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새로운 언어로 내 삶을 바라보는 계절

이 가을에 새로운 나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좀더 깊고 섬세한 나를...

이서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9/25 [15:21]

▲ 이서영     ©브레이크뉴스

 

가을은 작은 화분 안에서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보도의 블럭과 블럭, 그 작은 틈새에서도 무럭무럭 자란다. 가을은 그렇게 도처에 산재해 있다. 가을이 '우주'라는 의미의 코스모스꽃을 지닌 이유도 바로 '도처에 산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을에는 새 소리도 그냥 새 소리가 아니다. 가을은 새 소리에도 빛깔을 입히고 분위기를 입힌다. 가을은 성장하고 파티에 나가려고 막 집을 나서는 홍조빛 소녀와 같은 표정이다. 가을은 설렘. 가을은 소소한 일들에도 마음이 잔잔하게 물결치거나 바람 한 점에도 요동치는 파도와 같이 섬세하다. 주말 아침. 게으른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느리게 산책을 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북카페는 밝은 빛을 받아 현란하다. 고즈넉한 분위기지만 자세히 귀기울이면 풀벌레들의 합창으로 귀가 아플 지경이다. 매미는 어느덧 땅속으로 사라지고 이제 가을을 노래하는 숱한 전령들이 여기저기서 합창을 한다.

 

산책을 하다가 발 밑에 밟히는 야생초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가능한 한 몸을 납작하게 엎드린 채 땅과 맞닿아 있었다. 그들을 보니 애틋한 마음이 저절로 일었다. 무릇 생명을 지닌 것들치고 애틋하지 않은 게 있을까? 우리가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뱀이나 거미 같은 생물들도 사실은 인위적인 교육에 의하여 '혐오'라는 관념이 일반적인 본능인 것처럼 오도되어 있을 뿐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그 삶 자체만으로 애틋하고 긍휼한 존재이다. 관념 속 대상들은 왜곡된 거울과 같아서 한 사람이 자라면서 받는 교육이나 경험치들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게 아님에도 우리는 자신의 느낌이 곧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공통의 느낌인 것으로 착각한다. 사실은 동일한 상황에 놓여졌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치를 갖는다.

 

20세기 최고의 영적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구르지예프의 사상을 정리한 우스펜스키는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편벽된 관념 속에서 사는 이유는 눈을 뜨고 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 수면 상태를 두 가지 용어로 설명한다.

 

첫째로 그는 '동일시identification'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우리는 생의 반 이상을 이 상태로 보낸다고 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내가 하는 말, 느낌, 내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내가 바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내게 매력적이거나 혐오를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즉 대상에 대한 느낌이나 믿음이 곧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인 사상이나 느낌이나 대상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한다. 즉 에고가 형성되는 것이다. 혹은 자신만의 개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동일시의 상태에 놓이면 자신과 타자가 분리되기 때문에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두번째로 그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고려considering'를 설명한다.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타자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그들이 나를 공정하게 다루는지, 충분히 존경하는지에 대해 늘상 신경을 쓰는 상태. 이는 일상의 삶을 장악하고 있어서 누군가에게 그것은 강박관념으로 작용해 삶이 온통 걱정과 의심과 의문과 불안으로 가득해져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이 여유 있게 들어설 공간이라고는 없어진다. 털끝만큼의 마음의 여유마저도 그들에게는 불안의 요인이 된다.

 

그는 우리가 이 두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단어부터 점검을 해야 하는데 이 단어는 사실 너무나 많은 의미를 한꺼번에 포함하고 있어서 좀더 세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어떤 인간은 한 번도 자신을 의식한 적도 자신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혹자는 자신을 의식하려고 매우 노력하는 이가 있을 수 있으며 혹자는 자신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존재에 이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부류가 '인간' 혹은 '사람'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쓰인다는 것. 그는 이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인간을 7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싶어한다.

 

1 카테고리는 육체적인 사람. 2 카테고리는 감정적인 사람. 3 카테고리는 지적인 사람. 구르지예프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 가지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4 카테고리는 단일성과 의식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5 카테고리는 단일성과 자의식을 성취한 사람. 6 카테고리는 '객관적 의식'을 이룬 사람. 그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도달한 사람이다. 7 카테고리는 영원한 '나'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의식의 상태들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불멸임을 이미 아는 사람이다. 구르지예프의 이 분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논리가 옳다 그르다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논리로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는가에 있다. 그는 종교와 예술과 과학과 철학이라는 넓은 개념들을 예로 든다.

 

그 중 종교에 대한 각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들여다보자. 1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들의 종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모든 형태의 물신 숭배로 물들어 있다. 2 카테고리의 종교는 감정적, 감상적, 혹은 광신으로 변할 수 있다. 또는 더없이 잔인한 불관용이나 이단의 처형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3 카테고리의 종교는 의례적이고 학문적이다. 단어, 형식, 의례 등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4 카테고리의 종교는 자기개발을 위해 노력한다. 5 카테고리의 종교는 단일성을 획득하고 있고 1, 2, 3 카테고리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보다 많이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는 사람의 종교다. 6, 7 카테고리 사람들은 설명조차 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다.

 

이렇듯 같은 '종교'라는 단어 속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종교 행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언가를 일반화시켜 정의 내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구르지예프는 이것을 '새로운 언어'라고 표현한다. 같은 발음, 즉 기표가 같다고 하여도 그 속에 함의된 기의가 이렇듯 다르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우리는 '뱀'이나 '거미'라는 기표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기의를 상상할 수 있으며 이 상상에 이르러야만 나의 생각과 관념이 타자와 상이할 수 있다는 합리적 결과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구르지예프는 인간을 '기계적'이라고 표현한다. 심하게는 '인간은 기계'라고 정의 내리기도 한다. 언뜻 들으면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인지 놀라게 된다. 그는 언어의 섬세함에 도달해 있다. 그는 같은 언어 속에 숨어 있는 놀랍도록 다양한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내밀한 도구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늘 관성과 습관에 의해 일상을 운용한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일을 한다. 늘 같은 길로 출근하고 늘 같은 커피를 마신다. 불편함은 감수하지 않는다. 익숙함처럼 편안한 것은 없으며 편안함 이상 좋은 것도 없다. 늘 일상은 같은 쳇바퀴를 돌며 돌아가고 그 시스템은 안정적이므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러나 안정적이고 편안한 시스템이 진정으로 내 삶의 행복과 성장을 담보할 수 있을까. 배우고 성장해야 할 지구별 여행자로서의 우리가 날마다 같은 생각, 같은 생활 패턴으로 안정을 구가하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일까? 날마다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바로 내 삶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조금씩 깨어나게 된다. 잠들어 있는 삶 속에서는 성장의 씨앗 또한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미묘한 울림과 섬세한 풍경들이 나를 새롭게 깨어나게 한다. 이 가을에 새로운 나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좀더 깊고 섬세한 나를.

 

새로운 시스템으로 내 삶을 해석할 새로운 언어를 공부할 기회를 기꺼이 내 안으로 들여보는 것. 내 삶에 새로운 언어를 장착하려고 애쓰지 않는 한 나는 늘 과거의 사람, 통속의 사람, 클리셰cliche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을 테니.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 <책읽어주는여자 블루노트> 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