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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박 “젊음, 불안할수록 아름다운거죠”

[인터뷰]LA커뮤니티 칼리지 선거 사상 최초의 한인·여성 최연소 교육 이사(전), 티나 박(Tina Park)

임국정 기자 | 기사입력 2015/01/16 [16:52]
 
▲ 티나 박      ©브레이크뉴스
 

브레이크뉴스 임국정 기자= “그게 뭐하는 일이지?”

‘LA 카운티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평의회 이사(이하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라는 타이틀을 듣고 떠오른 생각이다. 그러나 그건 본 기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직접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 직함을 달고 있었던 사람도 처음 그 자리를 위한 선거 출마 제안을 받았을 때는 본 기자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게 뭐하는 일인데요?”
 
티나 박(Tina Park)은 한인 최초로 뉴욕증권거래소(NYSE) 감사부에서 일하다 9·11 테러를 겪은 후 선거 기금 모금 봉사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열심히 활동하는 그녀의 모습이 알려져 우연한 기회로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 선거 출마를 제안 받았다. 그렇게 LA커뮤니티 칼리지 선거 사상 최초의 한인, 여성 최연소 교육 이사는 우리가 생각했던 거창한 것이 아닌, 뜻밖의 계기로 탄생했다.
 
티나 박의 이야기를 담은 책 ‘바로 지금부터야, Just Live!’ 출간 계기로  13일, 서대문구 서소문로에 위치한 브레이크뉴스 본사에서 그녀를 만났다. 다음은 티나 박과의 일문일답이다.
 
티나 박과의 일문일답.
 
-솔직히 말해서 보통 사람들에게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라는 말은 매우 생소하다. 그래서 그런지 선거 사상 최초의 한인 최연소 교육이사라는 타이틀이 크게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란 무엇이고 어떠한 일을 하는가.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직은 캘리포니아 주의 주요 선출직 중의 하나이다. 이유는 주민의 세금으로 커뮤니티 칼리지가 운영되기 때문이다. 평의회 이사가 되면, 자그마치 약 10억 달러에 달하는 캘리포니아 주 LA카운티에 있는 모든 커뮤니티 칼리지의 예산을 관장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 그 외의 다른 업무도 많지만 평의회 이사의 일차적인 의무는 바로 주민의 세금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교육에 온전히 쓰이도록 힘쓰는 일이다.
 
한국에 비슷한 선거는 교육감 선거가 있다. LA 카운티가 미국 전체에서 가장 큰 구역이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당선된 사람은 나 하나였고, 교육 분야에서 당선된 여자 중 최연소이다.
 
 
 
 
▲ 티나 박 ‘바로 지금부터야, Just Live!’     © 브레이크뉴스
 
 
-얼마 전 ‘바로 지금부터야, Just Live!’라는 책을 냈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 책을 쓰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온 것은 커뮤니티 칼리지 이사 선거에 당선된 후이다. 정치와 관련해 선거 전략을 설명하고 교육에 관련해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었고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에 대한 것은 뜻이 없어 고려하겠다고만 말씀드렸다.
 
그러다 지난해 1월에 지인분이 미국 LA에서 출장을 오셨는데 점심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다시 책을 쓰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 재선에 불출마한 상태였고, 2012년 10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다. 그러한 이유가 있으니 지인분께서는 치유를 할 겸 책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해주셨다.
 
그리고 당시 한국이 학생 자살율 1위, 낮은 삶의 만족도, 노인 빈곤율 1위 등 엄청 분위기가 침체돼 있었다. 특히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사고라는 큰 비극이 있었다. 추모의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세월호 사고와 나의 경험을 감히 비교 할 수는 없지만 나도 9·11 테러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9·11 테러 당시 나는 월드트레이드센터 내에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폭탄이 터진 줄 알았다.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힌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순간적으로 “내가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안 들고 그대로 얼어버린다. 세월호 사고 때도 많은 사람들이 안내방송을 듣고 배 안에 가만히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왜 빨리 나오지 않고 배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배 안에 있었더라도 나는 배 안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9·11 테러 당시에도 옆에서 나가라고 하니까 나가게 된 것이지 실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당황한 마음에 빠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사고 발생 후 세월호에서 빠져 나온 교감 선생님이 자살을 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 회사에서도 9·11 테러의 희생자들이 있었다. 나와 각별히 친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나는 살아나왔다는데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한 죄책감으로 뉴스를 한동안 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울면서 “나는 왜 살았고, 그 분들은 왜 죽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상처가 한 10년은 간 듯하다. 9·11 테러에 관련된 얘기를 하지 못했고, 관련 사진만 봐도 마음이 아팠다.
 
사실 2009년 커뮤니티 칼리지 이사 선거에 당선되고 한 지상파 방송사에서 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왔다. 그때도 9·11 테러에 관해 얘기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만큼 9·11 테러는 그 자체로 나에게 비극이었고 아픔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고 난 후에는 그것에 관해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나의 아픔도 치유가 됐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가 다르고, 마음속에 자신만의 아픔을 담아 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나누면서 치유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을 수 있길 바랐다. 책을 통해 “괜찮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싶었다. 글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문인이 아니기에 돈을 벌려고 책을 쓴 것은 절대 아니다. 나눔과 사랑의 의미로 썼다.
 
나에 대한 인지도가 한국보다 미국이 높았기에 먼저 영어로 써서 미국에 나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인생을 살아오며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항상 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인생이지만 경험한 것들을 나의 조국에 먼저 공유하고 싶었다.
 
-9·11 테러를 겪은후 뉴욕증권거래소를 떠나 LA로 갔을 때, 동종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티비티(Protiviti)라는 비즈니스 컨설팅과 감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입사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위험, 좋지 않은 위험이 있다. 내가 큰 변화를 주기위해 LA에 갔는데 나의 직장까지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꾼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티비티에 입사했다.
 
프로티비티에 가서는 80%를 거의 출장을 다녔다. 이때 출장을 다닌 곳들이 캘리포니아 내 바닷가 옆이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출장을 다니며 뉴욕에서 가지고 있던 마음 속 아픔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무엇인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난 다른 것을 할 거야”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프로티비티에 다니며 그 준비를 한 것이다.
 
-그 후 선거 기금 봉사를 마쳐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직 선거에 출마했다. 출마를 결심하게 된 배경은.
 
▲공동체를 위해 보탬이 되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에 새롭게 선거 모금 운동 봉사를 시작했다가 우연히 선거 출마를 권유 받았다. 평상시 기회라는 것은 내가 좋은 일을 열심히 할 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힘든 일이 많다 보니 좋지 않은 마음을 먹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좋은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정말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저 경제적 풍요와 지위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바로 지금부터야, Just Live!’ 중 발췌)

-그렇게 임기를 마치고 돌연 불출마를 선언했다.
 
▲내가 처음 취직한 뉴욕증권거래소는 공무원 같은 개념이다.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들어가게 되면 기본 25년 정도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다. 실제로 거기서도 너무 잘 해줬고 그때 들어간 친구들도 아직까지 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얘기한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렀어? 내가 엊그제까지 18세였어” 세월은 굉장히 빨리 흘러가고 인생은 하나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과거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도, 돈과 명예와 같은 끝없는 욕망으로 미래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지금을 바라보고 지금에 만족해 기쁘게 살아도 인생은 너무 짧은 것 같다.
 
내가 비극을 겪으면서 그 좋은 회사에 남아있었다면 과연 지금 행복할까? 돈은 많이 벌었을 것이다. 다들 모는 차도 똑같이 몰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65살이 돼 은퇴를 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과연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잠깐 있다가 가는 인생이다. 그래서 아직도 난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잘 나왔다고 생각한다.
 
LA 커뮤니티 칼리지 교육 이사 선거에 내가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던 사람들은 정말로 안 좋아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그때까지도 나를 지지했고, 당연히 선거에 나올 것이라 생각했고, 파티를 열어주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그만둬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가 재선거를 하는 해의 10월이었다. 선거를 하려면 모금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도 있었지만 이미 선거를 안 하려고 마음먹은 후였다.
 
정치를 하다보면 하루 아침에 왕이 된 기분이다. 교육구 내 9개 학교가 있는데 내 사진이 학교마다 붙어 있었다. 한국의 교육감도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대학교 총장까지도 어려워하는 자리였다.
 
그러한 맛을 한 번 보면 그것이 중독이 돼서 계속 선거에 출마하게 되는 것 같다. 나도 30살 초반의 어린 나이에 70대인 총장 분들이 어려워 하고 잘 해주는 것을 보며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할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이 들어 뒤돌아 봤을 때 내가 한 건 뭘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마음을 내려놓는 데도 사실 많이 힘들었다. 현직이었기에 선거에서도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고, 같이 일한 친구들이 계속 이사로 있었다. 그런데 내려놓고 나니까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단 스스로 평가할 때 실제로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을 먼저 인정하고 일정한 단계와 과정을 거쳐 그것을 채워야 한다. 그러한 과정이 쌓여 나간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달라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바로 지금부터야, Just Live!’ 중 발췌)

-책 내용에 봉사라는 말이 많다.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아버지는 지난 2012년에 돌아가셨다. 생전 아버지께서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라”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표현을 많이 하는 분이셨다. 항상 “너는 너가 생각하는대로 될 수 있어. 생각을 잘 해라. 믿음대로 된다”라고 말하셨다.
 
나에게는 이 책이 여러 가지로 치유 과정이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아버지를 잃은 미안함과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이 글에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에 참 감사하다.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다.
 
사실 봉사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작했다. 어머니께서는 어린 나를 양로원이든 고아원이든 데리고 다니셨다. 그것을 보고 자라니 당연한 삶의 하나가 됐다.
 
봉사라는 것이 “나의 경력과 이력을 위해 내가 봉사를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봉사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나 진심으로 목적을 가지고 봉사를 하면 나타나는 결과들은 기적과 같은 수준이다. 나는 그런 것을 맛 볼 수 있었다. 그럴 때 내 인생이 성장하고 나의 자신감이 커졌다.
 
물론 봉사라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봉사하며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작은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도 물론 그렇게 시작했다. 뉴욕에서 가장 추운 해였는데 겨울에 대학교를 다니면서 라이프코칭이라는 자격을 받았다. ‘비기닝 어드밴스’, ‘어드밴스’, ‘어드밴스2’ 단계 등을 통과해야 마지막으로 라이프코칭이 될 수 있다.
 
‘어드밴스2’과정에서 “너 아닌 다른 것을 위해 뭔가 해봐라”라는 프로젝트를 했다. 그래서 나는 추운 겨울이 다가 오고 많은 사람이 죽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콘서트를 통해 돈을 모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숙자 보호소에 찾아갔다.
 
노숙자 보호소를 처음 찾아 가서 인사를 하니 매니저(매니저도 노숙자였다)가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어린 마음에 그의 손 끝을 잡고 악수 했다.
 
그 후 인터뷰를 하고 콘서트를 할 수 있냐고 물으니 그들은 정말 좋아했다. 그렇게 있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화장실이 어디있냐고 물으니 키를 건내 줬다. 하지만 난 아까와 마찬가지로 손 끝으로 키를 받아 들었다. 그러곤 다시 돌아서 “아냐, 아냐 그냥 화장실 안 갈래” 그렇게 얘기했다.
 
그렇게 또 한참 대화를 나누다 갑작스럽게 “너 왜 그렇게 해?”하는 마음이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사람들을 만나고 있는건데, 정말 미안했다. 그래서 나갈 때 이 사람들과 포옹을 하고 손도 잡고 나갔다.
 
결국 이렇게 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데도 이 분들과 인터뷰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아니야, 이렇게 하면 안돼. 사랑으로 대해야 해”라는 마음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콘서트를 두 번 해서 거기서 나온 모든 돈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이로 인해 졸업할 때 시장에게 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일들도 라이프 코칭을 했으니까 있을 수 있었던 일이다.
 
단순히 바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단점을 보면 단점만 보인다. 장점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생각을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바꾸자는 것이다. 나도 완벽하지 않다. 나도 계속 노력 중이다.
 
-최근에는 이라크에 사는 소수민족 아시리안(Assyrian)과 야지디(Yazidi)를 위한 인권 구호 활동을 하기 위해 캠페인을 주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떠한 활동인가.
 
▲작년에는 아시리안 IS 테러에서 가장 많이 희생당한 이란 사람들 중 약 80%가 아시리안 족속들이다.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루고 있던 당시 그들의 인구가 2억이었다. 지금은 전 세계에 100만 명이었다. 그만큼 죽이고 희생당했다. 이번에도 이란에서 똑같이 몇 만 명이 희생당했다. 이 사람들이 다 없어지면 한 국가가 없어지는 것이다.
 
작년 5월에도 그 분들을 위한 이벤트에 초대돼 참여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간 상태에서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는데 끔찍한 것들이었다. 아버지가 목이 없는 두 살 아이를 들고 우는 모습, 한 여자가 강간을 당한 채 온 몸이 찢어져 있는 등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진들을 보고 1주일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래서 이건 내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캠페인을 진행했다. 한국과 미국 신문에 나가고 유엔과 같이 일 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오로지 그 분들을 위해서 한 일이다. 만약 내가 이것을 나를 위해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했다면 그렇게 잘 되지 않았을 것 같다.
 
-경제, 정치, 교육, 인권 등 무척이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했다.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이유가 있는가.
 
▲특별히 다양하게 활동해야겠다고 마음먹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왔다. “사람들을 위해서 항상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왔다.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다 보니 다양한 일을 통해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내가 마음이 좋아야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긍정의 힘, 그러한 마음을 계속 훈련해 왔다.
 
-한국 교육에 관해 말한다면.
 
▲한국에는 많은 조기교육이 이뤄진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그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놀기도, 운동도 해야 한다. 대학교에 가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처럼 그 나이에 맞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부에 맞는 아이, 다른 것에 맞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게 맞는 재능을 키울 수 있도록 부모가 도와주면 좋겠다. 굳이 공부만 하도록 해 아이가 불행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결국 아이의 손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이 행복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이 잘 돼야 나라가 잘 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얼마 전 2년제 학교를 가난한 사람 말고도 모두에게 무료로 해주겠다고 발표했다.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처럼 교육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사람도 많다. 한국에 그런 시스템이 있었다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한국은 짜여진 틀에 끼지 못하면 두 번째 기회가 없다. 미국은 그 틀에 끼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기회를 또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말은 “한국이 잘못 됐다. 미국이 좋다”란 것이 아니다. 미국도 잘못된 점이 많다. 학생들이 무료 교육과 같은 제도가 있고, 책값까지 돈을 주는 데도 불평불만하기도 한다. 노조, 교수 등 있는 사람은 있는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대로 불만을 표한다. 한국 교육이 좋은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젊음은 불안할수록 아름답다’(‘바로 지금부터야, Just Live!’ 중 발췌)

-젊음은 불안할수록 아름답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기업 경쟁률이 100:1에 달하고 비정규직 600만 명을 넘어선 한국에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지금은 젊은 학생들부터 너무 불안해한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 친구, 네 친구 식으로 따돌림이 시작된다. 또 중학교에 가면 인문계를 갈 것인가, 공고를 갈 것인가 등으로 나눠지며 또 불안해한다. 고등학교에 가면 수능을 봐야하고 대학교를 어디 갈 지 정해야 한다. 이 때 좋은 대학교에 못 들어가면 대기업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 또 불안해한다. 그리고 나이가 차면 “좋은 사람, 집안과 결혼해야 하는데” 등 불안이 끊이질 않는다.
 
불안은 끝이 없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불안한 것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한 채 있을 것인지 아니면 불안해도 “우리는 원래 다 불안한거야”, “불안할수록 아름다운거야”라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끝까지 끈기를 잃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
 
나 또한 불안했었다. 나는 환경이 좀 더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시대 때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다. 우리가 그때 태어나지 않았지만 우리의 역사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나라가 없으면 내가 없는 것이다. 나라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나라를 되찾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만약 전쟁 이후 1세대 분들이 해놓은 일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있을 수 있을까.
 
그 분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 한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 목적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한 몸을 희생하더라도 “나의 조국을 살릴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했다. 그러한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다. 그분들처럼 고생하지 않았고, 그분들처럼 나라를 잃었다 되찾은 아픔도 없다. 우리는 좋은 세상에 살면서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불만을 가지거나 불안해한다. 나도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결코 역사를 잊지 않고 그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세상, 사회, 경제가 지금처럼 발전해 올 수 있었다.
 
현재에 만족하자. 남과 비교하면 끝이 없다. 밑으로 봐도 끝이 없고, 위로 봐도 끝이 없다. 행복과 성공의 기준은 누가 말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모두가 긍정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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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로 2015/01/22 [15:21] 수정 | 삭제
  • 이미 우리나라엔 저런 책도 많고 저런 사람도 많습니다.
    진정 봉사하는 사람은 저런책 안쓰지요...다 자기를 알리고자 하는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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