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11일에 지구별을 떠난 남자, 쇼스타코비치. 그의 음악은 의외로 클래식이 아닌 재즈 모음곡 중 <세컨드 왈츠>를 통해 처음 만났다. 재즈스럽진 않지만 마음에 쏘옥 들어오는 크기의 세컨드 왈츠는 쇼스타코비치라는 작곡가를 궁금하게 만드는 첫 질문이 되어 주었다. 현대 클래식 음악계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입지는 독보적이다.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은 다채로운 빛깔을 띠고 있어서 그와 함께 걷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다.
그의 작품 목록은 그의 사회적 배경과 연관되어 있다. 그의 독특한 사회적 배경이 그의 음악을 해석하는 데 다른 관점을 자꾸 개입시키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는 쇼스타코비치를 떠올리면서, 그의 음악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서 그가 사회적 배경에 침몰하지 않고 용케 살아남았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음악적 사상을 의심케 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과 그의 삶은 그러한 사회적 배경을 등짐처럼 지고 평생을 살아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고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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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겉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내밀한 내적 풍경들을 차분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주마간산하면서 볼 것을 다 보았다고 착각하고 느낄 것을 다 느꼈다고 착각한다. 사고하는 방식도 사실은 습관의 산물이다. 무의식적인 사고 방식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 우리의 짧은 사고에 대해 깊은 관조를 거쳐야만, 깊이 관조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최소한 오해의 시선으로 보지 않아야만 우리는 그의 삶에 짧은 의견을 자꾸 들이밀지 않게 된다. 의식적인 사고만이 타자나 사물이나 우리가 지나치는 풍경들을 있는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겨우 한 걸음 또는 반 걸음을 옮겨간다 하더라도, 겉만 보고 혹은 껍질만 보고, 눈에 보이는 상황만 보고, 일개인의 삶을 감히 재단하고자 하는 고질적인 천박한 습관을 고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내성적이고 과묵하면서도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의 이름은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로 190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남자다. 드미트리의 부모님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드미트리는 아홉 살이 되어서야 피아노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두 해 뒤에는 바흐의 <평균율곡집> 전곡을 연주할 수 있었고 즉흥 연주도 가능했으며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는 진득한 성격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사회가 불안한 긴장이 돌았을 때 그는 열한 살이었다.
열세 살이 되던 1919년 드미트리는 페드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드미트리에게 작곡이나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선생님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를 아끼고 오래도록 격려해준 스승은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였다. 글라주노프는 어린 드미트리에게 아버지의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그는 작곡할 때 숙련된 기량에 집중하게 했고 이러한 창작 방식은 이후 드미트리의 습관으로 자리잡는다. 드미트리는 미성년 시절에도 꾸준히 작곡에 열중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성향도, 라흐마니노프 성향도, 브람스의 성향도, 차이코프스키의 성향도 보이면서 그는 꾸준히 모방과 창조를 병행한다. 그는 매우 능숙한 피아노 연주자로서 작곡하는데 열중했지만 스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비교적 안락한 생활에서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위해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어머니와 누이들 또한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드미트리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극장에서 즉흥 반주를 했다. 건강은 점점 나빠져 영양실조와 결핵에 걸리기도 한다.
드미트리의 작품은 <교향곡 1번>이 레닌그라드에서 1926년 5월에 초연되었다.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레닌그라드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매우 성공적인 환호를 받았다. 스무 살의 작곡가로서 그의 미래는 밝았다. <교향곡 1번>은 그의 성년식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공연과 독주회를 계속해 나갔고 주로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 드미트리는 어린 시절의 작품들을 없애버렸다.
<피아노 소나타 1번> 역시 그의 스무 살 때 작품으로 12월에 레닌그라드에서 자신이 직접 초연했다고 한다. 굉음이 포함된 격정적 작품으로 불협화음에 있어서도 그 강도에 있어서도 매우 급진적이었고 프로코피예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물한 살의 드미트리는 이반 솔레친스키와 니나 바자르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한다. 솔레친스키와는 다방면으로 지식과 음악을 나누는 사이였고 물리학자인 니나 바자르는 만난 지 5년이 지나 결혼하기에 이른다. 안정된 가정을 원했던 드미트리에게 절실한 결혼이기도 했는데 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갈리나와 막심이 태어났다.
그는 20대에 접어들면서 노동계급 청년극장에서 제작하는 작품을 위해 음악을 제공하기도 하고 무성영화의 음악도 만들었다. 발레음악에도 기여한다. 드미트리는 시각적인 볼거리가 있다면 그 주된 역할은 음악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진화하는 소비에트 사회에서 드미트리는 언제나 인습 타파자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고 1930년대 중반의 문화적 구속 속에서 숱한 논쟁을 안은 채 작곡 활동을 계속해야 했다. 드미트리의 초기 음악의 개성은 '활기찬 리듬을 활용해 선율의 방향 및 강렬한 감정 표현 방식'을 끊임없이 새로이 찾아내곤 했다고 <쇼스타코비치, 그 삶과 음악>에서 리처드 화이트하우스는 말한다.
드미트리는 차이코프스키와 말러를 계승하는 음악가로서 신세대를 이끄는 작곡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 그는 말러의 교향곡을 공부하였으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깊이 감상하면서 성숙한 예술성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1921년 레닌의 신경제정책으로 인한 실용적 자유주의에 의해 국가의 간섭 없이 창작이 가능하던 시기를 지나 1927년 말에 이르자 스탈린의 정치적 입지가 확고해지고 이어 문화혁명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정치는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주로 잔인한 통치, 복수, 권모술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술 또한 비논리와 독단에 따른 명령과 이념에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1930년 말에는 1917년 이전의 예술 방법은 금지되었고 개인주의를 표현하는 방식은 사라져야 했다.
음모가 난무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미트리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오페라인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문화적 구속에 의해 예술적 작품으로 인정받기에는 자격미달이었다. 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의 사설은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었다고 비난했으며 '형식주의자'의 경향이 농후하다고 비난받았다. 반소비에트적인 '도착성'을 지니고 있다고 공격받으면서 드미트리는 자율성은 고사하고 생존할 수 있을지 불안한 환경에 처했다. 그는 이 와중에도 <교향곡 4번>을 완성했는데 이는 말러와 베토벤이 세운 교양악 형식의 급진성이라는 전통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평가는 당대의 러시아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평가였을 것이고 레닌그라드 관현악단 단장은 작품 발표를 철회하라고 설득했다. 이 작품은 1961년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숨막히는 분위기 속에서도 1937년 봄에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관현악 편곡을 가르칠 수 있었고 <교향곡 5번>도 탄생될 수 있었다. 1937년 11월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초연이 열렸으며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는데 대숙청의 시대였던 당대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한다.
1939년 <교향곡 6번>이 완성되었다. 말러의 영향력이 강화된 작품으로 작곡가의 내면과의 교감이 깊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레닌그라드 초연에서 관객들은 당황했고 당국에서도 논란을 일으켰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서방에서는 사랑받는 작품이었다고 전한다.
'레닌그라드'라는 부제가 달린 <교향곡 7번>은 1941년 7월에 작곡되기 시작해 1942년 3월 5일에 초연되었는데 이 연주는 전례 없는 문화 행사로 정치 선전용으로의 가치가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세계대전 참여를 서방에 알리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장대한 규모에 투쟁을 장려해야 할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적 내용은 모호하고 레퀴엠에 가까웠다. 이 교향곡은 따라서 교향곡 정규 레퍼토리에서 곧 사라졌고 1980년대 중반에야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1942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지명되었다. 20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감정의 과잉은 사라지고 작곡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절제된 세계를 표현하였다.
<교향곡 8번>은 1943년에 완성되었는데 이 교향곡은 전쟁의 공포와 만행을 초월하고 슬픔과 분노에서 비롯된 연민의 정을 보여준다고 한다. 노여움에 가득찬 주요 주제, 인간의 어리석음, 기계의 말살, 탈진 상태의 고요까지, 전사자를 기리는 레퀴엠.
이러한 의도의 작품이었으니 당연히 검열 당국의 제재를 받아 1956년까지 연주되지 못했다.
학생 시절 동료들로 구성된 베토벤 사중주단은 드미트리의 많은 작품의 초연을 맡는다. 그들은 드미트리의 현악 사중주를 마지막 곡 외에 전부 초연을 맡았다.
1945년의 <교향곡 9번>은 나치에 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교향곡을 기대하고 있던 당국의 심기를 완전히 외면한 작품으로 비난으로 가득찬 공식적 비판의 정점에 이르렀다.
1947년, <고국의 시>(Op.74)는 아리아와 합창이 등장하고 민요와 전통 가요를 소재로 하였는데 문제는 사회주의적 명분에 충실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태도는 문제가 되기에 충분했고 1948년,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등과 함께 드미트리는 서방에 대해 우호적이며 사회주의적 명분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도 높은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드미트리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의 작곡가이자 대중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비난의 강도도 가장 높았다. 음악이 예술의 한 장르로서 그 작곡가의 기량이나 내면의식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이념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가 기준이 되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압력일 것이다. 그는 교수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대중들로부터 악의에 찬 편지들도 받았다. 드미트리는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공식적인 작품'과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진지한 작품'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창작에 임했다. 따라서 어떤 작품들은 공식적 연주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로 그는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1947년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1955년 10월에, 1948년 여름에 작곡한 <유대 민요 연가곡집>은 1955년에야 초연될 수 있었다.
드미트리는 예술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기보다 예술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그는 20대 중반 이후로 이러한 신념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예술적 작품 활동의 방향타가 되어 주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을 표현하도록 강요받는 분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한 공식적인 작품과 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예술세계와의 분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나가야 했다. 따라서 점점 추상적이고 암호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수직을 박탈당한 이후로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소비에트 전국을 다니며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고 영화음악에도 참여해야 했는데 이는 소비에트 농업 계획이나 집단 농장을 선전하거나 러시아의 위상을 부각시키는 영화들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드미트리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꾸준히 완성하였다.
예를 들어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그는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젊은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평균율> 중 몇 곡을 듣다가 영감이 차올라 <24개의 전주곡과 푸가>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섯 달 후에 전곡을 완성한다. 이는 소박하고 꾸밈이 없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지만 하인리히 노이하우스는 연주를 듣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전주곡과 푸가는 전문가들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품은 사용되는 기법의 폭도 매우 넓어 드미트리가 새로운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창작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제 <교향곡 10번>에 도달한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고 프로코피예프가 작고한다. 스탈린의 사망 덕분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드미트리에게는 꿈 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드미트리는 프로코피예프와 그다지 친분관계가 깊지는 않았지만 1악장을 통해 프로코피예프를 추모하는 슬픔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작품은 감정의 표현의 폭이 다른 교향곡과 비교해 가장 넓어서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분분한 의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작곡가의 창조적 영감의 결집이라고 볼것인지 미학적 관점에서 결점이 있다고 볼 것인지는 청자의 자유재량이 아닐까.
스탈린이 사망한 뒤 드미트리는 새로운 작품의 창작보다는 지난 5년여 동안 미공개된 작품의 뚜껑을 열어 자유를 주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5년 동안이란 1948년 1월 모스크바에서 작곡가 조합 의장으로 이자 즈다노프가 취임한 때부터 스탈린 사망까지의 시기인데 이 동안 즈다노프는 공개적으로 드미트리를 강도높게 비난했으며 그 덕분에 드미트리는 모든 교직에서 사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던 때를 말한다.
1953년, 드미트리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티노>(Op. 94)를 작곡하고 다음 해 1월에 아들 막심과 안나 말로렛코바의 연주로 초연을 한 뒤 영화 음악의 배경 음악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나갔다. 드미트리는 이미 잊혀진 영화음악과 무대음악을 편곡해서 발레 모음곡으로 내놓는 작업을 통해 힘든 시기에도 관현악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54년 아내 니나가 아르메니아에서 핵 연구 중에 방사능 물질에 노출되어 사망했다. 드미트리는 마흔여덟 살을 지나고 있었다. 힘든 시기 동안 음표 하나도 그리지 못하다가 드미트리는 1956년 여름에야 <6개의 스페인 노래>(Op.100)와 <현악 사중주 6번>(Op.101)을 완성한다. <피아노 협주곡 2번>(Op.102)은 아들 막심을 위해 열아홉 살 생일 선물로 작곡하였는데 1957년 모스크바 초연에서 막심이 직접 연주한다. 재치와 생기로 가득한 곡이었다. 이 협주곡은 곧 정규 레퍼토리가 되었지만 드미트리의 오른손에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는 점점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접어야 했다.
같은 해 드미트리는 <교향곡 11번>(Op.103)을 모스크바에서 초연한다. 16년 전의 <교향곡 7번>이후로 가장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1905'라는 부제의 이 작품은 민요와 대중가요를 주제로 사용했는데 내용은 '차르 체제에 대항해 평화 시위를 벌였으나 차르의 군대가 수백 명을 학살하'였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1악장은 '궁전 앞 광장', 2악장은 '1월 9일', 3악장은 '영원한 기억'으로 고귀한 전사자에게 부치는 헌사를 담고 있다.
중요한 작업의 하나로서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호반쉬치나>의 관현악 편곡 작업이 있다. 이 작품은 1959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된 이후로 드미트리의 '러시아인 시기'(1957~1964)를 규정하게 되는데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은 드미트리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십대 시절부터 꾸준히 연습하고 작곡하는 삶을 죽을 때까지 견지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죽어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높은 명성을 가지게 된 작곡가.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대단한 작품들을 써내려 갔던, 그것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스무 살에 <교향곡 1번>을 완성한 천재 작곡가.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의 한 사람. 약 147개의 작품 중 교향곡은 15개, 러시아 작곡가 중 독특하게도 재즈모음곡도 작곡한 사람. 그의 삶의 일관됨은 음악 속에서 해석할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음악에서 음악으로 이어지는 드미트리와 아들 막심의 피아노 건반을 들여다 본다. 북카페 안, 피아노 앞에 앉는다. 피아노 위에는 케냐에서 온 흑인 세 명의 나무 조각상이 있다. 길게 아주 길게 목을 늘어뜨리고 있는 세 명이 피아노 건반의 움직임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건너편 산을 배경으로 바라보니 세 사람은 더욱 돋보인다. 악보를 잊어버려 이제는 한 곡도 연주할 수 없지만 하얀 건반과 까만 건반은 매우 매혹적이다. 왼손은 세 개의 건반을 무작위로, 오른손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소리를 만들어 본다. 불협화음의 소리들은 여러 개가 뭉치면서 일정한 운율을 만든다. 매우 어색하지만 소리들은 조금씩 질서 속으로 편입된다. 드미트리의 유려한 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린다. 질주한다. 의무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음악이고 피아노이며 작곡이라면 그는 그 작업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드미트리의 재즈 모음곡으로 돌아가보자. 음악적 호기심이 왕성하던 20대의 드미트리는 서방의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퇴폐적인 부르주아의 문화라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재즈를 듣고 그는 재즈어법을 사용해 1934년, 재즈 모음곡 1번을 작곡하고 1938년, 크누셰비치키의 재즈 국립악단을 위해 재즈모음곡 2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의 왈츠라는 춤곡 형식에 담긴 재즈모음곡은 이제 숱한 영화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21세기에 호명하고 있다.
**필자/이서영. 북카페 <책 읽어주는 여자 블루노트> 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