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ㅡ관능과 에로티시즘

옆으로 누워서 키스를 하고 있는 클림트의 키스는 뭔가 다른 분위기

이서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6/19 [15:54]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들은 늘 함께 있었다. 힘들 때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상처투성이인데도 그 상처를 감싸 안아 줄 사람. 나에게도 그러한 사람이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


클림트가 누구인지는 잘 몰라도 [키스]라는 작품을 본 사람들은 꽤 많은 것 같다. 한쪽은 절벽. 여인의 발은 가파른 절벽에 걸쳐 있다. 그녀의 두 손은 곱아 있다. 그의 사랑의 키스에 온몸이 전율을 느끼는 것일까? 살갗이 까무잡잡한 무어인을 상기시키는 남자가 여인의 볼에 입술을 대고 있다. 그의 키스는 끝날 것 같지 않다. 꽃으로 가득한 들판. 그녀의 옷도 황금빛 무늬로 가득하다. 그의 옷은 길고 각진 황금빛이다. 남성성이 잘 살아 있다. 에로티시즘의 대가였던 클림트. 어쩜 황금빛만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을 몽환이 그녀의 표정에, 그의 뒷모습에 오래 남아 있다. 그들의 사랑은 늘 진행형이었을까?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화가다. 클림트는 평생 에밀리 플뢰게와 정신적인 연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연인 관계를 떠나 오누이 같기도 하고 무엇이든 품을 준비가 끝난 어머니와 아들 같기도 하다. 물론 에밀리가 생물학적으로는 열한 살쯤 더 어리지만. 그들은 초기에는 육체적인 연인 관계였으나 곧 정신적인 관계로 옮아간 것 같다. 클림트의 연애전력을 따라가기도 버거웠겠지만 그 이상의 어떤 진한 결속이 두 사람을 그렇듯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지만 사후 양육비 청구 소송이 14건이나 되었다고 한다. 생전에도 단 한 명의 아이만 자신의 아이로 인정했다고 들었다. 그는 젊은 날에 매우 유명해졌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바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작품과 공개된 삶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그는 수많은 여인들 틈에서 시대가 강요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의 주관을 버리지 않고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간 관능과 이성이 교묘히 결합된 화가가 아니었을까? 그는 매우 자유로운 영혼으로 교수 제안에 두 번이나 탈락될 만큼 제도권에서 요구하는 작품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을 일목요연하게 고집해나갔던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 세계는 로맨티시즘을 지향하는 듯보이지만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보면 관능과 로맨티시즘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방편이었을 뿐 그가 추구했던 것은 시대와 관습, 편견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었을까.


언젠가 어느 고속도로 휴게실의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클림트의 [키스]가 벽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반듯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뉘어진 채로 벽에 걸려 있었다. 옆으로 누워서 키스를 하고 있는 클림트의 키스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이 절벽 위에서 키스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늘 여성에 대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안고 살았던 클림트의 내면 세계가 그렇게 표현된 것은 아닐까? 그 그림을 화장실 벽에 붙인 이는 의도적으로 그들이 휴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옆으로 뉘어 놓았던 것은 아닐까? 청소를 하고 있는 남자 직원에게 "여기, 그림이 잘 못 붙어 있어요"라고 말하고 나오긴 했지만 그들이 늘 옆으로 누워 편안한 키스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들었다고나 할까.

 

▲ 이서영 작가.   ©브레이크뉴스


필자가 클림트를 처음 만난 것은 개인적으로 마음이 힘들었을 때였다. 마음이 힘들다는 것은 제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 힘듦으로 인하여 책도 읽을 수 없고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우울과 절망의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던 때.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 주었던 세계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림의 세계였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힘든 상황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숨쉴 수 있었다. 깊은 호흡은 아니더라도 숨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좋았다.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고 숨고 싶었던 나를 따뜻하게 품어준 곳이 바로 그림이라는 세계였다. 그 화가들 중에 클림트가 있었다. 클림트의 황금빛은 태양의 따뜻함을 연상시켰고 그의 생명의 나무들은 참말이지 지쳐 있는 나의 영혼에게 한 자리 내어 주면서 앉아 쉬어가라고 내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클림트의 [키스], 빈 분리파 시절에 그렸던 [온 세계에 보내는 입맞춤], [아델레블로흐 바우어]의 눈빛. 모네의 [인상, 해돋이],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로트렉의 작품들, 르누아르의 [뱃놀이] 등은 필자의 균열된 마음을 다독여주는 유약과도 같았다. 그림이라는 현란한 질료 앞에서, 가장 근본적인 삶의 밑바닥에서 맛 본 위로와 또 다른 삶의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에게 감사한다. 감각적인 영역인 그림이라는 세계를 통해 한 사람의 삶과 영혼이 어루만져짐. 고통을 봉인시키고 삶을 삶으로 마주볼 수 있는 힘을 준 그림. 그림들은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위로받았다. 그림의 어떤 역할 때문일까? 화가들의 끊임없는 창조적 행위의 발현물인 그림들 속에서 필자는 필자의 창조에 대한 가능성을 흘깃 엿보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대단한 창조행위이다. 삶 또한 날마다 순간 순간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의하여 창조되고 있다. 필자는 삶 속에 함몰되어 빠져나오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것은 단지 생각이었을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단지 그림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그 속에서 살고 있던 수많은 화가들이 내 손을 잡고 필자를 또 다른 세상으로 초대해 주었다. 현실의 삶과는 다른 삶이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그 세상이 현실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고 위로해 주었으며 내 안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 지역인 바움가르텐에서 일곱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누나 클라라가 있었고 아래로 다섯 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에른스트와는 그가 젊은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함께 배우고 함께 작업한다. 어디서나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19세기의 빈도 빈부격차가 심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지만 일곱 명의 자식들과 아홉 식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부지런해야만 했다. 클림트는 학교에 1년 늦게 들어갔다고 한다. 원하는 교육을 원 없이 받을 만큼 풍족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동판조각가가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던 클림트는 5살이 되어 이사한 빈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응용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최초의 인물은 브룬스 선생님이었다. 브룬스 선생님은 클림트가 지닌 재능이 언젠가는 활짝 피어날 꽃한송이임을 알아본 멋진 정원사였다.


누군가가 성장한다. 이름을 알리고 유명해진다. 그는 이제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 이러한 과정을 연쇄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중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술가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주는 사람. 브룬스 선생님은 아직 꽃피기 전인 봉우리만 보고도 어떤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인가를 미리 예견했던 클림트의 첫 감사의 대상이 아닐까? 죽을 때까지 곁을 지켜주었던 에밀리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동생 에른스트도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클림트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이들은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활비를 벌기도 한다.

 

그가 살던 당시의 빈은 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고 있었고 성공한 은행가들도 많았다. 상인들의 부 또한 탄탄해서 예술에 대한 지지와 후원이 가능한 시대이기도 했다.


클림트가 17세가 되었을 때 빈의 링슈트라세에서는 대규모의 시가행진 축제가 준비된다. 이 행사는 황제 프란츠와 왕후 시시의 은혼식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은 클림트에게 이 행사의 작업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클림트는 에른스트와 에른스트의 친구였던 프란스 마츄와 함께 축하 행렬 구상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여러 곳에서 작은 일거리들을 얻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후 에른스트가 사망하고 작품의 경향에 대한 의견이 달라 마츄와 헤어지기까지 늘 셋이서 함께 작업하게 된다.

 

그들은 함께 미술사 박물관의 홀을 장식하고 저택의 천장화를 제작하고 잡지에 삽화를 그려넣는 작업을 했다. 국립극장 무대 커튼과 천장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21세에 빈 응용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클림트는 에른스트, 마츄와 [예술가 조합]이라는 이름으로 공동 작업실을 운영한다. 그러다 24세에 예술가 조합의 이름으로 첫 프로젝트를 맡는데 이들은 스타일이 달라 서로 분담하여 작업을 감당한다. 28세가 되었을 때 클림트는 미술계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아카데믹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점점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제 부부를 위한 축하 행렬이라는 카다란 축제를 총괄 담당했던 당대의 유명한 화가 한스 마카르트가 갑자기 죽자 부르크 극장 신축과 예술사 박물관의 실내 장식 작업을 예술가 조합이 맡게 된다. 이 때 클림트는 극장의 관중석을 실제 사람들을 모델로 하겠다는 구상을 내놓는다. 그러자 이 풍문을 전해 들은 수많은 귀족들이 클림트를 찾아와 자신을 그림 속의 모델로 써 줄것을 부탁하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구스타프는 이 작업으로 인해 일약 사교계의 명사로 떠오르며 수많은 귀족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유명한 화가가 된다. 

 

클림트가 28세가 되었을 때 동생 에른스트가 헬레네라는 여인과 결혼한다. 이때 헬레네의 여동생인 에밀리 플뢰게를 만나게 된다. 당시 에밀리는 17세였다. 에른스트와 헬레네가 결혼한 뒤 헬레네라는 귀여운 조카가 태어난다. 그러나 동생 에른스트가 곧 사망하고 클림트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조카 헬레네의 후원인이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에밀리는 클림트의 정신적인 후원자가 되고 그들은 죽을 때까지 수백여 통의 엽서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연서라기 보다는 클림트의 일상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편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클림트는 이런 과정을 통해 상당히 많은 부분 심리적으로 치유를 받지 않았을까.


클림트를 떠올리면 그 곁에는 언제나 에밀리가 있다. 클림트는 에밀리의 초상화를 4점 정도 남겼다.

키가 작고 통통한 체격의 클림트는 흘깃 보면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주위에는 늘 멋진 여성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대개 부유한 유대인 상류층 명사들이었고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클림트의 모델이 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32세 때, 클림트는 마츄와 함께 교육부로부터 빈 대학 강당 천장화인 [학부 회화]를 의뢰받는다. 교육부의 본래 의도는 '어둠을 극복한 승리'를 주제로 이성과 학문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학문이 사회에 끼치는 중대한 영향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철학, 의학, 법학의 세 학부 제작은 클림트가, 신학은 마츄가 맡아 제작이 들어갔다. 이후 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했는데 클림트는 교육부의 의도와는 달리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세기말적인 혼돈과 불안을 주제로 잡고 작업을 진행시킨다. 이 그림은 제작 과정에서도 완성 이후에도 거센 비난을 받았고 신문에서는 갑론을박이 계속되었고 격렬한 시위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마츄는 이를 계기로 에른스트 사망 이후 둘이서 함께 작업해온 [예술가 조합]을 떠나게 되고 이후로는 서로 독자적인 작업을 하게 된다.


이렇듯 독특한 자기만의 개성을 자신의 작품 속에 개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클림트는 35세 때 20여 명의 예술가들과 함께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게는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빈 분리파] 협회를 창설한다. 그리고 에밀리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에게 엽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빈 분리파는 그림, 조각, 공예, 건축, 음악 등 모든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고 싶어했다. 비평가들은 이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기존에 구축된 것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은 늘 당대의 주류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고 이전의 문화적 경향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클림트는 [누다 베리타스]를 그려 그들과 정면으로 맞선다. 누다 메리타스는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뜻이다. 그림 위에는 실러의 말을 불규칙적으로 배열했다.


"그대의 행위와 예술 작품으로 모든 이의 마음에 들 수 없다면 소수를 만족시켜라. 많은 이의 마음에 드는 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36세 때 제1회 빈 분리파 전시회가 개최된다.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이 참여한다. 5만 7천 여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경이적인 기록이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빈 예술가들과 외국 예술가들의 전시 작품 중 거래가 이루어진 작품이 218점이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다. 빈 분리파는 외국 미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자신들의 작품 또한 외국에 적극적으로 알린다.


38세 때 클림트는 제7회 빈 분리파 전시에 미완성작이었던 [학부 회화] 중 [철학]을 선보였다. 아카데믹하지 않고 노골적인 그림에 격분한 대학 교수 87명은 클림트의 작품을 설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회에 청원을 내기도 하는 소동을 불러일으킨다.


빈 분리파는 베토벤 전시를 기획한다. 오페라는 말러가, 공간 설계는 요제프 호프만이, 조각상은 막스 클링거가, 그리고 그림은 구스타프가 맡았다. 그리고 이들의 작품 전체가 베토벤을 중심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것이 그들 계획이었다. 클림트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주제로 프리즈를 구성한다. 분리파의 14번째 전시였던 베토벤 프로젝트는 대중의 거센 거부 반응에 직면한다. 책임은 클림트에게 전가되었다. 이때 분리파에 대한 환멸을 느낀 클림트는 첫 여름 휴가를 떠난다. 에밀리와 함께. 이후 그들은 해마다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다. 클림트는 여름 휴가지에서 그림의 소재로 풍경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언젠가 문구점에서 초록 숲이 그려진 노트를 한 권 샀다. 놀랍게도 그 풍경의 주인공은 클림트였다. 늘 여인들의 그림이나 장식적인 그림만을 보아오다가 풍경화를 그린 클림트를 만나니 놀라울 수밖에. 그의 풍경 그림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수 남겨져 감상되고 있다.


39세, 제19회 빈 분리파 전에 [의학]을 전시한 클림트는 작품 속에 임산부의 누드를 그려놓았다는 이유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예상대로라면 의학을 찬양하는 그림이어야 하는데 클림트의 의학은 어둡고 칙칙해보였다 . 그는 빈 순수미술 아카데미 교수직에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이 사건을 통해 교수직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클림트가 [학부 회화]를 의뢰받은 것은 31세 때다. 의뢰받은 작품 3점이 모두 완성되었을 때가 41세. 그는 교육부의 의도가 아닌 자신의 주관대로 그림을 완성하였다. 결국 43세에 클림트는 교육부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는 교육부에 작품의 제작비 전액을 돌려주었고 작품은 자신이 소장한다.

이 작품은 컬렉터인 콜러만 모저와 에리히 에더러의 소유였다가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강제로 몰수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들은 오스트리아 남부 임멘도르트 성에 보관되어 있다가 나치가 퇴각하면서 성에 불을 지른 탓으로 작품이 전소되어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한다. 

 

39세에 클림트는 [유디트]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다. 유디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여인이다.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디트의 도시를 침략한다. 이 여인은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했고 그가 방심한 사이 그의 목을 베어버린 매우 단호한 여인이다. 그녀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한 손에 들고 있는 그림은 15세기 이탈리아의 도나텔로의 석상으로도, 카라바조의 그림으로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그림으로도 남아 있다.


도나텔로의 유디트는 차분한 표정과 단호한 의지가 엿보인다. 카라바조의 유디트는 고통스러워하는 홀로페르네스가 그림 왼쪽을 차지하고 있고 유디트는 오른편에서 매우 어린 소녀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에 칼을 대고 서 있다. 칼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에 깊이 들어가 있다. 피가 흘러나온다. 어린 유디트 옆에 옆얼굴을 한 노파가 통쾌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구도이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거구이며 매우 역동적이다. 강인한 그녀의 표정. 유디트의 단호한 행동에 비해 홀로페르네스는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무력해 보인다. 유디트 외에 다른 한 여인이 이 과정을 돕고 있다. 그들의 결연한 표정은 젠틸레스키의 내면의식의 표출이라고도 한다. 젠틸레스키는 여류 작가였는데 그녀를 가르치던 미술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평생 잊지 못했다. 얼마나 깊은 고통이 그녀에게 이런 단호한 표정을 짓게 했을까.


아, 클림트의 [유디트]를 들여다보자. 그녀에게는 고통도 의지도 없어보인다. 몽환적인 그녀의 눈빛을 보라. 그녀가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보인다. 황금빛의 화면과 짙은 녹색빛 그녀의 가운은 그녀의 몽환을 보다 자극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클림트가 유디트를 그릴 때 참고한 그림이 있다고 한다. 찾아보니 프란츠 폰 슈투크라는 화가의 [죄]라는 작품이었다. 작품 속 여인은 단호한 눈빛으로 어둠 속에 서 있다. 그녀는 옷을 입고 있으나 상체가 거의 드러나 있다. 그녀의 목에는 죄를 상징하는 뱀이 그려져 있다. 어둠에 잠겨 있는 뱀. 프란츠는 19세기 독일 상징주의 화가라고 한다.

 

프란츠의 그림은 클림트에게 와서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된다. 그는 구도를 차용하였을 뿐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모델은 아델레블로흐 바우어. 그녀는 클림트의 중요한 모델이기도 했고 오랜 시간 내연의 관계였다고도 한다. 그녀는 어떤 그림에서는 그저 부유하고 정숙하고 이지적인 모습이고 유디트의 경우에는 몽롱한 눈빛의 요부로도 그려진다. 아델레는 18세에 빈의 설탕 공장 페르디난트 블로흐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는 부유하고 교양 있고 편견도 없고 문화와 예술에 커다란 관심을 가진 상류층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44세에 클림트는 호프만과 바그너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작가 연맹]을 창설한다. 다음해는 클림트의 회화사에서 전성기라 할 수 있는 해로 그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기억하는 [키스]라는 작품이 완성되었다. 또한 [아델레블로흐 바우어1], [아델레블로흐 바우어2]가 제작되고 [다나에]도 완성된다. [학부 회화]가 유화로 최종 완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해에 17세의 에곤 실레와의 만남도 이루어진다. 실레는 클림트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클림트]라는 소설을 읽어 보면 클림트 주위를 맴도는 실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다행히도 클림트는 실레의 독창성과 예술성, 독특한 개성,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알아보았고 이후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실레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서로의 경향을 받아들인다. 어떤 그림에서는 누구의 그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관계란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상하구별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어떤 의미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서로에게 스민다. 그래서 함께 오래도록 살아온 부부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이 어쩐지 서로 '닮았다'는 인식적 착시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46세에 클림트 그룹은 [미술 전람회(쿤스트 쇼)]를 조직하고 개최한다. 그는 많은 외국인 작가들을 초대하는데 뭉크, 얀 투르트, 나비파의 뷔야르와 보나르, 그리고 앙리 마티스와도 교류한다. 후기 인상파의 고갱과 고흐의 그림도 소개된다. 10대의 천재들인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의 작품들도 클림트에 의해 오스트리아 미술계에 소개되기 시작한다. 그는 46세부터는 더 이상 황금빛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56세.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심장발작으로 쓰러진다. 병상에서 에밀리를 찾으며 지구별 여행을 마감한다. 마지막 그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에곤 실레. 그는 이때 죽어가는 클림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다. 죽음의 순간을 마지막으로 포착해 기록에 남긴 에곤 실레. 그에게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클림트의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삶이라는 이름으로 56년의 지구별 여행을 마치고 사라진 클림트. 우리가 기억하려 하는 순간 그는 늘 21세기의 지금, 여기로 돌아온다.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책읽어주는여자 블루노트> 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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