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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살해-김재규 전 중정부장은 혁명가로 불리길 원했다!

5월24일은 김재규 사형 37주년...현국 현대사를 바꾼 인물 김재규 재평가

문일석 발행인 | 기사입력 2017/05/24 [09:54]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1980년 5월24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가슴을 향해 총을 쐈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형 당한 날이다. 5월24일은 김재규가 사형된 지 37주년이 되는 날로 서대문 형무소(구) 역사관에서는 11시부터 추모행사가 열린다. 신군부는 광주 민주화운동 초반,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그를 사형시켰다.

 

현직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군사법정에서 살해범으로 몰려 사형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인(義人)이라고 호창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필자는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씨가 살아있을 때 두 번에 걸쳐 인터뷰(1995년 10월 6일, 1995년 11월12일)를 가진 바 있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친형이었던 김재규 전 중앙정부장의 거사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김항규씨는 지난 1997년 5월30일 작고했다. 김항규씨는 대통령을 살해한 형을 두었다는 것 때문에 1979년 10.26 이후 험한 세상을 살았다. 현불사에 입산, 승려는 아니지만 10여년간 수도자의 일을 걸었다. 그 이후 죽기 전까지는 서울 서북구 동소문동에 소재하는 조그마한 한옥의 3평 남짓한 비좁은 방에서 생활하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필자의 김항규씨 단독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었다. 그는 "침묵해왔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입을 열 필요성이 있어 할말을 남기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당시 필자가 한 김항규씨와의 인터뷰를 다시금 소개하려 한다. 그 이유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당함으로써 박박시대(박정희-박근혜)가 끝나, 비교적 자유롭게 김재규를 재평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재규 친동생 김항규씨 단독 인터뷰<전문>

 

▲ 김재규가 사형됐던 사형장.     ©브레이크뉴스

-10.26은 사전에 계획했던 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으면 말해 달라. 
▲내가 형님을 만난 것은 10.26이 일어나기 15일 전쯤이었다. 밤이 늦은 시간까지 대화를 나눴다. 그때 형님은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을 알았는데, 박대통령은 절대로 물러설 성격이 아니다"면서 거사의지를 내비쳤다. 나는 "집안사람이 형님만 있는 게 아니다. 만약 형님이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린 어찌되겠느냐"고 말했었다. 이때의 대화로 보면 형님은 박대통령을 제거해야 된다는 생각을 거사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와 같은 대화가 오간 뒤부터 형님은 10.26이 일어날 때까지 나와의 면회를 거절했다. 형님의 10.26은 무엇이 되려는 생각에서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다고 본다. 형님은 박 대통령을 목숨을 걸고 사랑했다. 역설적이지만, 형님이 박 대통령을 너무 사랑했기에 박 대통령이 발전시킨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박 대통령을 제거했던 것이다.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하다가 더 이상 사랑을 나눌 수 없을 때 죽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심중(心中)이란 말이 있다. 형님이 박 대통령의 마음 한가운데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발전시킨 나라가 잘못되고, 그 국민이 피해를 본다면 불행한 일이기 때문에, 박대통령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런 최후의 용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형님은 최후진술에서 "제 나이 한 10년이나 20년 끊어 바치더라도  좋으니까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놓자, 나는 대통령의 참모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고급관리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 충성하고 이 국민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 결국 나의 명예고 지위고 목숨이고 또 대통령 각하와의 의리도, 이런 소의에 속한 것은 한꺼번에 다 끊어 바친다, 대의를 위해서 내 목숨 하나 버린다, 그래서 원천을 때려 버렸다"고 말했다. 


형님을 비판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어찌됐든 형님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형님은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민간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군인 출신 정치인들이 국가를 이끄는 시대는 지났다고 간파했다.


형님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부마사건의 현장에 직접 나갔었다. 부마사건을 현장 시찰한 형님의 결론은 민란(民亂)이었다. 10.26사건이 없었다면 서울에서 민란이 발생, 엄청난 희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대통령의 제거는 거대한 국민적 희생을 사전에 막은 대 사건이었다고 본다. 

 

-박대통령을 제거하고 대통령에 오르기 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김재규 여동생=김재선) 이런 주장은 신군부가 만들어서 유포시킨 내용이었다. 나는 오빠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을 때까지 뒷바라지를 한 사람이다. 오빠는 체포된 뒤 다급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했다. 다급한 메시지란 "혁명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전 국민에게 빨리 알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국선 변호사들은 오빠의 다급한 목소리를 외부에 전달하는데 소홀했다. 나 자신은 오빠는 독재정치를 무너뜨린 혁명가였다고 믿고 있다.

 

"사랑하기에 살인했다"

 

김항규는 10.26 이후 태백산 현불사에 10여년 간 은둔하며 세상을 보냈었다. 그는 그 동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한 내용의 일부를 공개했다.

 

▲ 김재규 친동생 김항규씨. 그는1997년에 사망, 필자와 생애 최후의 인터뷰를 가졌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당시 김영삼 총재와 어떤 사이였는가?

▲10.26 사건, 큰 비밀은 아니지만 그 동안 말 못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밝혀두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형님은 박정희 대통령을 너무너무 사랑했기에 총으로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大人)의 길과 소인(小人)의 길은 그런 점에서 다르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대통령을 살해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살해하는 것과 똑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형님은 사형대에서 떳떳하게 목숨을 내바쳤다.

 

1979년 10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사건 무렵이었다. 나는 가끔씩 형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형님은 "박대통령이 김영삼 총재를 없애라고 지시했다"면서 난감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김녕김씨로 김영삼 총재와 동성동본이었다. 항렬로는 김총재가 조카뻘이었다. 

 

형님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해 온 김 총재를 내가 도와주지는 못할 정 없앨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었다. 형님은 김영삼 총재의 제명사건(79.10.4)이 있기 하루 전 약수동 정보부장 공관에서 김 총재를 만났다. 씨족관념이 강했던 형님이 김 총재를 초청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의 깊은 내막은 잘 모르지만, 형님은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김 총재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형님은 "김녕김씨 씨족을 어찌 내가 죽일 수 있느냐? 그것도 한국 민주화의 기둥인 사람을"이라면서 개탄한 것을 옆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형님은 10.26이후 1심 2회공판(12월8일)에서 김영삼 총재 때문에 박대통령을 쏘기 위해 손에 총이 갔다고 했다. 인용해 보겠다.

 

"각하, 김영삼 총재는 이미 국회의원으로서 면직됐습니다.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그걸로써 본인을 처벌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국민들이. 또 이 사람을 사법조치까지 하면 같은 건으로 2중 처벌을 하는 인상을 줍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곧이어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이렇게 제가 콱 흥분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손에 총이 갔습니다....그러고는 그냥 손에 총이 가서 "이 버러지 같은 친구"하면서 차지철을 쏘고 대통령 각하를 쏘았습니다."

 

김재규 최후유언

 

24일 열린 김재규 등 10.26은인들 공동 추모행사.    ©브레이크뉴스
24일 열린 김재규 등 10.26은인들 공동 추모행사.     ©브레이크뉴스

 

-육군교도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김 전 중정부장은 어떤 유언을 남겼는가?

▲1980년 5월24일 사형을 당했다. 그런데 하루 전, 나는 온 가족을 데리고 형님의 면회를 갔다. 형님이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큰아버지는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절대하지 않았다. 나의 최후진술을 자자손손 전해다오.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 형님은 이 말을 마치고 난 후 나에게 "이제야 마음이 편안하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사형집행이 임박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김재규 추모식 자료.   ©브레이크뉴스

-그런 대화가 오간 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소개해 줄 수 있는가?

▲나는 형님과의 이별을 위해 이별가를 불렀다. 일본노래 나니와시(浪花節)였다. "내 눈을 보라/아무 말도 하지 말라/사내들끼리의 뱃속 아니랴/한 사람쯤 나 같은 바보가 없으면/이 세상에 아무도 눈을 뜨지 못한다" 는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이다. 내가 부른 이별가를 듣던 형님은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로 "음"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형님은 내 귀에다 대고 "항규야, 나 내일 영원히 이별한다. 너만 알고 있어라"고 말한 뒤 내 등짝을 있는 힘을 다해서 때렸다. 이것이 형님과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었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이 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루머이다. 내가 사형 당한 형님의 시신을 만지면서 얼굴을 확인하고 새 옷을 입혔다. 이런 설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루머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의 탐정 소설을 거의 빠짐없이 읽었다. 아마 1천여 권은 탐독했을 것이다. 혹시나 다른 사람의 시체로 바꿔치기 할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가지고 온 몸을 살펴보았는데 형님이 틀림없었다. 형님의 목에는 교수형 시킬 때 목에 걸었던 밧줄 자욱이 선연하게 나 있었다.

 

-장사 지낼 때도 참관했는가?

▲물론이다. 보안사에서 남한산성을 묘지로 지정해 주었다. 장례를 하기 하루 전에 남한산성을 올라갔다. 나는 산을 올라가면서 남무묘법연화경을 독경했다. 그리고 "부처님, 형님이 묻힐 묘지 하나를 주십시오"라고 소원했다. 이때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나무의 늘어진 가지들이 "여기요, 여기요"하는 듯 흔들거렸다. 그래서 나는 느티나무 곁을 가리키면서 "여기를 파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그곳에 형님의 시신을 장례 지냈다. 무덤이 비어 있다,  죽지 않고 어딘가 살아 있다는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한통의 박정희 친필편지 

 

김항규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10월19일자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보낸 친필편지 한통을 삶이 끝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 편지는 이 편지는 박대통령이 김항규의 행동을 정보부장인 김재규에게 질책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친필로 써 보낸 편지의 서두는 "근간 입수된 첩보 중 김 부장의  측근 또는 가족에 관한 건 몇 가지 통보하오니 사실여부 알아봐서 시정 조치토록 하시오"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그는 이 편지로 인해 혼쭐났다고 회고했다. 김항규는 이 편지를 잘 보관해왔다. 법률상으로는 살해주범인 형이 죽인 살해자 박정희이지만, 두 사람 간의 마지막 악연의 끈을 보여주는 문건이라고 했다.

 

이 편지를 펼쳐 보이며 눈물을 짓던 김항규씨는 "내가 좋아하는 설송 스님(작고)의 법문이 있다"면서 그 내용을 읊조렸다. 

 

 "바람없는 천지엔 꽃이 필 수 없다(無風天地無花開)/ 이슬 내리지 않는 곳엔 열매도 없다(無露天地無結實)"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는 한국 역사에 어떤 꽃과 열매를 남겼을까?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바람과 이슬처럼 사형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김재규의 친동생 김항규씨는 "꽃과 열매"라는 화두(話頭) 하나를 필자에게 말해주곤 세상을 떠났다. 1980년 5월24일, 이날 사형 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혁명가”로 불러주길 원했다. moonilsuk@naver.com

 

*필자/문일석. 시인.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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