집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