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유지 계승해 나가는게 남은자들의 임무

김환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09/08/25 [20:39]
전국민과 세계인의 추모속에 영면에 든 한국현대사의 거목 김대중


초인적 의지로 병마에 맞서 싸우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기도와 눈물로 쾌유를 빌던 수많은 국민과 세계인들을 뒤로한 채 2009년 8월18일 오후 1시43분 향년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국민의 정부 후계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진 서거하였을 때 비통함을 금치 못했던 김 전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이 떠난 지 87일 만에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이다.

이제 김 전 대통령은 서거 후 열화 같은 국민적 요구에 따라 전직 대통령 최초로 국장으로 엄수되어 8월23일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됨으로써 우리 곁을 떠나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국장기간중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 장쩌민 전 중국 주석,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고이즈미 전 일본 수상 네스타 노벨위원회 사무총장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과 42개국이 조전을 보내고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 조의조문단을 비롯 미국, 중국, 일본 등 11개국이 영결식에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세계 언론들도 서거 및 국장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100만여 명에 이르는 국민들 또한 전국 184개 분향소를 찾아 고인의 업적을 추모하고 영결식장과 서울광장에 각각 2만여 명이 그리고 영구차가 지나는 도로변에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운집하여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배웅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폐렴증세로 세브란스에 입원하였을 때만 해도 국민들은 인동초 같은 강인한 의지로 수많은 역경과 고난, 사선을 극복한 불퇴전의 초인적인 삶을 살아온 김 전 대통령이기에 비록 고령이지만 반드시 건강을 회복하여 이 땅의 민주주의, 서민대중의 민생문제, 남북평화를 위해 소금과 등불의 역할을 더 해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삶의 끈을 놓아 버리자 국민들은 충격과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앞서 언급한 바처럼 국장기간동안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 각계인사, 일반국민들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유명 인사들과 언론이 앞다투어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기원하였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이처럼 국내는 물론 세계인들을 추모 분위기에 휩싸이게 만든 것은 김 전 대통령이 살아생전 온갖 역경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화해와 세계평화에 대한 신념을 행동하는 양심을 통해 일관되게 실천하여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거듭 되돌아보건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마디로 한국 현대사에 영구불멸의 큰 족적을 남긴 정치거목이요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구출해낸 말 그대로 구국적 영도자라 할 수 있다. 또한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민족의 지도자이며 노벨 평화상 수상이 말해주듯 민주인권 평화에 일생을 바친 세계적인 민주인권평화 지도자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은 서거라는 인생최후의 순간마저도 북측의 최고위 특사조의조문단을 불러들여 파국상태에 빠져있던 남북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도록 마지막 선물을 남겨 주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이러한 업적과 거대한 발자취는 도전과 탄압, 좌절과 재도전, 백절불굴의 신념과 용기, 승리와 패배라는 치열하고 파란만장했던 삶의 빛나는 결정체다.
 
지도자 자질 보인 총명했던 유년시절
 
이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전과 응전, 영광과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역정은 한편의 인간신화요 드라마라 아니 할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인 음력 1923년 12월 (양력 1924년1월6일 )전남 도서벽지인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섬마을에서 소작농과 뱃사람을 대상으로 객주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부친 김문식과 모친 장수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의도는 목포에서 뱃길로 세 시간 거리인 150리 떨어진 섬으로 어업 외에도 농사를 많이 지어 식민지 시절 일제의 수탈이 심하여 농민들의 소작쟁의 운동이 벌어졌던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야당적 비판의식과 정치에 대한 집념은 어린 시절 일본인들의 수탈에 항거하여 섬 주민들이 일으킨 소작쟁의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생긴 항일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서거 4개월 전인 2009년 4월 마지막으로 고향 하의도를 14년만에 방문,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김 전 대통령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아호를 고향마을 이름을 따 '후광(後廣)'으로 지을만큼 고향에 대한 애착과 애정이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김 전 대통령은 매우 총명하였다고 한다. 학교가 생기기전에는 마을에 있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34년 4년제 하의 공립보통학교가 생기자 동생과 입학, 부급장, 부조장 등을 맡으며 뛰어난 리더십과 함께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아들의 재능이 남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부모가 4학년이 되던 1937년, 재산을 모두 팔아 목포로 옮겨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목포 제일보통학교(현 북교 초등학교)로 전학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졸업후 당시 전국 10대 명문 안에 들었던 5년제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중반기까지는 1,2등을 다투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재학 중 김 전 대통령은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았으며 웅변, 연설에도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면서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데다 반일작문이 문제가 돼 계속 맡아오던 반장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19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하면서 당시 명문대였던 만주 건국대에 응시하였으나 서류전형에서 낙방하자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재수를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포 상선회사에 취직하였다. 목포상고 4학년 때 호적상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3일로 고친 것도 징용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청년 실업가로 급성장한 해방정국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차용애와 결혼한데 이어 청년 실업가로 급성장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당시 스무살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근무하던 일본인 소유의 상선회사가 귀속재산이 되자 목포상선회사 경영 관리에 이어 재산관리인을 거쳐 11월 대표로 선정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목포상선 관리인을 맡으면서 해운사업가로 일취월장하게 된 김 전 대통령은 여세를 몰아 전남선박 목포조합장, 대양조선 사장 등을 거쳐 1948년부터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 겸 주필을 맡아 2년 동안 신문사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만 서른이 되기전인 1951년3월 흥국해운의 정식대표가 됨으로써 목포지역의 성공한 청년사업가로 입지를 굳혔다.

김 전 대통령은 해방 후 몽양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얼마가지 않아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은데 실망하여 탈퇴하였다. 이때 건준 참여 경력은 정치인생 내내 정적과 보수세력들로부터 빨갱이 등 색깔론 공격에 악용되는 빌미로 작용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하였다. 김 전 대통령이 늘 말해왔던 네 번째 죽을고비중 첫 번째였다. 서울 출장 중에 6.25를 맞은 김 전 대통령은 20일동안 걸어서 목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목포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자본가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의해 반동분자로 몰려 우익인사들과 함께 목포감옥에 수감되었다. 2개월간의 수감 기간 중 총살당할 뻔한 위기가 닥치자 감옥 문을 깨고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그동안 일으켜 놓았던 해운업은 전쟁으로 망하고 말았다. 6.25전쟁으로 사업이 망하면서 정치가 문제라는 의식을 갖게 된 김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국민이 편안하도록 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김대중
 
이러한 상황 하에서 1954년 임시정부가 위치하고 있었던 부산에서 발생한 '부산정치 파동'은 사업가였던 김 전 대통령이 정치에 본격 투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권을 연장하려는 목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산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정치적 대혼란을 야기하였다.

부산 정치파동 사건을 계기로 김 전 대통령은 전쟁직후인 1954년 목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처음 금배지에 도전하였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낙선 후 목포에서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올라온 김 전 대통령은 노동문제연구소를 차려 사상계 등에 노동관련 글을 쓰는 등 노동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즈음 민주당 신파였던 장면박사를 만나 1957년 중림동 성당에서 그를 대부로 토머스 모어라는 영세명으로 가톨릭 영세를 받는 등 장박사의 인연을 통해 민주당 대변인을 맡기에 이르렀다.

그 후 강원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민주당 후보로 59~60년 제4,5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잦은 선거 패배로 가산을 탕진하는 등 불운이 계속되는 와중에 첫 부인과 여동생을 잃기도 하였다. 4.19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1961년 5월 인제 보선에서 민주당 바람을 업고 처음 당선되는 기쁨을 맛보았으나 당선 사흘 후에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금배지를 달아보지도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혁명 사건에 연루되어 한 달 반 동안 수감되기까지 하였다.

5.16군사 정권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하던 1962년 평생 동지이자 반려자인 이희호 여사를 정일형 박사의 소개로 만나 재혼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마침내 1963년 7월 치러진 제6대 총선에서 전남 목포에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걷게 되었다. 타고난 웅변실력과 달변, 뛰어난 지략으로 첫출발부터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김 전 대통령은 1964년 김준연의원의 구속 동의안 처리를 무산시키기 위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무려 5시간19분 동안 의사 진행 지연작전(필리버스터)연설로 단번에 정치권의 혜성같은 존재로 부각되었다.

당시 의사진행 지연 발언은 세계 최장이라는 기록을 인정받아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바쁜 의정 생활 중에도 시간만 있으면 국회 도서관을 찾아 외교, 국방, 예산, 건설, 금융 등 다방면에 걸쳐 관련서적을 섭렵, 이를 바탕으로 상임위 등 의정활동은 물론 당대변인으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급성장하였다.
 
시련과 고난, 도전과 응전의 정치인생
 
박정희 군사정권은 뛰어난 의정활동으로 국정수행에 부담을 주는 눈엣가시 같은 김 전 대통령을 낙선시키기 위해 1967년 치러진 7대 총선에 공화당 중진이었던 김병삼을 후보로 내세워 목포에서 국무회의까지 개최하면서까지 정권차원의 낙선전략을 집중 펼쳤으나 김 전 대통령은 김병삼 후보를 누르고 당당히 재선에 성공하면서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당내 재정통, 대변인, 정책위의장으로 중진 정치인의 반열에 오른 이때부터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같이 할 수 없다고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했던 김 전 대통령의 평생 동지이자 정치적 숙적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본격적인 경쟁관계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첫 대결은 원내총무 자리를 놓고 벌인 경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로 지명되었으나 의원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어 치러진 당내 경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면서 원내총무 자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 '40대 기수론'을 구호로 내걸고 치러진 제7대 신민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서 세가 약했던 신파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결선 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이철승과의 연합을 통한 불가사의한 대역전극으로 구파출신으로 승리가 유력했던 김영삼 후보를 물리치고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듬해인 1971년 3선 개헌을 통해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그 유명한 백만 시민이 모인 장충단 공원유세에서 그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미, 일, 중, 소 4대국 한반도 안보보장론, 예비군 폐지, 남북교류, 유신독재를 예고한 총통시대 주장을 사자후 같은 열변으로 토해내며 건곤일척의 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이효상 국회의장 등의 지역감정 자극과 정권 프리미엄 등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박정희후보에게 94만표(46%득표) 차이로 분패하고 말았다.

관권선거에 힘입어 투표에서 지고도 부정개표를 통해 가까스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3선에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선을 통해 나타난 김대중 후보의 위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정권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 김 전 대통령의 정치생명을 끊는
것은 물론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공작정치가 모습을 드러낸 게 대선 한달 후인 1971년 5월25일 치러진 제8대 총선 때 였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대선 패배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총선 지원유세를 다녔다. 그러던 중 승용차편으로 목포 지원유세차 전남 무안을 지날 무렵 갑자기 화물차가 들이받는 두번째 죽을 고비였던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고관절 변형증이라는 중상을 입고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제8대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교통사고로 다친 고관절 치료를 위해 1972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투옥, 가택연금, 망명, 사형선고로 점철된 반독재 민주 투쟁
 
일본에 머물고 있던 1972년10월1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인 유신헌법 강행처리를 통해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해산과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자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은 유신 반대성명을 발표한 후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는 망명생활을 하며 해외에서 유신 반대 투쟁에 나섰다.

이듬해인 1973년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결성한 후 일본내 반박정희 세력을 모아 한민통 도쿄지부를 만들어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이후락)가 도쿄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팔레스 호텔에 머무르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했다.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한 중앙정보부는 동해상에서 바다에 수장시키려 하였으나 당시 하비브 주한대사를 비롯한 미국의 개입으로 포기하고 납치 5일만인 8월13일 서울로 끌고 와 동교동 자택에 가택연금 시켰다.

세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 김 전 대통령은 중정과 경찰을 동원한 박정희 정권의 철저한 가택연금 속에서도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였다. 1974년12월 재야단체인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여하여 재야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민주 구국선언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78년 12월까지 2년9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석방 후에도 가택연금은 계속되었다. 가택연금 중이던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정부장에 의해 정적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조성된 '서울의 봄'을 맞아 가택연금 해제와 함께 사면 복권되어 정치 재개에 나섰으나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12.12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포고령10호를 발표함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을 포함한 재야인사 20여명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하였다.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연행된 사실에 격앙한 광주시민들이 다음날인 5.18일 김대중 석방,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광주 민주항쟁에 나서자 신군부는 즉각 공수여단과 20사단등을 진압군으로 투입, 광주 무력 살육 진압에 나서는 한편 연행됐던 김 전 대통령에 대해 '광주 민주항쟁'을 배후조종했다는 내란음모 죄를 덧씌워 구속 수감하였고 이듬해인 1981년 1월 권력의 시녀였던 대법원으로 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 법정 최후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를 비롯 레이건 행정부,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에 나선 덕분에 무기로 감형 되었다. 다시 20년형으로 감형과 함께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구속된지 2년7개월 만인 1982년 12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 망명 생활 중에도 83년 6월 뉴욕타임스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 단식 지지 기고문을 실었는가 하면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차려 한국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다 망명 2년여 만인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하였으나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연행돼 가택연금 조치되었다.

귀국 감행으로 신민당이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함으로써 총선 후인 3월에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 공동의장에 취임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귀국 이후 활동은 1987년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촉발시켜 6.10민주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6.10항쟁으로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5.18관련자 포함 2335명의 국사범에 대해 사면복권 조치를 취하자 김 전 대통령은 16년 만에 광주를 찾아 망월동 묘지를 참배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돌입하였다.
 
연이은 대권도전 실패, 정계은퇴 후 3전4기 끝 정권교체 신화창조
 
6.10항쟁으로 이 땅의 민주화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간의 정치적 경쟁도 본격화되었다. 정치인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대권에 있는 만큼 본인들 뿐만 아니라 추종세력 사이에서도 모두 어렵게 쟁취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특히 민주화 투쟁의 주역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양진영은 대권은 따논당상이라는 판단이 지배하면서 양보 없는 반목을 계속한 끝에 후보 단일화가 결렬되기에 이르렀다.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곧바로 평민당을 창당,1987년 제 13대 대선에 도전하였으나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3위로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후보 단일화 실패는 민주세력의 집권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국민을 실망시키고 비판을 부르는 등 정치인생에 흠을 남겼지만 대선 4개월 후에 치러진 1988년 4.26총선에서 황색돌풍을 일으키면서 평민당이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발판을 다시 구축하였다.

제1야당 총재로서 노태우 정권 중반기까지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이 정치적 야합의 산물인 3당 통합에 의한 거대여당 민자당을 출범시키자 한순간에 소수야당 총재로 전락하였다. 이어 정치적 승부수로 단식투쟁을 벌여 이끌어낸 지방자치 선거에서 마저 참패하여 정계퇴진 압력에 처하는 등 위기를 겪었다.

그러다 1991년 9월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동참하지 않고 남은 잔류세력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합당한 후 92년 3.24총선에서 97석을 차지함으로써 세번째 대권도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 후 92년 14대 대선에 출마하였지만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영원한 맞수인 김영삼 후보에게 200여만 표 차이로 또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대선 패배 다음날 "또 한번 국민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하였다. 이제 40여년의 파란많았던 정치생활에 종말을 고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곧장 영국 연수 길에 올랐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6개월 머문후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여 통일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1995년 지방자치 선거 당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나선 것이 조순 서울시장 당선에 기여하면서 국민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정계복귀의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계파의원 54명과 함께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고 이듬해 1996년 4.11총선에서 79석을 획득하였다. 총선에서 부진한 성과를 올렸음에도 대안이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듬해 5월 형식적인 당내 경선을 거쳐 대통령후보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1997년 제15대 대선에 출마한 김 전 대통령은 정권 교체를 통해 이 땅의 민주화와 남북평화를 이루어 내겠다는 일념으로 지역주의 한계를 극복키 위해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포철 신화의 주인공 박태준 회장을 끌어들여 djp연합을 이루어내고 외환위기로 국가 경제가 파탄나면서 일기 시작한 국민적 준비된 대통령 열망, 독자 출마한 이인제 후보의 영남표 대거 잠식 등 선전에 힘입어 마침내 반세기 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신화를 창조하였다.
 
외환위기 극복, 정보기술 강국 건설, 남북관계 개선 등 구국적 지도력으로 성공한 대통령
김 전 대통령의 대권쟁취는 정부 수립 후 50년 동안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던 반민주적 권위주의 체제를 종식시킨 위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이자 지역감정과 지역차별의 피해자로써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던 호남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 국민화합을 도모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를 마련하는 역사의 전환점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드디어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이라는 국정지표를 내걸고 1998년 2월25일 취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전쟁이후 최대 국난이었다는 외환위기를 전임 김영삼 정부로 물려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부도 직전의 나라를 살려내기 위한 환란극복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념이 다른 자민련과의 동거정부, 소수정권의 한계, 정권을 잃은 보수야당과 극우세력들의 발목잡기가 국정수행에 큰 걸림돌이 되었지만 준비된 대통령다운 뛰어난 지도력과 세계적 민주,인권 지도자의 권위, 인맥에서 비롯된 탁월한 외교력으로 외국자본을 유치하고 금모으기 운동을 통한 국민결속 및 통합, 외환위기를 부른 한국경제의 병폐를 도려내는 구조조정을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등 4대 분야에 걸쳐 과감하게 밀어부치는 일대 개혁으로 취임 초 1년반만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예상보다 빨리 imf로 부터 차입한 195억달러의 구제금융을 3년만에 전액 상환하였다.

외환위기 극복여세를 몰아 정보, 기술강국(it)을 목표로 초고속 통신망을 설치하고 시골,군대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 정보화 교육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오늘날 세계최고 수준의 it강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벤처기업 육성과 수출주도 경제운영으로 재임동안 경상수지흑자 역대최고인 906억 달러, 소비자물가 상승률 3.5% 안정적 유지, 순 채권국전환, 경제체질 개선 성과와 임기 말에 이르러 140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쌓아 2008년 불어닥친 글로벌 경제위기 파고를 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제가 안정되자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의 숙원이었던 평화적 민족 통일을 위한 남북관계 개선에 나섰다.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을 통해 금강산 관광을 이끌어내 분위기를 조성한 상태에서 마침내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 분단후 최초로 남북정상 회담을 열어 역사적인 6.15공동 선언에 합의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 개선은 급진전되었다. 상호방문, 이산가족 상봉, 스포츠교류, 예술단 상호방문 공연 등 민간교류, 개성공단, 남북철도 연결, 육로 통행등 교류, 협력이 활성화 되면서 신뢰에 바탕한 화해 분위기가 고조된 것을 계기로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상태가 급격히 완화되었다. 민주인권 신장과 함께 햇볕정책에 의한 이러한 남북화해 노력으로 김 전 대통령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또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월드컵 4강 신화창조를 통해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대한민국의 국가위상을 세계만방에 떨치기도 하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이외에도 기초생활 보호자 지원과 의료보험 개선 등 사회 안전망 구축을 통한 생산적 복지, 민주화 운동 보상법, 의문사 진상규명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민주화 입법을 추진 민주, 인권 신장에도 남다른 업적을 이루어 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대구 섬유 테크노밸리, 안동 하회 문화권 조성 등 동서화합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기 말에는 영남 출신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내세워 광주 경선 승리,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 등 치밀한 대선 프로젝트를 통해 정권재창출에 성공함으로써 제2기 민주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 대통령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퇴임 전 아들들이 관련된 '홍삼게이트'와 퇴임 후 도덕적 정권 차별화에 승부를 건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 민주당 분당, 국정원 도. 감청 사건 등으로 곤욕을 겪기도 하였지만 서거 후 공개된 일기에서 "내가 살아온 길에 다소 흠이 있으나 후회는 없다"고 심경을 밝힌 데서 보듯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목이요 민족적 지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생, 정치, 삶의 지표이자 큰스승
 
김 전 대통령은 정치 인생 내내 정적과 보수진영으로 부터 인간의 신뢰와 관련된 거짓말쟁이 빨갱이 등 색깔론에 시달리고 55차례의 가택연금,6년간의 옥살이, 납치, 사형선고 등 갖은 핍박과 탄압을 받았지만 공개적으로 그들은 비판한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깊은 신앙심과 자신이 겪은 고난,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도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화해와 용서 정신을 일관되게 지켜온 때문이었다.

김 대통령은 또 투사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연설이나 토론회 때마다 적절한 유머를 통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도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도 하였지만 시대를 관통하는말 한마디 한마디는 반복어법을 통한 대세화를 만들어내 한국 정치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통찰력이 담긴 영구불변의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서울역 광장 분향소에서 이명박 정권을 질타하면서 자신의 평생 인생철학인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편이다" 또 정치의 속성을 한마디로 간파한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 같다" 정치란 "서생의 문제의식과 장사꾼의 상인정신으로 해야 한다"거나 "무엇이 되기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인생의 지표를 제시한 말들은 촌철살인의 명언이 아닐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의 소탈하고 소박한 삶 또한 존경의 대상이다. 비판자들은 김 전 대통령 사저가 아방궁이라고 비난하였지만 영결식후 공개된 집안내부는 값비싼 가구나 화려한 치장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만주지역이 포함된 고조선 영역을 표시하는 지도가 벽에 걸려 있었고 십년 이상을 신었다는 구두, 줄이고 늘이기를 반복해 가며 입었다는 잠옷과 양복, 목이 늘어진 양말 등 근면 검소한 삶을 살아왔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범민주 진영 김 전 대통령의 정신, 유지 계승위해 떨쳐 떨어나야
 
서거 직전까지도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 역주행을 우려하며 민주주의 위기, 서민경제 위기, 남북 관계위기 등 3대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며 범민주 진영의 대단결을 호소하던 김대중 전대통령,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초인적 의지로 병마와 싸워가며 민주주의 인권, 화해, 평화의 등불이 되고자 했던 국가와 민족의 스승이자 세계적 지도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표적 수사로 자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보 앞에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것 같다"며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끝내 우리 곁을 떠나고만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하면서 까지 북측 특사 조문단을 불러 남북관계 회복 선물을 마지막으로 남긴 민족 영웅 김 전 대통령이었다.

비록 몸은 가셨지만 그분의 정신과 유지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밀알로 쓰여 질 것이다. 이제 그 밀알을 가꾸어 김 전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하는 알찬 민주, 민생, 민족, 평화의 열매로 결실을 맺도록 만드는 역할과 책임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이희호 여사는 영결식후 서울광장에 들러 국민에게 감사의 말을 하면서 "화해와 용서"가 김 전 대통령의 유지임을 강조하였고 박지원의원은 영결식 다음날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이 세브란스 입원 중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던 기회를 이용"민주당은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합하고 야4당과 시민사회와 연합하여 민주주의 위기, 서민경제 위기, 남북관계위기 극복에 나서라"는 유언을 남긴 사실을 공개하였다.

남기신 유지와 유언 정말 옳은 말씀이다. 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단합을 위해 총선당시 비민주적 공천에 불복 탈당한 인사나 파벌정치 이해 문제로 복당을 불허한 인사,4.29재보선 당시 당 지도부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해당행위로 낙인 찍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모든 인사들과 화해하고 용서하여 원할 경우 당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대통합적 화합조치야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와 유언을 받드느냐 아니면 묵살하느냐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아울러 신당을 추진 중인 일부 친노세력과의 관계도 이러한 관점에서 관계를 하루빨리 재정립해야 한다.

화해와 용서, 대단합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여 단합에 반하는 파벌정치에 악용하여서는 결단코 안될 것이다. 특정인이 거명된 유언이 뒤늦게 공개되고 계파별로 반응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만약 당권과 대권에 집착한 파벌정치에 급급한다면 민주당은 물론 범민주 진영의 운명은 이명박 민간독재정권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최악의 상황을 자초한다면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배신이요 지지자, 당, 국민, 국가, 민족, 민주주의를 독재의 수렁으로 몰아놓는 용서받지 못할 만인공노할 정치적 죄악이 될 것이다.

비록 김 전 대통령이 남북관계 물꼬를 선물로 남기고 가셨지만 이명박 정권이 강경책을 거두지 않는 한 조문단 파견이 남북관계 개선의 전환점으로 작용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보수 영구지배를 목적으로 한 미디어 악법 시행을 강행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 엄혹한 반민주 역주행, 민생경제 파탄으로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제 양극화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 용서, 화해, 서민경제로 대표되는 김 전 대통령의 정신과 철학을 계승, 발전시켜 모두가 잘사는 통일된 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고인의 뜻을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는 데는 여야 ,국민이 따로 없어야 하겠지만 선도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은 아무래도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범민주진영의 몫이다. 고인의 숭고한 뜻을 실천적 행동을 통해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게 제 3기 민주정부 창출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명박 민간독재정권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하는 양심으로 임한다면 불가능은 없다.

그러나 희망과 믿음보다는 불안과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단합 유언의 아직 귀에 쟁쟁한데 대안정당, 수권정당 역량결집을 위해 뜻과 힘을 모으려하기보다 딴소리를 내는가하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해찬 그룹, 유시민 그룹, 민주당을 최악정당이라고 매도하면서 신당 보따리를 풀어헤치고 있는 일부 친노 망당분자들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영면에 든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슴 쓰리도록 그리워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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