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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81) - 영국 헨리 8세 왕과 여섯 명의 부인들(上)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4/26 [15:58]

‘블루스’(Blues) 음악의 역사적 바탕을 끝없이 헤아려 가면 14세기경 영국 교회에서 선창자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교창(交唱-antiphony) 형식의 독특한 성가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영국 교회의 독특한 성가들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영국의 ‘헨리 8세 왕’(Henry VIII. 1491~1547)은 로마교황청과 대립하여 교황청과 연계된 수도원을 해산시키면서 영국교회를 교황청에서 분리한 영국식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면 ‘헨리 8세 왕’이 에스파냐(스페인)의 자치국인 ‘아라곤’(Aragon)의 ‘페르난도 2세 왕’(Ferdinand II. 1468~1516)의 딸 ‘캐서린 공주’(Catherine of Aragon. 1485~1536)와 결혼 이야기를 살피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와 깊은 갈등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던 에스파냐(스페인)와 정략결혼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에 영국의 ‘헨리 7세 왕’(Henry VII. 1415~1509)은 1501년 자신의 후계자인 장남 ‘아서 튜더’(Arthur Tudor. 1486~1502)와 ‘캐서린’을 결혼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서 튜더’가 결혼 후 6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에스파냐(스페인)와 지속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둘째 아들인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를 형수 ‘캐서린’과 다시 결혼시켰습니다.

 

▲ (좌로부터) ‘헨리 8세 왕’/ ‘캐서린 왕비’/ ‘메리 1세’ / ‘킴볼튼 성’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처럼 형 ‘아서 튜더’와 그의 동생 ‘헨리 8세’로 연속되는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 되었던 ‘캐서린 왕비’는 ‘헨리 8세’와 결혼 후 연이은 유산과 갓 태어난 어린 왕자의 죽음이 연속되었습니다. 이에 유난히도 왕자를 열망하던 ‘헨리 8세 왕’은 새로운 결혼을 시도하면서 실타래처럼 엉켜든 역사를 낳게 됩니다. 당시 캐서린 왕비의 시중을 들던 미모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외교관 출신의 딸로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문화를 접하고 온 ‘앤 불린’(Anne Boleyn. 1507~1536)이었습니다. 이러한 미모의 ‘앤 불린’에게 푹 빠져버린 ‘헨리 8세왕’이 그와 결혼하기 위하여 부인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 무효를 요청하였으나 당시 로마교황청의 ‘클레멘스 7세 교황’(Clemens PP. VII. 1478~1534)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이와 같은 ‘클레멘스 7세 교황’에 대하여 잠시 살펴 가야 합니다. 그는 인류사의 가장 지혜로운 불빛인 르네상스 문화예술의 등불을 켜 든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후손입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에서 가장 빛나는 문예 부흥 후원을 펼쳤던 위대한 ‘로렌조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 1453~1478)의 아들로 곧 ‘즐리오 디 즐리아노 데 메디치’(Giulio di Giuliano de Medici)입니다. 그가 바로 교황에 올라 ‘클레멘스 7세 교황’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 가게 되는 내용은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아버지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친형인 위대한 ‘로렌조 데 메디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형을 살려낸 이야기입니다.
 
이는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을 말살하려던 경쟁자 ‘파치 가문’(Pazzi family)이 1478년 이른바 ‘파치의 음모’(Pazzi conspiracy)를 일으켜 ‘위대한 로렌조 드 메디치’를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아버지 ‘줄리아노 드 메디치’(Giuliano de' Medici. 1413~1478)가 19번이나 칼에 찔리며 숨져가면서 형 ‘위대한 로렌조 드 메디치’를 끝까지 보호하였던 것입니다.(상세한 이야기는 칼럼 106회차-페라라 공국과 소금 이야기 참조)

 

이러한 영국의 ‘헨리 8세 왕’이 요청한 결혼 무효를 ‘클레멘스 7세 교황’이 강력하게 거부하자 ‘헨리 8세 왕’은 영국 교회를 교황청에서 분리하여 국왕인 자신이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어버립니다. 이어 교황청과 연계된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종교 개혁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안고 영국 교회의 독특한 성가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한 혼돈의 물결 속에서 눈물을 머금은 아름다운 우정을 품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상향의 대명사로 잘 알고 있는 저서 ‘유토피아’(Utopia)를 펴낸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와 그릇된 것들에 대한 해학적인 비판의 저서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을 써 내려간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입니다, 바로 이들은 ‘캐서린 왕비’(Catherine of Aragon. 1485~1536)와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캐서린 왕비’는 이와 같은 친구들의 높은 학식에 매료되어 당대의 인문주의 학자들과 학문의 발전을 위하여 열성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잠시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네덜란드에서 사제인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도원에서 지낸 하늘이 내린 천재 ‘에라스뮈스’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가 영국의 저명한 가문의 개인 교사로 갔을 때 ‘토머스 모어’를 만나면서 그들은 12살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떠나 평생을 숨결과 같은 소중한 우정으로 매만진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헨리 8세 왕과 ‘캐서린 왕비’를 만났으며, 이후 그는 1502년에 설립된 케임브리지 대학의 마거릿 여성 신학교(Margaret Lady) 교수로 재직한 이후 1515년까지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습니다.

 

▲ (좌로부터) ‘토머스 모어’(Thomas More)/ ‘에라스뮈스’(Erasmus)/ ‘후안 루이스 비베스’(Juan Luis Vives)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 1532년 ‘헨리 8세 왕’이 ‘캐서린 왕비’의 시녀이었던 ‘앤 불린’(Anne Boleyn. 1507~1536)과 비밀리에 결혼한 이후 1533년 1월 25일 공식적으로 결혼을 선포하였습니다. 이후 ‘헨리 8세 왕’의 새로운 결혼을 옹호할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가 5월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앤 불린 왕비’의 가족들이 ‘토마스 크랜머’가 대주교에 임명될 수 있도록 막후 작업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는 대주교에 오르자마자 ‘캐서린 왕비’의 결혼 무효와 함께 새로운 결혼이 합법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 교황’은 ‘헨리 8세 왕’과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를 파문하는 강경책을 고수하였습니다. 이에 ‘헨리 8세 왕’은 영국교회를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하는 명목으로 종교개혁을 시행 하면서 6월 ‘앤 불린’ 왕비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맞불을 놓았던 것입니다. 

 

당시 ‘캐서린 왕비’는 ‘킴볼튼성’(Kimbolton Castle)에 유폐되었으며 유일한 딸 ‘메리 1세’(Mary I of England, 1516~1558)는 다른 성에 어머니와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헨리 8세 왕’은 ‘캐서린 왕비’에게 딸 ‘메리 1세’와 함께 살 수 있는 회유책을 동원하여 ‘앤 불린’의 왕비 인정과 결혼의 무효를 끈질기게 요청하였지만 ‘캐서린 왕비’는 이를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이때 ‘토머스 모어’와 ‘에라스뮈스’는 ‘캐서린 왕비’의 결혼 무효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며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끝내 이를 거부하면서 우정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이유가 근원이 되어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1535년 7월 6일 반역죄로 처형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음 해인 1536년 1월 7일 유난히도 차가운 바람이 ‘킴볼튼성’(Kimbolton Castle)을 두드리던 날 오랜 투쟁으로 허약한 몸을 가누어온 비운의 ‘캐서린 왕비’(Catherine of Aragon. 1485~1536)도 쓸쓸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당시 영국 남동부의 ‘하트퍼드셔’(Hertfordshire)의 ‘헌스던’(Hunsdon)에 격리되어있던 스무 살 나이의 딸 ‘메리 1세’(Mary I of England, 1516~1558)는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봉쇄되어 끝없는 슬픔을 깨물며 오랜 나날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또한,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는 단두대의 처형으로 처참하게 숨져간 친구 ‘토머스 모어’의 부당한 신원을 교황청에 탄원하여 그 복권을 기다리던 중 친구 ‘캐서린 왕비’의 죽음을 연이어 통보받았습니다, 이렇듯 비통한 가슴을 어루만지던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는 ‘토머스 모어’의 복권이 이루어진 직후 1536년 7월 12일 친구들의 곁으로 영면의 길을 조용히 떠났습니다.

 

이와 같은 비운의 ‘캐서린 왕비’가 세상을 떠난 4개월 후 ‘앤 불린 왕비’(Anne Boleyn. 1507~1536)에게도 무서운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왔습니다. 그것은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 왕’과 비밀리에 결혼하였던 ‘앤 불린 왕비’는 그해 9월 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를 낳았습니다. 다음 해 1534년 유산에 이어 1536년 1월 왕자를 낳았지만 사산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연속된 유산과 사산으로 집착처럼 왕자를 갈망하던 ‘헨리 8세 왕’은 ‘월트셔’(Wiltshire)지방 출신의 시녀 ‘제인 시모어’(Jane Seymour. 1508~1537)에게 또다시 새로운 눈길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과 맞물려 당시 영국 왕실에 섬뜩한 검은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었습니다. 이는 궁정 악사로 ‘앤 불린 왕비’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플랑드르 출신의 음악가 ‘마크 스미턴’(Mark Smeaton, 1512~1536)이 1536년 4월 30일 갑자기 긴급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모진 고문 끝에 ‘앤 불린 왕비’와의 간통 사실을 자백하면서 3일 후 ‘앤 불린 왕비’가 무자비하게 체포되어 런던탑에 구금되었던 것입니다. 이어 음악가 ‘마크 스미턴’의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은 자백을 바탕으로 번개와 같은 재판이 진행되어 1536년 5월 17일 ‘마크 스미턴’이 사형되었습니다. 이틀 후인 5월 19일 ‘헨리 8세 왕’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왕비’는 간통죄와 반역죄로 무참하게 참수되었던 것입니다. 체포에서 재판 그리고 사형에 이르는 기간이 불과 17일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헨리 8세 왕’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 왕비’(Catherine of Aragon. 1485~1536)가 세상을 떠난 당시 20세의 성장한 딸 ‘메리 1세’(Mary I of England, 1516~1558)가 있었습니다. 또한, 4개월 후 세상을 떠난 두 번째 ‘앤 불린 왕비’(Anne Boleyn. 1507~1536)에게는 3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살펴 갈 이야기는 비운의 ‘캐서린 왕비’가 ‘헨리 8세 왕’의 형이었던 ‘아서 튜더’(Arthur Tudor. 1486~1502)와 결혼하여 친정 에스파냐(스페인)에서 시댁 영국에 올 적에 함께 왔던 수많은 하인과 수행원 중에 전설적인 ‘트럼펫’(trumpet) 연주자 ‘존 블랑케’(John Blanke)가 있었습니다.

 

이는 로마 시대 이후 흑인이 영국 왕실문서에 등재된 최초의 기록으로 그는 오랫동안 궁정 악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는 ‘캐서린 왕비’의 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1520년 프랑스에서 귀빈들이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4살이었던 딸 ‘메리 1세 공주’(Mary I of England, 1516~1558)가 소형 하프시코드인 건반악기 ‘버지널’(Virginals)을 능숙하게 연주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던 사실에서 어머니 ‘캐서린 왕비’와 딸 ‘메리 1세 공주’로 이어진 깊은 음악적 소양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와 함께 아버지 ‘헨리 8세 왕’ 또한, 건반악기 ‘버지널’과 오르간 연주에 능숙한 인물로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춘 열정적인 음악 애호가이었으며 스스로 많은 음악을 작곡하였던 엄밀하게 음악가이었습니다.
 

▲ (좌로부터) ‘앤 불린 왕비’(Anne Boleyn) 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제인 시모어 왕비’(Jane Seymour)와 아들 에드워드 6 세/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음악적 소양을 물려받은 ‘메리 1세 공주’는 어려서 부터 유난히 영민하여 어머니 ‘캐서린 왕비’의 각별한 조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에 네덜란드 출신의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와 프랑스 출신의 ‘기욤 뷔데’(Guillaume Budé. 1467~1540)와 함께 북방 르네상스 3대 인문학자로 평가받는 에스파냐(스페인) 출신의 인문학자 ‘후안 루이스 비베스’(Juan Luis Vives. 1493~1540)가 친구이었던 ‘에라스뮈스’의 주선으로 영국으로 건너와 ‘메리 1세 공주’의 가정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메리 1세 공주’는 아홉 살 나이에 라틴어를 해독하였으며 그리스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스페인어를 공부하였습니다. 음악과 춤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져 어려서부터 아버지 ‘헨리 8세 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캐서린 왕비’를 버리면서 딸 ‘메리 1세 공주’의 사랑도 거두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안고 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진 내용을 이어서 살펴 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182)  헨리 8세 왕 과 여섯 명의 부인들(下)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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