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교포사회, 조총련 탈퇴자 늘고있다”

<박삼중 스님 대증언>차별 당하는 재일교포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2/08/28 [14:25]
누구엔가 보답하려는 차원에서 잔뜩 짓눌려 있던 일상의 스트레스를 비우려는 여행길에 삼중스님은 앞장섰다. 지금까지 300번도 넘도록 일본을 왕복하면서 수없이 많은 행사들을 진두지휘했지만 단 한번이라도 여유로운 관광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죽음 직전에 겨우 찾은 남은 시간에 남겨진 빚을 갚을 요량으로 일행들과 함께 뱃부온천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출항한 국제선이 후쿠오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일본에서의 모든 일정은 삼중스님의 손을 떠나 재일교포 오스카 긴자로(한국명: 조만길)에 의해서 이끌어졌다. 언제부터라고 딱 부러지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조만길은 일본 땅에 삼중스님이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온갖 정성으로 받들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웬일인지 가족처럼 저에게는 정성을 다합니다. 그 옛날 이총 귀환 사절단으로 한국까지 따라 온 그 때부터 줄곧 변함없습니다. 자그마치 30년 전부터 자칭 저를 위한 일본후원회장으로 스스로에게 감투를 씌었습니다. 그리 일본을 다녔지만 저는 일본말 한마디도 벙끗하지 못합니다. 오스카 역시나 대략 70~80% 정도나 한국말을 알아들을까 우리 둘은 그리 오랜 세월 동안에 말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신비한 인연이라 여겨집니다.”
▲ 삼중 스님과 함께한 조만길(왼쪽)과 한성일(오른쪽).   ©브레이크뉴스

인천에서 태어 난 조만길의 부모는 일본 땅에서 치마저고리를 입으면서 언제나 고국 땅을 그리워했던 교포 1세대였다. 입에 풀칠하기만 급급하여 일본에서 살지만 제대로 언어를 배우지 못한 탓에 한국어로만 대화했다. 그렇지만 한국말은 부모 두 분간의 대화로 간주할 뿐 자식들은 집안 언어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거의 대부분 한국어를 이해할 수는 있는 조만길은 한국어를 단 한마디로 입 밖으로 발설하지 않았다.

조만길과 한성일은 후쿠오카에서 뱃부 온천으로 삼중스님 일행을 안내했다. 몇 번이나 삼중스님이 이끄는 행사에 참석했던 한성일 재일교포 2세는 이번 일정에서 통역자로 나서 주었다. 일본에서 태어났어도 조선중학교와 조선 고등학교-조선대학을 다닌 탓에 한국어는 유창했다. 한 10여 년 전만 해도 북한이 조종하는 조총련 계에서 이끄는 조선학교를 졸업한 인물이라면 색안경을 끼고서는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났겠지만 지금의 교포사회는 완전히 딴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교포사회의 의식바닥
 
일본에서 교포 2세로 태어난 두 사람은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만 대화했다. 민단에서 운영하는 일반학교와 조총련에서 운영하는 조선학교를 다닌 학력 차이에서 일본 내에서도 살아있는 벽은 존재했다. 식민지 시절부터 겪어내야만 하던 치욕적인 모멸감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남의 나라 땅에서 살아야 하는 교포들은 고국 땅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민족 간에 38선을 경계로 살육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였다. 분단된 고국에 대한 내막을 그저 일본에서 선전하는 소문만 귀동냥 할 뿐 직접 나서서 파악하고자 나설 여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1960년대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경제적으로나 대외적인 활동 면에서 훨씬 뒤처져 있는 처지였기에 재일교포는 관심 밖의 사람들이었다. 마치 내다버린 자식처럼 밥을 얻어먹고 사는지 감방에서 몽둥이질을 당하던지 간에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활발한 활동력을 갖춘 조총련은 교포 사회를 깊숙이 파고들어 가면서 변화를 이끌었다. 일본인들에게 시달리면서 설움이 북받치는 가운데 교포사회는 어느 한편으로 응집하여 힘을 보태자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조금이나마 편의를 제공하면서 달콤한 낙원이 바로 북조선이라 부르짖는 쪽으로 줄을 서게 되었다. 그 편이 공산주의이건 민주주의 사회이건 간에 핍박받는 교포들에게는 그리 큰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단지 고국에서 실권을 잡고 있는 북조선 김일성 수상과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북송선을 대동한 북한은 드디어 1959년에 일본의 적십자 대표들을 움직여서 ‘재일교포 북송 협정’에 서명을 받아냈다. 그 당시 일본사회는 자체 내 인구 증가율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는 판에 늘어나는 재일교포에 대한 문제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려 했다. 그래서 거주지 자유 선택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일본 정부는 북송을 희망하는 상당히 많은 재일교포들을 줄일 수 있었다. 그 때 북송선에 올랐던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처하고 있는 현주소는 차마 입으로 밝히지 못할 정도로 그 곳에서도 차별받았다. 어디에서나 찬밥 신세는 면하지 못할뿐더러 북한에서는 심지어 생존권마저 박탈당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민단에서 이끄는 일반학교의 숫자는 조총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조선학교보다 무려 3배수나 적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포 2세들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선학교에서는 대한민국 칭호를 대신하여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현판식을 내걸으면서 조선의 후예를 사수했다. 또한 조선을 세계에 부각시킨 ‘포천문 전투’를 마치 ‘3.1만세운동’ 마냥 크게 떠받드는 통에 학생들의 뇌세포에 남겨놓았다 그러나 민단 일반학교에서는 이 전투의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고국에서나 민단학교에서는 독립투쟁에 해방의 초석을 다지도록 선봉장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들의 업적을 기렸다. 식민 통치를 피해 중국 상하이에서 야채장사를 하던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는 김구 선생은 1932년 상하이의 훙거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왕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전승 기념행사에 폭탄을 던질 계획을 하던 차였다. 한일애국단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청년 윤봉길이 자청하여 자신이 폭탄을 투여하겠다는 강한 의지에 김구 선생은 감동했다. 거사 당일 윤봉길은 정확하게 폭탄을 투척하여 연단에 도열해 있던 일본군 상하이 총사령관을 비롯하여 몇몇 중견간부들은 사망케 하면서 그 자리에서 투옥되었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 총통은 훙거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홀로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중국의 100만 대군도 실행하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한 사람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이 사건은 그 동안 장제스가 관심을 전혀 갖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를 부여해준 사건으로 영원히 역사에 남을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큰 획을 남긴 사건을 북한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의도에서인지 입을 닫았다. 그러다보니 서로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가며 엇박자처럼 꼬여가는 역사의 잔재에서 정작 피해를 당하는 당사자들은 바로 재일교포들이었다.

재일교포라면 특히나 교포 2세들은 철이 들면서부터 냉담한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은 큰 충격이었다. 일본 친구들과 자신의 말투가 확연히 다르다는 충격에서 자신을 향한 혐오감마저 들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정확한 일본어로 발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인들보다 더 정확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교포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또 다른 자의식으로 속마음은 감춘 채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들로 헛된 웃음만 날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어린 시절부터 피하고 싶었던 자의식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말하지 않는 습관은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도 한국과 일본 사이의 낀 경계인(境界人)으로서 식민지 시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락이었다. 식민지 시절부터 남겨 놓은 유산 ‘조선인은 열등하다.’이라는 꼬리는 여전히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일본으로 귀화한 교포들은 자신의 족보가 들통이 날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갔다. 교포 4~5세를 넘어서는 이 시점까지도 재일교포들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입 밖으로 거칠게 차별하지는 않지만 알게 모르게 잔존하고 있는 차별의식을 교포들은 인식했다. 그러니 귀화한 교포들은 스스로 자신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발설하는 일은 백이면 백 사람 모두 입을 함구했다.
 
백정부락과 조선부락
 
일본 내에서의 최하층 천민들은 겪어내어야 하는 차별과 궁핍한 삶은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의 고대로부터 중세, 근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인 차별 속에 부락을 일군 천민계층에는 백정부락이 존재했다. 사회의 최하층에서 온갖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인간 집단이라는 화두인 백정부락에 이어 식민지 시절에는 조선부락이 천민집단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백정부락과 조선부락은 어느 한편이 좋고 낮고를 떠나 동급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차별이냐고요? 조센징이면 좌우간 무조건 나쁜 짓한다고 잡아가두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 등록증을 휴대하지 않았다고 감옥에 잡아가두었어요. 조선인을 범죄자로 경찰은 지목했고 언제나 사고가 나면 주변 조선인들을 우선적으로 감옥에 처넣었어요. 그래서 차별받는 게 너무나 억울해서 이리 당하는 것이 싫어서 가라데 3단까지 땄습니다. 무조건 싸워서 이겨야 된다는 식으로 살다보니 감방을 들락거리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조만길은 어린 시절부터 무조건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길만이 억울함을 보상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워낙 강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조만길이었지만 다른 조선인을 이지매를 당하는 꼴을 보기만하면 주먹질을 했다.

“조센징! 조센징! 놀리는 소리에 고함을 쳤습니다. 우리를 바보 취급하지 마. 같은 밥 먹는데 뭐가 다르냐? 그러면 일본 학생들은 ‘고무신 꼭지가 다르다’며 다시 놀려댔습니다. 그 당시까지 우리 어머니는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싣고 다녔으니, 그들 눈에는 외계 인간처럼  여기면서 돌팔매질을 해댔습니다. 발이 네 개짜리 짐승을 죽이는 백정 부락에서 사는 천민 아이들처럼 조선인들을 열등민족으로 차별했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단단한 교육을 시켰다. 절대 조선인하고는 놀지도 사귀지도 말아야 한다는 의식은 입으로 가슴으로 남아서 지금까지도 유형무형으로 존재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찌엔니츠고센(일원이십오전)’을 말하면 단박에 우열을 가려냈습니다. 우물에 뭐라도 떠다니기만 하면 우리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동네 우물도 함께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지진이 나도 조선인이 동네에 살고 있어서 지진이 나서 사람이 죽었다면서 집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조선인이라는 그 한 가지 때문에 열등민족으로 죽음을 당하는 경우까지도 생겼습니다.”

한 동네에서는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조선인들은 천시하는 시선은 마치 죄수를 바라보듯 동일시했다. 일본 학계에서 열풍을 불게 한 열등이론이 등장하면서 조선인은 열등민족으로 단순세포를 지닌 집단으로 간주했다.

“조선인들을 징용이나 학병으로 일본으로 강압적으로 데려다 놓고서는 이리 열등민족으로 대우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치닫고 치받는 설움에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우리도 일본 놈과 맞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몽둥이를 들었습니다. 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며 총칼은 없어도 몽둥이로 두들겨 패며 너무 자존적으로 막 나갔습니다.”

어디에 살고 있던 간에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기에 더욱 악랄하게 반항했다. 이런 사태를 수습하고자 일본 정부는 1959년 북송선 사건과 거의 흡사하게 조선연맹과 손을 맞잡았다. 그러니 교포 사회는 자연스럽게 좌경으로 치닫게 되었다. 교포 사회는 서로들 치고 받으면서 막나가다가 정면에서 당해고 반항하다가 다시 붙잡히던 수난의 시기가 바로 8.15 해방 직후였다. 남북 신탁통지가 끝나자마자 6.25전쟁이 반발했다는 소식에 가슴을 쳤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교포 자신들은 스스로 권리를 챙겨야 한다는 자의식이 자라났다. 민단과 조총련, 두 개의 파에서 압도적으로 조총련에게 힘이 실어졌다.

“그 당시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정말 고민 많이 했습니다. 내가 조선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 데, 왜 나보고 손가락질하는지 정말로 일본인도 원망스러웠지만 부모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제일 수치스럽게 생각한 것은 바로 ‘한일합병’이라는 용어를 풀이할 때 이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한다는 이 조약에 대한 내용을 들으면서 정말로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싫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살아야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반에서 제일 힘 센 놈이 나보고 ‘야! 조센징!’하고 꼬나보면 ‘나 조센징인데 어쩌라고?’하며 어깃장을 놓다가 된 통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일렀더니 한복을 입은 아버지가 학교까지 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물론 일본 선생에게 멸시를 당했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대단했습니다.”

고국에서 서당에 다녔던 아버지는 그날부터 조선학교에서 한국어 선생을 하겠다며 나섰다. 일주일 한 번꼴로 일본 소학교에 다니는 조선 학생들에게 모국어 한글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민족들이 뭉쳐야 멸시와 차별을 이길 수 있다면서 조총련에 가입하여 여전히 한글 강사로 일했다며 재일교포 한상일은 아버지를 회상했다.

“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새벽부터 움직였습니다. 뗏목에 실어서 나무장사를 하다가 목돈이 손에 들어오자 작은 파친코 가게를 열었습니다. 조선인들이 돈을 모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파친코라며 일찍 감치 뛰어들었습니다. 그런 덕분에 동네에서 우리 집은 텔레비전도 있고 전화도 제일 먼저 놓았습니다. 참 대단한 아버지 덕분에 제 큰 아들까지 법인으로 만든 파친코 사업을 물려줄 수 있었어요.”

후쿠오카에서 제일 큰 한식당 춘향전에서 식사를 하면서 조만길과 한성일은 삼중스님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털어놓았다. 북한 작품들이 벽을 장식한 춘향전 한식당은 물론 조총련계로 한국 전통으로 주로 재일교포들이 선호했다.

“제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리 제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제 아버지 시대 때부터 전해들은 백두산 호랑이, 김일성을 아주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백발노인인 줄 알았습니다. 해방이 된 후 김일성의 실세를 알고 보니 겨우 38살이라고 하니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김일성은 가짜다. 진짜다.’라는 소문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한성일 재일교포는 자신이 조선대학교를 통해서 배운 역사적인 사건을 하나씩 끄집어내면서 서러운 타향살이까지 곁들였다. 시골 촌구석에서 나와서 오사카에 살고 있는 많은 조선인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 마침 4.19운동에 참가했던 고국 학생들이 밀항해서 조선고등학교에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지내다가 한 일 년쯤 지내고나서 서로 간에 친해졌으나 또 다른 비극은 이어졌다.

“낙원이 있다는 말에 속아서 한국에서 온 학생들은 거의 다 북송선에 올랐어요. 여기서 핍박당하지 않고 자기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선대학교를 졸업했으니 조총련에서 저도 일했습니다. 그저 무슨 사상에 심취해서 지금껏 살아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친구들이랑 한 조직에 있다는 느낌으로 지냈습니다. 요새는 한국 국적으로 바꾸면 더 잘살 수 있다는 자신의 타산성에 맞추어서 조총련을 탈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만길과 한성일은 먼 친척 간으로 서로 간에 국적이 달리했다가 다시 한국인으로 함께 뭉쳤다. 유독 거친 손으로 젓가락을 쥐고 있는 조만길을 쳐다보면서 한상일은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시절이었으니 어디 돈 백 엔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나요? 조선인끼리 계를 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곗돈을 타서 만 엔, 이만엔 하는 조그만 가게 한 칸이라도 얻어서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민족이라도 계돈 타먹고는 야반도주하는 못된 사람들도 끼다보니 계에 들어오는 새 사람은 반드시 보증인을 세워야만 계목을 태웠어요. 일본 거지, 조선 거지는 있어도 중국 거지는 없다는 말은 화교는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이끄는 문화 때문입니다.”

고국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고국이 교포 자신들에게 뭐 하나라도 도와주기를 바라지 않았다면서 두 사람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 양산을 고향을 둔 한상일은 일본 내에 거주하는 재일교포가 펼치고 있는 현주소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옛날 같았더라면 우리끼리는 같이 밥도 못 먹었어요. 오스카는 민단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조선학교를 졸업했으니 서로 국적이 달랐어요. 그래도 제가 조선학교를 나온 덕분에 이리 한국말을 잘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무슨 놈의 사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요사이도 도쿄 거리를 한복입고 활보하는 사람들은 바로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입니다. 그 시절에는 몰래 한국 방문을 다녀오는 조총련 소속 사람이 발각되면 어느 사이 조총련 간부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책을 해임시켜버렸어요. 요사이 어디 그러나요? 한국을 다녀왔다고 해도 아무런 해가 없습니다. 내가 조총련에서 탈당하닌깐 먼저 그 쪽에서 다가와서는 여기서 나가더라도 우리 모른 채 하지 말고 친하게 잘 지내자는 분위기예요.”

삼중스님이 이끈 ‘이총 송환 사절단’으로 부산에 방문한 조만길은 1년에 한두 번씩 부산소년원을 찾았다. 축구공도 선물하고 심지어 소년원생들과 함께 경주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불우한 시절을 잊지 않았다.

“어린 시절 하도 주먹질을 하면서 감방에 들락거리다가 삼중스님은 만나보니 정말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다시 주먹을 쓰다가는 또 감방 간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중스님을 따라 형무소를 들여다보는 제3자의 입장에서 겨우 잃어버리고 있었던 내 자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삼중스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sungae.kim@hanmail.net
 
*필자/김성애. 수필가.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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