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모스크바’ 대구, 그리고 10월 항쟁의 역사성
대구는 왜 외면하고 회피했을까
![]() ▲ 이계홍 주필 ©브레이크뉴스 |
얼마전 대구에서 지금으로부터 71년 전인 1946년 10월1일부터 12월까지 3차에 걸쳐 대구시민이 궐기한 대구 10월항쟁 추념식과 여러 관련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주요 언론은 물론 지역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그 역사성과 의미를 일부 보도를 근거로 되새겨 보기로 한다.
10월항쟁유족회, 10월문학회, 민주노총대구지역본부 등 지역 20여개 단체가 참여한 10월항쟁71년행사위는 관련 행사를 가지면서 “국가의 반인륜적 집단학살에 대해 정부와 국회가 사죄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또 대구2.28기념공원에서 '10월항쟁 진실규명·정신계승 시민추모제 겸 대회'를 열고 대구 10월항쟁의 역사 현장을 시민과 함께 답사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들은 몇 년 전부터 유족에 대한 배상과 보상, 유해발굴, 추모공원 조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미신청 유족을 위한 조사기간 재설정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제2의 진실화해위원회 설립을 요구하고, 왜곡된 역사교과서 수정과 반전 평화 인권교육을 강화하라고 주장했다.
유족회 등은 또 6.25 전쟁 전후 10월 항쟁에 연루돼 형을 살던 사람들이나 보도연맹원에 가입한 대상을 골라 집중적으로 학살했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이들은 ‘이명박근혜’ 보수정권 내내 이를 묵살하거나 외면하고, 그 이전 군사정부에선 10.1항쟁을 아예 없는 것으로 터부시했다는 것이다.
10월항쟁71년행사위는 "10월항쟁은 대구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미군정 식량정책 실패와 친일세력에 맞선 사건으로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 3.1운동과 함께 3대 민중항쟁"이라며 "하지만 수 많은 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10월항쟁은 망각속에서 '대구폭동', '10월사건'이라 칭하며 민중저항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이들은 특히 "제주4.3항쟁은 역사적 재평가와 기념사업이 이뤄져 ‘평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했지만, 10월항쟁은 참된 역사성이 회복되기는커녕 왜곡된 역사적 평가만 받고 있다"며 "때문에 민간인 학살과 분단으로 귀결된 수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로 가는 역사적 밑거름이 되도록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문재인 정부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폭력에 대해 국민과 유족에 공식 사죄하고 10월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권택흥 10월항쟁71년행사위 공동위원장은 "당시 자발적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던 민중의 자주적 항쟁과 저항 정신을 망각의 저편에서 건져내야 한다"며 "문 대통령은 진상규명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10월항쟁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매년 위령사업을 지원하고 있었으나 이명박 정부때부터 10년간 진실화해위 활동이 중단돼 진실규명과 관련된 예산 지원은 끊겨 유골 발굴 등의 작업은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다. 이상은 일부 지면에 보도된 내용이다.
10.1항쟁 의도적 회피
앞에서 거론되었다시피 대구의 10월 항쟁은 1948년 제주 4.3, 그해 10월 19일 일어난 여순사건의 도화선이 된 해방공간의 가장 큰 비극적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비극을 겪은 10월 항쟁의 본거지인 대구가 더 모르고 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모습이다.
왜 그럴까. 부조리와 시대모순을 극복하고자 사회변화의 기치를 높이 든 정신을 영광이 아니라 수치로 알았을까. 그렇다고 역사를 묻는다고 묻혀지는 것일까.
탐욕과 이익이 우선이라는 타산적 이해와 반세기 동안 반공보수의 길을 간 구권력의 정권유지 프레임 때문일까. 이성적 판단으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특히 10월 항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했다는 그의 친형 박상희가 경찰의 총에 맞아 희생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박상희는 1930년대부터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구미지국장, 구미 건준지부장 등을 맡으면서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구경북 지역의 대표적인 지성이었다.
당시 일본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이념이 사회주의인데, 그것은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상대적 이념이 배운 사람들이 지향하는 사회주의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는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로 몰아 가두고 고문하고 구속하는 등 잔혹하게 다루었다(당시 민주주의는 일제군국주의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고, 이념의 체계도 아니었다).
박상희는 몽양 여운형의 노선을 따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투했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친일경찰과 친일관료, 친일 자본가를 중심으로 나라를 이끌어가고, 시민 탄압은 여전하며, 먹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콜레라까지 창궐하는데 거주의 자유마저 제한하니 지역사회의 대표적 지도자인 박상희가 10월 항쟁의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진두지휘하다 시위진압 증원 경찰로 투입된 충청도 경찰에 의해 사살된 것이다.
대구는 진보의 뿌리
대구경북 지역민의 진보적 성향은 원래 뿌리가 있었으니, 그 근원은 조선조 때 기호학파 세도에 밀린 영남학파가 현실타파를 위한 저항적 위정척사 운동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승화시켜나간 영향이었다. 따라서 의병활동, 국채보상운동, 항일독립운동 등 진보개혁운동의 선봉에 선 것인데, 3차에 걸친 10.1민중항쟁도 그 연장선이었다. 먼 훗날 4.19학생혁명, 6.3사태도 대구가 도화선이었던 것도 이런 진보적 성향의 전통 때문이었다(이계홍의 월간문학 연재소설 '실록 행군' 일부 인용).
사회변혁을 추동하는 진보세력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출신 비율을 보면 대구 경북 출신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았다. 깨어있는 지식층이 많은 결과였다.
김단야(김천) 박열(문경) 김두봉(동래) 김원봉(밀양) 이육사(경북) 이상화(경북) 박문규(경산) 이관술(울산) 이재복(양평이 고향이나 대구에서 활동) 이여성(칠곡) 이쾌대(칠곡) 박상희(구미) 안영달(경남) 황태성(상주) 임종업(김천) 김달삼(대구에서 소년기 보냄) 문상길(경북), 제주 4.3때 박진경 9연대장을 암살한 하사관들도 영남 출신들이다. 인근 원주와 충주에는 이만규 김삼룡, 양양에는 최용달이 있었다.
이밖에도 대구경북과 연고가 있는 진보세력이 많지만 취재의 한계로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모두 옳고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를 보더라도 대구가 이 나라의 진보와 사회주의 구심점이고, 사회주의 산맥이며, 그래서 한국 사회주의 상징 도시임을 알 수 있다.
10.1항쟁의 주체는 대구시민
그렇다면 10.1항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대구경북은 해방되면서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충칭 등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숫자가 이만 명에 이르렀다. 귀국자들은 주로 망명세력들이었으며, 독립을 위해 분투한 항일투사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왜 이들 숫자가 많았느냐면, 앞에서도 거론했듯이 일제 관헌이 이들을 집중적으로 체포에 나서자 만주로 시베리아로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호남·충청 역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체로 자유주의 계열에 비조직적인 데 반해 대구경북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원칙에 투철하고 연대와 단합이 강고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일제 관헌들은 이들을 부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결국 이들은 견디다 못해 도피하거나 망명길을 택했던 것이다.
돌아온 항일투사들은 고향의 심각한 식량난과 어린아이들이 하나같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목격하고 함께 분노했다. 국토가 두 동강난 채 강대국 통치에 지도자들끼리 분열되고, 일제 강점기의 지배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친일 사대주의자들은 새로운 출세의 도구로 미군정에 영합하며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권력과 부를 쌓아가고 있었다. 민족정통성과 민족양심과는 상반되는 길이었다.
피흘려 쟁취한 해방과 독립이 고작 이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귀향운동가들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제적 모순과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 기근과 기아 가운데 착복과 수탈이 여전히 자행되는 것을 보고 침묵할 수 없었다. 결국 투쟁의 경험을 살려 모순극복의 선두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꼭 주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농민 노동자 일반시민 구분없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한다면 저항세력이 풍부한 전시민적 인적 자원이 뭉쳐서 나온 행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했다. 누가 주체세력이고 누가 추종세력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모호했다. 누구나 동조자고 누구나 주동자가 된 셈이었다.
먼 훗날 승자 편에 선 사람들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왜곡했을 뿐, 당시는 누구나 나선 사회변동의 주체였던 것이다. 조직력을 가진 전평과 노평, 운수노조 등 노동자들과 대구고보 대구사범 대구의전 등 학생들이 전면에 나선 것도 사실이고, 공산주의 세력이 잠입해온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그중 시민과 민족주의 양심세력이 더많이 움직였던 것도 사실이다. 부조리와 모순극복이라는 공감과 연대와 지지가 확산됐기 때문에 전도민적 궐기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훗날 정치적 이해관계로 왜곡하거나 숨겼다.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다”
다시한번 당시를 복기해보자. 1946년 미군정기,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백성들은 배를 곯았다. 식량정책 실패로 쌀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니 자고 나면 쌀값이 몇 배씩 폭등했다. 대구는 더 심했으며, 콜레라까지 창궐했다. 미군정은 전염병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시민의 타지로의 진출입을 봉쇄했다. 농산물과 생필품이 제대로 반입되지 못하면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렇게 사태가 심각한데도 미군정은 “쌀이 없으면 채소나 과일을 먹으라”는 허무맹랑한 대책을 내놓으면서 민심과 유리된 채 있었고, 반면에 관리들을 통해 강압적으로 식량공출정책을 폈다. 이 틈을 노려 일부 업자들은 공무원과 짜고 식량의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취했다. 친일세력이 여전히 시민 위에 앉아서 금고를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시민이 분기하는 것은 상식이었고, 따라서 친일세력을 제외하고 미군정의 식랑정책에 맞서 싸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대구시를 쪄누르자 풍선효과처럼 시위는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됐고, 후엔 전라도 충청도로까지 퍼졌다.
10월항쟁은 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와 민심수습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친일경찰을 통한 일제강점기의 지배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시위를 주도한 지도부에 대한 마구잡이 좌익사냥, 친일파 관료의 권력복귀 등으로 절망에 빠진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분노의 표출이었다.
당시 미군 정보기관 G-2 집계에 따르면, 경찰측 사망 82명, 행불 145명, 부상 96명, 우익인사 사망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이었으며, 시위대는 사망 6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민간인희생’인용).
피해집계 결과 진보개혁 세력보다 경찰과 우익인사 피해가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주민들은 왜곡과 조작이라며 믿지 않았다. 경찰의 피해가 강조됨으로써 시위대의 폭력성을 내세우는 것일 뿐, 실제로 총기를 지니고 있는 경찰에 의해 양민이 더많이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거기다 10.1항쟁으로 투옥된 사람들과 보도연맹원으로 가입한 사람들까지 처형된 것을 집계하면 희생자 수는 우익 피해보다 수십 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이 무장시위는 제주4.3, 여순사건의 전주곡이자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경산코발트광산항거, 3.15부정선거항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2.28학생운동, 6.3사태로 이어졌다.
교과서 왜곡
왜 숨기고 감추면서 교과서까지 왜곡했을까.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미군정에 대한 투쟁으로 단정했을까.
보도에 따르면, 최근 교육부가 공개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짧은 서술로 10월 항쟁을 다루고 있다. 신탁통치 문제로 인한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조선공산당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영남의 유혈 충돌사건 등을 일으키며 미군정에 대한 물리적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찬반탁 과정에서 ‘10.1폭동‘이 발생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차적 책임은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살해한 현지 경찰에 있다”
진실화해위 2010년 발간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이 사건(10월 항쟁)의 일차적 책임은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살해한 현지 경찰에게 있다”며 “그러나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군정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에는 미군정이 남한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으므로 (중략) 미군정도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밝혀 10월 항쟁에 대한 국가기관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대구시가 조례를 제정해 10월 항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사업을 지원하기로 한 것도 10월 항쟁이 정치·이념의 산물이 아니라 그때를 살아가던 대중적 요구로 발생한 아픈 역사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과서는 사안의 본질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10월 항쟁에 대한 오랜 연구로 <10월 항쟁>을 펴낸 김상숙 작가(전 진실화해위 조사관)는 “10월 항쟁에 참여한 인원, 계층을 봤을 때 단순히 조선공산당 한 세력만이 주도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며 “다양한 계층, 계급. 당시 시민과 농민들이 다 같이 참여한 사건이고, 요구 내용도 당시 민중의 피부에 와 닿았던 내용들, 식량문제, 토지개혁문제, 친일경찰 물러가라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미군정 당시 사회경제적 배경이라든가, 정치 상황에 대한 해석 없이 단순히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는 건 사건 자체를 오도하는 것”이라면서 “당시 조선공산당이 대중으로부터 두터운 지지를 받았지만, 조직이 탄탄하지 않았고 미군정의 탄압이 심했다. 해방 직후 민중의 건국운동 열기는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왜 10.1항쟁을 항쟁의 고장에서 외면하고 회피하는가.
5.16 이후 대구가 냉전·반공주의와 지역패권주의에 기대 인적 물적 자본을 확충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정치 프레임에 진보적 가치가 터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소장은 “기존 보수는 종북좌파 이데올로기와 국가권력에 기대는 국가 의존을 통해 너무나 쉽게 이득을 보는 정치를 해왔다”고 분석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지역적으로는 영남, 세대로는 60대 이상에 기반한 그동안의 보수정권은 전쟁과 북한에 대한 날 것의 공포와 공고한 신념체계가 남아있는 한 특정 지역, 특정 세대를 중심으로 한 강경보수 또는 극우에 가까운 정치세력으로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존’이 아닌 ‘잔존‘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그 확장성은 지극히 미미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안보보수, 시장만능보수, 유신보수가 더 이상 대구를 대변하진 못할 것이다. 성숙한 국민지성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런 보수가 10.1항쟁 정신을 훼손했다면 이제 퇴장의 운명을 맞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대세인 것 같다.
10.1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진상규명, 명예회복에 나서야 할 때다.
*필자/이계홍. 소설가. 본지 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