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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대 김무성-최경환-홍문종 대결예측-6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선선하고 선량하고 씩씩한 사나이였다!

심상근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5/11/22 [18:02]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최대장애요소인 ‘장인정신결핍’에 관련하여 그 내막과 해결방법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뉴스가 떴길래 그 이야기를 이 글의 끝으로 미루고 우선 YS에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한다.

 

▲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 브레이크뉴스

 

 

나는 지난 4년여 간 박근혜 의원이 당부한 바에 따라 내내 박정희 대통령님의 대변인 자격으로 글을 써왔고, 그러한 입장에서 YS는 박통과 대척지점에 있었고 그러므로 YS에 대한 나의 평가는 아주 우호적이지 않을 것은 예측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YS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나는 YS와 한 공간에서 한 나절 이상을 같이 지낸 적이 있었고 그와 대화하고 그를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한 번 YS는 나의 엄청 큰 부탁을 선선히 들어준 적이 있었다.


나는 YS를 인간적인 면에서 좋아한다. 근본적으로 선량하고 유쾌하고 선의적인 면모를 가졌다. 가상적으로 YS가 같이 낚시를 가자고 제안하였다면, 나는 기꺼이 따라 나섰을 것이다. 박통도 생전에 YS를 인간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는 추측한다. 다만 정치적으로 대척지점에 서있었을 뿐이다. YS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인간적으로 미워하기가 쉽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량하고 선선하고 유쾌하고 선의적인 경상도 사나이다.


내가 YS를 만난 계기는 다음과 같다. YS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였는데, 당시 나는 실리콘밸리를 포함하는 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북 캘리포니아 지역 지부장이었다. 그리고, 그와 별도로, 나는 당시 소위 평통 자문위원 (민주평화통일 대통령 자문위원)이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주요지역마다 수십 명씩 평통 자문위원을 선정하는데,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실제로 그 임명장에는 김영삼 대통령 직인이 큼직하게 찍혀있었고, 나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임명장을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으신 어머니께 드렸고, 어머니는 액자에 넣어 가보처럼 방에 걸어놓으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한 번은 해외 평통자문 위원 수백 명이 김영삼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워커힐에서 묵으며 회의를 하였고, 그 다음 날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함께 단체기념사진을 찍었다. 남북분단 상황에서 정부는 그런 식으로 해외교포들을 다독거리는데 상당히 공을 들이는 면이 있다. 총영사관은 교포사회에서 한 가닥 하거나 명망이 있다고 인식된 교포들을 그런 식으로 대접해왔다.


내가 수십 만 교포 중에서 평통위원으로 천거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있다. 우선 나는 브레이크뉴스/주간현대의 미국 자매지인 교포 주간지에 매주 두 번 정도 ‘심상근 박사 칼럼’을 썼는데, 교포들이 무지 내 글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의 직장이 총영사관에서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기관이었다. 나는 그 지역에 위치한 미국 핵무기연구소( LLNL)의 선임연구원이었다. 자랑 같지만, 출근이 늦어져 과속을 하다가 교통경찰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좌석에 놓아두었던 나의 직장 뱃지를 보더니 그냥 통과시킨 적이 있었다.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총영사관도 나에 대하여 예우를 갖추려고 노력한 바가 있었다.


나는 그리고 엄청 설치는 타입이다. 칼럼을 쓰는 외에도, 세상 중요한 일들에는 모두 의견이나 제안이 있고, 미국 대통령부터 한국 대통령, 거물 정치가들, 재벌총수들에게 개인적으로 내 나름대로의 분석을 보내는 일이 있다. 날카로운 분석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에 속한다. 뻔한 이야기를 하면 지루하지만, “어! 말이 되네!”하고 감탄하게 되는 분석을 누가 늘어놓으면, 어설프게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흥미를 느낄 수 있다. 40년이 넘게 쓰고 있는 내 글이 관심을 끄는 이유들 중 큰 것은 내 글이 그런 면에서 엔터테인먼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하여 나는 평통 해외자문위원에 위촉되었고, 그러므로 YS가 총영사관 주최 리셉션을 열었을 때 당연히 초청되었다. YS는 당시 국내에서 자기에게 비판적인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아버지를 따라온 현철 씨는 교포들과 악수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YS는 내가 주도하는 행사에 참석하여 한나절을 같이 보냈다. 총영사관이 주관하는 그 행사는 ‘이공계 지망 교포 젊은이들과의 대화’ 그런 주제 하에 열렸고, 그 지역 이공계인들 모임의 대표인 나는 자동적으로 그 모임을 주선하고 사회를 보고 주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상술한 대로 YS는 미워하기 힘든 그런 성격의 소유자이다. 젊은이들과 일일이 대담을 하였는데, 한 청년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니 아직도 이 것 저 것 생각 중이라는 식의 답이 나왔다. 그러자 YS는 큰 소리로, “뭐 그리 생각할 게 많노? 나는 중학교 때 이미 대통령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너무 생각이 많으면 헷갈린 데이. 후딱후딱 결정하고 매진하는 게 좋은 기라!”하여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이는 실제로 YS의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피아를 떠나 미워할 수 없는 선량함과 선선함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또한 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본부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워싱턴 수도 지역에 위치한 그 본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일만 명 회원의 협회의 본부 사무실이 세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회관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실제로 건물을 사주었다. 그로부터 건물 일부는 세를 놓아 운영비에 보태 쓰고 일부는 본부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출처=브레이크뉴스 DB>     ©브레이크뉴스


그 후 김영삼 대통령과 다시 인연을 갖게 된 것은 1997년 대선정국이었다. 이는 좀 긴 이야기이다.


상술한 대로 나는 산지사방 중요한 세상 일에 모두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세상 일에 엄청 관심이 많고, 그러므로 1960년 고2 때까지는 실제로 법과 지망이었다. 그러나 당시 월급으로는 누구도 살림을 할 수 없었고, 법관이나 검사가 되어도 부수입 내지 뇌물이 없이는 전혀 살아갈 수 없는 그러한 시기였으므로 나는 고3으로 올라가면서 일가친척들에게 상의 없이 공과로 지망을 바꾸었다. 공부는 나에게 쉬운 편이었으므로 나는 원하는 어느 대학에도 코 골며 들어갈 수 있었고 고로 내 맘이었다. 그러나 대제학을 끝으로 벼슬 길에 오른 적이 없던 심 씨 친척들은 지금도 나의 그 결정을 배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서주임만 되어도 졸업식장에서 교장선생님 옆자리에 앉는데, 네 머리가지고 법과 가지 공과는 뭐 말라비틀어진 거냐!” 이는 당시 고모님이 부르르- 하며 하신 말씀이었다. 특히 미국으로 유학 가서 눌러앉자 나는 완전히 버린 자손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세상 일에 있다. 공과는 순전히 밥벌이 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1970년 유학 가서 버클리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면서도 이따금 조선일보에 글을 올렸다. 당시 수백 통의 독자편지를 받기도 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애독자로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영애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일보에 나를 칭찬하는 코멘트를 기사화하여 올리기도 하였고, 박근혜 의원이 그 후 20년 정도가 지난 후 느닷없이 나에게 아버지를 위한 글을 쓰는 주필 내지 대변인이 되어줄 수 있느냐고 제안한 것은 그에 관련이 있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나는”독립적인 글쟁이로 남고 싶다. 다만 언젠가 대통령이 되시기를 바란다”면서 사양하였다.


그 다음 유명한 나의 애독자는 이건희 회장이다. 이 양반은 내가 쓴 책 ‘백만 명 먹여 살리기’ (1996, 도솔)을 받아보고는 삼성전자 사장 이하 임원들에게 그 책을 나누어주고, 앉으면 “심 박사 책 다 읽었나?”하며 채근하였다. 사장들이 툴툴거리는 소리로 나에게 전한 이야기이다.


그리고는 IT 붐이 광풍처럼 불 때, 나에게 9억 원을 보내도록 조처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광풍에 미쳐 돌아간 당시 나도 나선 것이 좀 후회가 되기는 하지만, 미국정부가 10억 원 정도, 산성전자가 9억원을 대주었다. 나는 미국정부가 상당히 주목하던 총아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삼성 간부들 사이에는 “회장님의 심상근 사랑이 도가 지나치다”는 불만도 있었다. 어쨌든 당시 삼성전자 사장들은 미국에 오는 길이면 나를 찾아왔다. 회장님이 그렇게 사랑한다는 심상근이 어떤 사람인지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 아침 문득 그 IT광풍은 사라지고 벤처회사들 태반이 문을 닫았고 나의 회사도 문을 닫았다. 당시 나는 심 씨 친척들이 사는 성남과 가까운 경기도 광주시에 5억 원을 들여 공장까지 차렸었다. 지금 생각하니 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과 더불어 만고의 애국자로 나 자신 간주하는 이건희 회장의 나에 대한 사랑과 호의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일로 기억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나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이유는, 내가 큰 그림을 그리고 정곡을 짚을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당시 세계화 바람 속에 서양 식을 배우고 받아들이자는 기류에 나는 정면으로 맞섰다. 서양의 시대는 가고 동양의 시대가 올 것이며, 동양의 가치가 지구촌을 선도하게 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그 책에서 주장하였다. 그리고, 미국 등 서구는 경제적으로 하락하고 동북아 지역의 동양국가들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96년에 펴낸 책이었지만, 그 후 나의 주장은 한 치도 틀림없이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 100년, 300년, 500년 계속 나의 주장이 증명될 것이다. 중국이 지금처럼 부상하지도 않던 당시, 나의 주장은 공허한 이론으로 들렸지만, 이건희 회장은 나의 주장을 100% 믿었다. 1975년 봄에 박정희 대통령은 내 글을 읽고 조선일보에 칭찬하는 코멘트를 기사화 시킨 적이 있지만, 이건희 회장은 사장들과의 회의석상에서, “심 박사 같은 사람은 무조건 밀어주어야 해!” 하였고, 그래서 9억 원 지원이 일사천리로 결제되었다. 하여간 나도 참으로 굿 맞은 사람이다. 이 게 모두 내가 눈만 비- 뜨면 책상머리에 앉아 이 소리 저 소리 끄적이는 통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게 좋은 건지 뭔지 좀 헷갈리는 적이 있다.


그 책에서 내가 동양시대의 도래를 예측한 한 중요한 요소는 첨단기술산업이 농사 짓은 일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제각기 독자적으로 물과 풀을 찾아 항상 이동하던 유목문화의 서양인들과 달리, 동양은 세세손손 여럿이 한 곳에서 오순도순 협동적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와 같이 여럿이 공동체를 이루어 농사를 짓는 것과 수만 명이 첨단기술산업을 미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 즉, 겨울에 일년 계획을 하고 (먹거리 구상),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연구개발), 여름이 오면 가꾸어(생산), 가을에 추수하는 (판매, 투자회수) 주기는 농사와 첨단기술산업의 공통점이며, 그러한 오순도순 공동작업에는 농경문화를 가진 동양이 서양보다 월등 익숙하며 고로 앞으로, 영원히, 첨단기술산업에서 동양이 서양을 누르고 창궐할 것이라고 나는 예측하였다. 그 외에도 나는 속이 깊은 동양문화가 저돌적인 서양문화를 누르고 결국 지구촌을 리드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나의 그 책은 또한 이회창 전 총리에게도 전해졌다. 나는 당시 위기의식을 느꼈고, 생전 만난 적도 없지만 ‘대쪽’이라는 세평에 정치적으로 그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 당시 삼성에서 9억 원, 미국정부에서 10억 원 자금을 대주어 핑핑 돌아가던 때인지라 나는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이회창 당대표와 독대를 하기도 하였다. 그 후 곧, 5월 정도로 기억되는데, 이회창의 대선가도에 제동이 걸렸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회창을 대통령까지 만들어 줄 마음이 없다는 정황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었고, YS 가신들 및 여당 의원들은 숨을 죽이고 YS 눈치를 보게 되었다. YS의 애초 의중은 ‘깜짝 놀랄 젊은이’ 이인제였던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혹은 훨씬 유두리가 있고 모가 없는 이수성, 이홍구 등도 YS 의중에 있다고 말이 돌았다.


세 치 혀로서 적진도 가르고 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이 있는 나는 그래서 하루 미국 집에서 편지를 써서 이회창 당대표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국제속달우편으로 동시에 보냈다. 말이 많은 나의 버릇 상 상당히 긴 서신이었는데, 요지는 협상안이었다. 즉, 이회창 당대표는 평소의 소신을 접고  정치비자금 건을 건드리지 말고, 그 대신 YS는 이회창 비토의중을 확실하게 거두라는 제안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그 다음 날 신문마다 주먹만한 헤드라인으로 보도된 바와 같다. 즉, YS는 초저녁에 이미 그 협상에 동의하였고, 다만 이회창 당대표는 새벽시간까지 고집을 꺾지 않자 고흥길 특보 등이 설득을 하였고, 결국 그 협상에 동의한다는 의향은 새벽시간에 청와대에 전달되었다. 당시 신문들은 그 협상을 제안한 사람을 ‘비선 인사’로만 보도하였다.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던 고흥길 특보는 그 후 내가 들리자 고맙다는 이야기를 반복하였다. 고흥길 특보는 솔직하고 효율적이고 선선한 참모 타입이다.


그 후 나는 이회창 대선후보캠프로부터 ‘정책자문위원’ 임명장을 우편으로 전달받았고, 이회창 후보 자택에 있는 팩스로 직접 의견을 보낼 수 있는 몇 명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의 그 협상안에 대뜸 동의를 한 YS는 내가 생각한 대로, 직선적이고 선의적이고 선선한 면모를 다시 보여준 것이다. 이렇건 저렇건, YS는 그러한 면모를 가진 씩씩한 경상도 사나이였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는 달랐다. 공부머리는 YS보다 더 좋을지 몰라도, 정치가가 필요한 어떤 면모가 결여되어 있었다. 나의 의견으로는, 그는 그냥 법관이다. 시대가 그를 불러낸 점이 있었지만, 그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그는 법관이었고, 정치가가 될 수 없었다.


세 가지 큰 사안에서 그는 정치가로서 실패하였다. 첫째, 나는 무조건 JP를 끌어안으라고 하였다. 우선 사기를 쳐도 좋으니 일단 끌어안으라고 하였다. 그가 부패했건 어쨌건 충청을 대표하는 정치실체였기 때문이다. 이회창 후보는 나의 이 거듭된 주장을 묵살하였다.


둘째, 병역사안이 터지자 나는, 무조건 국민들께 무릎 꿇고 빌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법적 하자 없다!”고 버티었고 지지율은 폭락하였다. 법관으로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셋째, DJ 고발에 대하여 나는 미국에서 하루에 열 번 팩스를 보내어, 고발을 하면 지지율 추락으로 대선은 날라갈 것이라고 “통촉하옵소서!” 식으로 그의 마음을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다른 참모들은 고발하면 지지율 올라간다고 우겼다. 이회창 후보는 손수 지휘하여 고발장을 준비하고 제출하였고, 그 날 그의 지지율은 근 27%에서 19%로 수직낙하 하였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우선, 그 낙하를 만회하지 못하고 1% 정도로 낙선하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고발은 YS와 그와 나 사이에 지난 5월에 함께 약속한 것을 헌신짝처럼 차버린 배신이었다. 신문마다 대서특필한 그 협상에서 이회창은 비자금 건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DJ 비자금을 건드린 것이지 YS 비자금을 건드린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할지도 모르지만, 형평 상 DJ 비자금 수사를 하면서 YS 비자금 수사를 하지 않는 것을 불가능하다. 지금 생각하여도 나는 YS에게 미안하다. 선선히 나의 제안에 동의하였지만, 나는 이회창의 약속위반 행위를 막지 못하였다. 이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DJ고발만 안 하였어도 이회창은 대통령 당선되고도 남았다. 보수적 국민들은 여론조사에서는 홧김에 지지 안 한다고 하면서도 대선 날 이회창을 찍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될 욕심에 재벌총수들 줄줄이 법정에 서고 형무소에 때 들어 가게 만들어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좋다는 이회창 대선후보의 그 ‘작음’에 국민들은 진심으로 낙심하였다. 많은 국민들은 그가 대통령 감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회창 후보는 낙선한 것이다. 법관으로 가장 적합한 한 인사가 정치계에 들어온 것은 그 자신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적재적소, 그 것은 만고의 이치이다.


모든 것을 떠나, YS는 한민족의 특성인 선량함과 선의를 몸소 보여주던 대한민국의 씩씩한 사나이였다. 그 점에서는 아무도 별로 이의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글의 본래 주제로 돌아와, 지난 5편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구절로 끝을 내었다:
미국과 일본의 이공계 수준은 한국인들은 상상조차 못한다. 그들이 9단이라면 한국은 1급 정도이다. 이는 한국에서 중소기업육성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근본 이유이다. 그러나 그 것을 해결할 방도는 현재로서 전혀 없다.
모든 이야기들을 다 하려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것이지만,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기술을 마치겠다. 내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 반드시 무엇인가 틀어질 것이다. 모두 지켜보기 바란다. (인용 끝)


그 위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도 하였다:
지난 수십 년 수천 개의 칼럼을 미국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쓰지만, 잘못 짚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믿건 말건 독자의 선택이지만, 지켜보면 증명될 것이다. (인용 끝)


이 구절들을 읽은 독자 분들 중에는 심상근이 뭔가 뿔이 나있다고 추측을 한 분도 있을지도 모른다. 맞다. 뿔이 나서 한 이야기이다.


위에서 이회창 대선후보의 DJ 고발에 관련하여 나는 엄청 무력감과 분노를 느낀 것으로 이야기하였는데, 이는 어느 지도자들을 위해 일할 때 종종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유사한 일이 중소기업 육성에 관련되어 지난 4년 간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자과 출신이지만 이공계 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없다. 고로 이공계인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정책방향을 설정한다. 그런데 4년여 년 전부터 풀타임으로 박근혜 의원-대선후보-대통령 주변을 상세히 관찰하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설익은 이공계인들이 박근혜 의원-대선후보-대통령에게 잘못된 입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마 6년, 7년 전부터, 한국의 이공계 학문 수준을 미국 일본 수준으로 높이지 않고도 창조경제 방식으로 중소기업을 육성할 수 있다고 박근혜 의원에게 주장하여 설득시킨 듯 하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허구이다. 재벌기업들은 수만 명이 떼거지 힘으로, 속도와 재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술은 반드시 최첨단일 필요가 없다. 일종의 조립공장 비슷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첨단부품과 생산장비는 수입하면 되었다.


반면, 중소기업의 경우 그러한 규모적 유리함이 없다. 그러므로 뭔가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새로 시작하여 돈을 버는 중소기업들 중 대부분은 최첨단 이공계 이론이나 방법이나 제품을 토대로 하고 있다. 새로 시작하는 중소기업들이 관련된 전체 시장규모 중 그 것이 95% 이상이다. 새로운 대기업으로 성장한 구글도 그 창업자들이 발명한 최첨단 검색 방법을 토대로 큰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야후 등 신흥 대기업들도 모두 최첨단에 해당하는 무엇들을 가진 자들이 시작한 사업이다. 그들 대부분이 하버드, 스탠포드, MIT 등 초일류 대학교 출신인 것도 이를 증명한다. 그들과 그들이 졸업한 공과대학의 수준을 9단으로 치면 한국의 수준은 1급 정도밖에 안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엄청 한심하고 웃기는 것이다. 내가 수십 년 공부하고 근무하던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런 것은 기초상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박근혜 의원-대선후보-대통령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소위 창조경제라는 것을 시작하였고 매년 수 조원을 퍼붓고 있다. 중국의 등장으로 대기업들조차 밀리는 상황에서 중소기업 육성은 시급한 일이지만, 그 이공계인들의 접근방식은 말도 안 되는 넌센스이다. 창조경제를 어느 정도 성공시키는 방법은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회사들을 끌어들여 심사와 관리 등에 참여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그 외 여러 파격적인 방법들이 기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년 후 결국, “DJ의 중소기업 육성책처럼 창조경제정책도 실패하였다”고 판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 나의 눈알이 튀어나오는 일이 또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작한 소위 ‘청년희망연대’의 황철주 이사장이 정말로 복창 터치는 이야기를 연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소기업들을 위하여 5,000명의 보부상을 육성하여 세계적으로 내보내겠다고 연일 호언장담하고 있다.


이는 완전 미친 이야기이다. 왜 미친 이야기인지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희극적이지만, 인내심을 갖고 이야기하자면, 1) 중소기업들은 한국에서 육성할 수 없다 2)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내다팔 물건들도 없다. 몇 가지 예들을 들추며 성공적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한국 경제규모에서 통계적으로 영이고 언제나 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3) 한국 청년들은 한국에서도 어떤 신제품을 파는데 엄청 애를 먹을 것이다. 한국은 그들에게 손금처럼 잘 아는 곳이고, 언어에 완벽하고 문화에 익숙하다. 그런데도 엄청 애를 먹을 것이다. 그런데, 언어도 안 되고 지리도 모르고 문화도 익숙하지 못한 외국에 내보내 판매를 시킨다? 언어에 익숙해지려면 누구에게도 최소10년 이상 거주가 필요하다. 4) 창조경제정책에서는 판매를 지원하지 않으므로 700억 기금을 사용하겠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창조경제는 판매까지 도와준다. 매년 수 조원 지원하는 창조경제에 돈이 모자라서 개인들이 정성을 다하여 기부한 700억원을 창조경제정책을 보조하는데 쓰겠다? 5) 창조경제는 내 판단에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창조경제는 황철주 같은 우물 안 개구리들이 박근혜 의원-대선후보-대통령을, 나쁘게 표현하면, 속여서 시작한 정책이다. 실리콘밸리 관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이다. 그런데, 이제 기부금 700억까지 그 것에 쏟아 붓겠다? 오히려, 뜬구름 잡기 식 창조경제와 독립적으로, 가장 실용적인 아이디어에 그 돈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한 바구니에 달걀을 모두 넣으면 모두 함께 깨질 수 있는 것 아닌가?


황철주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콧방귀도 안 뀌고 자신의 위대한 아이디어를 장엄하게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언한다. 그는 실제로 아무 것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이다. 나는 그와 같은 우물 안 개구리들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고 싶다.


우물 안 개구리들을 지탄한 것은 여러 해 되었다. 브레이크뉴스에도 여러 번 칼럼을 썼다. 처음에는 이찬진이 있었다. 한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좀 유명해지더니,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마이크로소프트 등에 도전하기 보다는 비례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후 별로 들은 적이 없다.


그 다음이 안철수이다. 컴퓨터 백신을 발명하여 좀 유명해지더니 정치로 뛰어들었다. 그의 연구소는 해외수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는데, 발벗고 나서서 미는 대신 그는 정치계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로 국민들을 호도하여 왔다.


황철주도 마찬가지이다. 이공계 분야에서 성공을 좀 하면 세계시장 개척에 발벗고 나서는 대신 산지사방 그럴 듯한 이야기나 하고 다니고, 이공계 수준은 나라마다 비슷하다 그런 완전히 허구적 발언이나 하고 다니고, 급기야 700억 원을 말도 안 되는 곳에 쏟아 붓겠다고 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준으로 나는 정말로 분격하고 있다. 물론 내버려두면 2년 내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 들어날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프로그램이 그렇게 망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눈이 뒤집어질 일이 될 것이다.


아래에는 황철주 청년희망재단 이사장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게재한다:

“본인은 근래 귀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듣고 하도 한심하지만 참고 지냈는데, 어제 다시 아래 인용한 국민일보 인터뷰 기사를 읽고 안 되겠다 싶어 이 서신을 보냅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325110&code=11151100&cp=nv

최근 재단 현판식 때 글로벌 청년 보부상 5000명을 육성하겠다고 했는데.“30년 전에 비해 대기업은 커졌다. 대 기업은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성장했다. 그런데 중소기업의 크기는 아직도 요만하다. 우리나라 스타트업 기업이 성장하려면 지금 한국시장이 아니라 미래 세계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그런데 중소·벤처기업이 가장 어려운 게 시장 개척이다. 정부도 연구개발, 생산투자 자금은 대주는데 마케팅 자본은 대주지 않는다. 우리 청년 한 명을 희망펀드로 해외에 내보내 10억 매출을 올리면 국내 5명을 고용할 수 있다. 5000명이 나가 1년에 10억씩만 벌면 새 일자리 2만5000개가 창출된다. 청년희망펀드에서 교육받은 청년이 다른 청년 5명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미션이 생긴다고 생각해보라. 생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 아닌가.” 

귀하의 가슴이 떨리는 이유는 청년희망펀드가 당신 돈이 아니라 공돈이기 때문입니다. 그 돈이 당신이 가진 돈의 전부이고, 그 결과가 부정적일 때 알거지가 되어 식구들과 모두 길에 나가 앉게 된다면, 당신의 가슴은 감격에 떨리지 않을 것입니다. 밤잠을 못 이루며 검토에 검토를 하고, 가장 판단력이 좋은 사람들을 찾아가 Show-stopper가 있을지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중소기업에서 성공한 유명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유명해지기도 원래 쉽습니다. 당신 회사가 생산하는 CVD 장비 등 그런 종류의 제품들은 모두 내 자신 손수 사용하였고 내 팀의 박사들이나 조수들이 항상 사용하던 장비들입니다. 어쨌든 램 회사 등과의 경쟁에서 성공하고 영업이익을 올리게 된 것은 당신의 능력이고 아마 동시에 운일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수십 년 첨단과학기술계에 종사하고 실리콘밸리 지역의 한인과학기술자 단체의 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6년 이상 지냈던 본인의 시각은 당신의 그러한 성공에 매료되어 쓰러지지 않습니다. 장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무슨 만능의 인간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위하여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 넓은 세상에서 단지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물론 본인도 그렇습니다.
청년 보부상들을 육성하여 중소기업 제품 판로를 개척하겠다는 생각에 대하여 본인은 완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고… 당신 돈이 아니므로 희떠운 생각을, 그다지 심사숙고 하지도 않고, 만방에 호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본인은 당신의 계획이 실패할 확률을 95% 이상으로 봅니다. 당신은 코트라 등 온갖 기관들이 별로 성과를 못 내었던 일에 어떻게 성공하겠다는 것인지 등을 설명하여야 합니다. 결국 당신이 성공한다면 그 때 본인은 정중히 사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과를 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본인은 전혀 믿지 않습니다. (중략)
본인은 박근혜 대통령의 그 제안 직후 곧바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뜬구름 잡는 짓은 불가이고, 아버님 식으로 튼튼하고 확실한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당시 본인이 제안한 바는, ‘기술훈련 보조’였습니다. 미국에서는 28%만이 4년제 대학에 진학합니다. 모든 것이 계급장 화 하는 한국에서는 대학졸업장도 계급장이고, 그래서 80% 정도가 묻지마 대학진학을 합니다. 그 결과 중소기업들은 더욱 인력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인력수급의 괴리는 세계에서 가장 심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고로 본인은 취직을 못하는 많은 인문계 대학 졸업생들에게 중소기업 등에서 필요한 기술을 배우는 경우 전액을 지원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 한 방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주: 취직하는 경우 그 기업에서 그 지원해준 금액을 재단에 기부하는 방식으로써 재단기금을 보존함이 좋을 것). 미국 하버드대학 졸업생들의 경우에도 역사학 같은 경우 대부분이 실업자가 됩니다.
본인은 본인이 제안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서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작지 않습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용적이고 탄탄한 구상 대신 완전히 뜬구름 잡는 식의 플랜을 대하고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하략)
(황철주 청년희망재단 이사장에게 보낸 편지 인용 끝)

 

▲ 심상근     ©브레이크뉴스

지난 글 5편에서 나는, 그림 1을 통하여, 한국은 곧 경제력이 상한선에 달하고 그 후 하강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그를 방지할 방도를 찾는 것인데, 안철수 황철주 등 유명 이공계인들은 그러한 현실을 완전히 호도하고 있으며,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공계와 벤처창업이 무슨 피크닉 같은 일인 양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진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sheem_sk@naver.com


*필자/심상근. 미 버크리대 박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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