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남과 정동채의 부친이 걸어온 길

미 군정하에서 경찰간부 공채 시험?

송인웅 | 기사입력 2004/09/25 [17:25]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서의 친일과 과거사 진상규명은 반드시 해야 한다. 다만 "계급과 직위가 아닌 일제통치하나 과거사에 있어 지난 행적기준으로 성역 없이, 정치권이 아닌 민간연구기관에서 기간 구분 없이 오랜 기간 명확하게 밝혀 정확한 역사가 바로 쓰여야 한다."는 것이 기자의 주장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를 가지고 신기남의원의 부친 신상묵에 대하여 알아보면 신상묵은 전북익산출신의 1916년생이고 1933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여(5기생으로 추정)1938년 6월 전남 화순군 청풍소학교 교사 발령을 받아 교사생활을 하다가 1940년 일본군에 지원하여 조선총독부 국군병지원자훈련소에 입대 우수한 근무성적으로 일본군 오장에 까지 올랐고 해방이 되자 1946년 경찰에 투신하여 경북도경 보안과장 등을 수행하다가 1953년 서남지구전투사령관 등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동채장관의 부친 정순석은 앞서 적시한 1952년 발간 대한민국 인사록 상의 정순봉(또는 정순태)이 정순석과 동일인물이라고 가정할 때 정순석은 전남 광주출신의 1919년생이고 송정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19년생이 늦게 학교에 입학하여 보통학교6년 과정을 마치고 송정중학교의 전신인 송정농업실수학교가 1936년 개교하였으므로 이때 입학하여 3년 과정을 마치고(20살로 추정,1939년)해방직후인 1946년까지 6-7년의 갭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농업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군청이나 금융조합, 경찰, 헌병, 교사의 길을 간다고 볼 때 6-7년간의 행적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이를 정장관 이모 정책보좌관의 "일본 중앙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강제징집을 피해 만주에 갔다가 해방후 미군정청에서 실시하는 경찰간부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경찰의 길에 들어섰다" 는 말을 대입하면 1939년 송정중학교 졸업을 하고 일본에 유학을 하여 중앙대 법학부 4년을 마치고(1943년경) 1947년 미군정청에서 실시하는 경찰 간부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경찰에 투신하였다는 기간과 4년의 갭이 생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모 정책보좌관의 말하였듯이 강제징집을 피한 만주에서의 4년간의 행적이 밝혀져야 한다.

왜 일제치하의 행적이 중요한가? 하면 다음과 같은 미군정하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미군정기(美軍政期)라 하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삼팔선(한반도 북위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한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실시한 군사통치시기를 말하는바 미군정하에서의 경찰제도는 일제식민지 경찰 기구를 활용하여 그것을 재편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

미군정기의 치안기구는 과도적 기구로서 일제의 경찰 제도를 잠정적으로 답습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10일 미 육군 대위 스타링이 경기도 경찰부장에 취임하여 해방 전 경기도(京畿道) 경찰부장이었던 일본의 강구웅(岡久雄)을 보좌역으로 하여 경기도는 물론 서울의 치안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 그 한 예이다.

미 군정장관에 임명된 아놀드 소장은 조선의 모든 행정을 관장하는 동시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치안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취임 즉시 각 경찰서와 파출소에 미군을 4∼ 5명씩 배치하여 치안을 담당케 하였으나 그들만으로는 질서유지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태평양미 육군 총사령부 포고문 제1호로 일제 때 경찰에 종사하였던 한국인 관리는 그 소속직장으로 복귀하라고 함으로써 직장을 이탈하였던 한국인 경찰관들은 대부분 복귀하여 치안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상기 기록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일제 때 경찰에 종사하였던 한국인 관리는 그 소속직장으로 복귀하라"는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문 제1호의 내용이다.

우리가 모두들 알고 있듯이 상기 포고문에 의해 일제 통치하의 헌병, 경찰 등의 관리가 소속직장으로 복귀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초기 경찰 조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신기남의원의 부친 신상묵도 경찰로 투신하여 경북도경 보안과장, 서남지구전투사령관의 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단순 요약하여 신상묵과 정순석을 비교하여 보자. 

*신기남 의원 부친 신상묵--1916년생--학력11년(보통학교6년, 사범학교5년)--경력7-8년(교사2년, 일본군헌병 5-6년)--합하여 18-19년--도 보안과장 보임, 서남지구전투사령관역임

^정동채 장관 부친 정순석--1919년생--학력9-13년(보통학교6년, 중학교3년, 대학4년)--경력(?)--합9-13년--도 순사부장 보임, 경찰서과장, 경찰서장역임


신상묵,정순석이 모두 광복 후인 미 군정청에서 경찰로 투신하였고 신상묵의 직급이 정순석보다 한 단계 높음을 알 수 있으나,정순석의 경력이 무엇인가 있어야만 간부직에 보직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 장관의 이모 정책보좌관의 말을 100% 신뢰하여 인정한다고 하여도 미 군정시기 3년 동안의 어수선한 시기에서 경찰 간부를 공채시험으로 보았을 리 만무하고 결국 면접이나 특채를 하였을 시 경력을 감안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흔히들 좋은 말로 말하는 '가슴 아픈 가족사'를 공인이 아닌 담에야 누가 밝히기를 바라겠는가? 공인이기에 밝히고 반성할 부분이 있다면 반성하자는 것이다, 일국의 장관이라는 위치는 실로 대단한 것으로 부친의 공덕과 조상들의 음덕이 있어야 가능하고 따라서 부친을 포함하여 조상들에 대하여는 자랑스레 밝혀왔다.

장관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혼자의 힘만으로 올랐기에 “부친이던 조상이던 상관할 바 아니다”고 하면 할말 없다.

추수한 곡식을 놓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한가위를 맞이하여 느끼는 기자의 마음이다. 여하튼 지금은 정보화  시대이고 인터넷 시대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기자는 네티즌들의 저력을 믿고 있다. 금번 추석연휴기간에 기자도 애를 쓰겠지만 네티즌들도 애를 써주기 바란다.

참고로 '일제 통치하의 순사부장(巡査部長) 임용:에 대하여 적시하였다. 

*일제 통치하의 순사부장(巡査部長) 임용

일제는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두어 경부의 직무를 보조케 하였는데, 순사부장은 순사 및 순사보의 상반(上班)이었다. 그 임용규정은 1912년 6월 4일 「조선총독부 순사부장에 관한 건」(조선총독부 훈령 제67호)으로 발포, 6월 15일부터 시행되었다.

순사부장은 문관 임용령(文官 任用令) 제6조에 의하여 판임문관될 자격을 가진 자, 또는 재판소 서기 등용 시험규칙(書記 登用 試驗規則)에 의하여 급제증서(及第證書)를 가진 자, 육군 준사관 하사 문관 채용규칙(陸軍 准士官 下士 文官 採用規則)에 의하여 기량(伎倆) 증명서를 가진 자, 경부 및 소방사의 고시 합격증서를 가진 자나 전에 경부 또는 경부 보였던 자, 조선에 1년 이상 재직하고 실무 성적이 우수한 순사로써 순사부장 시험에 합격한 자 등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를 임명하였다. 단 형사 소방 및 선박 승입 근무(船舶 乘翔 勤務)의 순사부장은 이러한 규정에 구애되지 않았다.

순사부장의 시험에 관한 규정은 「총독의 인가를 받아」경무총장이 정하고, 시험합격자에게는 증서를 부여하였다.[註129] 이에 의하여 1912년 6월 15일「조선총독부 순사부장(巡査部長) 시험규정」[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 훈령 갑(甲) 제44호]이 발포 시행되었다. 이 규정에 정한 외의 실무성적 고사 및 학술시험 방법은 「조선총독부 경부 특별임용에 관한 고시규정」과 「동(同) 시행세칙」을 준용케 하였다. 시험위원장과 위원은 경무총감부 경무부 근무의 고등관 판임관 중에서 경무총장이 임명하였고, 시험위원장은 시험 결과를 경무총장에게 보고하여야 하였다.


제이비에스 대표기자 겸 발행인, 서울포스트, 뉴스타운 대기자. 전 소방발전협의회 회장, 대청GH클럽 언론자문위원, 한남대학교 경영학과, 지역경제학과 경제학석사, 학군단 15기 예비역육군중위, 전매청, 한국상업은행, 대전택시운송사업조합 근무, 전 (주)뉴스타운 편집국장 겸 국회출입기자, 전 아이캔뉴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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