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감춰진 한-일 고대사비밀 밝히다

“이나리야마 쇠칼”에 새겨진 115자 한자 글이 지닌 뜻?

김영덕 교수 | 기사입력 2011/04/07 [14:40]
1968년에 동경 북쪽 56km 되는 교다 시에 있는 한 무덤에서 파낸 쇠칼에는 놀랍게도 115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5세기에 만든 이 칼은 역사 자료가 태부족한 당시 한·일 역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글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쇠칼은 일본 국보가 되면서 현재는 동경 박물관에 소장돼있다. 일본 통설로는 이 칼 글의 내용은 왜(倭) 나라에 아득한 옛적부터 일본 야마도 지방에 있던 왕권이 책봉한 지방 호족의 족보로 보면서 황국 역사관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자료라고 알고 있던 것이다.

▲ 일본서기  
그러나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짤막한 이 글에는 우리가 그 동안 몰랐던 4,5세기 당시의 백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놀라울 따름이다.
 
우선 이들 조상 이름을 살피면서, 백제가 새로 차지한 나라 땅을 좇아가면 이 나라가 커간 역사가 떠오른다. 고 확고가 이 칼을 만든 연대는 서기 471년이 된다. 한 세대를 스물다섯 해로 잡고 이 집안의 조상이 살아간 연대를 어림 잡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확고, 서기 471년
가사비리, 서기 455년,
바라고비, 서기420년,
다사기 확고, 서기 395년,
다가 비시 확고, 서기 370년,
고리가리 확고, 서기 345년
등이다.

여기서 우선 눈여길 점은 후왕 내지 영주를 뜻하는 칭호인 확고 앞에는 이 확고가 다스리던 땅이름이 적힌 점이다.

이 칭호 관례는 동성왕대까지도 이어간 백제 제도이며, 중국에서는 이미 주나라때부터 있어온 제도란다.

위 연대에서 백제는 이미 서기 345년 이전에 경상 북부까지 차지하고 들어갔음을 알 수가 있다. “고리가리”는 현재 함창에 있던 옛 가야 나라이던 고녕가야로 이두 표기된 땅 이름인 것이다.

서기 370년에는 “다가 비시”확고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백제는 현재의 영산(옛 이름 다가)와 창녕(옛 이름 비시)를 차지하고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서기 369년에는 백제가 일곱 가야 나라 곧 비시, 다가, 탁순, 가라, 다라, 남가라, 아라 등을 차지했다고 짐작되는 기사를 적고 있으며, 위 칼 글은 이 사실을 확실히 금석 자료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다라”와 “남가라”등 현재 합천과 김해 지방에서 발굴되는 백제 고소가리도 이 사실을 고고학에서 밝혀주고 있다.

다음에 ‘다사기’확고를 보면 당시에 마한 땅 남쪽 끝에 있는 현재 하동(옛 다사기) 까지도 다스리고 있어서 마한을 서기 369년까지 완전히 차지했음을 알 수가 있다.

서기 396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치는 난리 통에 다사기 확고 집안이 왜 나라로 망명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다음 세대인 ‘바라고비’와 ‘가사비리’에 이르러서는 확고라는 칭호가 없다는 것이다. ‘바라고비’라는 지명은 일본 동경 만에 흘러드는 현재의 ‘아라 가와(荒川)’를 뜻하는 것이다. 강화라는 고장의 옛 이름이 가비고시 인데, 가비는 강을 뜻하며, 가비나 고비는 한 가지라고 보며 ‘바라’에서 ㅂ이 떨어지면 ‘아라’가 되는 것이다.

망명한 이 집안과 빈사상태의 백제는 당시 연락이 끊긴 상태 였었음을 알 수 있으며, 아 상태는 다음 세대인 ‘가사비리’까지 이른다.

‘아라가와’ 강의 상류 지방에는 ‘가사하라’라는 동네가 현재도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 바로 이 쇠칼이 나온 무덤이 있는 “교다”라는 고장이다. 교다는 한자로 행전 行田이라고 적는데 본래는 ‘고다’라고 발음 됐을 것이며, ‘다’는 땅을 뜻하므로 ‘고’는 바로 고확고가 다스리던 땅 이였던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렇듯이 이 칼 글에 새긴 이름만 봐도 이 집안은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 장수 집안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확가 다 기로 대왕
 
이 칼글에 나오는 대왕 이름은 ‘기로’로 돼있으나 이두 표기에는 같은 말이라도 비슷한 소리의 다른 한자로 적히는 보기가 허다하며, 이는 개로(蓋鹵) 대왕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로 개로대왕은 서기 455년에서 서기 475년까지 백제를 다스리던 임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역사 사실을 알게 된다. 백제 대왕을 섬기는 장수가 동경 북쪽 관동 평야에 있는 ‘고다’라는 땅을 서기 471년 당시 다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백제가 확고를 두고 다스리는 이런 땅을 ‘다무로’라고 일컬었던 것인데, 한자로는 담로 (檐魯, 淡路) 등 여러 가지로 적고 있다.

그런데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의 다마나라는 동네에 있는 에다후나야마 무덤에서도 글을 새긴 칼이 출토됐는데, 이 칼에도 개로대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밝힌 바로는 이 칼을 만든 이는 통설인 무리(无利)가 아니 기리(旡利)이며 그 한자 이름은 “여기”(余紀)라고 우리는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개로대왕은 서기458년에 송나라에 보낸 상표문에서 ‘여기’를 우현왕으로 ‘여곤’을 좌현왕으로 임명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곳 다마나 시 일대도 백제 후왕 우현왕이 다스리던 다무로 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 무덤에서 나오는 고소가리(왕관)나 기타 백제 유물에서도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현왕 여곤이 다스리던 땅은 어데 일까? 그곳은 오사까 남쪽 엣 가와찌 일대이며 이곳을 개로대왕의 아우 여곤은 왜왕 고오로서 이 일대에 있던 백제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필자/서강대, 명예교수. 이 글은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발간하는 영문 학술지 “ the review od korean studies". 12권, 4호 (2009)에 실린 논문을 간추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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