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반장’ 최중락 회장 “가정이 화목해야 범죄가 안 일어나”

[인터뷰]최중락 수우회 회장·참전 유공자회 부회장을 만나다

임국정 기자 | 기사입력 2015/05/15 [09:00]
▲ 최중락 수우회 회장     © 브레이크뉴스



브레이크뉴스 임국정 기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왜 경찰이 됐느냐는 질문에 최중락 수우회(전·현직 수사, 형사과장들의 모임) 회장은 덤덤히 대답했다.

 

“젊은 사람이 정의 사회를 구현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 꿈이 젊을 때는 다 있지 않나. 그래서 기왕이면 범죄하고 한번 싸워보겠다고 생각해 경찰에 들어왔지”

 

그는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지난 1950년 4월 26일 순경 시험에 합격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피란 생활을 하던 중 10월 15일 경찰학교에 입교해 11월 17일 졸업한 후 치안국 전투경찰 202대대 2중대 3소대로 발령을 받는다. 그곳이 바로 평양이다. 그리고 미 제3수송사령부 미군 772헌병대대와 합동근무로 유엔 경찰로 파견이 됐다.

 

“당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미 7사단이 다 죽고, 한국군 1군단 7연대가 다 죽었다. 7천명이 얼어서 죽었다”

 

그렇게 최중락 회장은 경찰 생활을 전쟁으로 시작했다. 그에겐 결코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다. 힘겹던 전쟁을 마치고 1954년도 5월에 부대가 해체됐다. 그후 그는 서울시경 강력계 수사관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40년 10개월이라는 시간을 강력계와 함께 했다.

 

1929년 태어나 오래도록 쌓아온 경력과 함께 그에게 달린 타이틀도 숱하다. 서울시경 강력계장 강력과장 (총경퇴직), 경찰대학 전임강사, (주) 에스원(삼성그룹) 상임고문(22년)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경찰청 수사국 수사연구관, 참전 유공자회 부회장, 수우회(전·현직 수사, 형사과장들의 모임) 회장 등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중락 회장은 MBC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배우 최불암이 연기한 반장 역할의 실제 모델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경찰로 산다는 것, 그것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대한민국 강력수사계의 대부로 불리는 최중락 회장을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다음은 최중락 회장과의 일문일답.

 

-40년이라는 세월동안 강력계에만 몸 담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부서로 가고 싶지는 않았나?

 

▲다른 데로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올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계속 하게 됐고 강산이 4번이 변했다.

 

-현재도 경찰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지?

 

▲지금은 하지 않지만 경찰에서 큰 사건이 나면 아직도 전화가 온다. 좀 와서 봐 달라고. 경험담을 얘기해주거나 수사 진행 사항을 챙겨 주기도 한다.

 

-전·현직 수사, 형사과장들의 모임 수우회(搜友會)를 1979년 창립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강력계 형사니까 “우리가 언젠가 경찰을 그만두면 후배들을 좀 도와주자. 그래서 그 경험의 법칙을 좀 남겨주자”라는 생각에서 창립했다.

 

-지난 2013년 경찰대 수석졸업생이 고등학교 때 “정의를 위해 일하고 싶다면 경찰이 되라”라는 최중락 회장의 말에 꿈을 경찰로 바꾸고 최 회장을 롤모델로 삼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수사반장이 한창 인기였던 시절, 방송을 보고 많은 사람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래서 “나같이 되려면 경찰에 들어와라. 강력계 형사 한번 해 봐라”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경찰을 하게 된 사람도 더러 있다.

 

-수사반장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당시 경찰에서는 전국에서 1년 동안 도둑, 강도 등 각종 범죄자를 가장 많이 잡아들인 사람을 ‘포도왕’이라고 했다. 당시 내가 가장 많은 검거 실적을 올렸던 때가 있다. 도둑을 많이 잡으니까 경찰의 날, 언론에 포도왕 최중락으로 이름이 많이 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 그때 도둑도 군대같이 한번 잡아보자는 얘기가 나왔고, 방송국에 수사물을 만들어라고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수사물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방송국 쪽에서 “만들긴 만들겠는데 지원을 좀 해달라”라며, 포도왕을 파견해주길 부탁하자 내가 파견관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방송국에 들어가서 작가들과 상의 후 내가 겪은 강력 사건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금은 KBS2TV인 동양방송에서 ‘다이얼 330’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형법 330조, 특수절도죄를 말한다. 그러한 죄를 저지른 도둑을 잡겠다고 한 것이기 때문에 프로그램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 이 프로그램은 일주일에 다섯 번 5분씩, 10분씩 해서 50분을 방송 했는데 손님이 안 들었다.

 

그런데 MBC에서는 당시 드라마 하나를 가지고 45분짜리로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손님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동양방송에 나가 있다가 MBC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시작한 수사반장을 총 880회, 20년 8개월을 했다.

 

-수사반장 촬영 중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나?

 

▲수사반장을 찍으면서 나도 열의가 많아 현장 로케이션 촬영 중 카메라까지 지고 다녔다. 촬영을 하다 권총을 지닌 진짜 범인들과 서울 청계천 지하에서 만난 적도 있다.

 

그래도 형사라는 이유로 순간순간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설득해서 손들게 했다. 다행이 둘 다 살아나왔지만, 지하에서 총소리는 자꾸 나고 컴컴하니 밖에서 봤을 때는 다 죽는다고 할 정도였다.

 

-범죄에 대한 지론이 있다면?

 

▲범죄는 욕심이 있어서 저지른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순간의 욕심 때문에 범죄는 발생한다.

 

범죄자를 검거하는 일은 범죄자와 형사 간의 머리 싸움이다. 나는 다른 형사들이 잠잘 때, 자지 않고 밤을 새워 돌아다녔다. 또한, 도둑이 다니는 길을 알아서 도둑 다니는 길만 지켰다.

 

-그런 특별한 길이 있나?

 

▲도둑이 도둑을 잡아준다. 도둑한테 친절하게 해주면 나한테 안 잡히기 위해 제보를 한다. 도둑도 사람이고 인권이 있는데, 조금 친절히 해주고 도와주는 것 같이 하면 있는 대로 털어 놓는다.

 

하지만 나는 도둑을 내 손에 묶어 보내면 꼭 내복을 사 입혀서 보내고, 명절 때만 되면 도둑 가족들한테 쌀도 사서 보내줬다. 그렇게 소문이 나니까 도둑들이 나한테 형님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요즘 어디어디에 도둑이 많이 나오는데 어디 가서 지키면 되느냐?”라고 물어보면 장물아비네 집을 대준다. 그 동네의 물건이 한 일정한 장소로 몰려든다. 그럼 남들 다 잘 시간에 나는 거기서 노숙을 하며 도둑을 잡았다.

 

-기억에 남는 사건은?

 

▲한번은 약국에서 약을 훔치다 잡힌 도둑이 어머니가 몹시 아픈데 꼭 그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훔쳐올 것이 많은 데 영양제 한 가지만 훔쳐왔다.

 

아마 누가 문병왔을 때 그 약을 한번 먹어봐라고 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약 이름을 적어 놨다가 아들한테 “이걸 하나 구해봐라. 마지막으로 먹고 싶다”라고 하자 이 아들이 약을 살 돈이 없으니 약국에 가서 약을 훔쳐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실인지 아닌지 한번 가보자” 해서 도둑을 데리고 도둑의 집에 가보니 막 어머니가 운명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 놈을 잡아넣을 수도 없어 도둑을 시켜서 약국에 다시 약을 돌려주고 풀어준 일이 있다. 결국 훔쳐온 것은 없으니까, 그들을 단순히 나쁘다고만 말 할 수는 없다. 범죄이기 전에 사회다. 동정이 간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도둑질을 했지만 풀어준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한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렇다. 도둑이 되기 전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면 왜 도둑이 되겠나. 사람이 아이일 때부터 욕심을 없애줘야 한다. 그래야 도둑이 안 된다.

 

‘맹모 삼천지교’라고 맹자 어머니가 이사 다닌 이유는 자식 교육을 위한 주변 환경 때문이지 않나. 맹자의 성선설에서 보면 원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나빠졌느냐?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부부가 싸움을 하는 등 자라나는 환경에 의해 나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건 내가 입증하는 사실이다. 가출 청소년들이 1년에 3만 명 정도 된다. 가정에서 들들 볶이고 부모들 싸움에 진저리가 나서 가출하는 경우도 많다.

 

3, 4년 전 한 고등학생은 청량리역에서 서울역으로 오는 1호선에서 한 노인이 노약자석에 앉으려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고 서울역 층층대에 서가지고 그 노인을 발길로 차고 폭행했다. 그 노인은 고등학교 선생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속 사정을 살펴보니 그날 그 고등학생은 부모와 함께 춘천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부모가 아이들 문제로 싸움을 했다. 근데 주변에서 부모를 말려도 안 들으니 흥분해서 오다가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경찰에서는 그 고등학생을 폭행치사로 입건했다. 피해자를 조문 온 사람들은 “학생의 어머니가 옆에 탔었는데 왜 안 말렸느냐”라고 했고 학생의 어머니는 결국 약을 먹고 자살했다. 부부 싸움이 커져서 그러한 사건까지 발생한 것이다.

 

또 한번은 지난해 포천에서 중학교 3학년짜리가 중학교 학생을 상대로 살인 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다. 이 중학생도 잡아보니까 부모의 가정 싸움 때문에 다른 중학생을 죽인 것이었다.

 

다른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한테 그렇게 잘해주는데 범인의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와서 부인을 때렸다. 그러면 자꾸 자기 어머니가 우니까 “왜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불행하게 사느냐”라고 생각하며 화가 치민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밖에 나와보니 바로 2층에 사는 중학교 동급생이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외출하면서 희희낙락거리고 팔을 붙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미운 마음이 든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중학교 학생이 다른 중학생을 죽였다.

 

가정은 그만큼 어린 아이들에게 중요하다. 그들이 불우한 환경에 처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사건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육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 내에서의 인간성 회복 교육이다. 가정에서부터 교육이 바로서야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본다.

 

▲ 최중락 수우회 회장     © 브레이크뉴스

 

-경찰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있다면.

 

▲ 형제 강도 사건이다. 1970년대 한 형제와 누나, 3남매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빚을 진 상태에서 부모가 죽었다. 당시에는 보통 부모가 돌아가시면 누나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라도 부모노릇을 하면서 동생을 돌봤다.

 

하지만 이 누나는 남동생 둘에게 “우린 빚 갚으면 거지가 된다. 헤어지자”라며 도망을 갔다. 그 때 큰 애가 10살, 둘째가 9살이었다. 그렇게 형제가 성남에서 구두를 닦았지만 그래도 뼈대가 있는 집이라고 해서 중·고등학교를 제대로 배웠다.

 

근데 형이 고등학교 3학년 때, 구두 닦는 곳 앞으로 매일 등교하는 여고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다 그 여고생이 여름방학 때 구두 닦는 아이들 집에 와서 일주일을 살았는데 애기를 가진 것이다.

 

1982년도 5월 4일이 출산일이었는데 출산일 일주일 전에 산모가 배가 아파 죽는다고 난리를 쳐서 동생이 업고 병원에 갔더니 임신 중독증이라고 했다. 의사가 “잘못하면 산모도 애도 위험하다. 돈 3만 원만 가져와라. 주사 한 대면 살아난다”라고 말하자, 형제들이 돈이 없으니 누나를 찾아갔다.

 

당시 누나는 고등학교를 나와 시집을 잘 가서 모 회사 기업의 전무까지 올라간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돈 3만원을 달라니까 무슨 구두 닦는 놈이 아이가 있느냐며 야단만 치고 내쫓으려 했고, 형제는 무릎을 꿇고 산모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며 사정했다.

 

그런데 이 누나란 사람은 동생들이 매형이 올 시간이 되는데 가라고 해도 가지를 않으니 112에 “젊은 애들이 강도짓 하려고 와서 돈을 달라고 한다”라며 신고한다. 사이렌 소리가 나니까 애들이 담을 넘어 도망갔다.

 

경찰에 붙잡히지 않고 다시 성남으로 가려고 한남대교를 건너다가 동생이 생각하기에 누나가 몹시 나빴던 것이다. 돈 3만 원을 안 주면 안 줬지, 동생들을 강도로 신고했으니까.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살아서 무엇하랴”라는 생각에 한강대교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난간을 올라갔는데 형도 따라 올라오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누나 욕을 하면서 한강 다리에서 두 시간을 울었을 것이다. 살아보자고. 그렇게 둘이서 자살을 그만두고 동생이 형에게 “배가 아무리 고파도 도둑질은 안 하기로 했는데, 도둑질을 한 번 합시다”라고 제의한다.

 

동생이 말하길 “청소기를 하나 훔쳐서 팔면 3만 원 정도 된다. 그것을 하나 훔쳐다 팔고 앞으로 우리가 돈 벌면 새것을 사다주고 빕시다” 동생이 그런 말을 하니 형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데, 동생이 혼자서 간다고 하니까 형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울 한남동에서 동생이 전봇대를 통해 남의 집을 침범했다. 보통 도둑은 집에 들어가면 대문부터 열어놓을 텐데. 이 형제들은 처음이라 들어가서 청소기를 찾겠다고 한 명은 부엌에서 헤매고 다른 한 명은은 마루에서 헤맸다.

 

그런데 청소기가 있는 집에나 있지 다 있나. 찾아도 청소기가 안 보이니까 깜깜해서 안 보이는 줄 알고 동생이 성냥 불을 켰다. 그러자 주인들이 도둑이 들었다고 소리를 질렀고, 식구들이 우르르 일어나니까 형제가 불빛을 따라 도망가다 열려 있던 문간방에 들어갔다.

 

식구들이 따라 들어와서 붙잡힐 것 같았던 동생이 과도를 가지고 안 잡힌다고 휘두르다가 할아버지 허벅지를 찔렀다. 막 피가 쏟아지니 식구들이 무릎을 꿇고 우리가 소리 안지를 테니까 칼 놓으라고 하자 칼을 던지고 도망갔다. 그것이 5월 4일 새벽 2시 사건이다.

 

이후 경찰서에 전화가 왔다. 한남동 강도가 났는데 노인을 찔러서 3주 진단이 났다. 강도 상해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가보니 성냥갑이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 남아 있던 지문으로 동생을 찾아냈다.

 

5월 12일 새벽, 형사가 범인을 잡았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내가 “강도상해죄인데 포승 지르고 수갑 채워서 단단히 묶어서 와라”라고 했다. 형사를 한 명 더 보내려고 했는데 그 형사가 혼자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낮 1시까지 형사가 안 들어왔다. 그래서 “후배가 놓쳤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후 4시 반경에 그 형사 혼자 들어왔다. 들어오는 형사를 한 대 때리며 “놓쳤으면 수배를 해야지”라고 했더니 곧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문이 열리고 형제 두 명이 수갑도 안차고 뛰어 들어왔다. 그 형사가 나한테 말하는게 “잘못 잡았다. 잡고 보니 너무 불쌍한 놈을 잡았다”라는 것이었다. 보고를 안 했으면 풀어주고 싶은데 풀어줬다가는 자신을 직무유기로 형무소를 보내려고 할 것 같으니 도망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 수갑도 안 채우고 포승도 안 질렀는데 도망도 안가고 하루 종일 따라 다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형제를 불러 놓고 “형사한테 들어봤더니 그렇게 착하게 살았던 모양인데 차라리 누이를 찌르지 왜 노인을 찔러서 3주 진단을 내놨느냐. 강도만 됐어도 내가 풀어주고 보내겠는데 강도상해죄는 내 힘으로 못 풀어준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긴급 구속을 했다.

 

그 사건이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 그 때 긴급 구속을 하면서도 “너희들 살면서 굉장히 어려울 때가 있다. 명함 줄 테니까 명함대로 찾아오면 우리 집이다. 아무 때고 찾아와라”하면서 약도까지 그려줬다.

 

그리고 다른 형사들과 함께 “형의 아이를 키워서 서울대에 보내자. 그래서 판검사를 시켜보자”라는 마음에 한 달에 10만 원씩 산모를 도와줬다.

 

이후 넉달 만에 애기와 산모를 찾아 갔더니 둘 다 사라져 있었다. 집 주인 얘기가 형무소 다녀와서 “용돈 얻으러 갑니다”하고 나갔다는 것이다. 아마 몇 달 만에 그 여고생이 면회를 갔는데 교도소에서 참기 힘들었던 형이 “남자 생겼냐. 왜 면회 안 왔느냐. 우리 헤어지자. 너 갈 테면 친정으로 가라”라며 욕을 한 것 같다.

 

여고생이 욕을 먹고 보니 갈 곳이 없어 어린애를 버리고 혼자 나간 것이다. 아기도 못 찾았다. 이후 내가 전국 방방곡곡 시체가 있는 곳을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 아이 엄마를 찾으려고 시체 2600구를 감식했다. 백령도까지 가서 찾았다. 내가 파출소에 연락해 혹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를 알려주라면서 주소도 남겼지만 끝내 못 찾았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고 칼로 찔른 동생은 3년 징역을 살고 형은 2년 만에 나왔다. 지금도 명절 때만 되면 형제들이 찾아올 줄 알고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데 안 온다. “그때 내가 왜 둘 다 잡아넣었나” 이런 후회를 한다. 그것이 내가 형사 40년 생활에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이다.

 

그때 그 사건을 가지고 수사반장에서 ‘비정한 누나의 사건’이라고 해서 방송에 나갔는데, 당시 일요일 저녁에 난리가 났다. 출근을 하니까 전과자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어제 드라마 보고 잠을 못 잤는데, 그게 실화냐 논픽션이냐” 물어보길래, 실화라고 하니 한 명이 박수를 치면서 “실화면 누나가 있는 것 아니냐. 누나 집을 알려주셔야 한다. 누나를 죽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누나의 집을 알려 달라고 최불암 집에까지도 전화를 했다. 그 정도로 국민적 공분이 대단했다. 그래서 나는 “그 비정한 누나는 너희들이 아니어도 벼락 맞아 죽을 것이다. 기다려라. 정말 나도 잊지 못한다”라고 답했다.

 

근데 정말 벼락 맞아 죽었다. 나도 신문에 난 것을 보고 알았다. 벼락이 큰 버드나무를 쳤는데 그것이 쓰러지면서 지나가던 형제의 누나를 쳐 누나가 장애인이 됐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범죄 예방을 위해 사회적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7대 경제국 중 하나이다. 살아나가기 위해서 경제도 변해야 하지만 우리 생활에도 변화가 와야 한다. 특히 가정에서의 변화가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가정의 화목이다. 가정이 화목해야 범죄가 안 일어난다.

 

그래서 내가 주로 말하는 것이 공자의 유교에서 이야기 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어질게 살고, 이웃을 위해서 살고, 예의를 지키고, 지혜롭게 살아야 하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인의예지신’ 사상은 조선 태조 때 건립된 4대문에도 들어가 있다.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홍지문을 각각 동서남북으로 세워놓고 중앙에 보신각을 건립한 것이다. 옛날 역사를 보고 하는 얘기다.

 

이웃을 위해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하고 이웃을 도와주자. 이웃을 섬기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지원하며 살아보자. 그런 게 섬김 정치다. 그것이 구조적으로 된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더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경찰로서 살아온 소감은?

 

▲경찰로 잘 살았다. 상을 몇 장 받았나? 근정포장, 근정훈장, 대통령표창, 그 외 각 신문사 사장이 주는 근거 표창장 등 117장을 받았다. 나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가정의 평화를 부르짖고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며, 범죄에 대해 자문해달라고 하면 자문도 하면서 범죄 연구를 계속 하려고 한다. 범죄를 줄여 나가는데 계속해서 힘쓰겠다.

 

나는 만약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경찰을 할 것이다. 강력계 형사가 쉬운 것 같지만 3D 현장이다. 송장만 치우려니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한다. 그러니 나라도 또 해야지 어떻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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