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월 어느 날, 그 뜨겁던 화요일에 나는 남산 밑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만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제정신을 잃고 말았다. 특히 그녀와 헤어져 있을 때는 일기장에 써놓은 ‘바람’이라는 자작시를 웅얼거리면서 쓰라린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백치인지 치한인지 분간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바람1. 햇볕 속에서 먼지만 타고 있었네. 그날 소녀를 만났던 남산골에는. 서늘한 바람이 비수처럼 심장에 와 박혔네. 그건 운명이었네. 햇볕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바람이 억장을 무너뜨렸네. 그건 뜻밖에도 사랑이었네. 나는 눈물보다 맑은 눈망울을 가진 소녀에게, 눈꺼풀 속에서 목 놓아 우는 소녀에게, 독 묻은 은화를 삼키고 핏기를 잃어가는 소녀에게 그만 목숨을 송두리째 맡기고 말았네. 이젠 그대와 헤어지면 눈부신 태양도 보이지 않네. 살같이 흐르는 시간을 비끄러매 놓고 오늘은 애걸해 보겠네, 이 아픈 가슴을 위해 그대 영혼을 달라고. 죽도록 매달려 보겠네, 모래 위의 맹세라도 해달라고. 내 사랑 소녀여, 목숨이여.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자작시도 모자라 나는 어느 여류시인의 ‘바람2’까지 끌어다 놓고 청승을 떨곤 했다.
바람2. 가슴이 뛰어서 못 살겠네. 눈빛만 보아도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서 못 살겠네. 안 보면 못 살겠네 죽을 것만 같네. 보면 보는 대로 안 보면 안 보는 대로 가슴을 찢어 놓는 이 사랑을 위해 오늘은 만나서 목숨을 달라고 해야겠네. 아아, 끝장을 내야겠네.
뿐만 아니라 아무데서나 약간의 백지만 마련되면 나는 고즈넉이 앉아서 ‘가슴으로 치는 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곤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것 역시 낙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극성맞은 글이었다.
북소리1. 노량진 너머 그 진흙밭에서 내 30대는 뒹굴고 있었다. 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나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몰락한 천재, 신념의 트래디터, 생활의 실패자. 한강을 건널 때 강물로 뛰어내리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슴을 콱 틀어막고 있는 울분, 나는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우울과 절망을 각혈처럼 토해내고 있었다. 내 일상을 떠받쳐 주는 게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자살에의 유혹뿐이었다. 내가 노량진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느 날, 마침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그 짜릿한 흥분을 맛보기 위하여 남산 숲 속을 찾아갔다. 그때 만났던 여자가 송옥주였다. 나는 산 아래 있는 남강이라는 여관에서 그 여자를 탐식했다. 그 이후로 뻔질나게 남강을 드나들었다. 그게 내 생활의 일부를 맡아주는 것 같았고 웬만큼 갈증도 풀어주었다. 그것은 아편과 같았다. 갈증은 점점 심해갔다. 횟수도 빈번해졌다. 그리고 내가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처음엔 목마른 갈증이나 눈먼 욕정 말고도 최소한의 어떤 이유 같은 게, 일테면 하다못해 사회악을 고발하는 한 조각의 신문기사를 읽었다든가 혹은 한 판의 화투놀이에서 돈을 잃었다든가 하는 적어도 그런 이유라도 있어야만 했는데 나중에는 아무 이유 없이 마구 남강을 찾아가게 되어버렸다. 생활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나는 옥주와 함께 남강을 탈출했다. 그것은 벼랑의 끝을 향해 가는 방황의 시작이었다.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하여 내 20대와 30대 초반을 몽땅 바쳐버렸다. 그리고 30대 후반부터 돈을 버는 일에는 아예 흥미를 잃고 말았다. 출감이후 그 지옥 같은 노량진에 다시 상륙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돈 잘 번다는 학원에서 얼른 한밑천 장만해가지고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그만 일패도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북소리2. 일년간의 해외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명부남 교수를 찾아갔다. 전강자리라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반색을 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고생했네. 이제 슬슬 강의도 시작해야지.”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제 전강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학의 실세 중의 실세였으니까.
“논문을 좀 볼 수 없겠나?”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번엔 작가수업 쪽을 좀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발표한 ‘거룩한 평등의 이야기’라는 작품 모두에 소설론이라는 글을 붙여서 이번에 책으로 냈습니다. 우선 그 책을 오늘 선생님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으음, 한번 보고 싶구먼.”
“그리고 논문은 내주에 갖다 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게.”
명 교수는 아주 유쾌한 듯이 말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다음주 논문을 주기 위하여 명 교수를 만났을 때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 냉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 그 어쭙잖은 책을 바쳤던 게 실수였을까. 하지만 작품 앞에 붙인 소설론 말고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닌가. 문득 소설론의 어떤 내용에 실망하여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에 띄는 대로 소설론을 몇 대목 다시 훑어보았다.
<교수님께 바칩니다> 소설 ‘거룩한 평등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하여 한 영혼이 끈질기게 수행해 온 정신적 모험과 탐구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일반 자전적 소설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또한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자기 추상화 혹은 형상화를 시도한 일종의 정신적인 연대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적이고 기이하고 아슬아슬하고 그리하여 독자를 안타깝고 초조하게 만드는 그런 사건들이 별로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 소설은 대중소설의 일반적인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력한 흡인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거룩한 평등의 이야기’를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는 독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 바로 그런 특성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난해하다는 말을 독자들 사이에서 종종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작품이 소설 문법에서 크게 벗어났다거나 문장 사이의 논리적 간격이 너무 동떨어져 있다거나 혹은 그 연결이 모호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논리적 연계성이 너무 조밀하고 직선적이며 작품 속에 넌지시 던져놓은 듯한 가장 작은 일화 하나까지도 모두 유기적 관계 속에 놓여 있어 강한 응집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 비교될 만한 작품이 그리 흔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내 작품이 넓은 독자층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문장의 난해성보다는 작가의 관심이나 작품을 잉태시킨 작가의 감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거룩한 평등의 이야기’에서 마치 생식소(生殖巢)처럼 작품을 분비하지 않을 수 없는 특수한 실체, 다시 말하여 작품을 발출(拔出)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내 정신적 삶을 구성해 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그 정신적 삶을 재구성하기 위하여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영감과 그 영감을 작품으로 창조해내는 재능과 사람들에게 비록 평범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것에 어떤 특이하고 영원한 가치를 부여해 보려는 욕구를 느끼게 하는 내 고유한 감성 등을 재정립해 보려고 했습니다. <중략> 엄격히 말하여 나를 소설가라고 부르기에는 여러 가지로 주저되는 바가 많았습니다. 우선 내가 문학을 업으로 삼지 않았고 작품을 쓰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많은 논문이나 수필 등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위대한 평등의 이야기’ 말미에 가서야 도달한 결론 즉 자신을 구원하는 길은 소설을 쓰는 길밖에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뇌와 방황의 흔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중략> 내 소설을 읽어보면 차라리 일종의 참선기(參禪記)나 어떤 철학적인 일기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삶의 의미나 예술의 본질과 기능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물론 보편적이고 영원한 어떤 법칙을 발견하려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색과는 다릅니다. 더구나 내가 말하는 실체는 얼마든지 몽환적이고 주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드러내 보이는 실체가 보편적인 진실로 증명될 수가 없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한 실상을 보여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내 문학적 모색을 일반 철학적 모색과 구별해버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 것 같았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조금 진부한 느낌은 주지만 이 책의 모두에다 나는 소설론이란 글을 붙였습니다. 특히 소설론이라고 제(題)한 글에서 미에 관한 논의를 빼버리는 것이 몹시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름다움은 본능적으로 느낀다는 말 이외엔 어떤 미적 개념도 설정하고 싶지 않았고 또 미를 마냥 보편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최후 진술을 하는 사형수의 절박한 심경으로 허무를 직시하며 삶과 예술의 실체를 깨닫고 느끼는데 골똘해 있던 나에게 어떻게 철학적인 한가한 사변이 가능했겠습니까.<후략>
일주일 후에 명 교수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헐레벌떡 학교 앞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그는 밀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전에 논문을 가져갔을 때와는 너무 판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네를 전강으로 채용하기로 탁방이 났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네. 모두가 다 자네의 훌륭한 논문 덕택이니까.”
나는 그의 말에 감격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명 교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연신 오해하지 말라고 하면서 성의표시로 학교발전기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상한 느낌 같은 것은 조금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명 교수에게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그만한 성의는 얼마든지 표시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틀 후에 나는 명 교수의 비밀구좌에 그가 요구하는 금액을 넣어주었다. 나는 이 사실을 내 약혼녀 진국희에게 낱낱이 이야기했다.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내 집을 팔아서 갚겠다고 하면서 그녀에게서 돈을 빌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강의를 시작한 지 한달쯤 지나서였다. 어느 날 복도에서 마주친 동창 이재복 교수가 나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축하해. 국희 씨한테서 출강하게 됐다는 소식은 진작 들었지.”
그때 그의 입가에 감돌고 있는 비웃는 듯한 미소의 의미를 깨달았어야만 했다.
나는 ‘가슴으로 치는 북’은 더 이상 쓰지 않았다.
오후에 국희한테서 전화가 왔다.
“만나서 꼭 할 얘기가 있어요.”
나는 몹시 실망을 했다. 사환이 ‘여자 분인데요’ 했을 때 나는 옥주한테서 걸려온 전화일 거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환호했었다. 서울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 옥주를 찾기 위하여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쏘다녔던가. 왜 갑자기 나에게서 떠나가 버렸을까. 그녀가 갈만한 데를 찾아가서 그녀가 없을 때는 그만 털썩 주저앉아서 울어버리고 싶었다. 강의를 빼먹기 일쑤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아우성을 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출근을 한 후에도 오로지 전화벨 소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화기에서 옥주가 아닌 국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내가 실망을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은 슬픔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랄까, 인간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렇다. 국희는 유학을 함께 다녀온 명색이 내 약혼자다. 이역만리 영국 땅에서 내가 폐렴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고 있을 때 만약 그녀의 눈물겨운 간호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살아 있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무게도 없었다. 내가 왜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을까. 나는 그녀가 나를 만나서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들어보나마나 그 이야기일 게 뻔했다. 그녀가 전적으로 나에게 저질러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고 나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실수에 대하여 그녀는 정신없이 사죄의 말을 늘어놓을 것이고 끝에 가서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여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내가 왜 또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단 말인가. 내 귓가에는 그녀의 음성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전 맹세할 수 있어요. 순전히 울분 때문이었어요. 이 교수에게 그 얘기를 해버린 건 말예요. 명 교수가 당신에게 돈을 요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울분이 북받쳐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어요. 원, 세상에 당신에게 돈을 요구하다니. 당신이 그 분의 어떤 제잔데. 배신감으로 치가 떨려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연히 만난 이 교수에게 그만 자신도 모르게 명 교수를 맹렬히 성토하고 말았던 거예요. 사실 그때 그에게라도 교직을 팔아먹는 사이비 교수는 추방해야 한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제 울분을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전 미쳐버렸을 거예요. 그런데 한때 저를 두고 당신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이 교수가 재깍 검찰에 고발해 버릴 줄을 누가 알았어요. 그런 비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는 데는 저로서도 할말이 없더군요. 제가 좀더 사려 깊지 못했다는 게 혀를 깨물고 싶도록 후회스러웠어요. 이젠 오해를 풀어 주세요. 거듭 맹세하지만 순전히 울분 때문에 그랬을 뿐예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당신이 출감했을 때 저는 새가 기계에 치어 죽듯이 당신에게 치어죽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를 미워하지 마세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명 교수가 금품을 요구했던 것에 대하여 국희만큼 분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수를 채용할 때 학교 측이 어떤 명목을 붙여서 금품을 받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관행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보다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평소에는 버젓이 행해지던 행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서 단죄를 받고 있는 현실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내 흐리멍덩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입으로는 남들처럼 부정과 비리를 성토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부정과 비리에 중독이 되어 내가 정작 어떠한 죄의식도 느낄 수가 없게 되어 버렸을 때 나는 퍽 당황했던 것이다. 물론 한창 사정의 한파가 몰아치고 개혁의 물결이 소용돌이칠 때 뭐랄까 돈오병(頓悟病)의 신드롬이 나에게도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갑자기 깨달아서 아픔을 느끼는 병이랄까 여태껏 멀쩡하고 뜬뜬히 생각해왔던 것들이 문득 옳지 않게 생각되어서 고통을 느끼게 되는 증상들을 나도 조금은 느끼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 아픔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은 마치 여자를 올라타고 사정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어버리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작위적인 일이었다. 학교 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명 교수에게 돈을 건네준 죄로 내가 감옥을 다녀왔다는 게 여전히 나에겐 어떤 죄책감으로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다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나를 몰아넣고 있는 현실이 나로 하여금 한없는 절망과 오욕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는 순간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수화기에서 뜻밖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송옥주에 대해 급히 얘기할 게 있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옥주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나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그녀가 어렴풋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여자의 이름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 행적이 낱낱이 추적을 당하고 있는 듯해서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내색을 하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언젠가 당신의 집에 들렀다가 걸려온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죠. 옥주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당신이 작은 집으로 옮기면서 전세금을 빼 쓰는 걸 보고 저는 당신이 한 여자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송의 얘기를 꺼내서 어쩌자는 거요?”
“불쾌하신 모양이군요.”
“이건 내 문제요. 참견하지 마시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 어찌됐건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가 아닌가. 그리고 아직까지 약혼을 정식으로 파기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내 여자관계가 어떻게 나만의 문제란 말인가. 그러나 일련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사이가 소원해져 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국희를 털끝만큼도 미워하지 않지만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오. 얘기를 듣고 싶지 않소.”
“당신은 지금 제 얘기를 들어야만 해요. 그렇잖음 위험해요.”
국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협박까지 할 셈인가.
“그 여자를 만나게 된 것도 제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제발 만나서 내 얘기를 들어 주세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걸까. 아무튼 내가 옥주를 만나게 된 것까지도 자신의 탓이라고 우기고 나오는 데는 입이 벌어질 따름이었다. 하긴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그녀 때문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최초로 감옥에 들어갔던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대학에서 쫓겨나 학원 강의를 하게 되었던 일이며 학원에서 강의를 하다 말고 뛰쳐나와 남산으로 올라갔던 일이며 남산에 올라갔다가 옥주를 만나게 되었던 일이며 어느 것 하나 그녀 때문이 아닌 것이 없었다. 처음으로 옥주를 만났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날 나는 삶의 오욕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독을 마시고 이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남산으로 올라갔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숲 속에 앉아서 나는 이 세상을 하직하기 위하여 죽음의 의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의식이란 죽기 전에 내가 꼭 밟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절차로서 친구들과의 결별, 자의식과의 결별, 그리고 이 세상 마지막 봐두기 등 세 단계를 이르는 것이었다. 첫 단계인 친구들과 결별을 함에 있어서는 나는 이미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작별을 고해 버린 바가 있었었다. 그리고 그토록 쓸쓸하게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이미 내 곁에서 떠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들이 홀연히 나에게서 발길을 돌려버렸을 때 나는 죽음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하긴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 누가 나에게 다가와서 ‘김요한 잘 가’ 하고 손을 흔들어 주겠는가.
‘서울 경찰청은 17일 교수채용을 조건으로 00학원 측에 일억원을 제공한 00대학교 문리대 김요한 교수(37.전임강사)를 배임수증재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김 교수로부터 돈을 받은 00대학교 명부남 교학처장(54)도 연행하여 조사 중이며 같은 혐의로 구속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명 교학처장은 작년 1월 제자인 김 교수로부터 교수로 채용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남들은 학교 발전기금으로 2억-3억원씩 내는데 자네에겐 그렇게 받을 수는 없고’ 하며 넌지시 금품 제공을 요구했다는 것. 명 처장은 김 교수가 논문 및 자격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이 나왔으나 그를 면접대상에 포함시켜 교수로 채용하게 하고 다음달인 2월 김 교수로부터 일억 원을 받았다는 것‘
둘째 단계인 자의식과의 결별도 나는 별반 어려움 없이 해냈다. 아아, 육체를 떠나가는 내 자의식은 언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 영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떠돌다가 다시 만나게 된단 말인가. 나는 자의식을 잘 달래서 그냥 훌훌 떠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남산을 오르면서 줄곧 이 오욕을 벗어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 망망한 망각의 세계를 향해 떠나가야만 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앞의 두 단계를 별 탈 없이 마무리했기 때문에 그날 남산에 올라가서 ‘이 세상 마지막 봐두기’만 무난히 끝냈더라면 나는 스무드하게 이 세상을 하직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단계에서 그만 일이 틀어지고 만 것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나로서는 그날 남산 숲 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죽을 장소로 남산 숲 속을 택한 것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세상에서 한낮의 여름 숲 속보다 더 적막한 곳은 없다. 그곳은 어떠한 자의식도 빈사상태에 빠져버릴 만큼 조용하기 때문에 자의식과도 별 갈등 없이 편안히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남산 숲 속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차질을 빚고 말았다. 그 첫째 이유는 시간대였다. 불덩이 같은 태양이 쨍쨍한 햇볕을 내리쬐는 한낮에 찾아갔어야 했다. 내가 남산 숲 속을 찾아간 것은 오후의 해가 상당히 기울어진 뒤였다. 숲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이미 그 쨍쨍한 힘을 잃고 있었다. 나는 독(毒)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숲 속의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하늘거리고 있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소곤거리며 숲 속에 감돌고 있는 적막감을 내쫓고 있었다. 갑자기 어쩌면 이 세상을 떠날 시간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들어와 소나무 등걸에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던 햇살이 나무 끝으로 기어 올라가서 가물거리고 있었다. 숲은 어느새 황혼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아, 한낮의 햇살이 소나무 줄기에 붙어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어야만 했다. 나는 정신없이 가장 높은 가지에서 대롱거리고 있는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그 햇살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리면 금세 숲은 시커먼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에 나무 끝에 남아 있던 햇살들이 홀연히 허공으로 달아나 버리자 숲 속이 갑자기 컴컴해지면서 가슴으로 쏴 그리움이 밀려왔다. 내가 황혼의 어스름을 싫어했던 것은 바로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이 그리움 때문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 시선이 멀리 산 아래 한강 쪽으로 달려갔다. 멀리 강물을 내려다보는 것은 어쩌면 죽음의 의식을 코너로 몰아넣고 있다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눈부신 햇빛이 강물 위로 쏟아져서 억만 개의 햇발들이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이 파닥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리움의 빛살이 되어 가슴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있었다. 독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멀리 보냈던 자의식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기척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안개처럼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때 내 죽음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정신없이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별안간 가까운 숲 속에서 남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번쩍 고개를 들고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내 왼쪽으로 여남은 발짝 떨어져서 한 청년이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서 울고 있었다. 청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한 젊은 여자가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를 달래고 있었다. 저들이 어떻게 저기에 와 있었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을 때 그들이 내 앞으로 지나갔던 게 분명했다. 아니면 더 깊은 숲 속에서 슬며시 나와서 그곳에 앉아 있던가. 청년은 앞으로 늘어뜨린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고 있었고 여자는 청년의 어깨를 세차게 잡아 흔들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창피하지도 않아. 이런 꼴을 보이려고 날 쫓아다니는 거야. 제발 울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봐. 내가 봉호를 속이려고 그런 게 절대 아냐. 내 맘을 그렇게도 몰라.”
여자는 기를 쓰고 청년을 달랬으나 청년은 막무가내로 울고만 있었다. 여자는 이쪽을 향하여 앉아 있었는데 먼빛으로 보아도 얼굴이 퍽 예쁜 얼굴이었다. 청년의 울음소리가 오래 계속되어 홀연 내 귓가에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사방을 휘 둘러보았다. 강에는 수많은 물비늘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황혼이 내리고 있었고 숲 속에는 짙은 어둠이 나무 밑동으로부터 한 뼘씩 차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깜짝 놀라 내 손안을 들여다보았다. 아까부터 쥐고 있던 독이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틈에 독은 소나무 잎으로 덮여 있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독을 집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문득 청년의 울음소리가 그친 것 같아 돌아다보니 청년만 앉아 있고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몹시 안타까웠다. 청년은 않아서 뭔가를 수첩에 끄적이고 있었다.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잠시 희뿌연 하늘을 쳐다보고 나서 다시 청년 쪽을 보았을 때 여자는 그곳에 와 있었다. 볼 일을 보려고 잠깐 근처 숲 속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턱없이 기쁨이 샘솟았다. 여자가 흘끔흘끔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들은 이제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낮은 소리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속삭임에 온통 신경을 쏟으면서 속으로 가만히 부르짖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나기는 틀렸어. 결국 덜미를 잡히고 만 거야.’
나는 회한을 짓씹으면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두 남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내 앞을 지나쳐서 아래 길 쪽으로 내려갔다. 내 앞을 지나갈 때 앞장서 가던 여자가 나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나는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한눈에 여자를 관찰했다. 앳된 얼굴에 물기에 젖어 있는 듯한 슬픈 눈을 가지고 있었고 늘씬하고 탄탄한 몸매에는 뜨거운 욕망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에 얼떨떨해 있는데 까만 눈에 키만 머쓱하게 큰 청년이 지나가면서 암말 없이 무슨 종이쪽지를 나에게 휙 던져 주고 갔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그들이 길 끄트머리로 사라져버렸을 때 허둥지둥 그가 던져주고 간 쪽지를 펴 보았다. 수첩에서 뜯어낸 듯한 종이쪽지에는 얌전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남산 밑에 있는 남강을 찾아가 보시오.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봉호’
자살을 실패한 데 따른 허탈감 때문이었을까. 까닭모를 그리움과 호기심에 끌려서 나는 결국 그날 남강을 찾아가고 말았다. 남강은 여관이었다. 남산에서 회현동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있었다. 담쟁이덩굴이 온통 집 앞을 덮고 있어서 바깥에서 보기에는 여염집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집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 집 앞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슬쩍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간부터 나는 연달아 불가사한 일들을 겪기 시작했던 것이다. 집안 분위기는 바깥에서 보기와는 아주 달랐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인기척으로 술렁거리고 있었고 집안 구조도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복잡했다. 복도가 안으로 길쭉하게 나 있었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눈앞에 떡 버티고 있었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디선가 사람들이 숨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향수냄새가 확 풍겨왔다. 내가 들어서자 주인인 듯한 한 마흔 살쯤 먹어 뵈는 여자가 오른쪽에 있는 내실에서 쪼르르 나오면서 “이층으로 올라가세요.” 했다. 어두컴컴한 내실에는 그 여자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층계를 다 오르자 내 뒤를 쫓아오던 여자가 “205실로 들어가세요.” 했다. 205실은 층계 바로 옆에 있었다. 이층에도 아래층만큼 방이 많이 있었다. 그 방들은 미로처럼 뚫려 있는 복도의 양쪽과 끝에 붙어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뒤따라온 여자에게 물었다. “얼마죠?” “사만원예요. 누굴 불러 드릴까요?” 여자가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재깍 이 여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면서 빠끔히 열려진 방문 틈으로 아가씨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가슴이 무섭게 뛰놀기 시작했다. 공부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내가 그날 밤 왜 그렇게 빨리 섹스의 포로가 되어버렸을까. 그것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죽으려고 했던 끝이라 마음이 허허로워서 그랬을까. 그 키 큰 녀석은 왜 나더러 이곳으로 가 보라고 했을까. 내 가슴은 이상한 기대로 마냥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다시 부르겠소.” 내가 부르면 숲에서 본 그 슬픈 눈의 아가씨가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지금 나에겐 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여자가 뿌루퉁해진 얼굴로 “혼자 쉬었다 가면 만오천원예요.” 했다. 나는 수중에 돈이 없는 게 혀를 깨물고 싶도록 안타까웠다. 지갑에는 겨우 방값을 치를 만한 돈밖에 없었다. 방값을 치르자 여자는 휑 나가버렸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잠을 청해 보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들이 내 신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을까. 이맘때쯤은 벌써 이 세상을 떠나버렸어야 할 몸이 어쩌자고 여관방에 누워서 관능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젠 가봐야겠다고 몸을 막 일으켰을 때였다. 바로 내 방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방문을 쏘아보았다. 이쪽에서 기척을 하기도 전에 방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한 여자가 바람처럼 들어왔다. 아아, 슬픈 눈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쉿 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송옥주예요. 아까 들어오시는 걸 보았어요. 절 원하시죠?” 꿈만 같았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가진 게 이것밖에 없소.” 하고 말했다. “이런 덴 첨인 것 같군요. 아줌마를 불러서 송양을 불러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이걸로 선불을 하세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어 건네주고는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왜 그녀가 나를 원하게 되었을까. 역시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그녀가 다시 정식으로 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또 하나의 불가사의를 물어보았다. “청년이 왜 나더러 이 곳으로 가보라고 했을까요?” 나는 그녀가 놀랄 줄 알았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럴 만도 했잖아요.” “무슨 뜻이오?” “제가 먼저 하나 물어 보겠어요. 선생님은 왜 오늘 우리들을 미행했죠? 남산으로 오르는 골목 어귀에서부터 선생님은 우리를 따라왔어요.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숲 속까지 따라와서 우리들 옆에 떠억 앉아버릴 때엔 우리도 그만 아연해 버렸죠. 어찌 보면 우연의 일치 같기도 했어요. 선생님은 처음부터 쭉 무슨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선생님은 도무지 이 세상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어쨌든 미행을 당한 우리로서는 약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아마 그런 말을 했을 거예요. 미행했던 게 아니었다구요. 그렇다면 선생님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군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나요. 어머나,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구요. 가엾어라.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글쎄, 왜. 우리는 그것도 모르구......” 나는 궁금한 걸 죄다 알아내고 싶었다. “그 청년이 왜 울었소?” “호호호 너무 어려서 그래요. 걘 제 남동생인데 제가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걸 알고는 그리 섧게 울더군요. 하지만 배운 것도 없구 익힌 기술도 없는 제가 어떻게 돈을 벌어요. 어머니가 저를 이만큼이라도 예쁘게 낳아주었으니까 그나마 이 짓이라도 해먹을 수 있는 거예요. 전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한 몫에 굵고 큰 것을 꽤 차느냐 아니면 잔챙이를 여러 몫으로 나눠서 꽤 차느냐 하는 차이밖에 없는 거예요, 미인들이 돈을 버는 방법에는 말예요. 어때요 저 예쁘지 않아요. 선생님 이제 우리 연애해요. 제발 죽을 생각은 그만 하시구요. 제가 평생 잊지 못 할 정도로 서비스 잘 해 줄게요.” 내가 옷을 벗고 침대 위에 옹송그리고 앉아 있자 어느새 옷을 벗은 그녀가 내 목을 껴안으며 침대 위로 나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갖다대는 척하더니 눈 깜짝할 새에 입에 넣고 있던 박하사탕을 내 입 속으로 넣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사탕을 깨물어 버렸다. 그러자 몸이 무섭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이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같은 욕망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어느 틈에 내 몸 위에 엎어져서 그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온통 쏟아놓은 채 내 몸을 구석구석 혀로 핥고 있었다.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말을 타듯이 마구 몸을 흔들면서 소리소리 질러댔는데 그때 나는 ‘아아 내가 부활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환락의 극치였다. 하마터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뻔했던 내 몸 속 어디에 그런 희열의 불씨가 숨어 있었을까. 나는 죽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폭풍의 순간이 지나갔을 때 나는 눈앞이 맑아지면서 고해하는 심정과 같은 평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 느낄 수 있는 평화 같은 것이었다. 갈 데까지 막가지 않았는가. 이제 어디로 더 이상 내려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자존심을 모두 내다 버렸다. 나를 괴롭혀 왔던 수치심이나 굴욕감이 이제 더 이상 불평할 게 없어져 버렸다. 어디다 대고 잘 난 체 한단 말인가. 나에게 항상 갈등의 씨앗이 되었던 그 잘난 자의식도 완전히 요절을 내고 만 것이었다. 나는 계속 아늑한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그녀가 보여준 그 불가사의한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옷을 입고 나가려고 했을 때 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도로 앉으며 “이걸 받으세요. 저를 붙잡아 두려면 돈이 더 필요할 거예요.” 하고 다시 수표를 한 장 꺼내 주었다. 아줌마를 불러서 돈을 지불하고 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사귄 지 퍽 오래 된 사람들처럼 서로 안타까운 연정을 느끼면서 오래오래 이야기했다. 그녀는 쉴새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곳은 이모뻘 되는 친척 집예요. 첨에는 요 앞에 있는 식당에서 카운터를 보았죠. 돈도 못 벌고 시간만 뺐기더군요. 그래서 이곳에서 일하겠다고 그랬죠. 이 일은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돈도 벌고 시간도 벌 수가 있어요. 그런 슬픈 눈으로 보지 마세요. 어머, 저흴 불쌍하게 여기고 있군요. 하지만 여기서 일하는 아가씨들 중에는 뜻밖에도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돈도 벌 수 있고 적당히 즐길 수도 있으니까요. 모든 게 생각하기에 달려 있는 거 아녜요. 저도 몸만 잘 건사하면 얼마든지 이런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 짓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녜요. 얼굴도 예쁘고 몸도 쭉쭉이어야만 하지만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해요. 벌거숭이가 돼 버린 자신을 똑바로 쳐다볼 만한 배짱도 있어야 하구요. 남자도 발가벗은 욕망을 쫒을 만한 용기가 없으면 이런 곳에 올 수가 없어요. 남자들이 여기서 맛볼 수 있는 그 농밀한 쾌락은 모든 걸 벗어 던져 버린 것에 대한 대가예요. 하지만 꼭 그런 사람만이 찾아오는 건 아녜요. 일테면 사랑을 위한 그 길고 지루한 요식행위 같은 걸 견뎌 낼 수 없어서 결국 사랑의 욕망만을 집중적으로 충족하기 위해 찾아오는 한없이 조급하고 게으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그라져가는 욕망의 불씨를 다시 살려 놓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있구 그래요. 갈증을 풀기 위해 찾아왔건 괴롭고 허전한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찾아왔건 암튼 저는 이 작은 몸속에 모든 걸 집어넣어서 녹여버릴 자신이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 이제부터 이 옥주를 많이 애용해 주세요.”
그날 이후로 나는 뻔질나게 남강을 드나들었다. 그 들큼하고 녹지근한 쾌락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모습이 한시도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항상 이슬이 눈물이 맺혀 있는 듯한 슬픈 눈,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은어처럼 희고 빛나는 살결, 튀어 오를 듯이 질긴 탄력으로 뭉쳐진 몸, 그리고 얼굴에 번지는 은은한 미소, 그 미소 위로 슬픈 눈빛이 떠오를 때면 나는 정신없이 그녀를 찾아갔다. 그러나 늘 즐거운 일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내 믿음과 애정이 비틀거릴 때도 있었다. 그녀를 만난 지 한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대낮에 갑자기 남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남강으로 통하는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먼빛으로 두 남녀의 모습이 눈 속으로 확 들어왔다. 그들은 남강을 나와서 남산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뒷모습이 여자는 옥주 같았고 키가 훤칠한 남자는 남산에서 보았던 청년 같았다. 내가 남강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남산으로 오르는 골목 끄트머리로 사라져 버렸다. 왜 그들을 부르지 않았을까. 그들이 사라져 버린 후에야 나는 후회했다. 동생이 어떻게 이런 데까지 찾아올 수 있을까.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남강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고 있노라면 그녀가 금방 돌아올 것만 같았다. 나는 짐짓 아줌마에게 옥주를 불러달라고 했다. “지금 없는데요. 다른 아가씨 불러 드릴까요.” 여자가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날이 저물었을 때 나는 옥주를 다시 불렀다. 없다고 했다. 밤이 깊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아줌마가 없을 때 나에게 옥주를 불러주곤 했고 자신도 때때로 손님방에 들어가곤 하는 현양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옥주의 말에 의하면 현양은 나이가 가장 많은 아가씨로서 때론 조바 노릇까지 하고 있는데 내가 옥주를 스테디로 부르는 걸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녀가 감쪽같이 내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무슨 음모라도 꾸며보자는 얼굴로 잠시 생글거리며 나를 쳐다보더니 “저와 연애하지 않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에 흥분하고 있었고 이유를 꼭 집어낼 수는 없었지만 옥주한테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눈 딱 감고 그녀와 한번 놀아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현양은 이 바닥에서는 보기 드믄 꽤 지적이고 우아한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서 흥미랄까 호기심을 느꼈던 것은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와 목욕탕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 앞에서 옷을 홀랑 벗었을 때뿐이었다. 나는 그녀와 섹스를 함으로써 그녀가 훤히 알고 있는 옥주와의 관계를 허물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알몸 앞에서 내 남성이 끄떡하지 않자 그녀는 노골적으로 옥주를 깎아내리는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를 싫어하는 다른 여자로부터 듣는다는 게 무척 흥미가 있을 것 같아서 그냥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녀의 이야기가 청년의 모습과 뒤범벅이 되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현양이 계속 나불거렸다. “선생님은 일편단심 송양이지만 걘 오늘 밤 안 온다구요. 청수장 쪽 손님이 많아서 오늘밤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구요. 남강이 송양의 이모님 집이냐구요. 아녜요. 송양은 원래 충무로에 있는 청수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여름철이 되어 그쪽 손님이 시원찮으니까 이쪽으로 잠깐 원정을 온 것뿐예요. 지금도 손님이 부르면 청수장으로 막 달려가는걸요. 호호호 이런 데서 만난 사람끼리는 그저 하룻밤 데이트로 끝내는 게 좋아요.” 그날 밤 나는 현양의 알몸만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남강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틀 후에 옥주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전화 속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댓바람에 남강을 찾아갔다. 그녀는 나를 붙잡고 잠시 목 놓아 울더니 “현양한테서 얘기 다 들었어요.” 했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미안하다고 했다. 한참 후에 그녀가 울먹이며 불쑥 “또 떨어졌지 뭐예요.” 하고 말했다. “떨어지다니?” “속상해 죽겠어요. 이제 대검(大檢)은 다시 안 볼래요.” “오, 그랬었구나. 아냐, 용기를 잃지 말고 다시 시작해 보라구. 시험에 떨어지는 건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냐.” 나는 침이 마르게 그녀를 설득했다. “알겠어요. 내일부터 다시 학원에 나가겠어요.”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튿날 나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신설동에 있는 대입 검정고시 학원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책가방을 들고 학원 문을 나서는 옥주를 발견했을 때 나는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기뻤다. “오늘은 남강에 가지 말고 어디 딴 데로 한번 가보자, 안될까.” 나는 옥주를 어두컴컴한 여관방으로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보드하우스(bawd house)가 있는 청수장 근처로 데려갔다. 다른 데로 갈려면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할머니의 허락을 받으러 간 동안 나는 근처 다방에서 기다렸다.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보드의 허락을 받으려면 미리 돈을 좀 줘야만 되는데 그녀를 빈손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토요일 오후라 은행에서 돈을 꺼낼 수 없어 그렇게 되었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 후에 옥주가 아주 명랑한 얼굴로 나타났을 때 나는 후우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그린파크로 갔다. 처음으로 밝은 햇볕 속에서 맑은 공기를 쐬면서 하루를 맘껏 즐겼다. 숲 속의 음식점을 찾아가서 도토리묵과 빈대떡을 사 먹기도 하고 개울가 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밤이 깊어지자 우리는 숲 속에 있는 여관을 서너 군데 찾아갔다. 번번이 문전에서 거절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추월장인가 하는 여관에서는 주인이 험악한 얼굴로 “방 없어요. 다른 데로 가보시오.” 했다. 찻길로 나오자 송옥주가 가만히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제가 너무 어리게 보여서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입고 있으면 꼭 중 삼으로 보거든요. 우리는 이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거예요.” 열두시가 넘어서 우리는 돈암동에 있는 작은 호텔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그녀를 택시에 태워서 청수장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후에 오시겠어요?” 차에서 내리면서 그녀가 물었다. “남강으로 갈게.” 나는 동부이촌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러 갔다. 그런데 그날 오후, 내가 일을 마치고 헐레벌떡 달려갔을 때 옥주는 남강에 없었다. 내가 층계 위로 막 올라서는데 현양이 내실에서 나오면서 “오늘 송양 못 와요.”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청수장으로 한번 찾아가 보세요.” 현양이 뭔가를 나에게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부리나케 청수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게서도 뚱뚱한 주인 여자가 “오늘 송양 없어요.” 했다. 옥주가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었다. 나는 회현동 골목에 있는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날이 저물도록 양쪽 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에서는 계속 없는데요, 하는 말만 튀어나왔다. 나중에는 남강과 청수장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녀 보았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날 아침 옥주는 별동네로 돌아오자마자 할머니에게 재깍 감금당하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내가 우려했던 대로였다. 아침에 돌아온 옥주에게 할머니가 해웃값을 내놓으라고 했다. “할머니, 내일 아침 은행에서 찾아서 드릴게요.” 할머니가 눈 깜짝할 새에 송옥주의 뺨을 후려쳤다. “개 같은 년, 누구한테 흰수작이야. 이 쌍년아, 밤새도록 공짜로 씹 보시를 했단 말이냐, 엉. 이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이제 거짓말까지 하네그랴. 에잇, 한번 죽어봐라.” 할머니의 손이 이번에는 송옥주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챘다. 옥주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왜 때리는 거예요. 무슨 권리로 사람을 때리는 거예요.” “이 씨팔 년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그래요. 어디 한번 맘대로 죽여보세요.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주겠다는데 뭐가 잘못 돼서 이러는 거예요.” “야, 이년아 돈을 받고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엉” “나 거짓말 한 적 없어요. 좋아요. 나 얻어맞기까지 하면서 일할 수는 없어요. 나 오늘부터 일 안 할래요.” “좋다. 이년아, 어디 송장이 되기 전에 이 방에서 나가는가 한번 두고 보자.” 옥주는 머리를 싸매고 누워버렸다. 할머니는 홧김에 손찌검까지 했지만 옥주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깡패까지 불러서 협박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옥주는 사흘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송양, 시골로 내려가지 않았어요. 아직 서울에 있다더군요.” 사흘 동안 현양에게 매달린 끝에 나는 겨우 옥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있는 별동네의 전화번호도 알아냈다. 나는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근처 다방으로 가서 꼬박 두 시간 동안 별동네로 전화를 걸었다. “송양 없어요. 왜 그러세요. 없다고 했잖아요. 당신 누구요. 당신 정말 이렇게 귀찮게 굴 거예요?” 두 시간 동안 똑같은 말만 들었다. 마침내 할머니인 듯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나 주인 되는 사람이오. 왜 자꾸 전화질이요. 오라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로구만.” “송양을 만나고 싶습니다. 사흘 동안을 찾아 헤맸습니다.” “나 송양 모르오. 헛수고 말고 전화 끊으시오.” “제발 송양을 만나게 해 주세요.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은혜를 갚겠다는 말에 그녀가 솔깃해진 것 같았다. 그녀가 잠시 잠자코 있더니 천천히 물어왔다. “거기가 어디요?” “청수장 옆에 있는 다방입니다. 카운터 왼 쪽 구석자리에 앉아 있겠습니다.” “알겠소. 나 곧 나가리다.” 한 십분 후에 몸집이 장독만한 오십대 여자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금방 내 앞으로 다가오며 “김 선생이오?” 했다. 나는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독이 유난히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한번 훑어보고 나서 “도둑놈 같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어쩌면 그리 무지막지허우.” 대뜸 힐난조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까놓고 말하리다. 송양을 만나서 어쩌겠다는 거요. 살림이라도 차릴 셈이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없으면 나는 못 삽니다.” “단단히 미쳤소그랴.” 장독이 뭐라고 해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미스 송을 만나게 해주겠소. 그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해줘야겠소.” “송양은 어디 있습니까?”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오. 만나게만 해주면 그만 아니오.” “좋습니다. 무슨 약속이라도 하겠습니다.” “과히 어렵지 않은 약속이오. 미스 송이 계속 우리 집에서 일하도록 설득해 주시오. 나 그렇게 앙칼지고 독살스러운 년 첨 봤소. 그 연약한 몸 어디에 그런 독기가 들어 있는지 원 나 앞발 뒷발 다 들어버렸소. 자, 그 년을 설득하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그럼 당장 만나게 해주겠소.” 나는 그러마고 약속을 했다. 나는 하늘의 별을 따오겠다는 약속도 했을 것이다. 장독이 나간 뒤로 채 오 분도 안 되어 옥주가 나타났다. 나는 다짜고짜로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 가까운 풍전호텔로 갔다.
호텔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나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폐기해 버렸다. 그런 약속은 골백번 폐기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옥주를 덥석 껴안으며 애원했다. “옥주, 제발 그 곳에서 탈출하여 우리 새 출발하자.” 뜻밖에도 그녀의 태도가 고분고분했다. “좋아요. 저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대로 가면 몸도 완전히 결딴이 나고 말 거예요.” ‘만일 얼굴이라도 못생겨 봤어요. 이 짓도 못해 먹을 거예요. 저는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있다구요.’ 라고 말하던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우리는 밤을 지새우며 미래를 설계했다. “이젠 가을에 있을 대검시험이나 준비하라구.” “저도 그동안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잘 아는 언니 한 분이 순천향 병원 부근에 집을 얻어놓고 이태원 쪽으로 혼자 뛰고 있는데 절더러 자꾸 같이 살면서 그 쪽으로 함께 뛰자고 하거든요. 여기처럼 막 가는 것도 아니고 가끔 손님이 부를 때만 나가는 것이니까 구찌도 크고 시간도 많아서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면 그 언니 집 옆에 딱 좋은 셋방이 하나 나와 있는데 그 방을 얻어서 낮으론 학원에 나가고 밤으론 잠깐 룸살롱 같은 데 나가는 게 어떻겠어요. 시골에 있는 엄마와 동생 때문에 아주 놀아버릴 수는 없거든요. 어쨌든 내일 모레까지는 별동네에서 나올래요.” “잘 생각했어. 내 생각엔 방을 얻어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 샛방을 얻도록 하지. 돈 걱정은 하지 마. 그 할머니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던데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건 걱정 말아요. 하늘이 무너져도 내일 모레까지는 짐을 싸들고 나올 테니까.” “그럼 내일 오후 여섯시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이젠 선생님이 없음 못 살게 됐군요. 절 버리지 마세요.” 그녀가 내 목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이튿날 나는 집문서를 잡히고 마련한 돈을 가지고 호텔 커피숍으로 갔다. 그녀가 먼저 와있었다. “누가 저를 막아요. 이제 들어가서 싸놓은 짐만 들고 나오면 그만예요. 어서 나가요. 여섯시 반까지 방을 보러간다고 했거든요. 오늘 계약하겠다고 그랬어요.” 우리는 택시를 타고 한남동 쪽으로 달려갔다. 순천향 병원 앞에서 이태원 쪽으로 넘어가는 길목쯤으로 생각했는데 약도를 보고 찾아간 집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소 실망했다. 전망은 좋았지만 집으로 오르는 길이 너무 멀고 가팔랐기 때문이다. 샛방은 이층이었는데 옥상까지 써도 좋다고 했다. 주인집 식구래야 두 모녀뿐이었다. 딸은 대학을 갓 졸업한 회사원 같았다. 옥주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해서 재깍 복덕방으로 가서 계약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간단한 취사도구와 몇 가지 살림살이만 장만해 가지고 입주해 버렸다.
생각해 보면 산동네의 생활은 비록 짧았지만 그런대로 즐거웠던 것 같다. 옥주는 돈벌러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영동에 있는 술집으로 나가보겠다고 했다. 그녀는 대검시험 준비를 위하여 매일 학원에 다녔다. 그리고 학원에서 돌아오면 하늘에 맞닿은 그 ‘하늘집’에서 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유독 태풍이 잦았다. 오후가 되면 으레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학원에서 방금 돌아왔어요. 식사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사나운 비바람이 창문을 마구 때리고 있어요. 창문이 바람에 떨어져나갈 것만 같아요. 무서워요. 몸이 아파서 순천향 병원에 잠깐 들렀다 왔어요. 몸이 아프니까 혼자 있기가 더욱 싫군요. 지금 집안이 떠내려가라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서 춤을 추고 있어요. 공부는 하기 싫고 짜증만 나는 걸 어떡해요. 선생님 빨리 오세요. 엊저녁엔 왜 빨리 돌아가 버렸죠. 얼마나 속이 상했다구요. 오늘은 특별히 맛있는 걸 요리해 두었어요. 지금 오시는 거죠.” 전화를 받으면 나는 택시를 타고 쏜살같이 강변도로를 달려가곤 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산꼭대기 이층 방. 그곳만이 내가 피곤한 심신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출감 이후 나는 결국 이 산동네로 숨어 버리고 만 것이다.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몸을 담고 있었지만 학원은 나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암만 봐도 거짓과 탐욕과 협잡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들이 그 알량한 지식을 요란하게 포장하여 팔아먹는 갈데없는 야바위판만 같아서 그저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미친 듯이 뛰쳐나오곤 했다. 그리고 내 약혼자 진국희는 왜 나를 늘 왜소하게 만들어 버릴까. 그녀는 비참한 현실을 내 눈앞에 낱낱이 드러내 보이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착하고 의연한 그녀 앞에 서게 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약하고 비열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에겐 답답한 일상을 흔들어버릴 만한 여자의 ‘그 톡 쏘고 탁 튀는 맛’이 없었다. 항상 엄숙하고 경건했고 그런 그녀를 만나면 나는 늘 피곤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서 달아나 옥주가 만들어 놓은 은밀한 유형지에서 맘껏 편했던 것이다. 옥주가 차려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그녀가 참새처럼 종알대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둘이 밤새 슬픈 노래를 불렀고 가슴이 답답할 땐 옥상으로 올라가 산 아래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특히 비바람이 창문을 때리며 사납게 몰아칠 때는 우리는 흡사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섬에 와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사나운 바람소리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아무도 없는 섬에 와있는 듯한 그 외로운 느낌은 우리가 옥상으로 올라가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았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창문마다 눈부신 불빛을 쏟아내며 맞은편에 우뚝 서있는 하얏트호텔은 눈 아래의 크고 작은 건물들과 이태원으로 넘어가는 길가의 새까만 나무들이 떠 있는 어두운 밤바다를 거느리고 있는 밤하늘이었다. 우리는 어두운 바다에 떠 있는 섬에 서서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인간의 운명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눈에 보일 듯이 다가오고 있는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몸을 떨었다. 밤이 깊으면 그녀를 홀로 남겨둔 채 나는 대개 우이동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늘집의 생활이 시작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갑자기 마음속에서 의혹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혹시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녀와 헤어진 그 순간부터 나와 헤어져 있는 동안의 그녀마저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 달 전엔 그녀가 나에게 던져 주었던 그 얼마 안 되는 그녀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내가 이젠 남자들을 다 털어버리고 진종일 나만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제 겨우 헤어져서 홀로 있게 된 그녀를 또 소유하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한번 불안해지자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웬 일이세요?” “갑자기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구 그러세요.” “아무 일 없는 거지.” “그럼은요.” “그럼 잘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잠에 취해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한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옥주가 한밤중의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벌써 깊은 잠 속에 떨어져 버렸을까. 기어코 전화를 받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외출했을지도 몰라. 단박 하늘집으로 다시 가보기로 했다. 그러자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그것은 뭐랄까 아슬아슬한 모험을 할 때 느낄 수 있는 스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방금 왔던 길을 되짚어서 택시를 타고 하늘집으로 달려갔다. 그 집 파란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내 심장은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찾아가서 완전히 감춰져 있는 그녀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흥분과 기대가 ‘불의의 사태’에 대한 어떠한 우려도 압도하고 있었다. 대문을 두드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누구세요?” 하고 대문 안에서 쉰 목소리가 물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주인집 딸이었다. “접니다.” 그녀는 암말 없이 문을 열어주고는 대뜸 “연락을 받고 오셨군요.”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갑자기 복통을 일으켰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식중독이라 하더군요. 방금 병원에서 돌아왔는데 이젠 괜찮은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누워 있던 옥주가 눈을 번쩍 뜨며 깜짝 놀랐다. “누가 연락을 했군요.” “그래.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나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 사흘 동안 내 마음은 그럭저럭 평온했다. 그러나 나흘이 되던 날 내 병이 다시 도지고 말았다. 불현듯 그녀가 죽어 가고 있는 것만 같은 불안이 한밤중에 몰려오는 것이었다. 미친 듯이 달려갔다. 달리는 차 속에서 내가 불안해하는 것은 어쩌면 저녁나절에 일어났던 일 때문일 거라고 나는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옥주는 좀 이상했던 것은 사실이다. 왠지 우울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산 위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쇼핑을 가자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녀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녀는 시종 시무룩한 얼굴로 내 뒤를 따라다니며 반찬 몇 가지를 사는 둥 마는 둥 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아녜요. 몸이 좀 아파서 그래요.” 그런데 집에 돌아왔을 때 정작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도마에서 감자를 썰다가 그만 손가락을 베고 만 것이었다.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자 그녀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가슴이 섬뜩했다. “저 피 좀 봐. 얼른 손 이리 내 놔, 약 발라 줄게.” 그러자 그녀가 발딱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참 후에 그녀가 손가락을 쳐 매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도마 앞에 앉으며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한테 다녀오고 싶어요.” 그녀는 왜 갑자기 어머니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을까. 하늘집 대문을 두드릴 때 내 가슴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집에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예감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다. “이젠 한밤중에 찾아오지 마세요.” 주인아주머니가 대문을 빠끔히 열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뜻을 몰랐다. 귀찮아서 하는 소리쯤으로 알고 “정말 미안합니다.” 하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쑥 내밀며 내뱉듯이 말했다. “아가씨, 병원에 가고 없는데요.” 나는 잠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혼자 갔어요.” “아뇨, 키 큰 동생과 함께 갔어요. 그 동생이 몹시 다쳤거든요.” 주인아주머니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말고 이내 돌아서며 “안녕히 돌아가세요.” 하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키 큰 동생이 누굴까. 그는 왜 다쳤을까. 불길한 생각들이 밤새 날갯짓을 하며 나를 괴롭혔다. 다음날 아침 느닷없이 옥주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한테 다녀오겠어요.” 나는 달려가서 그녀를 배웅할 수가 없었다. 출발하기 오분 전에야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내가 다시 하늘집을 찾아갔을 때 주인아주머니가 옥주가 아침에 잠시 들렸다 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벌써 서울에 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이후로 옥주는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왜 갑자기 나에게서 떠나가 버렸을까. 지난 일주일 동안 그녀가 갈만한 곳을 죄다 뒤져보았지만 아무데서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옥주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내가 국희의 전화를 막 끊고 났을 때였다. “당신은 지금 위험해요. 만나서 제발 제 얘기를 들어 주세요.” 하는 국희의 간곡한 부탁을 “듣기 싫소.” 라고 단호하게 거절해 버리고 나서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사환이 나를 돌아보며 “선생님 전환데요.” 했다. 나는 수화기를 들자마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수화기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는 국희의 음성이 아니었다. 목구멍으로 잦아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저예요.” 하는 것은 뜻밖에도 옥주였다.
“이게 누구야. 지금 옥주가 전화를 걸고 있는 거지.”
“선생님, 죄송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이럴게 아니라 거기가 어디야 ? 내가 당장 달려가겠어.”
“지금 순천향병원 앞에 와 있어요. 네시까지 이리오세요. 혹시 제가 보이지 않더라도 가시지 말고 병원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전화를 끊어야겠군요. 누가 오고 있어요.” 전화가 끊어졌다. ‘그녀가 납치당한 게 틀림없어. 탈출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감시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는 거야’ 순간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부리나케 순천향병원으로 향했다. 강변도로를 달릴 때 그녀가 쫓기듯이 내뱉던 ‘누가 오고 있어요’란 말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쩐지 우리의 재회가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달음에 병원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 앞에 이르렀을 때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옥주가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서 맥이 빠졌다. 나는 병원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한 시간 동안을 기다렸다. 길 건너편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가서 병원 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또 한 시간을 기다렸다.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곧잘 들리곤 했던 곳이 생각났다. 나는 허둥지둥 오십 미터쯤 떨어져 있는 그랜드모텔로 달려갔다. 내가 들어서자 울긋불긋한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맞았다.
“또 오셨군요.”
“........”
“그 아가씨는 보냈습니까?”
젊은이가 엉뚱한 말을 했다.
“당신 나를 알고 있소?”
내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젊은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아이 실례했습니다. 제가 그만 다른 사람으로 착각을 했군요. 하아, 어쩌면 그리 꼭 닮았을까.”
“잠깐, 따라오시오.”
나는 젊은이를 이층으로 데려가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물었다.
“머리카락이 길고 눈이 큰 아가씨, 여기 왔었죠?”
젊은이가 눈을 뚱그렇게 떴다.
“하아, 정말 헷갈리게 만드네. 아까 손님이 그 아가씨와 함께 오셨잖아요.”
젊은이가 또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나 나는 옥주가 누군가와 함께 그랜드모텔을 들렸다 간 걸 알아냈다.
“그 아가씨가 언제 여기를 다녀갔소?”
“한 시경에 왔다가 네 시경에 나갔어요.”
나는 지폐 몇 장을 또 꺼내어 그의 손에 쥐어주며 물었다.
“그들이 하던 얘기를 기억해 낼 수 있겠소?”
젊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엿들은 얘기는 없구요. 다만 손님이, 그러니까 아가씨와 함께 왔던 그 남자 손님이 아가씨에게 왜 그리 빨리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지금 가서 이삿짐을 날라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쳐 가는 게 있었다. 나는 모텔을 뛰쳐나와 산동네로 올라가는 골목길을 헐레벌떡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비탈길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하늘집의 대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집안으로 들어가서 잽싸게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옥주가 잠적해버린 이후로 늘 잠겨 있던 방문이 빠끔히 열려 있었고 문틈으로 방안에서 여자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들입다 ‘옥주’ 하고 큰소리로 부르면서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안의 여자는 옥주가 아니었다. 걸레로 방바닥을 닦고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키며 쉰 목소리로 가만히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집 딸이었다. 나는 금방 사태를 알아차렸다.
“이사를 가버렸군요.”
나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한 발 늦으셨군요.”
“혼자 왔던가요?”
“아녜요. 국희 씨와 함께 왔어요.”
“그랬었군요.”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국희 씨가 얘기 안 하셨군요.”
“옥주에 대한 얘기를 오늘 잠깐 비쳤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런 사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사 간 곳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알아 볼만한 데가 있긴 있어요. 옥주의 동생이 입원을 하고 있거든요. 백병원 605실이에요.”
“고맙습니다.”
허둥지둥 층계를 내려오는데 등 뒤에서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몸조심하세요.”
병원에도 옥주는 없었다. 605실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환자와 다리에 깁스를 한 환자가 누워 있었고 다리에 깁스를 한 환자 옆에는 한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내가 막 돌아서서 나오려고 하는데
“옥주를 만나러 왔군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머리에 붕대를 감은 환자가 고개를 조금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눈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남산에서 만났던 그 청년이었다. 사실 아까 그를 보는 순간 남산의 청년을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옥주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가버리려고 했는데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었다. 나는 다급히 청년에게 물었다.
“어찌된 일이오? 여기서 만나게 됐군요.”
“옥주는 여기 오지 않았소. 누군가가 당신을 이 곳으로 보냈군요. 뭔가를 당신에게 알리고 싶었던 게 분명해요. 당신도 조심해야 하니까요.”
청년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무슨 소리요?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소?”
“내 얘기를 한 번 들어보겠소?”
청년은 이야기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다쳤냐구요. 자업자득이죠. 옥주가 한두 번 정색을 하고 나에게 경고를 하더군요. 자기를 계속 쫓아다니면 언젠가는 자기의 숨겨놓은 애인한테 큰 봉변을 당 할 거라구. 나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죠. 왜냐하면 그녀의 숨겨놓은 애인은 남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 당신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척 보아 패기나 정열도 없어 보이는 당신 같은 사람을 나는 눈곱만치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요. 하늘집으로 그녀를 찾아갔을 때 나는 죽음 같은 절망을 느꼈소. 당신도 남산에서 보았잖소. 나는 그녀 앞에서 울기까지 했소. 청수장에서 손을 떼고 함께 미국으로 가서 결혼을 하자던 년이 글쎄 갑자기 증발해버리더니 남강에 가서 또 그 짓을 하고 있잖소. 어머니가 위독하니 빨리 들어오라는 걸 나는 그녀와 함께 가기 위하여 차일피일하다가 결국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하고 말았소. 어머니가 세상을 뜨던 날에 나는 고작 남산에 올라가서 그녀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을 뿐이오. 남산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나는 맥도 모르고 쫓아다니는 숙맥 같은 애인이 또 하나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소. 그때 우연히 첨 봤다구요? 하여튼 옥주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소. 걱정했던 대로 그녀의 마음이 당신에게로 옮아갔소. 마침내 그녀가 하늘집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 나는 미칠 것만 같았소. 나는 옥주를 단념할 수 없었소. 한두 번 당신이 다녀간 뒤로 하늘집을 찾아가서 한사코 몸을 사리는 그녀에게 짐승처럼 달려든 적이 있었소. 그러자 그녀가 나에게 경고를 하더군요. 언젠간 큰 봉변을 당할 테니 제발 찾아오지 말라구. 그러나 나는 당신쯤이라면 언제라도 상대해 주겠다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소. 그런데 그녀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소. 눈에 띄게 풀이 죽고 말수가 적어지더니 나중에는 불안해서 쩔쩔 매는 거 같더군요. 필시 당신과 옥주 사이에 갈등이 생겼구나, 나는 고작 그런 정도로만 생각했소. 그날 밤 옥주와 내가 방안에 앉아 있는데 웬 사내가 불쑥 방 안으로 들어오더군요. 옥주가 벌떡 일어나 “미리 연락을 해주었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하고 호들갑을 떨더군요. 금세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소. 나는 한눈에 그 사내가 지독한 사이코라는 걸 알았소. 사내는 다짜고짜 ‘개새끼’ 하면서 나에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소. 뒷걸음질을 쳐서 간신히 발길질을 피했지만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나는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소. 그때 사내가 품에서 칼을 번쩍 뽑아 드는 게 보였소. 나는 벌떡 일어나 죽을힘을 다해 달아났소. 그러나 보다시피 이렇게 뒤통수에 칼을 맞고 말았소. 만약 가만히 서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즉사하고 말았을 거요. 나는 피를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한길로 달려가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소. 그녀가 그런 무지막지한 애인을 감추고 있는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그런 미친놈한테서 이런 봉변을 당한 걸 생각하면 기가 막혀 밤에 잠이 오지 않소. 옥주는 그 이후로 여기에 오지 않았소. 그러나 그녀가 여기에 오지 않는 게 나로서는 더없이 마음이 놓이오. 그 무지막지한 사이코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을 테니까요. 하여튼 이제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소. 퇴원하는 대로 나는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소. 정말 그동안 미안했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로 봐서 아직까지는 무사한 것 같은데 제발 몸조심 하시오. 옥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시오. 누가 당신을 이곳으로 보냈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이런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랬을 거요. 그럼 안녕히 가시오.”
나는 사태를 확연히 깨달았다. 그동안 머릿속을 굴러다니던 몇 가지 불가사의도 확 풀렸다.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피곤이 몰려왔다. 당장 국희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우이동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국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심장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벽시계가 열한시를 쳤다.
“누구세요?”
가정부가 전화를 받았다.
“김 선생입니다. 좀 바꿔주십시오.”
“안 계신데요.”
“어디 갔죠?”
“대구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오늘밤 늦게 집을 나갔어요.”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밤새도록 살의에 시달렸다. 그것은 일종의 감미로운 자살충동과 같은 것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토록 치사스럽고 스스러워질 수가 없었다. 약이라도 돈복하여 이 치욕스런 세상을 그냥 떠나고 싶었다. 청년이 상해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나 놀랍고 두려웠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살의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내 살의의 표적이 청년일 수도 있고 옥주일 수도 있고 그 포악하기 짝 없는 옥주의 숨겨놓은 애인일 수도 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흐르자 살의가 국희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국희가 있는 곳에는, 하다못해 그녀의 목소리가 있는 곳에는 정체모를 음모와 쓰라린 배신과 살을 저미는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밤새 그녀의 가냘픈 목 줄기를 두 손으로 꽉 눌어버릴 생각만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국희가 집으로 찾아 왔을 때 나는 뜨거운 시선으로 정신없이 그녀의 목 줄기를 핥고 있었다. 한참동안 장승처럼 서 있다가 그녀가 가만히 소파에 앉으며
“병원에 가보셨으면 이젠 알고 계시겠군요. 우선 이것부터 읽어보세요.”
하고 하얀 봉투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목 줄기에서 후닥닥 시선을 거두었다.
“이게 뭐요?”
“대구에 있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빼낸 거예요.”
나는 봉투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펴보았다. 한 페이지로 된 간단한 문서였다. 나는 그 문서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김웅삼의 정신질환에 대한 소견서’ 김웅삼. 당 24세. 경북 영천 출생. 00중학교 졸업. 혈액형 A형. 성장배경 : 결손가정에서 성장. 4세 때 어머니 가출. 편부 슬하에서 자랐는데 8세 때 아버지 김병순도 병으로 사망. 그 이후 아버지 친구인 송춘호가 그를 데려다가 양육. 송춘호에겐 아내 김정자와 딸 송옥주가 있었음. 송춘호는 제빵소를 운영했는데 김웅삼이 17세, 송옥주가 11세 때 제빵공장에서 일어난 화재로 사망함. 김정자는 한때 재혼하여 김웅삼과 송옥주를 두고 잠깐 집을 떠났다가 얼마 후에 다시 돌아왔음. 김웅삼은 특히 죽은 어머니와 양아버지 송춘호를 몹시 그리워했고 송옥주를 극진히 사랑했음. 정신질환 증후군: 도발형 포악성. 남자가 여자를 희롱하거나 집적거릴 때는 물론이고 심할 경우 수상쩍은 남자가 여자와 함께 있기만 해도 남자에게 잔인하게 폭행을 가함. 이와 같은 공격성 가격심리는 어릴 때부터 무의식 속에 잠재해 온 피해망상에 기인함. 자기에게 소중한 여자가 남자의 침범으로 어머니처럼 가출해 버리거나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목격하고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것 같음. 친어머니의 가출은 외판원과의 이로우푸(elope)로 판명됨. 전과: 특수 폭행죄 3회, 단순 상해죄 3회, 중상해죄 1회. 송옥주에게 추행을 한 송옥주의 의붓아버지를 칼로 찌르고 난 이후 본 정신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게 됨. 입원 격리 치료를 받음으로써 병세가 호전되고 있음. 송옥주와의 접촉을 예의 관찰 지도해야함.<후략>
문서를 읽고 나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후 한숨을 내쉬었다. 국희에 대한 적의도 그새 누그려져 있었다. 나는 가만히 물었다.
“어떻게 옥주를 알게 되었소?”
“아주 간단해요. 당신이 한밤중에 하늘집을 찾아갔던 날 밤, 제가 잠깐 여기에 들렸었는데 전화가 걸려 왔더군요.”
‘여보세요. 선생님 좀 바꿔주세요. 옥주의 부탁을 받고 전화하는 거예요. 여기 오심 절대로 안 된다고 선생님에게 말씀해 주세요. 왜냐구요? 너무 위험해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겠다고 그러세요. 누구냐구요? 옥주 친구예요. 옥주 있는 데를 알려달라구요?’
“저는 그 전화를 받고 곧바로 옥주를 찾아갔어요. 거기서 벌어졌던 일을 알게 됐죠. 김웅삼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옥주와 주인집 딸만 있더군요. 저는 옥주를 나무랬어요. 그녀가 용서를 빌더군요.”
‘제가 잘못 했어요. 봉호에겐 몇 번 얘기했지만 선생님에겐 차마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더군요. 그러나 언젠가는 털어놓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이 예정된 날짜보다 빨리 퇴원해버린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제가 선생님을 만나서 해결하라구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그 사람이 언제 또 나타나서 행패를 부릴지 모르니까요. 그 사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니까 거처를 딴 데로 옮기는 게 좋겠군요. 그래야만 선생님이 찾아오시지 못할 거 아녜요.’
“옥주는 다음날 일찍 거처를 딴 데로 옮겼고 당신에겐 시골로 간다고 했어요. 제게 대신 당신에게 사실을 얘기해 달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선뜻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결국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죠. 번번이 통화가 안 되더군요. 그러다가 겨우 통화가 됐는데 당신은 저를 만나주지 않았어요. 옥주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건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어제 당신에게 네시에 만나자고 해놓고 그 시간에 산동네에 가서 이사를 한 것만 해도 그래요. 당신이 하늘집으로 찾아올까봐 두려웠던 거예요. 그 사람이 하늘집 근처를 그림자처럼 맴돌고 있었으니까요. 이삿짐도 날라주었고 전세금도 제가 받아서 그녀에게 넘겨주었어요. 제가 끼어들어 당신을 괴롭혔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건 결코 제 본의가 아니었으니까요.”
“어젯밤 늦게 왜 시골로 내려갔소?”
“곧 알게 될 거예요.”
국희는 이제 할말을 다 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는 거죠.”
“그렇소.”
“좋아요.”
“고맙소.”
국희는 핸드백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고는 총총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종이쪽지에는 ‘저녁 일곱 시에 당신을 데리러 오겠어요. 국희’라고 쓰여 있었다. 말로 해도 충분한 걸 가지고 이렇게 쪽지를 남기고 가는 걸 보면 그녀는 어떤 극적인 효과 같은 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가소로웠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일곱시에 국희가 차를 몰고 집으로 왔다. 그녀는 암말 없이 나를 태우고 한참동안 달렸다. 약 한 시간 후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서울역이었다. 대합실입구가 빤히 보이는 역 광장에 차가 멈췄다.
“어찌된 일이오.” 하고 내가 말하자
“당신은 아직도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군요.” 하고 약간 힐난하는 말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고 차를 멈추고 나서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마음에 짚이는 게 있었다.
“오늘 밤 그들이 서울을 떠나는구려.”
“이제 알아 차렸군요.”
그녀는 대합실 쪽을 주시하면서 차분히 말을 계속했다.
“악수라도 하고 헤어지게 해 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하지만 이만큼이라도 해주기 위해 저는 어젯밤 영천까지 내려갔어요. 옥주의 어머니를 만나 ‘모친 위독함. 급하향 요망’이라는 전보를 옥주에게 쳐 달라고 사정사정했죠. 멀리서나마 그녀가 떠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아 두세요. 이제 곧 나타날 거예요.”
나는 잠자코 대합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대합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 속에서 달빛이 대합실 문턱에까지 밀려와 있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사람이 드믄 대합실 앞 광장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신문지 조각이 하나 이리 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데
“쉿, 저기 와요.”
그녀가 갈월동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광장 끄트머리로부터 두 남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달빛으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들이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옥주 하고 그녀를 부르며 뛰쳐나가고 싶었다. 옥주가 낯선 사내와 함께 몇 발짝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내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오, 이럴 수가,”
국희가 빠르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는 그녀 자신도
“참으로 놀라운 일예요. 첨에 청년이 당신을 너무 닮은 걸 보고 저도 기절할 뻔했다니까요.”
그렇다면 옥주는 내 얼굴을 보고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나를 좋아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져서 어쩌겠다는 건가. 그들은 어느새 우리 앞을 지나서 대합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차에서 내려요.”
우리는 급히 차에서 내려 대합실 쪽으로 걸어갔다. 옥주와 그 사내가 개찰구 앞에 서 있었다. 우리가 대합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송옥주가 흘낏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몸을 천천히 돌려 사내를 따라 개찰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국회가 나의 팔을 잡으며 가만히 말했다.
“이제 돌아가요.”
텅 빈 역 앞 광장에는 이제 달빛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차에 탔을 때 나는 궁금한 것을 하나 물어보았다.
“어째서 오늘 보내야만 했소?”
국희는 시동을 걸려다 말고 암말 없이 핸드백에서 무슨 입장권 같은 걸 한 장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런던행 항공권이었다. 출발 일시는 16일 오후 1시 50분이었다. 오늘이 14일 토요일이니까 16일이면 모레 월요일이었다. 후딱 돌아다보니 그녀의 속눈썹이 뿌연 물기로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편안한 여자는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떠나기로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군요. 이젠 당신에게 진 빚을 조금은 갚은 셈인가요.”
우리는 집 앞에서 헤어졌다. 그녀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와서 불을 끈 채 오랫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지금 막 시퍼런 격랑을 헤쳐 나온 것만 같았다. ‘이 끔찍한 소동은 과연 누가 일으켰을까. 그대 레비아탄이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번쩍 눈을 떠보니 어느새 창 밖에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 수화기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런던행 16일 1시 50분 비행기 좌석 있습니까, 남아있다구요? 그럼, 한 사람만 예약해 주시겠습니까.”
창 밖에서는 새들이 눈부신 햇빛 속을 풀풀 날면서 요란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필자/오태규. 소설가.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소설가로 데뷔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