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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오늘 비추기] '셰이프 오브 워터' 올바름을 외치는 이에게

정말 올바른 사회를 원한다면 존중하라

정우경 문화평론가 | 기사입력 2018/03/25 [09:36]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셰이프 오브 워터<사진출처=해당영화포스터>     © 브레이크뉴스

 

 

요즘처럼 도덕에 민감한 시기는 없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참고 넘어갈 것들에 사람들은 참지 않기 시작했고, 십수년이 지난 사건들도 모두 수면위로 올라와 군중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벌써부터 빠르게 변질되는 모습은 보여지고 있지만, 결국 사람들은 더 정의로운 사회, 올바른 사회를 향해 나아가기를 선택했다는 점은 역시 고무적이다. 그렇다. 세상은 올바르게 정립되고 있다.

 

세상이 올바르게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성간의 사랑에 대해 지극히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은 우주경쟁에 돌입했다. 누가 더 먼저 우주를 장악하느냐가 곧 승리의 열쇠를 거머쥐는 상황,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다시금 핵전쟁이 시작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속에서 언어장애를 가진-듣긴 하지만 말은 못하는- 엘라이자는 미국의 과학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을 하며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 

 

자명종이 울리면 계란을 삶고, 계란이 삶아지는 동안 욕조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일력을 뜯고, 바로 옆집의 포스터로 연명하는 늙은 화가 자일스의 안부를 챙긴다. 똑같은 버스에서 잠시 모자를 베고 쉬며, 같이 일하는 흑인 청소부 젤다의 도움으로 지각을 면한다. 여자이자, 언어장애자, 청소부. 60년대 사회에서 이보다 밑바닥에 살 수 없는 일라이자는 그런 힘든 상황속에서도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그런 일라이자의 삶 속에 괴생명체가 등장한다.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의 거친 남자는 인어-말이 인어지 양서류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인간을 닮은 생물-을 연구목적으로 포획하여 연구소로 데려온다. 본래라면 일라이자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스트릭랜드가 인어에게 손가락을 잘리고, 그 뒷수습을 일라이자가 맡게 되며 그녀의 인생은 난생 처음,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사건 가운데 휘말린다.

 

인어, 매일 스트릭랜드에게 가혹한 고문을 받고 연구를 당하는 말할 수 없는 생명체에게 일라이자는 점차 동질감을 느끼며, 그 동질감과 동정에서 나오는 친절에 인어 또한 반응하게 된다. 그 둘의 사이는 점차 우정을 넘어 이성, 이종간의 사랑으로 꽃피게 된다.

 

참 괴기하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영화다. 청소년 관람불가는 괜히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번에도 자신의 뒤틀린 동화적 상상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구현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다. 로맨스 하면 바로 상상되는 낡은 아이디어들을 현대인들의 올바름에 맞추어 세련되게 변주했다. 한 캐릭터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고, 흑인, 장애인, 게이. 맹목적인 반대를 받던 사회적 약자들이 중심에 서서 균형잡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이상적이고 올바른 현대 영화의 모습이었다.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정말로 이상적인 사랑을 보여주었다. 사랑이란 개념 사이에 어떤 편견도 존재하지 않음을, 같은 인간이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없음을 절대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던 두 인물의 사랑으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들의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이 아니었지만, 스트릭랜드와 그 부인의 관계1보다 훨씬 인간다운 관계였으며 고귀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고찰,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의 삶에도 사랑이 있음을 보여주는 서사는 이미 아카데미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인정 받을 만큼 훌륭했다. 그만큼 이 시대에 걸맞는 로맨스 영화였다는 점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시각적인 촬영기법과 고전적이면서도 훌륭한 음향은 덤이다.

 

세계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나를 포함해서-이 영화는 넘칠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아름다운 영화는 아니다. 기성적인 세계의 흐름을 지지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올바름을 추구한다는 이들 중에도 이 영화는 되려 불편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할 물음을 던져 주고 있다. '한 괴물'을 통해서 말이다.

 

엘라이자와 인어는 올바른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스트릭랜드 또한 그의 삶은 '그 나름대로'는 올바른 삶이었다. 조국 미국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국전쟁에서조차 살아돌아온 스트릭랜드는 투사였다. 미국이 승리하는 올바른 섭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 '조금의 희생과 폭력'은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 그 모든 행동이 조국과 그의 가족, 그의 삶이 더 나아지기 위한 옳은 행동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다. 

 

하지만 인어에게 잘렸다가 다시 접합한 손가락이 그대로 썩은 것처럼, 그의 올바른 섭리와 사랑은 그를 인어보다 더욱 괴물같이 만들었다. 누구를 쏘는데 주저하지 않고, 죽는 것보다 괴롭게 만드는 것 또한 그에게는 별 것이 아닌 일이다. 그에게 고통 당하는 이가 잘못을 했는가는 상관 없었다. 그는 그의 사랑을 위해서, 그 나름의 올바름을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존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인어에게 패배하는 순간까지 그를 동급의 개체로 존중하지 않았다. '넌 신이구나'라며 자신보다 상위의 개체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마치 온라인에 만연해 있는 '정의의 투사'들과 비슷해보인다. 이 영화가 정말 뛰어난 영화라고 치켜세우는 이들 중 한 부류인 그들 말이다. 올바른 사회를 위해서라면 그 누구와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그들은 언제나 정의 규범을 외치곤 한다. '흑인 차별 반대', '성소수자 억압 반대', '여성 혐오 반대'. 그들은 이 가치를 들고 투사처럼 다른 이들과 싸운다. 

 

그 투쟁이 틀린 것은 아니다. 분명 올바른 일이다. 스트릭랜드의 애국도 가치만 봤을 때는 올바른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그들의 정의에 심취해버리고 만 듯 하다. 반대를 하는 이들에게 논리적인 호소를 하는 것이 아닌 린치를 가한다. 중립적인 이들에게 가차없는 욕을 퍼붓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이의 직장을 잃게 하고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 또한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 행동이 옳은 행동이라고 합리화한다. 스트릭랜드가 아무 잘못 없는 인어를 고문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듯 그들도 그렇다. 그러곤 자신들이 지탄 받을 ㄸ '너희는 기득권이다'며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대의 모양 무엇인지 알 수 없네,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내 곁에는 온통 그대 뿐. (I find you all around me.)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내 마음 겸허하게 하네, (It humbles my heart,)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For you are everywhere...)

 

사랑에는 경계도, 모양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형태를 존중해야한다. 사랑을 하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아무리 당신이 입으로는 올바른 가치를 외치는 이라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다른 이에게 당신은 괴물로 비춰질 것이다. 손가락을 쥐어뜯던 스트릭랜드와 다를 바 없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올바르게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가치 위에 있는 궁극적인 올바른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누구를 만나던 웃으며 평화의 인삿말을 건넬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당신을 올바른 사회를 원하는가? 그를 위해 다른 이를 공격하는가, 아니면 존중하는가? 스트릭랜드인가 엘라이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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