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112) - 역사가 삼켜버린 비밀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7/12 [15:10]

BC. 522년 '다리우스 1세'(Darius I. BC. 550~BC. 486)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왕에 오른 배경에 관한 이야기는 인류사에서 역사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BC. 425)와 역사 총서(Bibliotheca historica)의 저자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 BC. 90~BC. 30)의 기록에서부터 상상과 추정이 뒤엉킨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그중 이란 서부의 케르만샤주의 베히스툰에 높이 100m에 이르는 거대한 자연 석회암 절벽에 새겨진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은 실제의 주인공이 남긴 역사의 유적입니다. 이 유적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몰락 이후 묻혀있던 유적으로 중세 이후 발견되면서 고대 언어의 비밀을 풀지 못하고 신비의 유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근대에 조금씩 비밀의 베일을 벗겨내다가 1837년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장과 왕립아시아학회 회장을 지낸 아시리아 연구의 세계적인 석학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 1810~1895) 박사에 의하여 비밀의 비문이 해독되었습니다.

 

▲ (좌) (우)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  (중) 베히스툰(Behistun) 지도   출처: https://en.wikipedia.org / http://www.livius.org     © 브레이크뉴스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대와 이란 고원에 수없이 세워지고 사라진 나라의 역사가 남은 터전에 가장 주요한 도로의 길목에 자리한 자연적인 공간을 이용하여 조성된 이 유적은 소중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문은 '다리우스 1세 왕'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유적의 가치는 소중하지만, 역사의 진실이라는 점에서 많은 평가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비문의 부조에 담긴 그림으로 전하는 기록과 함께 설형문자로 이루어진 비문에는 엘람 문자와 바빌로니아 문자, 고대 페르시아 문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에는 키루스 대왕의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건에서부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왕들의 계보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리우스 자신의 업적을 방대하게 남겼습니다. 그러나 전임 왕이었던 켐비시스 1세’(Cambyses I. BC. 600~BC. 559)왕과 '바르디야'(Bardiya.?~BC. 522)왕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기록 내용을 보면 끝없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의 역사가이었던 ‘헤로도토스’의 9권으로 이루어진 저서 ‘역사’에서 ‘다리우스’에 대한 내용과 전임 왕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많은 사실에서 ‘헤로도토스’ 자신도 이러한 역사적인 의문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당시 상황을 다리우스가 기술한 ‘베히스툰 비문’의 내용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 중 일부 내용-  
키루스 대왕의 아들 ‘켐비시스 1세’는 형제 바르디야(Bardiya)가 있었다. ‘켐비시스 1세’는 ‘바르디야’를 죽인 후 비밀로 하였다, 그런데 ‘켐비시스 1세’가 이집트에 있었을 때 페르시아와 여러 나라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가우마타’라는 이가 자신이 ‘바르디야’로 사칭하여 왕이 되었다, 이에 이집트에 있던 ‘켐비시스 1세’가 이복형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자살하였다. 이에 다리우스는 ‘가우마타’가 ‘바르디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메디아 왕국에서 ‘가우마타’ 세력들을 제압하고 왕이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다리우스가 기술한 내용으로 제작된 비문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이와 함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그의 역사서 3권에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바르디야’를 ‘스메르디스’(Smerdis)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르디야’(Bardiya)가 고대 페르시아어이며 그리스 시대에는 아시아 언어권에서 파생된 ‘스메르디스’(Smerdis)로 불렀던 여러 기록과 일치한 내용입니다. 필자는 편의상 ‘바르디야’로 표기합니다.
 
-‘헤로도토스’ ‘역사’ 내용-
이집트에 있던 ‘켐비시스 1세’가 에티오피아 왕이 봉헌한 귀한 활을 페르시아에 보내면서 언제나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형제 ‘스메르디스’가 이를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수사(Susa)에 비밀리에 암살자를 보내어 ‘바르디야’를 암살하였다. 그 후 ‘켐비시스 1세’가 이집트에서 수사(Susa)로 돌아가려고 말에 오르면서 실수로 칼날에 허벅지를 베는 상처를 입어 상처가 악화하여 며칠을 고열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암살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수사궁전의 관리가 ‘켐비시스 1세 왕’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서 ‘바르디야’와 닮은 자신의 형제를 ‘바르디야’로 위장하여 왕에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왕의 자리에 오른 그는 수사 궁전에서 많은 나라를 통치하면서 과감한 세금 면제를 시행하여 여러 민족의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가졌던 다리우스를 포함한 7인의 귀족 중 한 사람인 ‘오타네스’(Otanes)가 그 전모를 파악하여 7인의 귀족이 수사 궁전을 쳐들어가 그들을 처형하고 다리우스가 왕이 되었다,

이러한 삼류 소설과 같은 내용이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에 전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고도의 음모로 이루어진 다리우스 세력의 행동이 많은 의구심을 갖게 되지만 ‘바르디야’의 기록은 놀랍게도 말끔하게 지워진 채로 오랜 역사에 담긴 의문은 그 진실을 알아야 할 주인마저 잃어버린 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진실에 대한 가장 정확한 판단은 민심이었습니다. 당시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페르시아와 아케메네스 제국은 물론 통치권에 있던 메디아 왕국, 엘람 왕국,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이르는 모든 지역에서 의문의 죽음에 대한 항거로 다리우스의 통치를 반대하는 극심한 반란이 오래도록 일어났던 것입니다.

 

▲ (좌)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history) 1494년 라틴어판  (중) ‘베히스툰 비문’ (우)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또한 ‘베히스툰 비문’에 담긴 다른 내용을 보면 ‘다리우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의 은총으로 정당하게 왕에 오르게 되었음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는 ‘아후라 마즈다’가 어원적으로 직역하면 위대한 지혜의 뜻이지만 전능한 우주의 창조자이며 정의로운 수호신이라는 종교적인 해석에 비추어 볼 때 다리우스 자신이 정당한 왕권에 대한 많은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아후라 마즈다’의 신봉이 아케메네스 제국의 정신이 되었으며 훗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서 수호신으로 받들었던 사실을 새겨보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오점을 지우고 빛나는 계승으로 전하려는 문제 또한 역사에 담긴 교훈이라 할 것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리우스 1세'(Darius I. BC. 550~BC. 486)의 통치 기간에 그가 이루어낸 업적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이었습니다.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서부터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였으며 BC. 515년에는 인더스 강 영역을 정복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흑해 연안으로 이주하여 전설적인 전사로 세력을 키워가던 스키타이인의 세력화를 저지하면서 동유럽 영역까지 통치의 기반을 넓혔습니다. BC. 497년에는 고대 이집트의 완전한 정복을 이루면서 역사적인 숙제로 남아 있었던 홍해와 나일 강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였으며 BC. 492년에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그리스 영역의 모든 나라를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BC. 490년 올림픽의 꽃 마라톤을 낳은 그리스와의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에서 패배하면서 성화처럼 타오르던 부흥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폐막을 알리는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치욕적인 패배의 복수를 위하여 전의를 불태우며 강력한 해군의 전투력을 보강하는 현장을 주야로 독려하던 다리우스에게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반란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이에 강력한 수습을 위하여 속국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특수 병력을 조직하려 하였던 과도한 일정에 건강을 해치면서 BC. 486년 10월 64세의 나이로 장대한 삶을 마쳤습니다.

 

'다리우스 1세'(Darius I. BC. 550~BC. 486)에 대한 많은 평가와 해석이 역사의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물이 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기고 갔지만, 필자는 다리우스의 삶과 통치의 철학에 대한 역사적 행간을 헤아리면서 왕권의 승계 과정에서 빚어진 의문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노력이 위대한 업적으로 드러난 사실들을 절감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혁신적인 업적을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삼천 년 전의 역사에서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Royal Road’의 건설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오랜 지중해 상권의 왕자로 군림하였던 고대 페니키아를 정복한 이후 그들이 사용하였던 무역 시스템을 바탕으로 해상과 육로를 잇는 더욱 빠른 배송을 위한 고속도로망을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무역의 번영을 통한 탄탄한 국가 재정의 수익구조를 창출한 내용으로 나아가 이러한 도로망을 통한 광활한 통치영역의 신속한 지배 수단을 체계화한 의미가 돋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살펴지는 내용은 다리우스 자신의 초상을 넣은 금화 ‘다릭’(Daric)화를 주조하여 공용 통화 시스템을 구축하여 넓은 지배지역의 경제적 단일화를 시행한 점입니다. 또한, 다리우스 왕의 정책에서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진 대목은 세금의 징수에 대한 부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의 징수는 민심과 가장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부분으로 다리우스는 통치 기간 동안 세금의 징수를 본국과 속국의 관리가 담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민간업자에게 이를 대행하게 하여 부당한 징수를 통한 민심의 반목을 사전에 통제하고 국고의 세금이 중간에 새나가지 않고 온전하게 징수되는 이중적인 효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금 징수 업무를 대행한 업체가 이라크 동남부에 자리한 도시 ‘니푸르’(Nippur)에 '무라슈'(Murashu)라는 가족으로 구성된 은행 기업이었습니다. 이들은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BC. 580~BC. 529)이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여 유대인 석방을 선언하였을 때 본국에 돌아가지 않고 유대인 자유 정책을 펴는 부흥하는 나라에 그대로 남아 대금업을 시작하였던 유대인 가문입니다. 이들은 가족을 중심으로 유대인 공동체를 구성하여 나라마다 지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가축과 농산물을 담보로 대출업무를 시작하면서 각 지역의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와 장비들을 임대하여 일반 서민에게 빌려주고 수익금을 배분하는 경영방식으로 귀족과 서민의 중개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렇게 얻어진 수익의 일정액을 각 나라의 왕실에 세금으로 내면서 서민과 귀족 왕실에까지 그 평판이 아주 좋았으며 이러한 사실이 다리우스 왕에게 전해져 다리우스 왕이 세금의 징수를 유대인 기업 '무라슈'(Murashu)에게 대행시켰던 것입니다.

 

▲ (좌) 다리우스 1세 왕 (중) 다이우스 시대 지도 (우) ‘다릭 금화’(Daric)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다리우스 왕의 혁신적이고 효율적인 정책들은 다리우스 왕을 왕위에 올린 7인의 귀족과 유능한 인재의 등용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다리우스 왕의 통치에 대한 세세한 면면을 살펴보면 자신의 측근은 각 나라와 지역의 국정과 행정업무를 감찰하는 업무를 맡게 하였습니다. 이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와 ‘수사’(Susa) 그리고 바빌로니아에 중앙기관을 두어 방대한 통치 영역과 많은 업무에 대하여 즉각적인 동향의 파악에 대한 가장 신속한 정보를 가져와 문제의 해결에 즉시 대처할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리우스 왕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보편적인 역사의 한 이름으로 지나쳐 왔지만, 그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헤아림은 오늘날에도 많은 역사적 교훈을 가져올 내용이 많습니다. 기회가 되면 단행본으로 소개해 볼 생각입니다.

  

역사가 삼킨 비밀의 죽음을 안고 왕위에 올라 그 정당성을 치세의 업적으로 남긴 ‘다리우스 왕’은 자연의 절벽에 새겨놓은 ‘베히스툰 비문’과 함께 전설처럼 역사의 강을 흐르고 있습니다. 다음 칼럼은 (113) 페르시아와 에스더서입니다.*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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