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유해준 장군 탄생 100주년 추모

박관우 객원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12/27 [09:28]

▲ 박관우  객원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그동안 브레이크뉴스를 통하여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칼럼을 발표하였는데, 2017년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본 칼럼에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

 

구체적으로 1917년 12월 14일 충남 당진군 합덕면 대합덕리에서 기계유문(杞溪兪門)의 후손 유진찬(兪鎭瓚)의 차남으로 탄생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 활동하였던 유해준(兪海濬) 장군(將軍)인데, 어느 덧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유해준 장군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그 발자취를 돌아본다.

 

유해준 장군은 합덕공립보통학교(合德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예산농업학교(禮山農業學校) 3년 수료한 이후  1935년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단신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는 것인데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서 어떻게 그런 결단을 결행할 수 있었는지 그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필자라면 그렇게 까지 하지 못하였을 터인데 그동안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연구하였지만 그 과감한 결단력에 존경의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구체적인 망명 경로를 소개하면 유해준 장군은 봉천(奉天)과 상해(上海)를 거쳐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는 것인데 1936년 김원봉(金元鳳) 주도하에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입당하였으나 다시 항주(杭州)로 이동하여 조소앙(趙素昻),홍진(洪震) 등이 중심이 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였다.

 

1937년 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에 입학하였으나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생하여 다시 한국독립당에 복귀하여 항주 잔류인원의 후송 책임을 수행하였다.

 

또한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제15기생 생도 모집 시험에 합격하여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제1총대 포병 제2대에서 고된 훈련과 교육 과정을 마치고 졸업과 동시에 임관되었다.

 

더불어 유해준 장군이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 전속 부관직에 임명되어 광복군 창설 작업에 참여한 점을 주목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해준 장군은 광복군 총사령관 명(命)에 의하여 중국전방장사위로부녀회(中國前方壯士慰勞婦女會) 회장 송미령(宋美齡)을 방문하여  축하찬조금 10만원을 받아 광복군 총사령부에 전달하였다.

 

1941년 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흡수 개편되자 광복군 전방 사령부 소속으로서 파견 근무하게 되었고 중국군 중위로서 제3구대장직을 맡아 간사단 한청반(幹四團 韓靑班) 제1기생을 훈련시켜 졸업시킨 이후 원대복귀하였다.  

 

1942년 광복군 제2지대의 간부로 배속되어 지대장 고운기(高雲起),지달수(池達洙) 등 간부들과 함께 신편요원(新編要員)이 되어 수원성(綏遠省) 산바로 가서 초모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43년 유해준 장군은 최전방 중국의 각 부대를 순방하고 적후공작 거점이 될 마점산(馬占山) 부대가 있던 신민보(新民堡) 근처의 현(縣) 정부 소재지로 이동하였으며, 현(縣) 정부 내에 배속되어 일본의 점령지구인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 잠입하기로 하고 중국 위군(僞軍)에 가입대(假入隊)하였다.

 

마침내 10여일이 지난 뒤에 위군복장(僞軍服裝)으로 일본 초병의 검문을 통과하는데 성공하였으나 현지에서 포섭하였던 한국인이 헌병대에 밀고하는 바람에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처음에 헌병대 본부 구치장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장가구(張家口)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 구치소에 미결수로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일본 구주(九州) 소창 재판소(小倉 裁判所)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광복 이후 유해준 장군은 조소앙, 홍진의 권유로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 초창기에 중위로 입대하였으며, 6.25전쟁 안강(安康),기계지구(杞溪(地區) 전투에서 연대장으로 참전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육군보병학교장(陸軍步兵學校長)과 육군대학(陸軍大學) 총장(總長)을 역임한 이후 마침내 1967년 8월 1군사령부 부사령관 재임을 끝으로 30년에 걸친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역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전역사(轉役辭) 중에 “국토통일 성업을 완수할 때가 오면 외견(外見)은 비록 노병(老兵)이되 계급 불요(不要),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성스러운 마음으로 서슴치 않고 사랑하는 나의 1군에 복귀해 여러분들 앞에 서서 싸울 각오가 돼 있습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읽을수록 그 우국충정(憂國忠情)에 숙연한 심정 금할 수 없다.

 

또한 유해준 장군은 군생활시에 평소 고매한 인품으로 인하여 많은 부하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고 하며, 더불어 해박한 지식과 경륜, 애국충정(愛國忠情)에서 우러나오는 훈시, 훈화는 청년 장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유해준 장군은 1977년 건국훈장(建國勳章) 독립장(獨立章)을 수여받았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6년 4월 15일 향년(享年) 70세를 일기(一期)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끝으로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해준 장군의 탄생 100주년을 엄숙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생전에 우국충정(憂國忠情)의 심정으로 군인정신(軍人精神)에 투철하였던 고귀한 생애가 우리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길 충심으로 기원한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브레이크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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