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5.16군사쿠데타, 전두환 5.8계엄군 진압만행?

“5.18 비극 발포자를 밝혀내고, 학살자들을 냉혹하게 심판하라!”

정구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5/16 [17:22]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 희생된 광주시민들.     ©브레이크뉴스 자료사진

 

‣ 역사는 말한다

 

이승만의 12년 독재에 국민은 실망했다. 4·19혁명 직후 대통령의 독재를 방지하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내각제가 유일한 대안으로 부각되었다. 윤보선은 4·19 이후 3·15 부정선거에 의해 4선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 자격이 국회에서 무효로 선언됨에 따라 1960년 8월 민의원, 참의원 합동의회에서 윤보선을 4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윤보선은 장면 총리와 국정지도력의 불협화음과 정계의 혼탁과 학생들의 잦은 시위로 5·16군사쿠데타 원인을 제공했다.

 

이승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후계자 이기붕 당선을 위한 부정은 극에 달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와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눈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발견되어 정권타도 투쟁으로 이어졌다.

 

경찰의 발포로 16명이 죽고 72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참사였다. 4월 18일 시위에 나선 고려대생들이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으며 다음 날인 4월 19일 서울의 각 대학과 중·고생, 시민 등 10만여 명이 시위에 동참하고 경찰의 발포로 인한 사상자가 186명 희생자, 6500명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를 발표했다.

 

‣ 박정희는 누구인가?

 

박정희는 1942년 만주에 있는 신경군관학교(만주군관사관학교 제2기생)를 입학해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한 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44년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후 8.15해방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1945년 육군 중위로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귀국하여 국군창설에 참여하고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2기로 단기교육을 마치고 대위로 임관됐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할 때 육사 5기생과 8기생들과 인연을 맺어 훗날 5·16군사쿠테타의 후원세력을 조직했다. 4·19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에 개입된 장성을 추방하라는 정군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군파 장교로 추대될 정도로 청렴 속에서도 능력 있는 군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1961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부사령관으로 재직 중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혁명공약을 내걸고 청년장교들과 함께 5.16군사쿠테타를 일으키고 7월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여 2년 7개월 동안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 사임으로 1963년 대통령 육군대장으로 예편하고 대통령 권한대행 겸직을 하다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되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1967년 제6대 대통령, 1969년 10월 17일 3선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을 모색하다 3선 개헌에 의해 1971년 7월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단행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포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해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자 10월 18일 새벽 0시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10월 26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박정희는 스스로 근대화의 기수를 자처했다. 5.16군사쿠데타를 성공하고 잘 살아보자는 근대화의 논리와 정책을 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구 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포하자 윤보선이 반발하면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후에 전격적으로 부정축재자 재산환수를 단행하고, 정적(政敵)이나 배신자(背信者)를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갔다. 그는 군정기간동안 전면적인 사회개혁 일환으로 정당, 사회단체 해체, 용공분자 깡패 검거 소탕, 댄스홀 및 고급요전 폐쇄, 부정부패처리법을 동포해 7억 2000만환에 이르는 부정축재환수 등을 단행했다. 국민의식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재건국민운동본부 설치, 생활간소화, 가족계획화, 문맹퇴치운동, 농어촌고리채정리,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60년 6월 10일 비밀첩보기관이자 동시에 국민감시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그토록 충성을 바쳤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프랑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시켜 제거했고, 이후 군부 내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7월 3일에는 국가재건최고의장인 장도영을 추방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지역 재력가 김지태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 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토록 했다.

 

박정희 정권은 당시 유원식 준장 증언에 의하면 집단학살은 포기했지만, 5∙16군사쿠테타 직후 이른바 용공분자 2만 8천여 명을 검거해 집단학살하려 했다. 이후 간첩단 사건, 월북자 가족단 간첩단 사건, 제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을 조작해 국민들의 숨통을 조이며 탄압을 했다.

 

박정희의 개혁정책들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군정실시 후 2년 후에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공언해 ”2.27선언“으로 군으로 원대복귀를 약속했으나 ”4.18조치“로 군정연장 발표 후 국민여론에 밀려 철회하는 등 비난을 받고 정치의 길을 택하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박정희의 가장 업적은 근대화와 경제화를 이룩한 점이다. 18년 동안 군사독재와 인권탄압에 맞선 대다수 국민과 학생, 종교인의 민주화 수많은 인사를 탄압하고 사형시켰고, 정작 본인이 집권 18년 동안 사상시비(思想是非)에 휘말리면서도 반공(反共)의 기치를 내세우고 경쟁자인 김대중에게는 색깔론의 공세를 집요하게 퍼붓기도 했다.

 

‣ 영·호남지역 감정 원조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북한의 남침위협 대처, 근대화와 경제적 발전,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변화, 오일쇼크의 충격, 국내외 정치적 현안“이라는 명분으로  군론을 분열하는 영남과 호남간의 지역감정을 격화시킨 후 오늘날에도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유발한 원조다.

 

‣ 민주화 요구를 긴급조치로 탄압하다

 

박정는 18년 장기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밀려 ”긴급 조치“ 발동으로 철권정치를 강행해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 반민주적 통치를 반대하는 학생,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근로자, 농민, 도시빈민자 등의 저항에 아랑곳하지 않고 탄압을 이어갔다. 하지만 역사는 냉혹하게 심판했다. 문세광의 피격에 의한 육영수의 사망, 본인은 신복(臣僕)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시해(弑害), 아들 박지만의 마약투여, 딸 박근혜의 탄핵, 파면, 구속 등 온 가족이 불운을 겪어야 했다. 

 

‣ 10·26 사태와 12·12 사태

 

최규하는 신군부의 지원으로 8개월 간의 과도기를 거치는 동안 12월 2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하여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0년 8월 16일 신군부의 압력으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하야(下野)를 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출범할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무능한 최주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인 12·12사태 수습과정과 5·18 광주항쟁 전국 확대 계엄과 최초 발포 명령자를 함구한 채 2006년 10월 22일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인 10·26사태를 계기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나회는 12·12사태 때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비육사 출신 장성들로 이루어진 계엄군의 공식지휘라인은 무시하고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박준병 등 정규 육사출신그룹이 다져진 결속력을 발휘하여 대세를 장악하였다. 

 

1979년 12월 13일부터 1980년 9월 1일까지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중에 5·17 계엄확대 조치, 국보위설치 같은 국정의 모든 것을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부터 재가를 받아 이루어졌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완전히 포위하고 전두환,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최규하 대통령 관저로 쳐들어가 위협을 했지만 1시간 30분 동안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은 같은 말만 되풀이 하자 신군부의 노태우는 짜여진 각본대로 청와대, 총리실, 관저 등 정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때 전두환 합동수사본장은 즉시 노재현 국방장관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하고 체포 후에 12월 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데 성공함으로 전두환 신군부는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 전두환은 누구인가?

 

전두환은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 1955년 육군사관학교 11기, 1965년 육군대학교 졸업, 1969년 육사 동기들 가운데 선두로 대령에 진급할 정도로 남보다 항상 앞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남에게 추월당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승부욕은 강하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무모하게 돌진하는 경향이 강하다.


전두환은 평소에 운동을 좋아 하여 축구, 육상, 씨름 선수를 했고, 육사생도시절에는 럭비선수로 활약 하고 축구부 주장을 했다. 육사 11기 동기생들의 모임인 북극성회 회장 등을 맡아 전면에 나서기를 좋아 하고 솔직하고 호방한 말솜씨로 좌중(座中)을 곧잘 사로잡았다. 전두환은 어릴 적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오기와 공격성을 갖추고 있었다. 청년 장교시절에는 오성회와 하나회 같은 사조직을 결성하여 이끌었다.

 

전두환은 육사시절부터 리더십과 프랜드십을 발휘하고 의리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동기생들 중에서 가장 앞서가면서도 후배들을 챙겼다. 집권 후에는 장세동과 같은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거느린 전형적인 보스다. 등산이나 법정 출두, 해외여행 등 움직일 때마다 마치 신복들을 한꺼번에 몰고 다니는 보스기질을 가지고 있다. 1963년 육사생도시절에 조직한 사조직은 훗날 권력의 기반이 되었다.

 

전두환은 30대 초반 육군 대위 신분으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면담한 뒤 육사생도들의 5·16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주도한 것을 계기로 국가재건국민회의 의장실 민정비서관, 중앙정보부 제7국 인사과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를 거쳐 1966년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1967년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의 추천으로 청와대를 경호하는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1970년 백마부대인 제9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 1973년 육군준장, 1976년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1977년 육사 11기 156면 가운데 가장 빠른 육군소장,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 후 줄곧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 했다. 

 

‣ 전두환의 등장

 

결단은 긴박한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느냐에 따라서 당사자와 주변사람의 운명을 엇갈리게 한다. 박정희의 예기치 않은 사망으로 초래된 권력의 공백기에서 12·12 사건으로 군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새 정권을 창출해 가는 과정에서 전국비상계엄이라는 특수상황을 이용하여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정치 전면에 등장하였다. 10·26 사태 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사책임을 맡고 11월 6일 사건전모를 발표하면서 국민 앞에 나타났다. 

 

전두환 대통령은 위기 때마다 결단력을 발휘했다. 보안사령관이 아니었다면 합동수사본부장이 될 수 없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허심수·우경윤 대령에게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을 지시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정승화를 제압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육군중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하면서 권력의 중심을 구축했고, 1980년 5월 17일 제42회 임시국무회의에서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 선포안이 찬반토론도 없이 가결시키고 전두환은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는 조치와 함께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였다.

 

‣ 5.18광주항쟁의 만행!

 

계엄군은 5월 27일 새벽 4시 10분~5시 10분 1시간 만에 광주시 도청상항실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시민군 166명이 사망하고 65명이 행방불명되었고, 2,800명이 중경상의 만행을 저지르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계엄군은 유혈진압 후에 대통령 자문 및 보좌기구라는 명분을 내세워 5월 31일 행정과 사번 전반에 걸쳐 주요 업무에 대해 지휘와 감독 및 통제기능을 수행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구로서 유신체제 이후 새로운 군사정권을 예고한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를 신설하고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에 취임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이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사임하고 8월 22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하고 1980년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단일 후보로 나서 99.9%인 2,524표를 얻어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전두환의 개혁을 앞세운 폭압정치!

 

5월 27일 새벽 4시 10분에 계엄군 25,000명을 투입하여 1만여 발을 사격해 5시 10분까지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사살했다. 비극이었다. 5·18광주항쟁 당시 사망 163명, 행방불명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 3,130명, 구속 및 구금 등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3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대다수 국민, 광주시민 등은 사상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난무하다. 그 증거로 1985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0년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다“고 답변했다.

 

▲ 정구영     ©브레이크뉴스

전두환은 10·26사태로 최고통치권자의 유고(有故)가 발생하여 권력 공백상태와 사회혼란기에서 각계각층에서 민주화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압할 수 있는 명분은 오로지 “안보”이기 때문에 제5공화국 출범 후에도 국정지표를 4년 연속 국가안보를 제1호로 명시하고 집권 초기에는 허화평(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삼수(보안사 인사처장), 허문도(안기부장 비서실장)의 3허는 사회정화운동을 앞세워 공무원 숙청, 정치인 탄압, 부정축재 환수, 언론통폐합, 삼청교육대 등 폭압정치를 폈다. 전두환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며 인권을 유린하고 정치 발전을 저해했다.

 

역사는 진실만을 알려야 한다. 계엄군의 5.18 광주항쟁 진압과정에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군부의 전두환과 노태우는 침묵하며 거짓을 역사를 우롱하고 있다. 한 때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이 광주의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허용했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최근 미국국무부에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동향보고에 의하면, 신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이 명령을 한 것이다.

 

무고한 학생과 광주시민은 계엄군에 의한 수백여 명, 수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5.18광주항쟁에서 인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었다. 만행을 저지른 학살자?(전두환, 노태우, 신군부에 충성한 군인과 공무원)들은 버젓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역사는 냉혹하게 심판을 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잘못된 과거사는 물론 역사의 시계를 멈추게 한 역사의 죄인들을 적폐청산으로 규정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 jgy2266@hanmail.net.


*필자/ 평론가(역사), 언론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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