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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자유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사건 프랑스 대혁명의 촉발점, 테니스 코트 서약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누적되어 형성된 사회구조, 신분제의 확립으로 인한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의 쇠락

정길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10/25 [06:37]

▲ 정길선 박사     ©브레이크뉴스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기반으로 한 프랑스의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그 허울만 남게 되어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힘이 약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프랑스의 심각한 재정난은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징세권이 이미 세리들에게 넘어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봉건제의 특성과 약간 다른 의미의 신분제로 구성되어 있었던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이미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하며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는 오랫동안 왕권과 귀족들의 권력 대립이 지속되면서, 그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누적되어 형성된 사회구조로 점철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신분제가 확립되어 있었기에 기본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 밑에 크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러한 신분제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같은 신분끼리여도 완전히 이해관계가 일치되지는 않았다. 크게 알려진 것은 특권 신분과 피지배 신분의 갈등이라는 구도지만, 실상은 그보다 좀 더 많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왕권이 약화되고 절대왕정의 착취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이미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었고 결국 1789년 5월에 개최된 삼부회(States-General)에서 평민계급 의원들은 계급별 투표에 반대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계급별 투표는 계급당 한 표를 주는 것인데 문제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이 서로 담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3계급에 놓여있던 평민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에 평민들의 요구사항이 제대로 전달되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평민계급 의원들은 삼부회의 영국식 의회 개편과 헌법 제정 등을 주장했고, 귀족, 성직자 계급 의원들과 협상을 벌이며 이와 같은 요구 사항들을 관철해 나가려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귀족, 성직자 계급 의원들은 이에 반대하여 협상을 무산되었고 마침내 1789년 6월 19일, 평민계급 의원들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질베르트 뒤 모티에 라파예트(Gilbert du Motier La Fayette, 1757~1834) 후작,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 미라보(Honoré Gabriel Riqueti Mirabeau, 1749~1791) 백작,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 등의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 계급 의원들이 평민계급의 주장에 동조함에 따라 단독으로 삼부회를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루이 16세가 국민의회를 반대하여 군대를 동원해 삼부회 회의장을 폐쇄하고 국민의회를 해산하려 들었다. 그러자 이에 맞서 평민계급 의원들과 국민의회에 동조하는 시민들은 장소 섭외 문제로 인해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때 테니스 코트를 소개하고 열쇠까지 가져온 사람이 조제프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1738~1814) 박사였다. 기요탱은 단두대 설계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단두대의 이름을 길로틴(Guillotin)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평민계급 의원들과 국민의회에 동조하는 시민들은 살 데 메뉘 플레지르(Salle des Menus Plaisirs) 홀의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대응책을 논의하게 된다. 이 때 테니스 코트에서 헌법 제정 요구를 서약하게 되는데 이를 테니스 코트 서약(Tennis court oath)이라 불리게 된다. 이를 '죄드폼의 맹세(Serment du Jeu de paume)'라고도 하는데 죄드폼은 공과 코트를 사용하는 게임으로 오늘날의 테니스와 비슷했다. 

 

현대의 테니스는 17세기부터 존재하던 죄드폼과 랑그폼 등의 유럽 민속놀이 규칙을 하나로 통일, 규격화하면서 탄생한 스포츠이기 때문에 '테니스' 라는 명칭을 붙여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혁명을 일으키자는 등의 과격한 주장들도 있었으나 결국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민의회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초대 의장으로 천문학자인 장 실뱅 바이(Jean Sylvain Bailly, 1736~1793)를 선출하게 된다. 

 

"국민 의회(The National Assembly) 전문"

 

① 국민의회는 헌법 수립, 공공질서의 재건, 군주제의 참된 원칙을 유지하기 위해 소집되었다는 것을 고려할때, 그 장소를 불문하고 그 누구도 심의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구성원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그 장소가 어디든지 불문하고 합법적인 의회기구가 된다.

 

② 모든 구성원은 헌법이 제정되고 굳건한 토대 위에 세워질 때까지 절대로 해산하지 않을것이며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모일 것임을 엄숙히 선서하며, 이 선서를 맹세함에 있어서 모든 구성원이 서약을 통하여 우리의 결의가 변함없음을 확인한다.

 

③ 우리는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해산하지 않을 것이며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모일 것임을 맹세한다. 

 

이 사건 이후 대세는 국민의회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결국 루이 16세는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에 굴복하여 이를 인정하고 국민제헌의회(National Constituent Assembly)를 창설하는 것에 대해 반 강제적으로 허가하게 된다. 그러면서 루이 16세는 국경 지대에 주둔한 군대를 파리를 불렀고 그로 인해 파리 근교에는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국경지대에서 진주한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자 7월 전후로 하여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국왕의 군대가 파리 시내로 진입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7월 11일, 루이 16세는 재정 총감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 1732~1804)를 파면하면서 이 소식은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파리는 큰 혼란에 빠졌고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여 각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어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운명의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고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바스티유를 습격한 1만여 명의 시민들을 향해 수비군이 15문의 대포를 발포하자 시민 약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무장한 국민군의 증원과 시민들의 끈질긴 공격으로 결국 바스티유는 함락되고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이후 혁명정부는 압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철거했고 오늘날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에는 공원이 조성되었다. 프랑스는 매년 7월 14일을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지정하고,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념하여 군사 퍼레이드, 각종 축제나 콘서트 등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기인 1989년에는 200주년 기념일이었기에 더욱 더 성대하게 치렀다고 한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Tennis Court Oath, the Trigger of the French Revolution, the Incident That Established Western European Liberal Democracy

Columnist Gil-seon Jeong

 

France's absolute monarchy, based on the divine right of kings, reached its peak during the reign of Louis XIV, but gradually became nothing more than a facade during the reigns of Louis XV and Louis XVI. The fundamental cause was the weakening of the absolute power of the French royal family due to financial difficulties. Considering that the tax collection rights in half of France had already been transferred to tax collectors before Louis XVI ascended the throne, the Ancien Régime, which consisted of a class system with slightly different characteristics from the feudal system, was already heading towards its worst situation. Ancien Régime means "old system" in French and is also a term that symbolizes France's absolute monarchy. This means that the social structure was formed by the accumulation of the results of the conflict between the royal authority and the nobles, which had continued for a long time, as customary and written laws.

 

In addition, since the class system was established, it was basically composed of three classes under the king and the king's family. However, if you look inside this class system with the king at the top, even the interests of the same class did not completely coincide. What is widely known is the structure of the conflict between the privileged class and the ruled class, but in reality, it was a bit more complicated than that. In the meantime, the royal authority gradually weakened, and the citizens' discontent with the exploitation of the absolute monarchy was already reaching a critical point, and eventually, at the Estates-General held in May 1789, the commoners opposed class-based voting. The class-based voting that appears here was one vote per class, but the problem was that the first class, the clergy, and the second class, the nobles, often colluded with each other, so the commoners, who were in the third class, were in a very disadvantageous position. Therefore, it was rare for the demands of the commoners to be properly conveyed.

 

The commoners demanded a reform of the English-style parliament by the Estates-General and the enactment of a constitution, and they negotiated with the noble and clerical members to push through these demands. However, the majority of the nobles and clergy opposed this, and the negotiations broke down. Finally, on June 19, 1789, the commoners, including the Marquis de la Fayette, Gilbert du Motier La Fayette (1757–1834), Count Honoré Gabriel Riqueti Mirabeau (1749–1791), and 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 who had returned from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decided to unilaterally transform the Estates-General into the National Assembly (Assemblée nationale). However, Louis XVI opposed this, mobilized the army, closed the Estates-General meeting, and attempted to dissolve the National Assembly. In response, the plebeian deputies and citizens who supported the National Assembly were in a difficult situation due to the problem of securing a venue. At this time, the person who introduced the tennis court and even brought the key was Dr. Joseph-Ignace Guillotin (1738-1814). Guillotin was well known as the designer of the guillotine, and the guillotine was named after him. So the plebeian deputies and citizens who supported the National Assembly moved to the tennis court in the Salle des Menus Plaisirs hall to discuss countermeasures. At this time, they pledged to demand a constitution on the tennis court, which came to be called the Tennis Court Oath. This is also called the 'Serment du Jeu de paume', and Jeu de paume was a game that used a ball and a court, similar to today's tennis. Modern tennis is a sport that was born by unifying and standardizing the rules of European folk games such as Jeux de Pomme and Lange Pomme that existed since the 17th century, so it is not much different from calling it 'tennis'. During this discussion, there were radical claims such as calling for a revolution, but in the end, the National Assembly declared that it would not back down until the constitution was established, and elected astronomer Jean Sylvain Bailly (1736-1793) as the first president.

 

"The National Assembly"

 

① Considering that the National Assembly was convened to establish the constitution, reestablish public order, and maintain the true principles of the monarchy, no one can stop the deliberations regardless of the location, and wherever the members are gathered, it becomes a legitimate parliamentary body.

 

② All members solemnly swear that they will never disband until the Constitution is established and firmly established, and that they will assemble whenever necessary, and in swearing this oath, all members confirm through their oath that our resolution is unchanging.

 

③ We swear that we will never disband until the Constitution is established, and that we will assemble whenever necessary.

 

After this incident, the trend turned toward the National Assembly, and Louis XVI had no choice but to give in to the National Assembly, recognize it, and semi-forcibly permit the creation of the National Constituent Assembly. In the meantime, Louis XVI called the troops stationed in the border area to Paris, and as a result, troops stationed in the border area by Louis XVI's order were stationed in the suburbs of Paris. Then, around July, the citizens of Paris began to feel anxious that the King's troops might enter the city of Paris. Meanwhile, on July 11, Louis XVI dismissed Jacques Necker (1732-1804), the chief of finance, and this news was delivered to the citizens. Paris then fell into great chaos, and the citizens armed themselves to protect themselves, setting up barricades on each street, and engaging in a defensive battle.

 

And on the fateful July 14, the citizens of Paris stormed the Bastille. The Bastille was a fortress in Paris that stored weapons and ammunition and held political prisoners. When the defenders fired 15 cannons at the 10,000 citizens who stormed the Bastille, about 100 citizens were killed. However, with the reinforcement of the well-armed national army and the citizens’ persistent attacks, the Bastille eventually fell and the political prisoners were released. Afterwards, the revolutionary government demolished the Bastille, a symbol of oppression, and today, a park was created on the site of the Bastille. France designates July 14th as Bastille Day every year, and holds grand events such as military parades, festivals, and concerts to commemorate the storming of the Bastille prison. It is said that the celebration was even grander in 1989, during the presidency of François Mitterrand, as it was the 200th anniversary.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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