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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33) - 현악기를 품은 피아노의 탄생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9/20 [10:44]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시대의 열정적인 예술가 후원으로 인류사의 전환적인 문예 부흥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가문입니다. 이와 같은 메디치 가문의 원동력이 되었던 메디치 은행을 설립한 조반니 드 메디치(Giovanni diBicci, 1360~1429)는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입니다. ‘조반니 드 메디치’가 1397년 메디치 은행을 설립한 이후 후손 중 딸의 아들로 메디치가를 이어가던 ‘잔 가스토네 드 메디치’(Gian Gastone de' Medici, 1671~1737) 대공을 마지막으로 1737년 340년간의 역사를 품은 메디치 가문은 모든 후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이러한 메디치 가문은 340년에 이르는 대를 이은 예술가 후원의 역사에서 인문학에서부터 미술과 음악은 물론 여러 분야에 이르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와 같은 메디치가에 대하여 미술가 후원에 대한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메디치가의 진정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바이올린 악기와 피아노가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탄생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려면 먼저 메디치 가문의 계보에 대하여 잠시 헤아려야 합니다. 
  

▲ 바이올린과 피아노 악기 탄생에 공헌한 메디치가의 인물(좌로부터 ‘로렌초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루크레지아 드 메디치’(LucrezIa de' Medici. 1470~1553), ‘레오 10세’(Pope Leo X. 1475~1521),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 코시모 3세 드 메디치’(Cosimo III de' Medici. 1642~1723)     © 브레이크뉴스


 
메디치 가문의 역사에서 예술가 후원과 문예 부흥에 가장 많은 영향을 가져다주었던 인물은 ‘위대한 로렌초’로 불린 ‘로렌초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입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이며 메디치 은행의 설립자인 조반니 드 메디치(Giovanni diBicci, 1360~1429)의 증손자입니다. 그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으며 그중 장녀인 ‘루크레지아 드 메디치’(LucrezIa de' Medici. 1470~1553)는 메디치 가문의 역사에서 단절된 혈통의 마지막 계보를 이었던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1488년 피렌체 귀족 ‘자코보 살비아티’(Jacopo Salviati. 1461~1553)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녀의 남동생 ‘레오 10세’(Leo X. 1475~1521)가 1513년 교황에 오르면서 이들 부부는 소금 독점권을 얻게 되어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직계 혈통의 계보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로렌초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의 증손녀로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가 되었던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가 세상을 떠나면서 실질적으로 단절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계보는 ‘로렌초 드 메디치’의 장녀인 ‘루크레지아 드 메디치’(LucrezIa de' Medici. 1470~1553)가 1486년 이탈리아 귀족 ‘자코보 살비아티’(Jacopo Salviati. 1461~1533)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낳아 그 후손들이 마지막 계보를 이어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약하여 보면 ‘루크레지아 드 메디치’의 여섯 번째 딸인 ‘마리아 살비아티’(Maria Salviati. 1499~1543)가 낳은 ‘코시모 1세 드 메디치’(Cosimo I de 'Medici. 1519~1574)와 ‘루크레지아 드 메디치’의 8번째 딸인 ‘프란체스카 살비아티’(Francesca Salviati)가 낳은 아들이 27일간 잠시 교황에 올랐던 ‘레오 11세 교황’(Leo XI)으로 메디치가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레오 교황은 후손이 없어 후계가 단절되었고 ‘코시모 1세 드 메디치’의 아들 ‘페르난도 1세 드 메디치’(Ferdinando I de 'Medici. 1549~1609)로 대를 이은 이후 그의 아들 ‘코시모 2세 드 메디치’(Cosimo Ⅱ de' Medici. 1590~1621)로 대가 이어졌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 ‘페르난도 2세 드 메디치’(Ferdinando II de 'Medici. 1610~1670)로 후계가 이어졌으며 다시 그의 아들 ‘코시모 3세 드 메디치’(Cosimo III de' Medici. 1642~1723)가 후계를 물려 받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잔 가스토네 드 메디치’(Gian Gastone de' Medici, 1671~1737) 대공이 후계가 없이 사망하면서 메디치 가문은 모든 후계가 단절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메디치 가문이 바이올린과 피아노 악기를 탄생시킨 배경을 살펴보면 ‘로렌초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가 당시 ‘크레모나’ 도시에 청년 악기 제작자이었던 ‘고토라도 아마티’(gotardo Amati. 1476~1540)에게 여러 악기를 주문하여 음악가들을 후원하였던 내용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이러한 메디치가의 음악에 대한 후원과 관심은 ‘로렌초 드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 교황이 되었던 ‘레오 10세’(Pope Leo X. 1475~1521)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레오 10세 교황’은 다양한 악기의 제작에 대한 후원은 물론 인근 나라에서 초청한 음악가와 가수 그리고 연주자에 대한 지원으로 교황청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를 만큼 열렬한 음악 애호가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메디치가의 음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레오 10세 교황’의 누나이었던 ‘루크레지아 드 메디치’(LucrezIa de' Medici. 1470~1553)를 비롯하여 그의 여러 후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증조할아버지 ‘로렌초 드 메디치’와 작은할아버지 ‘레오 10세 교황’으로 이어진 음악사랑은 프랑스 ‘헨리 2세’ 왕(Henry II-French. 1519~1559)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던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에게서 더욱 빛이 났습니다. 그는 아들 ‘샤를 9세 왕’’(Charles IX. 1550~1574)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탈리아 ‘크레모나’ 도시의 악기 제작자인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 1505~1577)에게 궁전에서 사용할 여러 현악기와 함께 바이올린 악기 제작을 의뢰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카트린 드 메디치’의 주문으로 최초의 바이올린 악기를 제작한 ‘안드레아 아마티’의 아버지가 바로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악기를 제작하였던 ‘고토라도 아마티’인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이어온 메디치가의 음악에 대한 후원과 관심으로 메디치 가문의 딸 ‘카트린 드 메디치’에 의하여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현악기 바이올린(violin)이 탄생한 역사와 함께 화성과 선율의 요소를 함께 품은 피아노(piano) 악기가 메디치가에 의하여 탄생한 사실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문예 후원 가문으로 평가하게 되는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피아노(piano) 악기를 최초로 제작한 인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파도바(Padova)출신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 1655~1732)입니다. 그는 메디치가의 주문으로 최초로 바이올린을 제작하였던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 1505~1577)의 손자인 ‘니콜라 아마티’(Nicola Amati. 1596~1684)의 크레모나 도시 공방에서 1680년 수습생으로 공부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제작의 역사적 관점에서 ‘니콜라 아마티’는 혁신적인 악기 제작의 교육 프로그램을 열었던 인물입니다. 

 

▲ (좌) 최초 바이올린 제작자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 1505~1577)와 (중) 그의 손자 ‘니콜라 아마티’(Nicola Amati. 1596~1684) (우) 최초 피아노 제작자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 1655~1732)입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 / http://www.sussexvt.k12.de.us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니콜라 아마티’(Nicola Amati. 1596~1684)의 공방에서 현악기 제작 교육을 받은 수습생을 살펴보면 세기의 명품 악기를 제작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와 ‘안드레아 과르네리’(Andrea Guarneri. 1626~1698)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 출신의 ‘야콤 슈타이너’(Jacob Stainer. 1619~1683)는 ‘스트라디바리’가 명성을 얻기 전에 가장 주목받았던 제작자입니다. 또한, 현악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소리와 진동을 전하는 구멍인 사운드 홀(f-holes)의 크기와 현악기의 허리부분(C- Bouts)의 과학적인 곡선과 크기를 정립한 ‘죠반니 바띠스따 로제리’(Giovanni Battista Rogeri. 1642~1710)와 진주와 같은 보석을 상감기법으로 작업한 매우 아름다운 현악기 제작자로 잘 알려진 ‘지아코모 제나로’(Giacomo Gennaro. 1627~1701)도  ‘니콜라 아마티’ 공방에서 교육받은 제작자입니다. 또한,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 남쪽 오스트리아 국경 부근에 아름다운 도시 ‘미텐 발트’(Mittenwald)가 세계적인 현악기 제작도시로 성장한 배경도 ‘니콜라 아마티’ 공방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던 악기제작자 ‘마티아스 클로츠’(Matthias Klotz. 1656~1743)가 고향에 돌아가 마을 주민에게 악기 제작 술을 가르친 까닭이었습니다. 이에 당시 가장 주요한 현악기 제작도시로 부상하면서 공방형태의 학교가 1858년 바이에른 공국의 ‘맥시 밀리언 2 세 왕’(King Maximilian II. 1811~1864)의 후원으로 ‘미텐 발트 바이올린 제작학교’가 설립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현악기 제작 교육학교로 발전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미텐 발트 악기 제작학교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디치가에 의하여 피아노 악기가 최초로 제작된 역사적인 이야기를 헤아리면서 현악기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는 이유는 다음 회에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또한, 필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살펴 가면서 자료를 찾아 헤매던 중 현악기의 본고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현악기 제작가 이승진 씨를 비롯하여 여러 한국인의 연관 자료를 만나게 되었던 사실은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 (좌) 현악기 제작가 이승진 악기 제작 장면 (중) 악기에 칠하는 장면 (우) 이탈리아 제작가 협회 전시에서 남편 이승진 씨가 제작 출품한 악기를 시연하는 부인 강운영 바이올리니스트 (사진 제공: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현악기 제작가 이승진 씨는 현재 현악기의 본고장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이탈리아 현악기 제작가협회’ 정회원으로 등록된 유망한 악기 제작가 입니다. 이탈리아 현악기 제작 협회는 인류 최초의 현악기가 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명성에 걸맞게 이국인에게 무척이나 배타적인 협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승진 씨는 현악기의 본고장 크레모나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척박한 환경에서 3백여 년 동안 고달프게 자란 가문비나무의 밑동이 바이올린 악기의 공명판으로 가장 최적이라는 일명 ‘가문비의 공명’을 탄생시킨 오늘날 이탈리아 최고의 악기 명장 ‘지오바타 모라시’(Gio Batta Morassi. 1934~)공방에 입문하였습니다. 그는 6년 동안 ‘지오바타 모라시’ 공방에서 전통 방식의 현악기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모라시 가문의 악기들을 제작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통한 교육과 실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2013년 이탈리아 안라이 현악기 제작 콩쿠르 ’바이올린‘ 부분 1위’와 ‘2015년 이탈리아 안라이 현악기 제작 콩쿠르 ’비올라‘ 부분 2위’‘ 그리고  ’2017 몰타 국제 현악기 제작 콩쿠르 ‘비올라’ 부분 은메달’ 수상과 같은 국제 현악기 콩쿠르에서 15회에 이르는 자랑스러운 수상을 하였습니다.

 

▲ 현악기 제작가 이승진 씨가 제작한 2012년 가림베르티(Garimberti) 모델 안라이 콩쿠르 수상작품 ((좌) 악기 전면부, (중) 후면부, (우) 악기의스크롤(Scr oll) 페그박스(Pegbox)부분 (사진제공: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이승진 씨가 이와 같은 자랑스러운 현악기 제작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그의 누나 이소미 씨가 2005년 ‘이탈리아 ’굽비오 국립 현악기 제작학교’(Maestri Liutai Scuola di Gubbio Italia)를 졸업하였던 영향이 많았습니다. 누나 이소미 씨는 ‘미텐 발트 악기 제작학교’를 졸업한 이지용 씨와 결혼하여 현재 영국 런던에 소재한 세계적인 바이올린 수리 복원회사 ‘플로리안 레온하르드’(Florian Leonhard Fine Violins)에서 남편 이지용 씨는 현악기 수리 복원가로 이소미 씨는 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악기 제작가 이승진 씨는 2015년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강운영 씨와 결혼하여 부인 강 씨는 현재 이탈리아 ‘밀라노 포메리지 무지칼리오케스트라’와‘ 볼로냐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연주자와 악기제작자라는 실과 바늘 같은 인연 속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자긍심을 현악기의 본고장에 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악기 제작가 이승진 씨와 활 전문가 이소미 씨 남매 이외에도 ‘이탈리아 ’굽비오 국립 현악기 제작학교’의 최초 한국인 졸업자로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경호 씨를 비롯하여 ‘크레모나 국제 현악기 제작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동진 씨와 독일 ‘미텐 발트’ 악기 제작학교를 졸업한 황인규 씨 그리고 크레모나 ‘국제현악기수공전문학교(IPIALL)를 졸업하고 이승진씨에 이어 이탈리아 현악기 제작가 협회 회원으로 등록된 홍성희 씨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명 연주자들과 달리 잘 알려지지 않은 자랑스러운 한국인 현악기 제작 명인의 이야기를 다음 기회에 독립적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어서 이와 같은 오랜 현악기의 역사를 안고 메디치 가문에 의하여 피아노 악기가 최초로 제작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다음 칼럼은 (314) 메디치가와 피아노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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