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울지말고, 조국위해 울어달라!”

<박삼중 스님 대증언>스님이 울면 되나요? 안 되죠!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2/06/21 [15:30]
2012년 6월 18일은 삼중 스님에게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낸 감개무량한 날이었다. 사지가 떨리는 분노로 눈물을 흘리던 소년은 한순간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한낮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현충비 앞에서 새로운 각오를 약속했다. 삼중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무작정 소망했던 자락이 현실에서 성취하는 기쁨에 참으로 행복했다. 어린 시절에 한 번 스친 현충비석에 적힌 ‘육탄10용사’ 앞에서 했던 약속을 생을 마감할 시기에 드디어 일구어냈다.

지난 6월 18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내 육탄10용사 현충비 앞에서 ‘제63주기 육탄10용사 및 제62주기 다부동전투 구국용사 추모식’을 봉행하는 삼중 스님의 추모사에는 남모른 아픔이 숨어 있었다.
 
어린 꿈을 이룬 삼중 스님
▲ 지난 6월 18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내 육탄10용사 현충비 앞에서 ‘제63주기 육탄10용사 및 제62주기 다부동전투 구국용사 추모식’을 봉행하는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스님이 울면 되나요? 스님은 안 울어야죠. 그런데 눈물이 나는데 어떡합니까? 늙은 노승이지만 주체할 수 없는 통곡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니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죠. 지금으로부터 57년 아니면 56년 전으로 기억이 됩니다. 제가 육탄10용사의 현충비 앞에 섰습니다. 언제? 57년 전에, 전 꿈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실질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울었는지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가졌던 모든 꿈을 내려놓았습니다. 가슴 속으로 언젠가는 내가 꼭 한번 육탄10용사 현충비 앞에서 제향을 모셔 드려야 되겠다는 하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전 행복합니다.”

63주기 육탄10용사 및 62주기 다부동전투 구국용사 추모식에 참석한 봉행 추진 위원장 한민구 예비역 육군대장을 비롯한 참전 용사, 그리고 시민들은 힘찬 박수를 쳤다.

“슬퍼서 울기도 했지만 과거에 있던 그 소년기에 육탄10용사 현충비 앞에서 난 나와의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약속을 지켜냈습니다. 이 추모 제단을 준비하면서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걱정 말고요. 우리나라 국군을 대표할 만한 어른이 나오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제가 한민구 합참의장에게 염치불구하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면전에 계시지만 육군참모총장에 재임하고 계실 때 행사에서 잠깐 뵈었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전화상으로 늙은 중을 기억하면서 한민구 육군대장은 흔쾌히 추모식에 동참해 주겠다는 따뜻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다부동전투에서 대한민국을 마지막까지 지켜낸 6.25 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93세)과 한민구 역대 합참총장을 만나는 순간은 삼중 스님에게는 영광 그 자체였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도록 단단한 초석을 다지게 만든 두 영웅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추모식은 상상을 뛰어넘어서는 신뢰로 인한 진한 감격은 부풀렸다.

“이 육탄10용사 어른들이 이런 대접은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한민구 추진위원장의 추도사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 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윤숙님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시 낭송은 저로 하여금 ‘나는 지금 죽어도 좋다.’ 이 땅에 와서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육탄10용사께서는 지금도 여러분에게 말하고 계십니다. 아니 여러분뿐만 아니라 이 국민에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제발 제발 너희들은 우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가슴에 깊이 새겨서 우리의 교훈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하는 말씀을 제가 대신 육탄10용사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국민들에게는 잊어야 할 역사가 있고 잊어서는 안 될 역사가 있습니다. 이 늙은 중뿐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은 이분들을 오늘만이 아니고 영원히 가슴에서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아는 민족, 역사에 길이 남는 민족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중 스님이 소망하던 ‘육탄10용사 및 다부동전투 구국용사’의 추모 행사에 6.25 전쟁 영웅인 백선엽 대장과 항일 의병장의 후손인 한민구 대장이 함께 하는 현실에는 위대한 영령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오후 2시 추모행사에 앞서서 현충원 정문 옆에 자리한 육탄10용사 묘석 앞에다 제단을 따로이 마련했다. 부산과 대구에서 몰려 온 추모객들은 10시에 올릴 추모제단에 정성 드려 준비한 음식들을 올렸다. 육탄10용사 묘비 앞에는 정갈하게 장식한 과일바구니와 꽃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제단으로 영령들을 기쁘게 했다. 염불에 맞추어 살풀이춤으로 영령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삼중 스님은 실로 오랜만에 아련한 추억에 젖었다. 어린 시절에 ‘육탄10용사’ 영령들 앞에서 ‘복수’라는 상상할 수 없는 시꺼먼 돌덩어리가 가슴에 자리했던 옛날을 회상했다. 삼중 스님은 복수심에 싸인 어린 시절이 존재했기에 오늘과 같은 뜻 깊은 추모식을 올릴 수 있었다며 행복한 미소를 띄었다.

“제가 운명적으로 중을 택한 이유는 딱 한가지였습니다. 방황하던 어린 소년에게 비쳐지는 세상에서는 가장 착한 사람은 스님이라는 생각으로 대구에서 해인사로 걸어서 내려갔습니다. 스님은 신선처럼 고고하여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 사는 줄 알았습니다. 무슨 해괴망측한 복수라는 말을 그리 어린 마음에 담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저를 만들어준 바탕으로 자리했으니 고마울 뿐입니다.”

해인사의 주지스님은 유명한 청담스님이었다. 주지 겸 총무원장을 지내신 청담스님은 그 시절 최고의 수행자로서 유명한 분이었다. 어린 소년의 눈에는 역사가 깊은 웅장한 해인사의 사찰 앞에서 잔뜩 긴장했다. 해인사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하늘아래 갈 곳이 한 군데도 없었던 소년에게는 앞날은 그저 깜깜하기만 했다. 만약 중이 되지 못한다면 그대로 죽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생명을 맞바꾸는 면담이니 만큼 더욱 긴장감으로 온 몸은 바짝 움츠려 들었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청담스님은 옆에서 시중드는 스님들이 보이지 않았다. 청담스님은 90도 각도로 정중한 인사를 올리는 소년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서 왔느냐?”

“대구에서 200리 길을 걸어서 중이 되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 무슨 목적으로 중이 되려하는지 설명해 보아라.”

“..........”

소년은 말을 아꼈다.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 줄이 왔다 갔다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긴장한 채 입을 열 수 없었다.

“학생복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 하는 나이에 중이 되려고 해? 어린 시절부터 꿈이 있었잖아, 그렇지? 왜 갑자기 꿈을 바꾸었는지 이유를 대봐라.”

“.........”

소년의 입은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이번 면접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 입은 더욱 더 다물었다.

“내가 입은 이 누더기 옷이 보이지. 중이 되면 거지처럼 이런 누더기 옷을 평생 입고 다녀야 해! 부처님은 거지 대장이야. 장가도 못가고 술도 못 마시고 먹는 것도 하루 두 끼 밖에 먹지를 못해! 그래도 중이 되고 싶으냐?”

사실상 청담스님의 누더기 장삼에 감싸인 실화는 유명했다. 대략 50년도 넘어 보이는 누덕누덕 기운 장삼에는 더 이상 기울 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조각을 가리키면서 청담스님은 소년에게 겁을 주었다. 거지 대장으로서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삶을 사신 분이 바로 청담스님이었으니 괜한 겁을 주려 한 말은 아니었다.

“저는 영원한 인생을 찾아서 200리 길을 걸어서 해인사로 왔습니다.”

운명이 걸린 한판에서 소년은 ‘영원한 인생’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뭐~ 영원한 인생을 찾으러 중이 된다고……. 아야~ 이놈 됐구나! 참 좋다! 영원한 인생이라…….”
연신 ‘영원한 인생’을 되뇌는 청담스님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꿈 많던 17살 소년은 누더기 장삼을 선보이던 청담스님과의 면접으로 해운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어린 꿈은 그대로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2012년 6월 18일 오후 2시, ‘제63주기 육탄10용사 및 제62주기 다부동전투 구국용사 추모식’을 봉행하는 추모식에는 특별한 추모행사는 성대하게 펼쳐졌다. 새하얀 한복을 차려입은 열 명의 어머니들은 육탄10용사 현충비 앞에서 현화와 다비식으로 영령들을 위로했다. 조용한 발걸음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모윤숙 시)의 시 낭송에 감싸인 참배객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 숲을/이순신같이, 나폴레온같이, 시이저같이,/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코바 크레믈린 탑까지/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나니/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숨 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 지었노니/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울어 달라 일러 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 하려는가?/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조국을 위해선 이 몸 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작은 관도 사양하노라./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모윤숙 시 전문)

시 낭송으로 눈시울이 붉어진 삼중 스님은 6.25 전쟁을 겪는 바람에 못 먹고 못 입고, 등 시러웠던 참담한 영상들이 겹쳐져 떠올랐다. 중이 되려는 밑바닥에는 복수심으로 가득한 처절함 속에서 현실을 헤쳐 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인권변호사로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소년의 꿈은 이룰 수 없었다. 복수, 증오, 애증으로 뭉개진 어린 시절의 아픔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장 가까이했다. 인권변호사가 꿈이라는 말에 ‘맹랑한 놈일세! 그런 허황된 말을 해!’ 고모부가 내지르는 일격은 소년 꿈을 싹둑 짓뭉개버렸다. 복수를 하고자 이를 갈던 밑바닥을 삼중 스님은 재해석하며 이해할 수 없는 흔적들을 헤집어 보았다. 가장 중심에는 여자로서 가장 혹독한 생을 살다가 9년 전에 떠나신 삼중 스님의 어머니가 자리했다. 임종시간을 맞는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너 때문에 내가 산다며 늘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어머니는 정말로 힘든 인생을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22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가 어머니가 19살에 결혼했으니 딱 1년만인 달랑 혹덩이를 매단 세상을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차라리 어머니가 자식을 떼어놓는 비정함을 있었더라면 행복한 인생을 누렸을 것입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내 자신까지도 불행했습니다. 17살 사춘기 시절, 세상살이는 어머니의 잣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중이라는 길로 들어서려 했는지 일찍 감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달랐습니다. 안일하고 평범한 잣대는 어딘지 부족하여 항상 어머니와는 다툼이 많았습니다. 하루속히 고등고시를 합격해서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뒤 담장을 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자연스레 죄수복을 입은 재소자들을 보며 자란 인연에서도 내 인생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밑에 너 같은 효자가 어디 있느냐’는 말을 25년간이나 매달려 살던 어머니가 막상 임종을 한다는 소식에는 삼중 스님은 발길을 멈추어 섰다. 어머니가 미워서 발이 띄지를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서 멈추었다. 실로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삼중 스님은 자신도 가까이 다가선 길목에서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기쁨은 형언할 길이 없었다.
 
다음을 이날 행사에서 있었던 한민구 예비역 육군대장의 추모사 전문이다.
 
63주기 육탄10용사 및 62주기 다부동전투 구국용사 추모식, 봉행 위원회, 추진 위원장 한민구 예비역 육군대장 추모식 추모사(전문)
 
“2012년 6월 18일 오후 2시, 호국영령들이 영변하고 계신 국립서울현충원 내 육탄10용사 현충비 앞에서 ‘제63주기 육탄10용사 및 제62주기 다부동전투 구국용사 추모식’을 봉행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장렬히 산화하신 구국용사들의 숭고한 위국헌신 정신을 추앙하고 그 넋을 위로하며 미래를 짊어질 후대들에게 호국 보훈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자 함에 그 뜻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찾아 온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북위 38도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대구폭동사건, 여수반란사건, 제주4.3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였고. 북한군 38도선 경계선에서도 도발도 빈번했습니다. 북한군은 1949년 5월 3일 기습적인 남침으로 개성 송악산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5월 4일 송악산에 배치된 제1사단 11연대 서부덕 소위를 공격대장으로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박창근 등 용사들이 폭탄을 안고 침투하여 적의 참호를 박살내고 빼앗겼던 고지를 탈환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서부덕 소위를 포함한 10명의 용사들을 '육탄 10용사'라 명명하고 그 공을 기렸는데, 육탄10명들이 불사른 용기와 투혼은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는 다부동전투까지 이어졌습니다.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북괴군에게 함락되고 한 달 만에 남한국토의 92%가 점령되었습니다. 최후의 보류인 대구와 부산을 방어하기 위해 다부동 지역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요충지였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해낸 처절한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제1 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한 7,600여 명의 병력만으로 북한군 3개 사단 약 21,500명과 T-34전차 34대 및 각종 화기 670문이 뿜어내는 필사적인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므로서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추모식은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님을 모시고 봉행코자 한 것인데 장군님께서 다른 사정이 있어 참석지 못하였습니만 먼저 가신 전우들에 대한 그 분의 각별한 추억과 추모가 있었음을 여러분께 고해 드립니다.

이 행사는 육탄10용사와 다부동전투 구국용사들을 기리는 위패를 모시고 박삼중 큰스님께서 헌다 등의 절차로 진행합니다만 종교적 차원을 넘어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진혼의 추모식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오늘 이 행사를 통해 6.25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반세기만에 세계에 우뚝 선 대한민국이 이분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것임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직도 3대 세습의 미망에 사로잡힌 북한이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도발과 위협을 지속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재인식하고 더 크고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국가 안보의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이 행사를 배려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준비하셔서 호국 봉훈의 의미를 새롭게 지켜주신 박삼중 큰 스님과 참전용사 여러분, 그리고 시민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삼가 다시 한 번 호국 영령들의 영전에 머리 조아려 명복을 빕니다.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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