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여인, 떠나간 명세빈

[스타비평] 다시 연기자로 평가받기까지

변희재 | 기사입력 2004/12/15 [11:00]

청순가련형의 순수한 여인, 이것은 섹스어필한 여성상과 더불어 모든 남성들의 이상형일 것이다. 특히나 늘 아름답고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윤석호 감독이라면 시대를 초월하여 이런 여인상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한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심은하라는 배우가 그런 역을 독점해왔었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고개숙인 남성에게 꽃을 내밀어주는 우리들의 연인 다슬이를 비롯해서 그런 캐릭터들은 신세대 여성이 아무리 부각된다 할지라도 남성들에게 있어 함부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심은하 역시 그 청순가련형의 한 가지 캐릭터에 만족하기에는 너무 그릇이 컸다. 그녀는 영화 <텔미썸씽>, <미술관 옆 동물원>을 통해 새로운 여성 캐릭터 영역으로 저 멀리 떠나갔다. 90년대 후반부터 바로 이러한 심은하의 자리를 채워줄 여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윤석호 감독은 신인인 명세빈을 이러한 시기에 발굴해내었다.

 명세빈은 1976년생이면서 1998년도에 데뷔를 했으니 요즘 연예계 판도에 비춰봤을 때 그리 빨리 데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가 데뷔하기 전에 무슨 대단한 준비를 해왔었던 것도 아니다.

 “나는 다른 연예인들처럼 아역 탤런트 출신이나 학창시절 연예인의 꿈을 품고 연기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 연극무대에 서봤다던가, 모델 활동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다. 나는 그저 평범한 의상학과 여대생이었다”

 명세빈은 당시 동덕여대 의상학과 재학중이었다. 명세빈은 구태여 연예계로 진출하기 위해서 사전준비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평범한 여대생들처럼 가수나 탤런트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명세빈은 한국 최고의 발라드 가수 신승훈의 사인을 받다가 그의 뮤직비디오 <내방식대로의 사랑>에 모델로 픽업되었다.

"우리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신승훈씨가 있던 2층으로 올라가는데 반대쪽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매니저라고 했던 사람이 막 내려오고 있었다. ‘아 잠깐만요. 마침 안 가시고 계셨군요.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는 무척 절박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신승훈씨 일행과 근처의 까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부킹’이려니 했는데 신승훈씨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였다. ‘뮤직비디오에 출연해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가 왜요?’가 아니라, ‘할~께요’하고 선뜻 응락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명세빈은 한국의 동요 가사처럼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마음 하나로 연예계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데뷔한 이후부터는 그녀는 놀라울 정도의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여배우들이라면 다들 꺼려하는 삭발모습을 공개하는 cf에 출연한 것이다.

 어떻게 갑자기 머리까지 깎고 cf에 출연할 용기를 내었는지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학력의 여대생이 머리까지 깎으면서 연예활동을 지속할 정도로 한국의 연예산업이 당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명세빈은 <남자의 향기>라는 영화에까지 출연하게 되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명세빈을 스타 대열로 들어서게 한 작품은 역시 뭐니뭐니 해도 윤석호 감독의 1998년 작 <순수>였다. 이 드라마는 명세빈을 위해서 만들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명세빈의 순수한 캐릭터를 부각시켰다. 당시까지 명세빈은 kbs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을 맡을 정도의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니 언론 역시 명세빈의 캐스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대한매일의 보도내용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사실은 명세빈의 파격적인 발탁이다. 그녀는 초코하임 광고의 삭발연기와 최근 장현수 감독의 영화 <남자의 향기>에서 김승우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이른 바 ‘신데렐라’ 배우다. 연기력이 검증 안 된 상태에서 윤석호 감독과 kbs 미니시리즈 제작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는 명세빈을 춘천 촬영현장에서 만났다.

‘주연으로 뽑혀 너무 좋아요. 하지만 연기력을 기초부터 쌓아온 게 아니어서 책임감 못잖게 부담도 느껴요.’ 해맑은 첫인상 너머엔 신인답지 않은 차분함이 엿보인다. 그녀가 맡은 해진 역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석호 감독은 3회분의 촬영을 끝내고 “명세빈의 이미지가 해진과 딱 맞아 떨어지는 데다 예상대로 화면상의 흡인력이 대단하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명세빈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연기했고 순수한 여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 당시 명세빈의 인기는 신드롬으로 표현될 정도로 대단했었다. 스포츠서울의 보도이다.

 “얼마 전 종영된 kbs 드라마 <순수>의 여주인공 명세빈이 청초한 이미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나타난 ‘순수 신드롬’이 올 겨울 신세대 여성들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싱그럽고 귀여운 이미지, 티없이 맑은 피부, 앙증맞은 액세서리 등이 ‘순수 신드롬’의 상징물들이다.”

 명세빈은 <순수> 이후 역시 kbs의 <종이학>에 류시원과 함께 다시 출연한다. 역할 또한 <순수>에서의 청순한 여인 그대로였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종이학>은 <순수>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드라마였다. 연속 두 편의 드라마를 성공시키긴 했으나 너무 하나의 이미지에만 갇혀있다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명세빈은 다음 작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바로 sbs의 sf드라마 <고스트>에서 1인 3역을 맡은 것이다. <고스트>의 민병천 감독은 명세빈에 대해서 높은 기대를 표하기도 했었다.

 “<고스트>를 연출하고 있는 민병천 감독은 ‘세빈의 전작을 보면서 또다른 면이 있는 연기자라고 생각해서 출연을 제의했다’고 한다. 순수하고 내성적인 연기를 주로 했지만 민감독에겐 숨겨진 재기발랄함이 보였다. 그리고 만족하고 있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다. 처음엔 다소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하나둘 숨겨놓았던 것을 내보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특히 귀여운 깍쟁이의 모습이 술술 나올 때는 즐겁다’고 한다. 또한 감정이 풍부한 명세빈은 민 감독 특유의 연출스타일을 잘 소화해내는 연기자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불안정한 대사 전달력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방송사에 들어온 시청자 항의 내용이다.

 “tv에 나오는 정치인들이 하도 우물거려서 답답해 죽겠는데 즐겁자고 보는 드라마에서조차 배우가 우물거리면 어디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명세빈은 <고스트>에서의 변신 실패로 큰 상처를 받았다. 그는 향후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추구할 것을 암시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신이 낫죠. 연기에 갓 입문한 신인이 연달아 주연을 맡았으니 얼마나 큰 행운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요즘에야 깨닫고 있어요. 금방 눈에 띄는 연기자 보다 보고 난 뒤 긴 여운처럼 팬들의 가숨속에 남는 것이 진정한 연기자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됐어요.”

 그러나 명세빈의 좌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mbc의 일일드라마 <날마다 행복해>에 출연 중 연기부족으로 중도 하차하고 만다. 특히 드라마계의 거장인 장수봉 감독과 선배 연기자들이 “앞으로 연습 많이 해야겠다”는 등의 말을 하자 명세빈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사퇴를 표명했다. <순수>에서의 윤석호 감독이라면 명세빈을 이렇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감독이 원한 명세빈은 대사 전달력이 아니라 순수함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이 당시는 명세빈에게는 사실 연기생명이 걸려있는 위기였다. 윤석호표 드라마 속의 ‘순수한 여인’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지만 모든 실험이 다 실패로 돌아갔다. 명세빈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다시 ‘순수한 여인’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kbs 드라마 <나는 그녀가 좋다>에서 다시 순수한 여인으로 돌아온다. 명세빈의 출연의 변이다.

 “흔하다구요? 하지만 여자 배우라면 영원히 좋아하고 맡고 싶어하는 역할일테니까 지켜보세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녀가 좋다> 역시 기대에 못 미치고 말았다. 이것 저것 다 실패하고 다시 예전의 것으로 돌아온 명세빈을 팬들은 주목하지 않았다. 이미 연예계 생활을 하며 다양한 역할을 맡아온 명세빈이 다시 티없이 순수함으로 돌아오기에는 시기적으로 늦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좋다>의 실패 이후 한국에서 명세빈의 연기생활을 끝이라는 평들이 많았다. 그러나 명세빈은 2000년 mbc로 건너가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섹시한 악녀 역으로 변신한다. 특히 그녀는 첫회에서부터 파격적인 비키니 수영복씬을 선보여 전국의 연예기자들을 불러모았다. 순수한 이미지의 명세빈이 벗어던지자 한국의 연예신문들은 열광했다. 잊혀졌던 명세빈이 옷을 벗으며 주목을 받자 다시 광고가 쇄도하며 연예계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 명세빈은 인기 예능프로그램의 mc를 거쳐 2004년 역시 mbc의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통해 30대 노처녀 여기자역을 훌륭히 소화해내었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는 단지 벗었다는 것 하나로 인기를 회복했다면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는 30대 캐리어우먼의 심리를 섬세히 표현했다며 연기력 차원에서 극찬을 받았다. 명세빈이 연기력으로 평가받기는 1998년 <순수>에서 데뷔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명세빈이 <순수>에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그녀의 실제 성격은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아이큐 150의 영리한 머리를 갖고 있고, 의외로 강한 승부근성의 소유자이다. 대충 연예계에서 인기 얻고 돈 좀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힘겨운 이미지 변신도 마다하지 않고 최고가 되기 위해 승부를 건다. 특히 이는 그녀의 연애관에서도 나타난다. 명세빈은 한때 한국 언론재벌가의 한 남자와 연애하여 결혼설이 나돌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혼도 포기하고 다시 연기로 매진한 것이다. 

 윤석호 감독은 <순수>때의 명세빈에 100% 만족했다. 명세빈 만큼 순수한 해진의 역의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명세빈은 이미 저 멀리 떠나가 있다. 한번 만족한 배우와는 다시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윤석호 감독, 과연 지금의 명세빈과 언젠가 다시 한번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마도 명세빈이 다시 돌아오던지 윤감독이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하지 않는 한 지금으로서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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