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초가을, 백남주 목사 원산신학산에서 축출

<한국종교 산책>백남주 목사, 새주파를 총독부에 등록하는 일에 앞장

최중현 박사 | 기사입력 2017/04/21 [18:05]

초원이 백남주 목사를 처음 만난 날이 정확히 어느 날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백남주 목사가 원산신학산에서 축출된 때가 서기 1934년 해 초가을 무렵이었으니, 초원의 신학산 방문은 늦어도 그 해 8월 말 또는 그 전이었을 것이다.  백남주 목사와 김남조로부터 받은 종교적 감화감동이 당시의 젊은 초원에게는 그 뒤 평생의 방향을 거의 결정짓다시피 할 정도로 컸던 모양으로, 그 해 가을에 예수교회에서 백남주 목사가 ‘천국 결혼’의 건(件)으로 말미암아 축출될 때에도 초원은 백목사를 따라 나섰고, 이듬해 봄에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802번지 김성도 여사의 ‘새주파’를 찾아갈 때에도 함께 가게 된다.  백남주 목사는 이 새주파를 총독부에 등록하는 일에 앞장섰고, 1935년 10월에 총독부에 계출되어 1937년 2월에 등록절차가 완료된 이 단체의 새 이름은 ‘성주교(聖主敎)’였는데, 이 성주교의 창립행사에서 초원은 만 18세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司會)를 맡아보았던 모양이다.


이 신흥교단에서 한동안 지방순회 부흥강사로 활동하던 백남주 목사를 보필하며 따라 다니던 김백문은 가끔 자신도 강단에 서곤 하였던 모양이다.  이래서 뒷날 그는 “........이전 이 땅에서 수만명 수십만 명을 길러도 보고 가르쳐도 보았”다고 회고하였던 것이다.  초원의 관심은 계속해서 신령현상 등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하늘에서 울려오는 풍악소리를 들을 정도로 신령파집단의 분위기에 깊이 심취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主님을 비몽사몽 간에 확실히 본 것은 1930년대 내가 은총을 입고 한 3년쯤 됐을 때, 주께서 나타나서 나를 이끌고 내가 할 사명과 앞날의 역사와 기독교의 난제문제들을 가르쳐 주시던 역사는 있었”다고 후일에 회고한 바와 같은 신령적(神靈的) 체험이 초원에게 있었던 때는 1937년경이었다.  이러던 중에 그는 이 당시 성주교단을 포함하는 신령파 집단들이 대개는 3년을 채 못 넘기고 그 신령한 역사(役事)들이 메마르고 시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고, 그래서 “진리” 혹은 “이론(理論)”에 의한 뒷받침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이 무렵의 초원에게 김남조로부터의 재촉도 있었던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찌기 함경도 방면의 신령파 모임에서 알게 된 곽할다(郭割多) 여사의 딸 조선애(趙善愛)를 1937년에 아내로 맞게 된다.  신부는 간호원으로서 신랑보다는 네 살 위였는데, 이듬해 2월 25일에 시댁에서 아들 흥규(興圭)를 낳는다.


그런데 이미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8년부터는 신사참배 압력을 조선인들에게 본격적으로 가하기 시작한 일제 총독부는, 이어서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다고 판단되는 종단들을 겨냥하여 ‘유사종교해산령’이라는 것도 내리며 탄압을 서두른다.  이리하여, 일제 총독부 앞에 조선 장로교회조차도 지레 무릎을 꿇고 제27회 총회에서는 총회 참석자 일동을 대표하여 노회장 23명이 평양의 신사(神社)에 참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곧 뒤이어 나온 것은 ‘창씨개명’이라는 해괴한 조치였다.  초원의 집안이 각별히 친일적이었다는 자료는 보이지 않고 있으나, 1940년 2월 25일부로 그의 집안의 성씨가 ‘향산(香山)’으로 바뀌게 된 것은 최소한 그 집안이 당시 공개적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할 만한 입장에 있지도 못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꾼 지 한 달 반쯤 지난 4월 7일에 초원의 부친 김광조 옹은 만 59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 이듬해 12월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된다.


이러한 가운데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었는데, 다른 한편으로 1940년 4월 서울에서는 ‘조선 신학원’이라는 것이 강의소 형태로 개원하게 되고, 초원이 여기에 학생으로 입학하러 상경하였던 모양이다.  신령역사에 이론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재학하던 중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몇 교수 및 학생들과 더불어 연행되어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때에 ‘아무개 아무개까지도 다 항복을 했는데 네가 항복을 안 할 것이냐?’라고 하는 취조관의 말도 들었다고 한다.  한 2차 자료에서는 1940년 9월에 ‘신령회’ 사건이라는 것으로 하여 조선신학원의 교수 및 학생이 경찰에 구속된 적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김백문이 구속되었던 일과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이 고문의 결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어쨌든 경찰의 손에서 풀려나게 된 초원은 서울을 떠나 어디론가 몸을 숨길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김헌(金憲)이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아 그의 연고지인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라는 곳으로 간다.  이 때가 몇년 몇월이었는지를 밝힐 자료가 아직은 없다.  다만, 초원이 이 무렵에 사용하던 기독교 성경책 속에 ’수도삼칙(修道三則)’을 쓴 것이 있는데 그 쓴 날짜가 1943년 7월로 적혀 있는 점으로 보아서, 늦어도 그 해의 7월에는 그가 섭절리에 와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그의 수도삼칙은 다음과 같았다:


“修道三則
一. 무삼일에나 外飾을 가지지 말나.
二. 아므일에나 自我를 압세우지 말나.
三. 순간이라도 自主掌하지 말나.
    ×         ×         ×
一. 滋卑한 者를 기쁘하시도다.
二. 順從하난 者를 즐기시도다.
三사. 끝지 견대난 者를 사랑하시도다.
                                아-멘
一九四三. 七.
           쥬의 殿에서
                   이스라엘 수도원 準則”


당시 초원의 부인 조씨의 거취에 대해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그녀가 초원 아닌 다른 남자와 통정하여, 1943년 3월 12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온천동 8구에서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 일로 하여 초원은 약 6개월이나 정신적 고통 속에 있었던 나머지, 시력까지도 크게 손상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나, 스스로를 다시 가누며 부인을 용서하고 부부생활을 다시 계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련도 어쩌면 초원의 섭절리행을 재촉하는 데 한몫을 했을 수가 있다.


섭절리로 들어간 초원을 따라 그의 직계가족이 문산읍 내(섭절리로부터 약 10리쯤 떨어져 있음)로 이주해 왔고, 초원의 “신앙의 어머니”인 김남조 여사도 두 아들 위종과 석기를 데리고 문산읍 내로 옮겨 왔다.  김흥규는 자기가 1944년에 문산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렇게 기도생활을 시작한 초원에게 이리저리 연줄이 닿은 신앙동지들이 은밀히 섭절리 거처에 출입을 하게 되었던 모양으로, 이 해의 6월 2일에는 이른 바 제1기 수도생들의 입수식을 거행하고 수도원장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초등학교 아동이었던 김흥규는, 제1기 수도생들이 남자 서너 명과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수효의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남자들 중에 유일하게 끝까지 견뎌 수료한 사람의 이름이 ‘지용성’이었으며, 여자들은 상당수가 수료일까지 남아있게 되었는데 그들의 이름 중에는 박윤념(일명 박술남), 김정애(金正愛), 홍의선, ○덕수, ○영선,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 중 신사참배를 피해 다니다가 학교 후배 ‘지춘자’의 남편이 문산경찰서  소속의 비밀경찰이라는 것을 알고 지춘자의 집에 몸을 의탁하러 왔다가 김백문을 만나게 되었다는 홍의선의 회고를 인용해 본다:


“...20여 명의 동지들이 모여 이스라엘교회 수도원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다.  그들은 모두 주님없이 살 수 없어 모여든 형제들이었다.  그때는 기도원이 없던 때였는데 앞으로 많은 기도원이 생길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다.  1945년 3월 2일 밤중에 8월 15일에 큰 징조가 있을 것을 알려주셔서 기도하였다.  소망중에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며 8․15가 오기만 고대하고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살아갔다.”


이 기간에 초원이 생활비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관한 구체적 자료는 발굴된 것이 거의 없으나, 김정애의 집안이 상당한 뒷바라지를 했다고 하는 김흥규의 증언이 있고, 지춘자와 그 친정 어머니가 초원의 추종자였던 점에서 이 두 여인을 통해 김헌의 재력도 초원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야소교 이스라엘 수도원’이라는 호칭을 제1기 입수식 때부터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조만간 이 이름은 정식 호칭으로 되었던 모양이다.  바로 여기서 한국 현존 기독교 “이단”들 중의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리하여 첫 수도생들이 모인 지 1년 2개월 남짓 지나서 한반도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부터 그가 이 곳을 근거지로 해서 ‘耶蘇敎 이스라엘수도원’이란 호칭을 정하고, 서울에서는 ‘김인애’라는 부인의 집에서 서울 일원의 추종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다가 그 집회의 장소를 한강 남쪽 상도동으로 옮겼던 점으로 미루어, 신령파 시절의 신앙동지들과의 은밀한 연락과 내왕 같은 것이 일제강점기 중에도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러한 동지들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인물 중에는 전술한 김남조 및 곽할다, 그리고 후술될 최노득, 조경선, 등이 있었으며, 섭절리시절 초기에 처음 김백문을 알게 된 교우들 가운데에는 김금봉 여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섭절리의 이스라엘수도원은 초가 한 채와 밭을 포함하여 대지 1,800평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땅의 소유권등기는 초원의 명의로 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이 당시 신령파 인사들이 모여들어 수십 명 정도의 집회가 자주 있었던 것 같으며, 이것은 그의 스승 백남주 목사가 설립하였던 원산 신학산의 분위기를 계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jhchoe1128@daum.net

 

*필자/최중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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