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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35)-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아름다운 로마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2/26 [15:18]

르네상스 하면 누구나 중세 이후 이탈리아 피렌체를 거점으로 일어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8 세기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10 세기 오토 르네상스 같은 소중한 흐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최초의 르네상스 운동으로 평가받는 8세기 에 있었던 고전문화 부흥운동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프랑크왕국 카롤링거 3대왕 샤를마뉴(Chalemagne,742~814)는 768년 부터 814년에 이르는 46년의 재위 기간 동안 셀 수 없는 전투로 일생을 마친 전설적인 왕입니다. 이러한 전설과 같은 서사시 ‘롤랑의 노래’ 그 주인공입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세력을 증명하듯 샤를마뉴는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Leo Ⅲ750~816)의 집도 속에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갖게 됩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 클르도프의 시편(Chludov Psalter) .비잔틴 사본.  미니아튀르(세밀화)

모스크바역사박물관소장. 출처:ldysinger.stjohnsem.edu    © 브레이크뉴스


     

당시 동로마제국(비잔틴국)의 레오 3 세 아이사우리안(León III  Isaurian,686·741)황제가 726년 성화상 파괴령(iconoclasm)을 선포합니다. 수도원과 교회 내의 모든 성화와 성상을 파괴하라는 이 선포는 교회의 입장에서 당시 대부분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교화의 교과서와 같은 성화와 성상을 불태우고 파괴하라는 명령은 따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741년 동로마제국(비잔틴국)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콘스탄틴 5세(Constantine V,718~775)황제는 교회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더욱 강력하게 시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795년 레오 3세(Leo III,750~816)교황이 샤를마뉴 왕의 도움 속에 로마의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게 됩니다.

 

레오 3세 교황은 자신들의 수호세력인 동로마제국(비잔틴국)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며 확고한 세력을 가진 샤를마뉴 왕에게 이를 호소합니다. 이에 샤를마뉴 왕은 자신 스스로가 글을 모르는 입장에서 충분한 공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로마교회를 보호하였고 이러한 교감 속에서 서로마 황제 대관식이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이 가지는 의미는 당시 유럽 역사에 실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첫째 동로마제국(비잔틴국)과 로마교회의 밀월의 관계가 카롤링거 왕조로 바뀌게 된 점으로 이는 세력의 변화를 증명하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대 상황이 끝없는 전쟁과 도발로 이어지며 국경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는 상황에 일반 평민은 물론 귀족사회에 까지 신의 말씀에 대한 신봉의 정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서로마 황제 즉위를 기점으로 대규모의 문예활동에 대한 지원과 후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로마제국의 부활이라는 상징성을 증명하고 싶은 샤를마뉴 황제의 야심이었으며 이상이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운동을 전개할 경제적 바탕이 세력의 확장에서 소유한 영토와 전리품 등을 통하여 재정상태가 아주 좋았기 때문입니다.     
 

▲ (좌) 레오3세 교황 라테란 궁(Lateran Palace) 모자이크 작품 799년 / (우) 레오 3세 교황과 황제 대관을 받는 샤를마뉴

출처:wikimedia     © 브레이크뉴스

 

샤를마뉴 황제는 이와 같은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가장 먼저 자신의 세력권은 물론 이웃나라에 까지 각 분야의 유명한 학자와 건축가, 필경사,예술가에서 부터 수도자와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들을 초빙하였습니다. 각 분야의 인재들을 초빙하여 로마제국의 문예를 부흥하려는 정책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로마의 레오3세 교황이 샤를마뉴 황제의 지원으로 로마 시내의 환경 정비 사업에 착수하여 훗날 역사는 ‘아름다운 로마의 재건’ 이라고 평가 하였던 것입니다. 
                  

▲ 알퀸(ALCUIN)과 샤르마뉴 황제의 아들 피핀(PEPIN) 의 대화 출처:google.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흐름이 바로 인류사에 최초의 문예부흥 운동인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바탕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샤를마뉴 황제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하며 후원하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 Pepin 과 Louis의 교육을 맡겨 후세의 운명을 부탁할 만큼 샤를마뉴 황제가 역사 속에 존재하게 한 인물입니다. 나아가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실체도 바로 이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알퀸(Alcuin,735~804)이라는 오늘날 영국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지역의 노섬 브리아 왕국(Northumbria)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 요크대학교의 Alcuin College가 바로 엘퀸의 이름에서 유래한 대학입니다. 이와 같은 스승과 샤를마뉴 황제의 여러 이야기들을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칼럼은 (36)『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흑색편지』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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