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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잊혀진 독립운동가 임 빌리버 추모

항일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던 독립운동가 임 빌리버 추모

박관우 역사작가 | 기사입력 2017/05/29 [10:13]
▲ 박관우 역사작가    ©브레이크뉴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던 윤예원 신부의 항일운동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인물이 있었으니, 본 칼럼에 소개하는 임 빌리버이다. 여기서 임 빌리버는 원래 이름은 아니고 천주교 본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의 12사도중의 일원인 필립보와 동일한 본명으로 추정된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에 의하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난지 7개월이 되는 1919년 10월 황해도 매화 본당에서 신부들의 회의가 열렸을 때 홀연히 나타나, 특히 윤 신부에게 상해임정에 합류하기를 권하였던 임 빌리버라는 인물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 청년은 구체적으로 윤 신부에게 상해임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보내는 권고문 500매를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윤 신부의 핵심적인 항일운동인 군자금을 모집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주었으니, 당시 윤 신부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인적사항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안타깝게 생각된다.

 

여기서 군자금이란 바로 적십자 회비를 의미하는데, 임 빌리버는 윤 신부에게 적십자운동의 참여를 권유하며, 이러한 권유를 받아드린 윤 신부는 직접 회원으로 가입하고, 40원의 회비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황해도 공소를 다니면서 신자들에게 회비를 낼 것을 촉구하고, 더 나아가서 동료사제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적극적인 동참을 촉구하니, 이는 바로 윤 신부가 군자금 모집활동을 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적십자회는 1919년 8월 29일에 상해임정에서 설립한 보건후생단체로서 외형적으로 보기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당시 독립군 부상자들을 구호하는 역할이 주된 사업이었지만, 독립군의 가족도 돌보는 역할까지 수행하였기에 이것은 단순한 구호사업이 아니라 독립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임 빌리버의 결정적인 자료가 발굴된 것은 아니나, 자료추적을 하는 과정에서 당시 적십자회 상해통신원이었으며, 상해임정의 조사원으로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던 임창준을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임 빌리버가 임창준과 동일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나 일단 임 빌리버를 평양에서 온 청년이라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상해임정의 조사원인 임창준도 평양출신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임창준이 적십자회 상해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하니,임 빌리버와 임창준이 비슷한 측면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동일인물로 확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임 빌리버는 1920년 2월 7일 뮈텔 주교를 면담하였는데,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상해임정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로 있던 안창호의 편지를 뮈텔 주교에게 전달하였다는 점인데, 이런 편지를 뮈텔 주교에게 전달한 것만 미루어 보아도 임 빌리버가 상해임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뮈텔 주교의 일기를 보면 임 빌리버의 천주교 항일운동 동참에 대한 촉구에 뮈텔 주교의 반응이 냉담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용산신학교 신학생들에게 항일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기낭 교장 신부의 소극적인 입장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던 임 빌리버는 그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윤예원 신부가 항일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던 독립운동가 임 빌리버를 숙연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그 행적이 우리사회에 널리 전파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역사작가.<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저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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