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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석 역, 국내최초 난중일기 최종 완역판 탄생

<신간 소개>『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 도서출판 여해에서 출간

박정대 기자 | 기사입력 2014/10/23 [17:22]

난중일기 최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 홍기문의 최초 한글번역본 난중일기를 반영하고 내용을 보충하여 최종 정리한 『증보판 교감완역 난중일기』를 출간했다.(도서출판 여해) 노 소장은 난중일기 연구를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후대의 이본을 모두 망라한 최종 완역본을 내놓은 것. 1795년 정조 때 간행된 충무공전서본의 난중일기와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 및 후대의 활자본을 비교분석하였다. 원문상의 문제점을 모두 바로잡아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복원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번역을 했다.  
 

▲ 난중일기     ©브레이크뉴스

 
노 소장은 그간에 친필 초고본의 오독을 바로잡은 내용과 2007년 새로 발굴한 을미일기 등 32일치, 새로 해독한 내용 등을 정리하여 난중일기 교감완역본을 만들었다. 그 후 2013년 홍기문이 1955년에 최초로 번역한 난중일기 한글본을 발굴하여 기존번역본과의 차이점과 후대의 번역본에 미친 영향관계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 번역이 이은상에게도 일부 영향을 준 것을 확인했는데,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이은상이 최초로 번역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후대 난중일기 번역서의 원조는 홍기문의 번역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홍기문은 초고본을 보지 않고, 정조 19년(1795년)에 간행된 『충무공전서』(신문관본과 통영본)와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를 토대로 번역했다. 때문에 여기에는 초고본으로 풀어야 할 누락과 오독 등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점에서 이를 완벽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난중일기 해독상의 중요한 부분에 그의 견해를 인용하거나 비교대상으로 참고했다.
 
지금까지 초고본을 중심으로 이본끼리 대조하여 교감한 사례는 총 174건인데, 초고본 자체에서 문맥과 문헌을 참고하여 교감한 사례는 91건, 전서본으로 교감한 사례는 29건[중복 7건], 󰡔난중일기초󰡕로 교감한 사례는 3건, 일기초로 교감한 사례는 58건[보유 35]이다. 
   
 홍기문의 번역사례

 

① 문맥을 고려한 예 : 이 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려가는데, 순천 부사(권준)가 1마리를 잡아 보냈다. (계사 2월 20일) 홍기문은 일장(一獐)을 한 마리 노루로 해석하지 않고, 주어의 의미를 살려 사슴 한 마리로 해석했다. 이은상도 이 견해를 따름.


② 전후 내용으로 고증한 예 : 이영남(李英男), 이여염(李汝恬)이 와서 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더욱더 한탄스러울 뿐이었다.(계사년 3월 2일) 주석 : 원균이 공로를 탐하여 백성의 머리를 베어다가 왜적의 머리로 보고하였다. 2월 28일자에 원균의 군관들이 섬을 오간 것도 그러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영남이 말한 강진의 2명도 원균의 부하에게 붙들려 갔다가 살아온 사람들이다.


③ 구체적 사실을 밝힌 예 : 행궁의 기별을 들으니, 동궁(東宮, 광해군)께서 평안치 못하다고 한다.(계사년 6월 12일) 행궁은 임금의 궁궐 이외에 지방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인데, 홍기문은 전주에 머물고 있는 광해군의 숙소라고 주석했다.


④ 배경사건을 밝힌 예 :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하였다.(계사 8월 30일) 홍기문은 “원균이 이순신의 부대를 패망하게 하고자 자신의 배는 감추어 놓고 영등포의 왜적을 토벌하러 가자고 주장하였다.”고 함.


⑤ 글자의 뜻을 훈고하여 의역한 예 : 새벽꿈에, 영의정이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고 나는 관을 벗고 있었는데, 함께 민종각(閔宗慤)의 집으로 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깼다. 이게 무슨 징조 인지 모르겠다.(未知是何詳(祥)) (갑오 11월 8일) 홍기문은 詳자를 “징조”로 해석함. 즉, 본래 詳자는 祥자와 통하고, 祥자에는 징조라는 뜻이 있다.


⑥ 고전용어를 밝힌 예 :  권 수사(권준)의 조사(朝辭)를 면제하는 공문[除朝辭關]. 『대전회통』「이전․제수」에 보면, 관원이 부임할 때 길이 멀고 일이 급한 경우, 조사(朝辭)를 면제하고 부임한다고 했다. 조사(朝辭)란, 외관직에 임명된 관원이 임금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는 것이다. 홍기문은 “임금에게 직접 인사드리는 의식을 제례하는 의식”이라 했다.


⑦ 문맥에 맞는 어휘 사용 : 체찰사 처소로 나아갔던 진무(鎭撫)가 와서, “18일에 삼천포에서 만나자.”고 한다기에 행장을 차렸다.[馳行]  초고본에는 “馳行”으로 되어 있고 「일기초」에는 “治行”으로 되어 있다. 문맥을 볼 때 행장을 차려 떠날 준비한다는 후자의 의미가 더 좋다. 홍기문은 “길을 떠나야 하겠다”로 하고, 이은상은 “달려가기로 하다”로 해석했다. 
 
특히 이번에는 난중일기에 적힌 의문의 두 글자 “難逃”라는 글귀의 의미를 정확히 밝혔다. 제갈량이 촉한의 후주 유선(劉禪)에게 올린 표문에 “정해진 운명은 피하기 어렵다(難逃定數)”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삼국지연의』104회,「큰 별이 지고 한승상이 죽다(隕大星漢丞相歸天)」 에 “제갈공명이 문방사보를 취하여 의자 위에서 죽음을 앞두고 손수 유표를 써서 후주에게 전했다. 유표의 요약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살고 죽는 것에는 상도가 있으니, 정해진 운수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이 장차 이르려고 하는데 저의 충정을 다하고자 합니다.(孔明令取文房四寶, 於臥榻上手書遺表, 以達後主. 表略曰 伏聞生死有常, 難逃定數. 死之將至, 願盡愚忠).”라고 하였다.     
  

부록에는 이순신의 명량대첩에 대한 글을 덧붙였다. 여기서는 정유년(1597) 군기와 전선 제조를 담당한 체찰 부사 한효순(韓孝純)이 선조의 명을 받아 급히 전선을 만들어 수군을 도운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이 내용은 한효순의 『월탄연보』에 나온다.
   
“급히 전선(30척)을 만들어 수군을 도우라는 선조의 하교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밤낮으로 경영하여 전북 부안 변산(邊山)에서 전선을 만들어 연속 30여 척을 보냈다.  또한 군관들을 남쪽에 많이 보내어 피난민의 배 값을 조등(刁蹬, 농간을 부려 값을 뛰게 함)하는 자는 엄한 형벌로 금지시켰다.”

 

난중일기 병신년 윤8월 14일자에 보면, 체찰사 이원익과 부체찰사 한효순이 당도하자, 이순신이 광양현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군민을 위로하기 위해 전선을 정비하는 부역을 면제하게 해주었다. 『선조실록』 1597년 5월 13일자에, “체찰부사 한효순이 치계하였다. 대략의 내용은 삼도(三道)의 전선(戰船) 중에 현재 진중에 있는 배가 1백 34척이고, 격군(格軍)이 1만 3천 2백여 명이란 것이었다.(體察副使韓孝純馳啓 大槪三道戰船時在陣中者, 一百三十四隻, 格軍一萬三千二百餘名云)”라고 되어 있다. 선조실록 6월 26일자 비변사에서 보고한 내용에 “통제사 및 체찰 부사 한효순(韓孝純) 등에게 하유하여, 현재 있는 전선(戰船)과 소선(小船)의 수를 빠짐없이 초출(抄出)하고 아울러 싣고 있는 군사의 수와 기계의 숫자를 일일이 자세히 기록하여 주야를 가리지 말고 치계하도록 하소서.(請下諭於統制使及體察副使韓孝純等, 時在戰船、小船, 無遺抄出, 竝令所載軍數、器械之數, 一一詳錄, 不分晝夜馳啓)”라고 하였다. 
   
노 소장은 명량대첩의 승리요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 13척으로 133척을 상대하는 열세의 상황에서 부하를 군법으로 경고하고 군공으로 사기를 진작케 하여 부하를 독려하고, 지휘관이 솔선수범하여 신의로써 화합과 단결을 이루어 승리를 이끌었다.
  

둘째,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 임기응변. 협수로라는 울돌목을 교전장소로 정하고, 조수의 급류를 이용하여 수군의 전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고 왜군의 병력을 무력화시켜 적을 신속하게 물리칠 수 있었다.
  

셋째, 지역민의 자발적 동참을 유도한 감화력. 이순신의 헌신적인 노력에 지역민들이 수군을 지원하고 의병활동에 자발적으로 적극 동참하였다. 피난선 수백 척을 동원하여 13척 전선의 후방에서 전선으로 위장하여 왜군의 기선을 제압했다. ▲『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 신국판, 25,000원(도서출판 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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