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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50)-음모의 궁전에 갇힌 메디치가
 
이일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3/21 [11:28]

메디치 은행의 2대 주인 ‘대코시모’는 1420년 은행을 물려받은 이후 1433년 유럽 각 나라 10개 주요 도시에 설립한 지점을 통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중해와 유럽은 물론 증동지역까지 다양한 상품을 수출입하는 오늘날의 종합상사와 같은 경영방식을 은행 업무에 접목시킨 사례로 당시로는 매우 선구적 경영이었습니다. ‘대코시모’는 전수받은 아버지의 경영철학에 담긴 장점을 고수하면서도 더욱 활동적이며 공격적인 경영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매사에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지 않고 갈등과 반목을 중재하는 평화적인 입장에서 계층에 구분이 없는 후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합리적인 의식으로 서민에서 귀족 그리고 상인에서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교유하였던 그에게 당연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와 함께 그는 어머니 ‘피카르다 부에리’의 열정적인 교육으로 인문학에서부터 문학과 예술에까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여 당대의 학자와 예술인의 높은 신망과 존경의 대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 코무네(comune)와 시뇨리아(signoria)의 역사를 간직한 피렌체 자료 출처 https://www.flickr.com     © 브레이크뉴스

 

 

그러나 이렇게 급성장하는 메디치가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반대파 피렌체 귀족들의 음모가 은밀하게 추진되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알비치가문의 리날도 델리 알비치(Rinaldo degli Albizzi, 1370~1442)와 스트로치가문의 팔라 스토로치(Palla Strozzi, 1372~1462)입니다. 이와 같은 자치 도시 피렌체의 시대적 대립을 이해하려면 한 번쯤은 배우며 지나갔지만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코무네(comune)와 시뇨리아(signoria)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코무네는 주민공동체라는 뜻으로 11세기경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 주민공동체 형태의 자치도시가 생겨나면서 지도자 격인 집정관이 혼자 또는 다수로 구성되어 도시를 이끌어 갔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민주적인 이 제도가 지도자의 선출과 관련된 다양한 계파가 난립하면서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외부의 위협이 수시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자치제라는 협의 때문에 즉각 결정하여 대처할 수 없었던 문제로 시기를 놓치게 되어 도시의 운명이 바뀌는 일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코무네의 문제들을 보완한 통치 권한의 뜻을 가진 시뇨리아(signoria) 제도가 14세기에 도입된 것입니다, 이는 지도자의 권한을 강화한 제도로 도시마다 다르게 이루어졌으며 피렌체에서는 공화정이라는 모호한 체제로 주요한 길드의 조합원들이 선출한 9명의 대표로 시뇨리아(signoria)가 구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뇨리아는 정부의 주요한 업무를 결정하지만, 도시와 사회 각 분야에서 대표로 선출된 도디치 부오미미니(Dodici Buonomini)라는 12인으로 구성된 사회단체와 그리고 16인으로 구성된 피렌체 도시의 치안과 보안업무를 관장하였던 세디치 곤 팔로니에르(Sedici Gonfaloniere)와 협의하는 상당히 복잡한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중세 길드 작업 광경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이중 장치와 같은 협의 제도는 경제력을 가진 부유한 상인에 의하여 지배되는 길드와 귀족들이 서로 은밀하게 연합하여 이를 선도하는 가문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12세기 당시부터 급변하는 피렌체 정세에 감각적인 권력을 가졌던 알비치가문이 피렌체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사업만 하던 메디치 은행 설립자 ‘조반니’와 달리 아들 ‘대코시모’는 성공적인 은행경영과 여러 사업의 확대로 엄청난 경제력을 가지게 되면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알비치가문의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스트로치가문의 ‘팔라 스토로치’와 공모하여 ‘대코시모’ 싹 자르기를 도모한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음모자 알비치가의 ‘리날도’가 1428년 토스카나 변경의 루카공화국 정복을 주장하여 전쟁을 이끌던 그가 전리품을 빼돌려 사유 재산을 축적하였다는 죄명으로 피렌체로 소환되었습니다. 이후 전쟁은 피렌체의 패배로 끝이 났고 자신의 소환 배후에 메디치 세력의 힘이 작용한 의심을 하고 루카와의 전쟁 패배의 원인을 메디치가 ‘대코시모’와 추종세력의 비협조로 몰아 피렌체에서의 추방을 도모한 것입니다.            

 

이러한 음모의 시나리오를 최종 점검한 ‘리날도’는 시뇨리 후보 중 베르나르도 구아다니(Bernardo Guadagni)가 경제적 어려움을 갖게 되자 이를 해결해주며 매수하여 자신의 세력을 동원하여 곤팔로니에레에 당선시킵니다. 이후 루카와의 전쟁 패배의 방조협의로 ‘대코시모’ 를 당시 베키오 궁전으로 소환하여 형식적인 재판과정을 거쳐 체포해 버립니다. 이후 ‘코시모’는 피렌체에서 20년간 추방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전개되면 당시 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당시 ‘대코시모’ 메디치가의 추방을 선도한 대표적 학자가 서유럽에 그리스문학을 최초로 소개한 마누엘 크리솔라라스(Manuel Chrysoloras, 1355~1415)이었습니다. ‘피렌체 찬가’로 잘 알려진 공화주의를 주창한 르네상스 인문학자 이며 정치 철학자인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1370~1444)가 그의 제자이었습니다.

 

또한 알비치와 함께 메디치가 추방의 거사를 도모한 스트로치 가문의 ‘필라스트로치’(Palla Strozzi) 또한 ‘마누엘 크리솔라라스’의 제자이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가장 극렬하게 사형을 주장하였던 프란체스코 필렐포(Francesco Filelfo, 1398~1481)가 마누엘 크리솔라라스의 삼촌인 존 크리솔로라스(John Chrysoloras) 의 후원으로 공부하였던 인연을 가진 사실에서 이들이 음모의 목소리를 높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표자인 ‘마누엘 크리솔라라스’는 높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매우 오만하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메디치가와 교유하였던 학자들과 자주 충돌하였고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메디치가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가 ‘대코시모’의 추방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 메디치가 추방을 주장한 학자들     © 브레이크뉴스



여기서 하나 짚고 가야 할 내용은 ‘대코시모’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프란체스코 필렐포에 대해서입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사촌이었습니다. 르네상스에 대한 예술사를 살필 때마다 예술가 후원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메디치가와 세기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관계가 왜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음모의 터널에 갇힌 메디치가의 운명이 자뭇 궁금해지는 이야기들을 이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51) 다음 칼럼은『메디치가의 운명』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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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21 [11:28]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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