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비운의 정치인, 그들의 발자취] ④이회창

대통령 당선자를 가장 위협했던 선거 ‘2인자’

김상래 기자 | 기사입력 2014/10/21 [17:27]
브레이크뉴스 김상래 기자= 성공한 정치인, 좋은 정치인의 조건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리더십, 도덕성, 인맥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정치인이 최종적으로 성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행운’ 또한 빠질 수 없는 한 가지 조건으로 여겨진다. 어떤 정치인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지지부진하던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기도 한다. 또한 선거에서 경쟁자가 자신의 실수로 자멸하며 쉽게 당선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존재한다. 다른 조건을 일정 수준 갖췄음에도 주변 인물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결정적인 승부에서 아쉽게 패배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브레이크뉴스>에서는 ‘비운의 정치인’을 선정하고 그들의 행적과 실패요인을 살펴보았다.
 
▲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브레이크뉴스

병풍에 날아간 두 번의 대통령 선거

‘39만557, 57만980’ 이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패배한 두 번의 대선에서 당선자와의 득표수 차이였다. 이 전 총재는 대한민국이 군사 독재 정권 시대를 지나 대통령 직선제를 다시 채택한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 중 가작 적은 득표수 차이가 났던 두 번의 선거에서 모두 낙선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두 번에 걸친 낙선은 이 전 총재의 정계 은퇴 선언을 이끌었다.
 
치열한 경쟁으로 아슬아슬한 결과를 낸 선거로 평가 받는 지난 2012년 대선의 결과보다도 더 적은 득표수 차이를 보였고 득표율 차이 또한 마찬가지로 적었다.
 
이 전 총재의 입장에서 이러한 아쉬운 패배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그의 두 아들의 병역 의혹이 첫 번째로 꼽힌다. 당초 그에게 유리한 듯 보였던 선거 준비 과정에서 ‘병풍’으로 불린 자녀 병역 의혹은 치명타가 됐다. 이 전 총재의 패배는 본인의 능력이나 선거에서의 전략 부재가 아닌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웠다. 하지만 병풍으로 이 전 총재가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던 ‘대쪽’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것만은 확실했다.
 
이 전 총재는 1960년 서울지방법원 법관으로 임용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대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며 군사정권이 청탁과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려 군사 정권으로부터 기피인물로 낙인찍히는 반면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김영삼 정권에서 그는 이어져오던 정치권의 요청에 거절의사를 표명하다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엄정한 직무수행으로 대쪽이라는 별명을 더욱 널리 알리게 됐다. 법조인 출신인 이 전 총재는 총리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을 적극 활용해 강한 국무총리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적극적이고 강직한 국무총리 활동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충돌이 잦아졌고 취임 4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총리 사퇴로 이 전 총재의 존재감은 국민들에게 더욱 확실하게 각인됐고 큰 인기를 끌게 됐다.
 
이처럼 원칙을 지키는 대쪽 같은 이미지로 국민에게 인기를 끌던 이 전 총재에게 병풍은 순식간에 청렴한 이미지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대선이 있었던 1997년 8월까지 이 전 총재는 여론조사에서 다른 대선 잠재 후보들과 비교해 월등히 앞선 지지율을 보였지만 당내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병풍을 막지는 못했다. 여론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 손상을 입기 시작하는 동시에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브레이크뉴스
지지율 1위의 대선주자를 낙선 시킬 만큼 병풍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 전 총재의 병풍 사건 이후 사회적으로도 군 입대 문제가 엄격해지는 등의 변화가 있는 정도였다. 병풍으로 인한 이 전 총재의 낙선 이전까지는 고위층,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의 군 면제가 잦았고 이에 대해 큰 논란 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 전 총재의 입장에서 병풍 사건은 아쉬울 일이다. 그에게 조금의 행운만 따랐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 조금의 행운은 빗겨 나갔고 그는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아쉬운 패배로 이 전 총재를 이끌었던 병풍은 15대 대선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사안으로 두 번의 심판을 받았다. 이 전 총재는 2002년 대선에 참여했지만 또 한 번의 패배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병풍은 5년 후에도 이 전 총재를 따라다니며 거세게 불었다. 병역비리 전문가인 김대업의 폭로로 정치권에서 이 전 총재의 아들 이정연씨의 병역 면제가 또 다시 정치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후 조사와 재판에서 김대업은 허위 진술로 실형을 살게 되지만 때는 이미 선거가 끝나고 이 전 총재가 은퇴 선언을 한 뒤였다..
 
이 전 총재는 두 번째 경험하는 대선에서도 지지율 1위를 달리다 병풍을 맞으며 약 11%의 지지율을 잃으며 패배한다. 당시 이 전 총재 측은 기존의 청렴·대쪽 이미지를 더욱 부각 시키며 그를 ‘깨끗한 정권의 창출자’라며 선거전에 열을 올렸지만 쓰라린 경험을 다시 겪어야만 했다.
 
이미 5년 전의 영향으로 병역에 대해 더욱 까다로운 잣대가 생긴 국민들에게 이 전 총재는 자신을 깨끗한 정권 창출의 적임자로 납득시키지 못하며 은퇴를 택했다.
 
이 전 총재를 돕지 못한 당시 시대적 상황
 
이 전 총재의 낙선에는 병풍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낙선의 배경에는 시대적 불운 또한 존재했다. 이 전 총재는 자신이 정권을 물려받으려 했던 전 정권으로부터의 단절을 주장했다. 경제상황 악화로 흉흉해진 민심에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지지도가 곤두박질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재의 첫 번째 대선이 있었던 1997년에는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12월 자금지원 양해 각서 체결 직후 치러질 선거에서 여당 소속의 이 전 총재는 힘을 쓰기가 힘들었다.
 
반면 정권 교체를 노리는 이 전 총재의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를 잘 활용했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지지도를 쌓았고 결국 이 전 총재는 전 정권의 과오를 극복해내지 못했다.
 
바닥을 치던 신한국당의 지지도로 어려움을 겪던 이 전 총재는 당시 조순 민주당 총재와 연대하고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꿔 기존 구정치 세력과 차별화를 노렸다.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탈당을 촉구했지만 하지만 경제위기로 인한 김영삼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당명 변경으로 막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떨어지는 지지도를 개인의 능력으로 끌어올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이 전 총재는 선거기간 내 꾸준히 이어오던 전 정권과의 선 긋기로 인해 당내 분열이라는 역풍
▲ 이인제 의원     ©브레이크뉴스
을 맞기도 했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씨의 공천을 거부하면서 상도동계와 등을 돌리게 됐다.
 
병풍·경제상황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이 전 총재에게 당의 분열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당내 분열은 이인제 의원의 탈당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 전 총재의 지지도를 나누는 역할로 낙선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됐다.
 
병풍으로 이 전 총재의 지지도가 하락하자 경선에서 패배했던 이 의원은 신한국당 탈당 후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이에 몇몇 상도동계 인사들은 이 의원을 따라 탈당했고 보수 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당시 이 전 총재의 김영삼 정부와의 선 긋기가 적정한 선에서 이뤄져 상도동계와의 갈등을 최소화 했다면 상황을 만회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들과 관계 악화가 덜 했다면 이 의원의 독자 출마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 의원의 출마를 국민신당에 참여하지 않은 상도동계 인사들도 은밀히 돕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전 총재와 상도동계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정계 은퇴 이후
 
이 전 총재는 두 번의 대선에서 ‘역대 당선자를 가장 위협한 2등’이었지만 그 역시 2등일 뿐이었다. 그는 패배를 받아들이고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다가 2007년 17대 대선에 다시 나서지만 15%의 득표율에 그쳤다.
 
혹자에게는 이 전 총재는 그저 대통령 당선에 실패한 사람일 수 도 있지만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까지도 정치계에서 선대위원장 후보 등으로 꾸준히 언급되며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비록 이 전 총재의 정치인생이 대권 낙선의 연속이었지만 “대통령 보다 큰 정치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 전 총재에 대해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온건·합리적 노선으로 대정부관계를 유지해 정국안정에 기여 했고 야당으로서 여당과 정부에 협조해 당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이 전 총재는 자신의 대업을 이루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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